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미와 매미의 우화도 변한다
이솝 우화는 뜨거운 여름에 열심히 일하는 개미와 나무 위에서 한가히 노래하는 매미를 부지런함과 게으름의 대조적인 인물로 묘사하였다. 시원한 그늘에서 신나게 노래하는 매미는 더위를 무릅쓰고 땀 흘려 일하는 개미를 한심하고 어리석다고 비웃었다.
하지만 겨울이 닥쳐왔을 때 월동준비 없는 매미는 춥고 배고픔에 지쳐 개미에게 찾아와 도움을 요청하였다. 개미는 매미에게 “왜 여름에 식량을 모아 두지 않았냐?”라고 물었다. 매미는“노래를 부르느라 그럴 시간이 없었다”고 대답했다. 개미는 매미를 비웃으며“여름에 노래를 불렀으니 겨울에는 춤을 추면 되겠구나” 라고 말하면서 도움을 매정하게 거절하였다.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곤궁에 처한다는 교훈을 강조하여 미래를 준비하는 개미의 정신을 칭송한 것이 개미와 매미의 주제이다. 흥부와 놀부의 이야기에서 문전박대를 당하는 흥부는 착하게 살기 때문에 대박을 터트렸지만 매미는 즐겁게 노래만 부른 대가로 쪽박을 찬 꼴이다. 이들 우화는 착하고 열심히 살면 좋은 결과로 보답 받는다는 권선징악의 감동적인 미덕을 펼친 것이다. 그러나 개미와 매미의 스토리는 상황에 따라 달리 전개된다.
공동체 복지주의에서 개미는 매미의 딱한 사정에 동정하여 자기의 먹을 양식을 기꺼이 나누어 준다. 매미는 어려운 이웃을 돕는 베풂의 정신에 감복돼 자기반성을 한다. 예술의 나라 프랑스에서 개미는 힘들게 일하는 자신들을 위해 매미가 노래로 격려해 준 보답으로 식량을 매미에게 준다. 노래의 엔터테인먼트의 가치와 필요성을 중시하는 프랑스다운 발상이다.
공산주의에서는 매미가 식량을 나눠 먹자고 요구하자 개미는 혁명 동지애의 학습에 충실해 동의하였다. 개미와 매미는 준비한 식량을 모두 먹어 치워 봄이 되니 함께 굶어 죽어 있었다. 사회주의의 과도한 분배주의의 결과이다. 개미는 할당받은 일을 하고 매미는 노래를 부르면 배급생활이 보장되는 것을 미끼로 개미와 매미를 목적을 위한 한낱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 북한 체제이다. 자본주의 미국에서는 푸대접 받은 매미는 자신의 슬픔을 개미의 업소에서 노래로 불러 인기를 끌자 개미의 사업이 번창한다. 매미는 개미와 합작해 공연기획 회사를 설립하여 사업의 대등한 동반자로서 성공한다. 미국다운 개척자 정신이 꿈을 이룬 것이다.
오늘의 4차 산업혁명시대는 누구에게나 창의성의 기회가 열린사회로서 육체노동보다 아이디어, 재능 등을 중시하면서 개미와 매미의 각자 개성에 따른 선택권을 존중한다. 그 결과 개미의 꾸준한 성실함보다 매미의 탁월한 재능이 돋보인다. 세상은 성공만 보고 싶어 하고 성공의 과정보다 결과의 가치만 추켜세우니 일개미보다 매미의 노래가 빛을 낸다. 우화의 메시지는 개미 버전에서 성공한 매미 버전으로 변한다. 개미는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였으나 그에 대한 대가는 기대에 못 미치고 힘겹게 삶을 산다. 하지만 매미는 별 볼일 없는 무명에서 어느 날 슈퍼스타 가수로 도약하면서 매미의 인생 자체가 장미꽃으로 바뀐다.
세상은 매미가 이룬 성공의 대리만족에 취한다. 갑을관계의 논리에서 을이었던 매미는 새로운 스타로 탄생하고 갑으로 역전한다. 성공은 준비된 사람만이 이루는 노력의 결실로 치장하고 인간승리로서 감동을 이끈다. 성공의 스포트라이트에 가려 어두운 면은 보이지 않는다. 성공은 곧 행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행복은 보는 눈이 아니라 마음가짐에 있다. “자신을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가장 행복하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했다. 행복의 정답은 없으며 남이 없는데 나만 있고 만족하는 것이 행복이다.
개미와 매미의 우화에서 보듯이 권선징악의 이분법적 가치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또한 만능적 잣대나 해결책이 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권선징악, 인과응보 등을 고지식하게 강조하는 고정적 안목으로는 세상을 바로 볼 수 없다. 세상은 급변하고 음지가 양지가 되듯 영원한 가치는 없다. 동일한 현상도 보는 관점에 따라 전혀 다르게 볼 수 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기를 선호하면 눈에 콩깍지가 씌는 확증편향(Myside Bias)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아집과 고립에 빠진다.
개성의 자유와 유연한 사고가 필요한 사회 변혁시대이다. 서로 다른 것을 다양성과 선택의 자유로서 보장하는 것은 창의성과 역동성을 이뤄내는 에너지이다. 개미와 매미는 각자 선택한 길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살맛나는 일이고 이를 즐기는 것이 성공과 행복의 출발이다.
***80대 옥토제너리언의 활약 시대
노령인구가 인구 5명 중 1인이 되는 초고령 사회의 100세 시대는 인류가 겪어 보지 못한 인류사의 새로운 기원이다. 오늘의 80대는 옛날의 병약한 노인상이 아니라 활기찬 젊은 고령세대이다. 80대는 지금 나이에 0.8을 곱한 64세의 생체나이로 장년의 활동기이고 인생의 전성기에 해당한다. 인생을 25세까지를 봄, 50세까지를 여름, 75세까지를 가을, 그 이후를 겨울이라고 한다면 80대는 늦가을이고 90대는 초겨울에 접어든 셈이다.
80대는 산전수전 겪은 인생의 후반전이고 새로운 연장전이다. 그들에게선 시들은 노추의 모습이 아닌 믿음직한 노장의 관록이 보인다. 늙어도 늙음의 기백과 멋이 있게 변할 수 있다. 노화는 변화를 의미하지만 그 변화가 퇴화를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우리나라의 연령별 생존확률을 보면 70세는 86%, 80세는 30%, 85세는 15%, 90세는 5%이다. 90세가 되면 100명 중 5명만 생존하는 통계이다. 80대를 넘는 것은 축복이고 삶의 긍지이다. 옥토제너리언(Octogenarian)은 그리스어로 8을 의미하는 Oct와 60세 이상 노인을 뜻하는 genarian 이 결합한 합성어로 일하는 80대를 지칭한다. 옥토제너리언은 선택받은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자기관리를 하면 누구나 가능한 시대이다.
세계보건기구에 의하면 세계 인구 약 81억 중의 80대 비율은 2003년 세계인구의 1.3%인 8천2백만 정도였으나 2023년에는 2.0%인 1억6천여만이고 2053년에는 5.1%인 5억명으로 증가할 것으로 추산한다. 100세를 맞는 어르신들께 대통령이 선물하는 청려장도 그 숫자가 10년 전과 비교하면 곱절 이상 늘었다. 지구 생태계에서 인간만이 수명 연장에 온갖 노력을 하고 있어 수명 120세는 꿈이 아니고 100세의 센테너리안(centenarian)이 활약하는 시대가 멀지 않다.
월스트리트저널에 의하면 미국은 1980년 약 11만명의 80세 이상 근로자가 2022년에는 6배가 늘어 69만여 명이다. 일본은 75세 이상 취업자가 2017년 9%에서 2022년 11%로 2% 증가하였다. 한국노동연구원에 의하면 80대 고용률이 1982년 2.2%에서 2022년 18.7%로 40년 사이에 8배 증가하였고 80대 중에서 5명의 한 명꼴로 취업이 증가하는 추세이다. 코스닥 상장 기업에서 80대의 등기 임원 수는 2014년에는 31명이었는데 지난해에는 120명으로 늘었다.
'청년처럼 사는 어르신'을 일컷는 청어시대에 액티브 시니어의 활약이 기대된다. 100세 시대의 80대는 아직 물러날 나이가 아니다. 건강한 80대라도 장년기처럼 활동할 수 없으나 옥토제너리언의 활약은 더 이상 경이로운 것이 아니다.
나이의 정년은 있어도 삶의 정년은 없다. 나이를 초월해 은퇴를 미루고 일하는 80대의 노익장의 열정은 노쇠를 극복한 인간 승리이다. 젊게 사는 그들의 공통점은 긍정적, 절제적 생활신조를 갖고 자기관리가 철저하며 겸허함과 배려심이 깊고 무엇보다 집념과 열정이 넘친다. 삶의 의미를 나름대로 통달했기에 미련 없이 삶을 즐기는 나이가 80대이다. 60대 70대는 얼굴의 주름살에 부끄러운 듯 서글퍼 보인다만 80대는 두툼한 주름살에 무심해 신선의 경지에 이른 중후한 인상을 풍긴다.
노화는 첨단 항노화 의료 보건 기술로써 극복할 수 있기에 노화는 치료 가능한 질병이고 더 이상 늙지 않을 수 있다는 낙관적인 예언을 하는 노인학 전문가들이 늘고 있다. 늙음이 인생의 낡음이 되지 않고 회춘의 리모델링이 가능한 시대이다. 늙음은 나이만큼 늙는 것이 아니라 생각만큼 늙는다. 절망과 무기력증을 극복하고 희망과 열정을 가지면 젊어질 수 있다.
삶은 인간 성숙을 향해 진행 중이고 나이 들수록 원숙해져 대기만성의 전성기를 이룰 수 있다. 나무가 늙었다고 늙은 꽃이 피는 것이 아니고 늙게 핀 꽃이 오래간다. 삶의 지혜와 높은 경륜, 중후한 인품을 갖춘 옥토제너리언은 사회 리더의 원로 파워로 군림하고 있다. 역사상 빛나는 위업의 35%는 60세-70세에 의해, 23%는 70세-80세, 6%는 80대에 의하여 성취되었다고 한다. 80대가 흔치 않았던 시대의 80대의 위업을 볼수록 오늘의 80대의 활약이 더욱 기대된다.
80대는 미운 나이지만 노년 혁명의 기수 옥토제너리언은 세대교체를 바라는 아래 세대를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카리스마로 응답한다. 늙음을 거부하는 것인지 초월하는 것인지? 물러나 쉬지 않고 계속해서 자기 일에 매진하는 그들의 욕망은 노욕일까 열정일까? 어쨌든 그들은 우리가 선망하는 롤 모델이다.
① 미국 대통령에 도전하는 80대의 트럼프의 리턴 매치는 옥토제너리언 세대의 저력을 과시한다. 미케란젤로가 천지창조 벽화를 그린 것이 89세이고 괴테가 파우스트를 완성한 것이 82세였고 베르디는 86세까지 작품 활동을 했다. 황희는 68세에 영의정이 올라 86세에 은퇴했다.
② 버나드 쇼는 90세에도 작품을 발표했고, 루빈스타인은 90세에 카네기 홀에서 지휘를 하였고 샤갈은 98세까지 작품 활동을 하였고 엘리엇 카터는 90세 이후 무려 40곡을 작곡하였다. 91세의 여성 산악인 크로스는 미국 대륙에서 제일 높은 위트니산을 등반하였고 평범한 주부인 시바타 도요는 92세에 시를 쓰기 시작하여 98세에 유명한 시집을 발간하였다.
현재 90대에도 활약하는 분들이 늘고 있다. 22년 동안 말레이시아를 통치했던 마하티르 총리는 물러난 지 15년 만에 복귀해 93세의 최고령 국가 정상이 되었다. 반도체 칩의 파운드 리를 창업한 모리스 창은 74세 때 고령을 이유로 은퇴하였으나 78세에 다시 복귀하여 93세에도 회사를 지휘하고 있다. 94세인 워런 버핏과 조지 소로스는 세계 제일의 투자가로 활동하고 있고 미디어 재벌인 93세 머독은 27세와 연하와 다섯 번째 재혼을 했고 92세 엘렌 버스틴은 명연기로 노익장을 보여주고 있다. 96세 영화인 신영균은 사회 각 처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92세의 이길여 총장은 대학을 이끌고 있다.
③ 해리 리버맨은 70세에 그림을 시작해 101살의 나이에 22번째 전시회를 개최하였다. 화가인 그랜드마 모제스는 75세까지는 10남매를 길러낸 평범한 주부였으나 그림을 시작해 1,600점의 작품을 남기고 101세로 타계하였다. 103세 김형석 교수는 왕성한 학술 활동으로 국민적 존경을 받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