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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강해설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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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설교 여기 스크랩 01.마태복음 1:1-17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
진짜이지 추천 0 조회 84 20.04.28 10:0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마01.0101-17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pdf



마태복음 1:1-17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


 

마태복음 1장은 성경을 신약부터 읽으려는 사람들에게 가장 재미없고 난해한 장으로 인식되어 있다. ‘낳고라는 계보로 구약의 인물들이 나열되는 지루함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대부분은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고 또한 자세히 알아야 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고 대충 읽고 넘어가려고 한다. 그러나 마태복음 1장은 가볍게 읽고 넘어가도 되는 장이 아니라 매우 중요한 장이다. 왜냐하면 1장에서 마태복음서를 주신 하나님의 의도와 뜻대로 파악하지 않고서는 나머지 장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출발이 잘못 된다면 마태복음 전체를 잘못 이해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개역개정성경 1절에서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바른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는 이러하다. 그분은 다윗의 자손이고 아브라함의 자손이다라고 좀 더 원문의 표현에 가깝게 번역하였다.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는 이러하다라고 하여 처음부터 예수님은 그리스도임을 선언하면서 복음서를 시작한다. 이 선언은 매우 중요하며 충격적인 선언이다. 마태가 이 선언을 시작부터 하고 있다는 사실이 왜 중요하며 충격적인가?

마태복음의 일 차 독자는 유대인들이기 때문이다(마태복음의 일 차 독자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은 본서를 연구해 가면서 차츰 증명되어질 것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이해하기보다 선지자 중의 한 사람 정도로 이해하려고 하였다(16:14). 그렇지만 그가 선지자였을지라도 하나님을 모독하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해 나가는 일에 걸림돌이 된다는 생각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 그런데 그런 자를 마태는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보내기로 약속하신 메시아라고 선언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스스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으로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유대인들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유대인들을 향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선언은 매우 충격적이고 중요한 선언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더욱 우리의 호기심을 유발시키는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는 이러하니라라고 한 표현방법이다. 이 표현은 창세기에서 “~의 족보는 이러하니라라고 표현된 톨레도트’(Toledoth : 내력, 계보, 족보, 역사 등)라는 말이다. 창세기에서 신명기까지의 책(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을 우리는 흔히 모세오경이라고 한다. 모세가 이 다섯 권을 기록한 것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광야에서 생활할 때였다. 즉 출애굽 이후의 사건들은 이스라엘이 직접 경험하였던 것들이었기에 그다지 조직적으로 서술하지 않더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던 일들이었다. 그러나 창세기의 내용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직접 경험하지 않았던 내용들이었다. 이런 이유로 인하여 모세는 이스라엘이 어떻게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고 어떻게 하나님으로부터 언약을 받게 되었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여야 하였기에 좀 더 조직적이고 논리적인 기록이 필요하였다. 그래서 모세는 열 개의 톨레도트(2:4, 5:1, 6:9, 10:1, 11:10, 11:27, 25:12, 25:19, 36:1(9), 37:2)라는 말을 써서 선택받은 자들의 기원과 출생 및 후손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새롭게 역사를 이끌어 가신다는 사실들을 나타내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마태복음에서 1장을 톨레도트로 이해한다는 것은 본문에 기록된 계보가 단순히 구약의 인물들을 족보로 나열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새로운 구속역사의 시작을 알려주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여기 기록된 예수님의 족보는 단순히 혈통적 내력을 설명하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 언약의 성취를 보여 주려는 데 의의가 있다. 그래서 마태는 의도적으로 족보를 완전수 7을 두 배로 한 수 14대로 만들었고 또한 유대인들이 완전수로 여기는 3, 즉 세 번으로 정리하여 기록하였다.

족보를 14대로 맞추어 기록하였다는 것은 역사적인 인물들을 빠짐없이 기록한 것에 초점이 있다기보다는 14대에 맞추어 누군가는 생략되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족보의 인물들을 빠짐없이 소개하려는 목적보다 하나님의 계시를 위한 목적에 맞추어 과감하게 생략한 족보를 소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 족보를 통해 강조하고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

개정성경의 인물 나열은 역사적인 순서로 아브라함, 다윗이지만 바른성경의 번역에서 보는 바와 같이 원문에는 아브라함이 아니라 다윗을 먼저 기록하여 강조하고 있다. 출발부터 다윗 언약의 정신을 반영한 족보로 시작한다. 그래서 마태는 14대를 끊어서 정리할 때도 의도적으로 다윗을 두 번 넣고 있다. 즉 다윗을 중심으로 한 족보라는 의미이다. 또한 다윗이하 솔로몬, 르호보암 등 모두 역대 왕들임에도 불구하고 6절에서 유독 다윗에게만 이라는 칭호를 붙여서 기록함으로 왕의 족보를 통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윗 언약을 성취하신 왕이라는 사실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누가복음에 소개된 계보(3:23-38)와 비교해 보면 더욱 두드러진다. 마태는 다윗의 아들로서 솔로몬을 제시한 이후 줄곧 유다 왕들의 이름을 나열하고 있는 반면 누가는 다윗의 아들로서 나단을 제시한 이후 마태와는 전혀 다른 이름들을 나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예수님을 왕으로 강조하려는 의도가 있음을 나타낸다.

그러면서도 마태는 예수께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사실을 빼놓지 않는다. 즉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여기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 오셨다는 것을 강조한다. 아담의 범죄 이후 사람이 죄인이 된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찾아오셔서 복을 주시고 그와 맺은 언약을 통해 구원을 이루시겠다는 선언을 하신 첫 사람이 바로 아브라함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한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강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자신을 알리고 역사를 나타내고 증거를 주시는 첫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아브라함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계시 사역이 계속 진행되어 예수님께 이르렀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주셨던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12:3)는 말씀을 성취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의 역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이어졌다는 뜻이다.

그렇게 언약을 이어가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조치가 취해지는데 그것이 ‘~에게서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해 감에 있어서 믿음 없는 이스라엘 때문에 누군가의 희생이 투입되어야 했다. 결국 ‘~에게서라는 희생은 인간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에 의해서 성취되어지는 언약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에게서는 다섯 명의 여인, 다말, 라합, , 우리아의 아내(밧세바), 마리아 등이다. 다말은 자기 자식을 지키기 위한 유다에 의해 버림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언약이 유다 가문을 통해 이어갈 것을 알고 창녀로 변장하여 유다를 통해서 언약의 후손을 이어가고자 했었다(38:1-30).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비언약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유다의 집안에 하나님의 언약 정신을 가진 자를 투입시켜 언약이 이어지도록 하셨다. 이 일로 말미암아 자기 자식을 지키려는 유다는 자신이 의로운 줄 알았으나 결국은 자신이 아니라 언약 정신을 가진 다말이 의롭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38:26). 결국 유다는 다말을 통해 보여 주신 하나님의 의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고 그 다말에 의해 하나님의 언약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질 수 있었다.

라합은 이방 여인이면서 창녀이지만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살려줌으로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셨음을 드러내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언약에 불신하는 이스라엘을 고발하는 것이었다(2).

룻은 모압 여인이었지만 시어머니 나오미가 고향(약속의 땅)으로 돌아갈 때에 자신의 길을 포기하고 시어머니의 하나님을 좇아감으로 하나님의 언약이 보아스를 통해서 이어지는 희생 속에 들어가게 되었다(룻기).

다음은 우리아의 아내에게서이다. 여기서 밧세바의 이름은 기록되지 않고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에게서솔로몬을 낳은 것으로 나온다. 물론 솔로몬은 육체적으로는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다. 그러나 언약의 관점에서는 밧세바를 다윗의 아내로 보지 아니하고 우리아의 아내로 보고 있다는 것은 솔로몬이 우리아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언약적 의미에서 생각해야 할 부분이다.

우리아는 다윗의 범죄 때문에 억울하게 희생된 자였다(삼하 11). 따라서 솔로몬에게는 우리아의 희생을 반영함과 동시에 다윗의 죄악을 고발하는 기능을 같이 지니고 있다. 다윗의 죄를 회복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로서 솔로몬을 하나님께 사랑을 입었다는 의미의 이름인 여디디아라고 하였다(삼하 12:25). 그래서 다윗은 시온이 유지되는 것은 오직 주의 은택으로 고백하였던 것이다(51:18).

결국 다윗 언약 계통의 왕들은 자신의 업적을 과시하는 이방 나라의 왕들과는 달리 백성의 죄를 담당하는 대표자로서 희생적 모습을 담아내는 자들이어야 한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과 같은 죄인에 의해 희생되어지는 우리아의 모습으로서 등장하게 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예수님은 다윗의 족보를 따라 나신 다윗의 자손이면서 다윗의 왕권적인 모습을 거부하면서 우리아와 같이 세상의 권력에 의해 희생당하는 하나님의 아들이 왕으로 오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16)라고 표현하였다. 즉 예수님은 요셉의 족보를 취하고는 있으나 요셉과는 관계없이 하나님 언약의 성취로 이 땅에 오신 것임을 강조한다.

마리아는 비천한 처녀의 몸으로 요셉과 정혼한 상태에서 아이를 잉태하는 희생을 감당해야 했다. 그러한 희생을 통해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시게 되었다. 이렇게 하나님의 언약은 사람들이 무시하고 연약한 자로 여기는 비천한 여자들을 통해 위기를 넘기면서 이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실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본 장에서 중요하게 강조되는 것은 기름부음 받은 사람들이 아니고 언약의 계보에 투입된 여자들이 아니라 그들을 부르시고 적재적소에서 언약을 이어가도록 일하신 언약의 하나님이시다. 계보에서 강조된 것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나 왕의 계승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언약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최종적으로 기름 부어 세우신 예수님 그분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이다. 그것 때문에 본 장의 계보에는 역사적인 인물들이 다 기록되어야 필요가 없었고 여자의 이름이 기록되어도 상관이 없는 족보이다. 결론은 하나님께서 언약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분만 복음이시기 때문이다. 이제 이 이후의 마태복음 성경공부는 복음이신 예수께서 그리스도시라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질 것이다 (20140824 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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