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1:1~7 /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병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
(요 11:1) 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요 11:2)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버니더라
(요 11:3)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요 11:4)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요 11:5)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요 11:6)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요 11:7)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오늘 말씀에는 나사로의 죽음이 나옵니다. 사망권세에 시달리는 제자들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죽음은 잠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잠자는 자를 깨우러 가자고 말씀하십니다. 부활이신 예수님에게는 죽음은 잠에 불과합니다. 가장 무서운 것이 죽음인데 우리는 부활 신앙으로 죽음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으면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부활 신앙으로 우리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담대하게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3 나사로가 베다니에 살고 있었습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 근처에 있는 감람산 동쪽에 있는 마을입니다. 나사로 가정은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사로와 누이 마르다와 마리아가 살고 있었습니다. 나사로는 그 집에 기둥 같은 가장이었습니다. 가장 나사로가 병이 들었습니다. 그 병은 불치의 병이었고 죽을병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사랑하여 예수님께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기던 자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 말씀 듣기를 좋아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실 때 예수님을 초청하여 식사를 섬겼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정말 예수님을 사랑하였습니다. 예수님도 그들의 가정을 사랑하셨습니다. 이 가정은 예수님과 깊은 사랑의 관계성이 맺힌 아름다운 가정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이 이들을 사랑하셨는데도 그 가정에 병이 났습니다.
병은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만 걸리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에게도 병을 주십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집이라고 만사형통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사랑하는 자에게 고난을 주십니다. 때로는 질병도 주시고 사건 사고도 나게 하십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사랑하는 자에게 매 하나 더 준다는 말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와 마르다가 고통하는 것을 보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도 사랑하는 이들이 고통받는 것으로 마음이 아프셨습니다.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사랑하는 이들에게 질병과 죽음의 고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사랑하는 자녀에게 고난을 주시며 우리가 울 때 우리와 함께 눈물을 흘리십니다. 눈물을 흘리면서도 왜 고난을 주실까요?
고난이 우리에게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통하여 만민을 구원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고난을 통하여 믿음을 배우고 더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도 담대하게 살 수 있고 죽은 후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고난을 통하여 고난받는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도울 수 있게 됩니다.
나사로가 병이 났을 때 예수님은 그곳에 계시지 않고 멀리 갈릴리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람을 보내 예수님께 이 소식을 알렸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나사로의 병을 고칠 것을 믿었습니다.
4~7 예수님은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두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나사로의 병은 죽을병입니다.
나사로는 결국 죽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을병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 안에는 죽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안에는 죽을병이란 없습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는 죽음이 없고 잠만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 안에는 절망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빛이십니다. 예수님 안에는 어둠이 조금도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무슨 문제를 만나든지 밝게 보고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둘째, 예수님은 그 병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영광을 얻게 하기 위해서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를 통해서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드러내고자 하십니다. 이를 통하여 예수님은 마지막 날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부활의 주님을 드러내시기를 원하십니다. “나, 오직 죽은 자를 살리는 예수님이야!” “내가 믿는 하나님은 썩어서 냄새나는 자도 살리시는 최고의 하나님이야!” 말씀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소식을 듣고 빨리 베다니로 달려가셔야 했습니다. 아니면 여기서 말씀으로라도 고치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왕의 신하의 아들을 가시지 않고 말씀으로 치료하셨습니다.
“나사로는 나았다!” 하시면 나사로는 살아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갈릴리에 이틀을 더 유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틀을 유하시고 가면 죽은 지 나흘이 됩니다.
나사로는 죽어서 시체가 썩어서 냄새 납니다. 인간적으로 완전히 소망 없는 상태가 됩니다.
예수님이 소망이 없는 그때 가서 나사로를 살리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썩어서 냄새나는 자를 살릴 수 있는 분으로 알리고자 하셨습니다. 3일까지는 자연적으로 우연히 살아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썩어서 냄새나는 자를 살리는 것은 우연이 살아난 것이 아닙니다. 누가 썩어서 냄새나는 자를 살릴 수 있습니까? 석가입니까? 석가는 한 어머니가 아들을 잃고 슬퍼하자, 그 어머니에게 아무도 죽지 않은 집에서 물을 한 바가지 퍼다가 아들에게 먹이면 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물을 찾으러 다니다가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죽음은 나만의 슬픔이 아니라 인간 모두의 슬픔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를 통하여 위로를 얻은 것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릅니다. 예수님은 썩어서 냄새나는 자를 살리십니다. 예수님은 이를 통하여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우리는 언젠가 죽습니다. 죽은 몸은 재가 되고 흙이 됩니다. 예수님은 썩어서 냄새나는 나사로를 살리는 것을 통해서 우리도 다시 살리시는 분이심을 드러내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심으로 다시 오실 때 우리를 살리시는 부활의 주님이심을 드러내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마지막 날 우리를 다시 살리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 안에 영생의 소망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