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안개 때문에 보이지 않으므로 안개 속에 사노라면 안개에 익숙해져
아무 것도 보려고 하지 않는다 안개의 나라에서는 그러므로 보려고 하지 말고
들어야 한다 듣지 않으면 살 수 없으므로
귀는 자꾸 커진다 하얀 안개의 귀를 가진
토끼 같은 사람들이 안개의 나라에 산다
묘비명(墓碑銘)
한 줄의 시(詩)는커녕
단 한 권의 소설도 읽은 바 없이
그는 한평생을 행복하게 살며
많은 돈을 벌었고
높은 자리에 올라
이처럼 훌륭한 비석을 남겼다
그리고 어느 유명한 문인이
그를 기리는 묘비명을 여기에 썼다
비록 이 세상이 잿더미가 된다 해도
불의 뜨거움 꿋꿋이 견디며
이 묘비는 살아남아
귀중한 사료(史料)가 될 것이니
역사는 도대체 무엇을 기록하며
시인(詩人)은 어디에 무덤을 남길 것이냐
초겨울
혼자 사는 데 곧 익숙해지겠지
외국에 간 자식들 소식 없고
세금 고지서만 꼬박꼬박 날아오겠지
외기러기 친구들과 어울려
어쩌면 성당에 나가겠지
새벽 기도를 하고
열심히 설교를 듣고
신부님 칭찬을 기뻐하겠지
온종일 봉사 활동 쫓아다니고
고단하게 쓰러져 하루하루를 잊겠지
뒷산에서 소쩍새 우는
옛날 집 팔아버리고
마침내 아파트로 이사하여
난방비가 인상될 때쯤
허리 병 때문에 드러눕겠지
잠마저 잃고
꿈마저 빼앗기고
환한 웃음마저 눈물로 되갚으며
혼자 앓는 데 곧 익숙해지겠지
그리고 아무도 익숙해질 수 없는
앞날을 기다리겠지
그 긴 순간을 기다리겠지
꿈속의 엘리베이터
엘리베이터는 비어 있었다
B4를 누르고 잠깐
어두컴컴한 직육면체 공간 속에
혼자 서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자동문이 열릴 차례였다
그러나 열리지 않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열리지 않았다
열림 버튼을 누르려 했지만
어두워서 보이지 않았다
손으로 더듬어보았으나
아예 버튼이 없었다
사라져버렸다
세상에 이럴 수가
문을 두드려도 소용없었다
핸드폰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캄캄한 꿈에서 깨어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김광규 시선집 『안개의 나라』 ( 2018. 1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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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규 / 1941년 서울 출생. 서울대 및 동대학원 독문과 졸업. 1975년 계간 《문학과 지성》을 통해 등단. 첫 시집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에서 최근 『오른손이 아픈 날』까지 11권의 시집을 펴냄. 시선집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누군가를 위하여』 외. 현재 한양대 명예교수(독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