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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나라를 품은 이의 특징>
정신과 의사 정혜선 씨는 모든 사람을 “당신이 옳다!”는 마음으로 대하라고 말합니다.
30년 동안 정치인, 법조인, 경제인, 대통령 후보들, 고문 피해자, 세월호 피해자 등 약 12,000명의 환자와 만나본 경험을 통해 내린 결론이라고 말합니다.
한 중학생 아이는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두세 시간씩 배회하다가 친구에게 전화를 겁니다.
그러면 친구는 “집에 안 들어가고 뭐해. 빨리 들어가, 병신아!”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산소가 필요해 창문을 열었는데 매연이 확 들어오는 느낌을 받는다고 합니다.
더 이상 산소가 없으면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요?
살 힘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집에 들어가야 하는지는 자신도 압니다.
그 대답을 들으려고 전화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해답을 찾으려 사람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갈 수 있는 산소, 양식을 찾으려 사람을 만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래, 무슨 일 있어?”라는 관심, 그리고 “그렇구나, 그럼 나라도 안 들어가겠다!”는 식의 ‘공감’으로 대해줄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사람을 죽이고 싶다거나 가출하고 싶다고 말해도 “네가 옳다.”라는 식으로 공감해주라고 합니다.
그러면 십중팔구는 좋은 선택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해답이 아니라 힘을 얻으려 사람을 만납니다.
한 번은 정혜선 씨에게 자녀가 죽어 슬퍼하는 어머니가 찾아왔다고 합니다.
어느 날 아침부터 이유 없이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하여 멈추지 않는 증세가 시작된 것입니다.
병원에도 갔지만 눈물은 계속 지속되었습니다.
그리고 정혜선 씨를 만나 “저 미쳐가나 봐요. 저 미친년 맞죠?”라고 묻더랍니다.
정혜선 씨는 “아니, 자식이 죽었는데 눈물이 안 나는 게 미친년이지 하루 종일 눈물 흘리는 게 뭐가 미친 거예요.”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분은 “그렇죠?”라고 말하더니 곧 잠에 곯아떨어졌고 몇 시간 뒤에 일어났는데 눈물이 멈추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찾는 것은 자신이 피신할 공간과 자신의 허기를 달래줄 공감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겨자씨와 같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정원에 겨자씨를 심었더니 큰 나무가 되어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었습니다.
겨자씨가 심겨진 정원은 우리의 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 안에 하느님 나라가 심겨지면
큰 나무가 생겨서 힘들고 지친 사람들이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이 생깁니다.
자신 안에 하느님 나라가 없으면
사람들을 쉬게 하지 못하고 오히려 힘들게 합니다.
휴식을 주려고 해도 자신의 정원에 나무는 없고 가시덤불밖에 없기 때문에 결국 상처를 주게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는 누룩과 같다고 하십니다.
하느님 나라가 사람을 상징하는 밀가루 서 말 속에 들어가면 그 서 말의 밀가루가 온통 부풀어 오릅니다.
빵에 누룩을 넣는 이유는 반죽이 부풀어 먹기 좋게 만들기 위함입니다.
밀가루로만 만들어 구우면 딱딱하게 되어 배부르게 해주기보다는 치아를 아프게 할 수도 있고 또 목에 걸려 잘 넘어가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하늘나라를 품은 사람은 누구를 만나든 그 사람의 허기를 달래줄 수 있습니다.
사람과의 관계가 힘든 이유는 사람을 만날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상태로 만나기 때문입니다.
내가 휴식이 되고 양식이 되어주어야 하는데 상대를 통해 휴식을 찾고 양식을 찾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는 성령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사랑과 평화와 기쁨입니다.
내 안에 사랑과 평화와 기쁨의 나무가 없다면
누구에게도 휴식을 줄 수 없고, 누구의 배도 채워줄 수 없습니다.
사실 사람을 아프게 하는 것은 나의 자아가 살아있기 때문인데,
하늘나라가 내 안에 이루어졌다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내 안에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 나를 죽였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이 지배하는 나라가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렇게 나를 죽였으면 그 사람은 온유하고 겸손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웃과의 좋은 관계를 원한다면 먼저 하느님과의 관계부터 회복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웃과의 관계는 저절로 잘 되게 될 것입니다.
내 안의 하느님 나라는 힘든 사람이 쉴 공간이고, 배고픈 사람이 먹을 양식입니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오늘 <복음>에서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한 쌍의 비유를 전해줍니다.
곧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루카 13, 19)
‘겨자씨’는 유다문학에서 ‘작은 것’의 전형적인 상징으로 사용되어 왔다고 합니다.
‘겨자씨’는 비록 작은 씨앗이지만, 자라나서 큰 나무가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비유에서 그것은 ‘정원’에 심었을 때를 말합니다.
아무 데나가 아니라 ‘정원’에, 그것도 “자기 정원”에 심었을 때를 말합니다.
그러면 하늘의 새들이 깃들이게 됩니다.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라는 말에서,
“깃들다”(κατασκηνω)는 단어의 뜻은 “밑에 거주하다” 곧 “장막에 들어가다”, “장막을 치다”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곧 새들이 단순히 가지 위에 잠시 내렸다가 다시 날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안전하고 영속적인 거처를 마련하고 지속해서 거주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교회’라는 혹은 ‘가정’이라는 생명의 말씀나무에 한 둥지를 틀고 사는 새떼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이미 한 그루의 생명나무입니다.
당신께서 뿌려진 생명의 씨앗이 자라나 사랑으로 피어난 나무입니다.
한편, ‘겨자씨의 비유’가 하늘나라의 외적인 변화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면,
‘누룩의 비유’는 내적인 변화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곧 누룩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복음의 위력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누룩”은 밀가루에 들어가 자기의 능력을 전체에 돌려줍니다.
그러나 먼저 반죽되어야 하고, 섞여야 됩니다.
누룩은 밀가루에 묻혀 보이지 않지만, 결코 죽지 않습니다.
오히려 밀가루 속으로 들어가 섞일 뿐입니다.
그리고 변화시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룩을 밀가루 “속에” 집어넣었다고 하십니다.
우리도 이 누룩을 우리 ‘속에’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적은 양의 누룩이 자루 서 말을 모조리 부풀리듯이, 갈라진 우리의 내부를 통합할 것입니다.
그렇게 성장시키고 변화시킬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누룩이 되어 세상 속으로, 형제들 속으로 들어가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를 통하여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시작된 것처럼 보이는 하늘나라의 복음은 세상을 해방하는 변화를 가져올 것입니다.
적은 양의 누룩이 가루 서 말을 모조리 부풀리듯이 말입니다.
또한 “집어넣다”(εγκρυπτω)는 동사는 “숨기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밀가루 서 말 속에 숨긴 누룩이 온통 부풀어 오르듯이,
하늘나라도 현재 숨겨 있는데 미래에 엄청나게 확장되리라는 전망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누룩”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복음의 위력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겨자씨가 이미 ‘우리’라는 밭에 뿌려졌고,
누룩이 이미 ‘우리 가정, 우리 공동체’라는 밀가루 안에 넣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맘껏 자라나고, 맘껏 부풀어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제 안에 넣은 누룩이 제 속을 파고들게 하소서!
섞여들지 못한 까닭에 부풀어 오르지 못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제 안에 뿌려진 씨를 묻어두고만 있지 않게 하소서!
죽지 못한 까닭에 싹을 피우지 못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아멘.
-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소리 없는 변화>
“하느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그것을 무엇에 비길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고, 누룩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겨자씨와 누룩과 같다고 하셨을까?
겨자씨는 씨 중에서 가장 작은 씨입니다.
오늘 그 씨를 보여드립니다.
얼마나 작은지 보십시오.
그런데 겨자씨가 자라서 큰 나무가 되고 새가 깃들만큼 우거집니다.
누룩 역시 밀가루 반죽 속에서 아주 작은 부분을 차지할 뿐입니다.
누룩도 밀가루 양에 비해서 아주 보잘 것 없을 만큼 적은 양이지만 밀가루 반죽에 들어가서 밀가루 전체의 성질을 변화시킵니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한 사람이 내 삶의 자리와 머무는 곳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믿음을 가진 우리 한사람, 한 사람이 겨자씨와 누룩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내가 바로 서면 지금은 미약하지만 분명 큰 변화를 가져올 것입니다.
한 사람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한 사람이 큰 나무 역할을 하게 될 때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 그늘의 고마움을 느끼게 될런지요.
콩나물을 키울 때 콩나물에 물을 부으면 물이 다 빠져나갑니다.
하지만 콩나물은 크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성장과 변화는 드러나지 않게 이루어집니다.
실망과 좌절 안에서도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예기치 않은 역경과 시련도 믿음의 사람에게는 은총의 기회요 희망입니다.
따라서 순간순간을 감사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활동을 통해서 드러나게 되었는데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이미 왔는데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천만다행입니다.
왜냐하면 완성에로 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의 삶은 시작과 완성 사이의 긴장 안에 있습니다.
“우리 마음속을 스쳐가는 순간순간의 생각,
꿈같이 왔다 갔다 하는 우리의 상상,
마음 속 깊이 숨은 티끌 같은 비밀 하나까지
하느님의 전지전능하신 눈앞에 숨겨져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
그러므로 정신을 바짝 차려 깨어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오로도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행실대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로마 2,6)
이 말씀은 믿는 이들에게는 두려움보다는 기대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겨자씨의 비유를 통해서 성장을,
그리고 누룩의 비유를 통해서 자연스런 변화를 말해줍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주님의 가르침이 마음 안에 새겨져서 자연스런 삶의 변화를 통해 증거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나라가 언제 오겠느냐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질문을 받으시고
“하느님 나라가 오는 것을 눈으로 볼 수는 없다.
또 ‘보아라,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라고 말할 수도 없다.
하느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 (루카 17,21)
고 하셨습니다.
결국 지금 내가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고 있다면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내 안에 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을 하든지 따지지 마십시오.
자동차 운전을 하든지, 부엌일을 하든지, 짐을 나르든지 상관없이 마치 사제가 성체를 모시고 가듯이 하십시오.
매 순간마다 이렇게 ‘천국을 위하여 일하십시오.”
(알베리오네)
내 삶의 자리를 하느님의 나라로 만드는 하루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부원장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 나라의 삶 -그리스도 안에서 겨자씨같은, 누룩같은 삶>
꿈이 있어야, 비전이 있어야, 희망이 있어야 삽니다.
꿈이, 비전이, 희망이 있어야 비로소 사람입니다.
이런 꿈이, 비전이, 희망이 내적 활력의 원천입니다.
여러분의 꿈은, 비전은, 희망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평생 꿈이자 비전은 하느님의 나라였습니다.
갈릴래아 전도를 시작하실 때의 예수님 일성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예나 이제나 시공을 초월하여 예수님은 물론 우리 믿는 이들의 영원한 평생 꿈이자 비전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멀리 있는 하느님의 나라가 아니라 가까이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살아야 하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요즘 대한민국 가을은 어디나 절경이라 흡사 하느님의 나라같습니다.
올해의 단풍은 유난히 곱고 깨끗합니다.
어느 수녀님 계신 곳의 단풍 사진도 좋아 주고 받는 덕담도 생각납니다.
“아, 거기도 천국이네요.”
제 탄성에, “천국이면서 성지입니다.”라는 수녀님의 답변입니다.
이어지는 저의 화답입니다.
“그러고 보니 모두가 천국이자 성지네요.”
성지 있어 성인이 아니라 성인 있어 성지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나라 있어 하느님의 사람이 아니라, 참으로 하느님의 사람이 있어 비로소 하느님의 나라임을 깨닫습니다.
내가 하느님의 사람이 되어 하느님의 나라를 살 때
비로소 하느님 꿈의 실현인 하느님 나라가 펼쳐집니다.
바로 예수님 자체가 하느님 꿈의 실현인 하느님의 나라였고
무수한 성인성녀들이 하느님 나라의 실현이었습니다.
우리를 통해 하느님의 꿈이 실현되는 거기가 바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하느님이 계신 곳을 찾지 말고 하느님을 찾으라 했습니다.
어디나 하느님이 계시기에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느님을 만나라는 것이요 하느님의 나라를 살라는 것입니다.
행복기도문 둘째, 셋째 단락이 생각납니다.
주님/눈이 열리니/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하느님의 나라/천국이옵니다
곳곳에서/발견하는
기쁨, 평화, 감사, 행복이옵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나이다
그렇습니다.
죽어서 가는 하느님의 나라가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살아야 하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지금 여기서 하느님 나라를 못살면 죽어서도 못삽니다.
지금 여기서부터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면 죽어서도 하느님 못 만납니다.
오늘 복음은 한쌍의 하느님의 나라 비유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그것을 무엇에 비길까?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그것은 누룩과 같다.”
루카복음 사가는 하느님의 나라로 독자들의 생각을 이끕니다.
이렇게 하여 예수님의 상경기 첫 단락을 마무리짓습니다.
여기서 루카는 선교활동에서 직접 체험하는 바와 같이, 막을 수 없는 복음의 확장과 변화의 힘을 이야기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도 막을 수 없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꿈을, 하느님의 뜻을 좌절시키지 않는 섬세한 사랑의 관심입니다.
깨어 있어 하느님의 꿈인 하느님 나라가 잘 실현되도록 돕는 일입니다.
건드리지 말고 그냥 놔두고 사랑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물론 이웃에 대한 처신이기도 합니다.
더 좋은 것은 내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겨자씨처럼 자라남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내적 변화와 성장을 통해 내 자신은 물론 주변으로 하느님의 나라는 확장될 것입니다.
내 자신이 주님의 누룩이, 믿음의 누룩이, 희망의 누룩이, 사랑의 누룩이 되어
자신의 내적 변화와 성장과 성숙은 물론 이웃을 신망애의 누룩으로 부풀려 성장과 성숙을 돕는 것입니다.
물론 이 모두는 하느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겨자씨의 성장과 누룩의 변화는 모두 하느님의 나라의 확장과 성장을 상징합니다.
여기서 문득 생각나는 것이 예전 강론 때 가끔 인용했던 부패인생과 발효인생입니다.
외관상 흡사해 보여도 내용은 천지차이입니다.
부패인생은 악취가 나지만
발효인생은 향기가 납니다.
누룩의 효소가 작용할 때 발효이듯
성령의, 사랑의, 말씀의, 기도의 누룩이란 효소가 활발히 작용할 때
비로소 잘 익어 맛좋고 향기로운 발효인생에 하느님 나라의 실현이라는 것입니다.
과연 나는 맛좋게 잘 익어가는 향기로운 발효인생인지요?
자주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제1독서 에페소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인간관계로서의 아내와 남편 사이의 이상적 관계에 대한 내용입니다.
세상에 부부사랑보다 힘든 사랑은 없을 것입니다.
하여 피정지도시 자주 형제자매들에게 드리는 격려 말씀이 생각납니다.
“특별히 성인되려고 노력할 것 없습니다.
평생 부부노릇, 부모노릇만 잘 해도 성인입니다.
부부가 함께 평생 살기만 해도 성인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모두가 살아있는 순교 성인입니다.
또 부부는 함께 살았다는 자체로 구원입니다.”
격려하면 모두 폭소를 터뜨립니다.
그러니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고 순종하는 수평적 평등의 부부관계는 얼마나 아름답고 향기로운지요.
그대로 하느님 나라의 실현입니다.
바로 오늘 바오로 사도는 부부일치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일치로 견주며 부부관계의 신비를 밝힙니다.
“이는 큰 신비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두고 이 말을 합니다.
여러분도 저마다 자기 아내를 자신처럼 사랑하고, 아내도 남편을 존경해야 합니다.”
상호사랑과 존경이요 상호사랑과 순종입니다.
이래야 이상적 부부관계에 하느님 나라의 실현입니다.
어느 수도형제 부모님이 주고 받은 대화도 재미있어 나눕니다.
모친이 “내 다시 살아도 당신을 남편으로 택해 살고 싶다.” 라 말하자
부친은 곧장, “내 다시 살게 되면 수도원에 들어 가겠다.” 답변했다는 말에 수도형제들 모두 폭소를 터뜨렸습니다.
아마 모친보다 부친이 부부생활에 애로사항이 많았었던 것 같습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모든 사람!”
화답송 후렴처럼, 참으로 주님을 경외하여 주님을 닮아갈 때
오늘 지금 여기서 실현되는 하느님의 나라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하느님 나라를 잘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끝으로 주님과 나, 나와 너, 남편과 아내의 이상적 관계 속에 하느님 나라를 살 수 있기를 소망해 쓴 ‘하늘과 산’이란 제 자작시를 나눔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늘 있어/산이 좋고/산 있어/하늘이 좋다
하늘은 산에 깊이를 더하고/산은 하늘에 신비를 더한다
이런 사이가 되고 싶다/이런 사랑을 하고 싶다
환경이 좋아서 천국이 아니라 이렇게 관계가 좋아야 천국입니다.
반대로 아무리 환경이 좋아도 관계가 나쁘면 거기가 지옥입니다.
천국은 '장소place'라기보다는 '관계망network of relationships'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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