교육칼럼원고
‘스승의 날’만 오면 왜 선생님들 기를 죽이나!
여유만만
푸르른 녹음으로 짙어가는 계절의 여왕이라고 하는 오월이 또 어김없이 찾아 왔다. 5월 10일 월요일 아침에 상쾌한 기분으로 출근했다. 허나 오후 공문을 분류하던 순간 상쾌함은 수천길 낭떨어지로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왜냐하면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올해도 “담임교사가 호소하는 촌지 거부운동”추진이란 공문이 하달되었기 때문이다. 스승의 날만 다가오면 교육계는 자부심이나 보람보다는 비통함 그 자체이다. 각종 업체에서는 사은 선물울, 꽃을 팔기위해 홍보및 광고를 하느라 난리법석을 떤다. 각종 매스컴에서는 학부모가 부담스러워 한다니느 촌지가 어떠니하며 여론몰이를 한다. 교육청에서는 공문으로 선생님들에게 촌지 근절에 관한 교육을 하고, 입간판이나 가정통신문을 학부모님에게 보내도록 지시하고 있다. 작년엔 국민권익위원회가 서울 강남지역 학교에 대한 집중적인 암행감찰조사관들이 일부교사들의 쇼핑백과 자동차 트렁크까지 뒤졌다는 복장터지는 신문기사를 보았었다. 50만 교육자들을 하필이면 꼭 스승의 날 앞두고 잠재적 범죄집단으로 모는 행위는 너무해도 너무하는 것이다. 참으로 격세지감을 느낀다. 서울의 일부 부유층이 사는 특정지역의 세태를 전국의 행태인양 퍼트려 교육계에 찬물을 끼얹는다. 필자가 근무하는 학교도 읍소재지이나 어떤 선생님과 어떤 학부모가 촌지를 주고 받았다는 그 사례를 들은 적이 없다. 학부모님들께 촌지받기를 원하는 그 어떤 선생님도 본적이 없다. 가끔 학년말에 선생님 수고하셨다고 저녁식사대접을 받는다든지 양말, 스타킹 한셋트, 과일한상자 같은 정성어린 산물을 받는 것은 가끔 본다. 자연스러운 인간적인 정이 오가는 선생님과 학부모의 자녀교육에 대한 상담이 이루어지는 가교역할이 아닌가?
본래 촌지(寸志)란 어떤 은혜를 입은 그 후에 “마음이 담긴 작은 선물, 또는 정성을 드러내기 위하여 주는 돈으로 흔히 선생님이나 기자에게 주는 것을 이른다.”고 사전에 정의되어 있다. 어떤 떳떳하지 못한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뇌물과는 전혀 상반된 의미이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촌지도 일종의 뇌물과 같은 의미로 싸잡아 매도되고 있다. 70년대까지만 해도 일종의 사람사는 사회에 윤활유같은 감사의 표현수단이었었다. 그럼 왜 스승의 날에만 촌지가 거론되는 것일까? 내 자식만 잘 봐달라거나 어떤 최소한의 불이익도 받지 않게 해달라는 일부 학부모의 이기심과 우리사회의 특유의 집단 동조(同調) 문화에서 기인되었다고 본다. 극히 일부 학부모들이 촌지를 주면 우리아이만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불안감, 교사에 대한 불신감이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그런 오해는 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교사가 되기위해선 철저한 검증을 거쳐 어려운 관문을 뚫고 교대와 사대를 졸업하고도 힘든 임용고시를 합격해야 교사라는 직업을 택할 수 있지 않은가. 또한 교사는 철저한 청렴성과 도덕성이 요구되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교사란 학습자의 배움의 과정에서 이끌어주거나 도움을 주는 사람을 의미한다. 이러한 행위를 교육이라 부르며, 대부분의 교육은 학교에서 이루어진다. 교사는 스승 또는 선생님이라고도 하며, 대학에서는 교수라 부른다. 교사의 역할은 문화권에 따라 다양하다. 학문적인 내용은 대부분의 사회에서 강조되지만, 교사의 업무는 인성, 창의, 직업교육, 영적인 가르침, 시민으로서의 소양, 단체사회에서의 역할, 생존 기술 등을 포함하기도 한다. 과학적인 교육학이 적용된 학교에서 교사는 특수한 직종의 전문직인 것이다.
스승의 날의 직접적인 계기는 1963년 충남 강경고등학교의 윤석란(당시 17세) 학생이 병석에 누워계신 선생님을 방문해 선행을 베풀다 당시 청소년 적십자단 JRC (현 RCY) 들과함께 별도로 날을 잡아 선생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퇴직한 선생님들을 찾아뵙는 행사를 마련했었다. 이 행사가 충남 전 지역에서 전국으로 확산되어 1965년 4월 23일 우리 민족의 큰 스승이라 할 수 있는 세종대왕 탄신일인 5월 15일을 스승의 날로 정하여 실시되어 올해 27주년을 맞게 된 것이다. 1973년도 행정부에서 서정쇄신 운운하면서 폐지되었다가 그로부터 10년 뒤인 1982년에 부활되었다. 스승의 날에는 교육 공로자들에게 포상을 하고, 각급 학교의 학부모회, 동창회, 사회단체들에서 교육에 수고가 많은 교직자들을 위한 사은행사를 하기도 한다. 스승의 날은 본래, 교권 존중과 교육자들의 사기앙양, 그리고 명예존중, 지위향상을 위하여 제정되었으나, 일부 교사와 학부형에 의한 촌지수수 등의 탈선으로 말미암아 해마다 구설수에 오르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대다수 열악한 환경에서 정말 혼신을 다하여 교육에 투신하면서도 극히 일부 교사의 실수를 문제삼아 참된 스승으로서 더욱 정진하려는 뜻깊은 스승의 날에 전체 교직자에 대한 비난 공세를 퍼부어 교사들의 사기를 우직끈 부러트리는 것은 올바른 사회행태가 아니라고 본다. 거기다가 설상가상으로 스승의 날만 다가오면 온갖 매스컴들이 일제히 너도나도 다투어가며 극히 일부 선생님들의 비리, 실수, 무능, 촌지수수 등의 사례를 온 세상에 보도하기 시작한다. 이런 현실에 어찌 선생님들이 스승의 날을 반기겠는가! 오히려 풀죽은 모습으로 고개 숙이고 왜! 스승의 날을 만들었느냐고 원망스러워한다. 국군의 날 국군을, 경찰의 날 경찰을, 소방의 날에 소방관을 질타하고 기죽이는 것을 본적이 없다. 왜 스승의 날만 전후해 선생님들의 기를 죽이는가! 말없이 묵묵히 사도의 길을 가는 수많은 대다수의 선생님들의 미담은 소개하는데 왜 그리 인색한가!
필자도 1972년에 선생님의 첫발을 내디딘지 어언 교직경력이 38년이나 되었다. 70년대에는 스승의 날이 없었어도 옛말에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것처럼 선생님을 학생, 학부모 지역사회 모든 주민 아니, 전 국민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존경했다. 교직경력 2년째이던 1974년에 음성군 삼성초등학교재직때 학부모 집을 가정방문 하였을 때 일이다. 시골이라 전형적인 초가삼간 마루가 없는 봉당이 있는 집이었다. 싸립문에 들어서자 내 반의 아이가 “엄마! 선생님 오셨어!” 그 말이 끝나자마자 문풍지 찢어져라 안방 문을 박차고 할아버님이 신발 신을 새도 없이 “아이구 선상님 오셨슈! 어서 방으로 들어가시지유” “아이구 에미야! 빨리 술상 차려라!” 순간 집안에 민방위 훈련 저리가라는 비상이 걸렸다. 그 땐 10월 하순이라 좀 선선한 날씨였다. “선상님, 이 아랫목으로” 따끈한 그 자리를 내주시며 당신은 방 윗목에 자리 잡는 것이었다. 참으로 민망하여 자꾸 사양했지만 어찌나 기필코 주저앉히시는지 뜻을 거역 할 수 없었다. “어유! 선상님 우리 철부지 손녀딸을 가르쳐 주시느라고 월매나 속을 썩어유! 고맙구먼유” 나한테도 할아버지뻘인 그 분이 24살 총각 선생님 앞에서 무릎을 조아리며 말씀하셨다. 어째 이런 일이! 지금 같으면 ‘세상에 이런 일이’ 에나 나올법한 이야기가 아닐까? 그 날의 일을 생각하니 가슴이 떨려온다. 감격이 쓰나미 처럼 밀려와 입이 찢어져 귀에 걸린다. 그날 씨암탉 잡아 집에 꼬옥 꼭 감춰두었던 흰 쌀알이 동동뜨는 동동주로 황제처럼 대접을 받고 얼간하여 하숙집으로 돌아오며 ‘햐! 선생님이 되길 천번만번 잘했다’고 쌍박수를 쳐댔었다. 그 날의 기억이 새롭다. 그립다. 생각하면 눈물이 나는 아름다운 추억이다.
스승의 날은 내 아이의 스승에게 내 자식만 부탁하는 날이 아니고 나를 가르쳐준 스승을 찾아뵙거나 안부전화라도 드리는 미풍양식의 분위기를 조성하여 내 자식이 본받게 하는 날이 되어야 한다.
사도헌장의 전문을 다시금 새겨본다. 오늘의 교육은 개인의 성장과 사회의 발전과 내일의 국운을 좌우한다. 우리는 국민교육의 수임자로서 존경받는 스승이요, 신뢰받는 선도자임을 자각해야한다. 이에 긍지와 사명을 새로이 명심하고 스승의 길을 밝힌다. 스승의 주된 임무는 제자로 하여금 고매한 인격과 자주 정신을 가지고 국가 사회에 봉사할 수 있는 유능한 국민을 육성하는 데 있다. 스승의 자질은 스승은 스승다워야 하며 제자의 거울이 되고 국민의 사표가 되어야 한다. 스승의 책임에는 스승은 제자 교육에 열과 성을 다하여 맡은 바 책임을 다하여야한다. 스승은 제자의 성장 발달을 돕기 위하여 학부모와 협력하며, 학교와 사회와의 상호작용의 원동력이 되고 국가 발전의 선도자가 되어야 한다. 어찌 스승이 없었다면 김연아가 세계에 요정피겨퀸으로 우리의 가슴속에 펄럭이는 올림픽에서 값진 금메달로 애국심과 감동을 줄 수 있으며, 박태환이 수영에서 세계를 제패할 수가 있었단말인가? 또한 우리 국민 모두가 스승없이 지금 자신들의 일자리에서 맡은 바 업무를 충실히 수행하며 행복한 삶을 추구할 수가 있단 말인가?
“영원한 나의 모든 스승님!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그리고 “모든 선생님들 스승의 날에 기죽지 맙시다.”
무명교사 예찬사를 되뇌어 본다. 유명한 교육자는 새로운 교육학의 체계를 세우나, 젊은이를 건져서 이끄는 자는 무명의 교사로다. 그가 켜는 수많은 촛불, 그 빛은 후일에 그에게 되돌아와 그를 기쁘게 하노니, 이것이야말로 그가 받는 보상이로다. 무명의 교사보다 예찬을 받아 마땅할 사람이 어디 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