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 형제처럼 지내는 큰집의 사촌들 중에는 똑똑한 사람이 많다.
그 중에서도 제일 윗 언니는 이대 약대를 수석으로 입학하여 매
번 장학금을 챙기더니 졸업 후 결혼을 하고는 근사한 약국을
가지게 되었다. 화곡동 어디쯤인데, 당시 우리 집이 있던 길동
에서 화곡동을 가자면 큰 결심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만만치
않은 그 거리를 혼자 고독을 즐기며 가기엔 나는 너무 싱싱
했었다. 그런데, 내가 입시 준비에 열을 올리던 고3때 짐을 싸
가지고 화곡동 큰언니네 일주일간 머무를 일이 생겼다.
:''지혜니? 나 큰언니인데, 작은언니랑 같이 약국 좀 봐다오''
"응? 아이구 언니두..나 고 3인데? 나야 가서 도와주고 싶지만
엄마가 허락하실까? "
:''작은엄마께는 말씀 드렸거든, 너도 맨날 공부만 할 수 있니?
방학인데 좀 머리도 식힐 겸 와서 일주일만 있거라.''
"!!!!"
이게 왠 떡이야. 엄마의 감시를 벗어나서 내가 좋아하는 작은
언니랑 밤새 떠들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살이 떨려왔다.
가족모두 1주일간 제주도에 휴가를 떠나버린 텅 빈 약국......
조제약은 못 지어줘도 매약품이나 드링크제라도 팔면서 손님
끊기는걸 방지한다는 목표아래 나와 작은언니는 에어콘 성능
좋은 시원한 화곡동 이화약국에서 한여름의 1주일을 보내게
되었다. 나는 고3, 작은 언니는 나보다 12살 많은 30 노처녀.
박카스와 우루사, 판피린이나 사리돈만 팔았는데도 엄청 수
입이 좋았다. 수익금의 30%씩 우리에게 나눠준다고 한 큰언니
의 약속을 의식한 것은 아니지만, 손님이 일단 오면, 어떻게
든 구슬려 가정상비약을 왕창 왕창 사게끔 하여, 국가 보건에
이바지하며 지냈다. 자주 들르는 사람들은 거의 매일 오다시
피 하는데, 매일 시원한 박카스에 우루사를 먹고는 약국의자
에 하염없이 앉아서 에어콘을 즐기는 복덕방 할아버지, 시장
가는 4시쯤 어김없이 와서는 처음 보는 아가씨들에 대한 정보를
조금이라도 캐 내려는 수다아줌마, 학교 가는 길에 들러 인사하
고 가는 옆집 초등학생, 시간이 어떻게 나는지 하루에도 수십
번 외출하여 한가지씩만 사가는 어떤 군인이 바로 그들이다.
신기한 건, 그 네 사람은 절대로 같은 시각에 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침에 꼬마가 인사를 하고 가면, 할아버지, 군인,
아줌마의 순으로 들어 온다. 그것은 거의 매일 반복 되는 일
이라 4일째가 되었을 때, 벌써 버릇처럼 이쪽에서 먼저 기다
려졌다.
"저 할아버지 말야.."
"응? 복덕방 아저씨?"
"응, 언니가 맘에 드나 봐. 중매라도 서실라 그러나?"
"아휴, 얘. 별소릴 다.."
밉지않게 눈을 흘기며 핀잔을 주는 작은언니도 내심 그런 기
대가 있었나 보다. 우리는 친절했고, 사람들은 이것저것 우
리들에 대해 알아가기 시작했다.
"어서 오셔요~"
"..안녕하셔요.."
매일 들르는 군인이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라 두 명의 동료를
데리고 왔다. 스물 너댓으로 보이는 그 구릿빛 사내가 내 마
음을 콩당거리게 했음은 물론이다. 한꺼번에 셋이 들어서자
그렇지않아도 그만 보면 긴장되던 나는 얼굴마저 화끈거렸다.
이 순간이 되면 늘 보이지 않는 경쟁자가 되는 작은언니가
먼저 미소를 띄며 말을 건넸다.
"오늘도 박카스 드려요? 오늘은 두 분이 더 오셨네?"
목소리를 일부러 이쁘고 젊게 내려는 듯 보였다. 연하의 그
들에게 무얼 기대할 수 있다고...
나는 나이 면으로 볼 때 언니보다 좋은 입지를 가지고 있었다.
내 생각에 분명 그들은 나를 보기 위해 온 것이다.
나는 최대한 우아한 표정을 지으며 아쉬움을 남기고 방으로
들어갔다. 이쯤에서 사라져야 더 감질이 나는 법이니까. 쿠쿠
"저..한가지 물어봐도 돼요?"
함께 온 동료군인이 언니에게 말을 걸었다.
"실례지만 나이가..어떻게 돼요?"
매일 오던 사람은 베레모를 푹 눌러쓰고 얼굴이 상기된 채
어색하게 서 있었다.
"제 나이요?" 언니가 되물었다.
".....저..두 분다요..또 한 명, 아가씨 있잖아요."
그러면 그렇지. 그들은 내 나이가 궁금했지만 예의상 언니
나이도 물어본 게 틀림없었다.
"호호호~ 별걸 다 물어보시네. 숙녀 나이 물어보면 실례여요~"
대답을 회피하는 작은언니. 분명, 나이가 들통나면 자기한테
마이너스니까 내 나이까지 감추려는 게 분명했다.
약국안쪽의 쪽 방에 들어앉아 바깥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귀를
기울이던 나는 살짝 얼굴만 내밀고 참견을 했다.
"나이 알면 모하시려구요? 언니 나이 많아요."
언니가 고개를 홱 돌려 나를 째려봤다. 비겁한 동지를 보듯.
"저....실은.. 좀 많아도 되거든요...."
"야..오늘은 그만 가자."
"에이, 왜 오늘 얘기하자."
"야 실례야 실례....."
세 명의 숫기 없는 남자들이 허둥거리며 인사를 하고는 약국을
빠져나갔다.
"까르르르~ 저 사람들 되게 웃긴다아~ "
"그러게..할말이 있음 다 하고 가지 저게 모람. 더 궁금해 지게."
언니는 아쉬운 듯 나를 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너! 언니 나이 말하면 안돼! 알았지?"
"알았어.알았어."
건성으로 대답한 나는 내 나이도 조금 올려줄 것을 제의했다.
아직 고등학생이라고 하면 어쩐지 비린내가 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여자 나이라는 게 여자가 꾸미기에 달라서 일단 나이를 말하면
그 나이에 맞추어 생각하는 것이 남자들의 특성이다. 별로 나이
들어 보이지 않는 언니의 외모도 한 몫하지만, 말투라든가 발랄
한 그 모습으로 누가 봐도 언니는 서른 노처녀로 볼 수 없었다.
"나는 그럼 26이다." 자기 나이보다 4살이나 깎아버리는 언니.
"그럼 나는 22해줘." 왠지 스물하고도 둘이라면 제일 물 오른
나이일 것 같아서 스물 둘의 여대생으로 말해달라고 했다.
우리는 우리만의 모종의 음모에 키득거리며 즐거웠다. 남을 속
인다는 것도 즐거웠고, 이성으로부터 관심을 받는다는 것도 기분
나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날은 정말 아침부터 그 군인이 기다려졌다.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정확한 시간에 약국 문을 열었지만, 언니의 화장이
좀 짙어지고 내 매무새가 더 단정하고 둘 다 너무 심할 정도로
친절한 게, 아무래도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매일 오던 그 시간이 되자 할아버지도 다녀갔고, 옆집 아이도
다녀갔다. 그런데, 수다장이 아줌마가 다녀가고 해가 뉘엿뉘엿
질 때까지 그 군인이 안 나타나는 것이다. 그 초조함과 절망이란.
그는, 밤10시가 되어 약국 셔터를 내릴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우리는 그에 대해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먼저 그 얘기를 꺼
내면 속내가 들키는 것 같아서 였을 것이다. 밤새 한잠도 자지
않았다. 뜬눈으로 꼬박 새운 그 밤 자주 뒤척이는걸 보니 언니도
분명 그 생각을 했는가 보다. ''왜 그가 안 왔을까?''
다음날 아침 7시에 청소를 하고 약국셔터를 올리는데 언니 눈이
동그래졌다. 내 뒤에 그가 서 있었던 것이다.
"어머! 이른 아침에 왠일이셔요?"
반가운 기색이 들어날까 무척 조심하며 언니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네...어제는 일이 있어서 못 왔어요. 근데,"
그는 어제의 결석을 변명하며 미안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전혀
미안할 필요가 없음에도.
"여기 언제 까지 계시죠?"
그는 내 속마음을 아는 듯 물었다. 내가 밤새 그 말을 해주려고 별
렀다는 걸 눈치 챈 것 같았다. 이제 큰언니가 내일이면 돌아오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 즉 작은 언니와 나는 일상으로 돌아갈 것
이고 더 이상은 볼 수 없는 것이다. 그가 그것을 꼭 알아야 했다.
"내일이 마지막이죠. 왜요?"
"네 ? 그래요?"
약간 놀란듯한 그가 금새 풀이 죽었다.
"우리 내무반에 나이 많은 병장이 한 사람 있거든요. 훈련갔는데,
가기 전에 특명을 내려놨어요. 아가씨 하나 구해 놓으라구... 근데,
모레나 되어야 오거든요...사람은 참 좋은데..키가 좀 작아서..
165인데....전주가 고향이고..."
그는 묻지도 않은 그 병장의 신상에 대해 주절주절 늘어놨다.
그 병장의 나이 많음에 벌써 나는 생각이 물건너 갔고, 언니 또한
키 얘기를 듣고는 탐탁치 않은 얼굴이 되었다. 언니소원이 175이상
되는 남자와 결혼하는 것이라는 것쯤은 아주 오래 전부터 간파하고
있는 사실이다. 언니의 눈에 실망의 빛이 역력했다.
약국에서의 마지막 날은 너무 지루했다. 약도 잘 팔리지 않았고,
에어콘도 고장이 나버렸다. 짠순이 큰언니가 중고 에어콘을 샀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원인은 우리가 너무 계속 에어콘을 켜고 있
었기 때문이라고 정비사가 말해줬다. ''분명 큰언니는 수리비를
우리에게 물릴 거야.'' 힘들여 번 1주일간의 수익금 중 얼마가 그냥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그 군인에 대한 생각조차
하기 싫었고, 할아버지도 아줌마도 옆집의 아이도 볼 일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돈계산을 끝내고 언니와 단둘이서 조촐한 파티를 했다.
작은 케익과 콜라뿐이었지만 함께 지난 1주일의 무사를 축하하며.
"언니, 실은 그 군인말야..맘에 있었지?"
"얘는...애하고 놀일 있니? 기껏해야 스물 넷이나 되었을까?"
"하하~ 하지만 언니 좀 긴장한 거 사실이잖우?"
"아이구, 그렇고 보니 니가 더 맘이 쏠렸었구나? "
"응? 아냐 아냐 절대로! 난 그런 쑥맥 별로라니까."
"...?"
"...!"
"까르르르!~"
우리는 시덥잖은 이야기들을 콩튀기 듯 꺼냈다 뒤집었다 하며 화곡
동 약국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그동안 고마웠다 얘들아. 약속대로 이익금의 30%다."
다행히 큰언니는 에어콘 수리비를 제하지 않았다. 형부로부터 근사
한 점심까지 얻어먹어 챙기고 시내로 나가는 좌석버스를 타는데
"얘! 저기 좀 봐."하며 언니가 내 팔꿈치를 쳤다.
버스정류장에 예의 그 군인과 어떤 늘씬한 아가씨가 함께 서있었다.
무척 가까워 보였다. 아가씨가 그 군인의 팔짱을 꼈다 뺐다 하며
장난을 치고 있다.
"애인인가 부다."
"후후. 그런가 봐."
그들의 모습을 뒤로하고 우리가 탄 버스가 먼지를 일으키며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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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이야기를 읽으신 여러분. 현 보건법 상 약사신분이 아니면 어떠한 약도 팔 수 없음을 알려드리오며
위 이야기는 아주 오래 전 이야기일 뿐더러 큰 언니는 이제 약국을 하지 않습니다. 뭐, 약사자격없이 약을 팔았던 것에 분개하는 분이 있다면 그냥 너그러이 용서 하시고 딴지 걸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가끔 정말 항의하는 분이 있음 ^^;)
2003년 8월… 큰 키를 좋아하던 언니는 자기랑 키가 똑 같은 남편과 결혼하여 잘 살고 있고…
정말 그 이화약국은… 아직 화곡동에 있을까요? 궁금해 지네요.
첫댓글 난 지금 부지런히 약 팔믄서 꿈신 글 읽었네. 단편소설처럼 글이 맛깔스러워.. 정말 동네 사람들 우물터가 약국이기도 해
그때 정말 좋은 경험이었어요. 근데 조제약 말고 박카스종류만 팔아도 돈 되던데요? ^^
화곡동 갈때마다 "이화약국" 찾아보게될꺼가틈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