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전남 함평에서 고구마 사건이 있었다. 전국적 관심은 이듬해 봄에야 불거졌지만 그 출발은 고구마 수확기인 정확히 요즘의 일이었다. '빼때기'란 게 있다. 고구마를 얇게 빼딱빼딱하게 썰어 말린 것으로, 얼었다 녹으면 썩어버리는 놈들을 제대로 보관하는 방편이었다. 농협에선 생(生)고구마, 건(乾)고구마로 구분했다. '건'으로 수매하던 빼때기를 같은 값에 '생'으로 사들인다는 발표는 고구마 농가에겐 기쁨이었다. 농협이 수매를 못해 고구마가 '생'으로 썩어버린 뒤 정부의 수매자금을 농협이 착복한 사실이 밝혀지자 농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따뜻한 지역에서 자라는 고구마를 오랫동안 보관하는 다른 방편으로 쫀득이'라는 게 있다. 삶은 고구마를 잘라서 건조 시킨 것이다. 노릇노릇하고 말랑말랑한 데다 삶는 과정에서 당분이 숙성되고 크기도 줄어 보관하는 데 최고다. '빼때기'는 콩 팥 등 잡곡이나 무 배추 등을 잘라 넣어 죽을 끓여 애용하고, '쫀득이'는 남녀노소 없이 호주머니 속에 넣고 다니면서 겨울도 지내고 보릿고개도 견딘다. 고구마를 생으로 썰거나 삶아서 잘라 통풍이 잘되는 곳에 널어놓고 말리는 일이 옛날 남쪽지방의 월동 준비였다.
▦요즘 들어 고구마가 부쩍 뜨고 있다. 농민신문(16일자)은 '맛있고 몸에 좋은 울퉁불퉁 팔방미인'이란 제목으로 그것을 칭송하고 있다. 알칼리성이며 섬유질이 풍부하다는 이유만으로 충분하다. 게다가 나트륨을 몸 밖으로 배출하는 효과가 있어 짠 음식을 가까이하는 우리에겐 더욱 긴요하다. 대한 암예방협회는 '암을 이기는 한국의 음식' 중의 하나로 선정했다. 편식하는 아이들에겐 비타민을 주고, 젊은 여성들에겐 다이어트와 빈혈예방을 도와주고, 어르신들에겐 노화를 더디게 하는 효과가 있다. 하지만 이 모든 장점도 고구마 맛의 즐거움엔 미치지 못한다.
▦함평 사건 직후 경북 안동지역에서 비슷한 이유로 '감자 사건'이 터졌다. 1970년대 이러한 고구마ㆍ감자 사건은 이후 우리 농민권익 운동의 출발이 됐다. 한반도 기온상승으로 경기도나 강원도에서도 고구마가 재배되면서 '남쪽 고구마, 북쪽 감자'란 말이 무색해졌다. 올 가을엔 고구마를 챙겨보자. 생으로 베어먹어도 좋고, 오븐에 구워도 좋다. 남는 고구마는 '빼대기'나 '쫀득이'를 만들어 베란다 한쪽에 널어놓으면 된다. 김장만이 김장이 아닐 터, 함평과 안동에서 있었던 옛일까지 생각할 여유가 있다면 올 겨울은 더욱 달콤하게 맞을 수 있다. 한국일보 지평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