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세종문화회관 자리에 1970년대 4층 규모의 서울시민회관이 있었다. 당시 서울에는 마땅한 공연장이 없었으며 그나마 서울시민회관이 유일했었다.
1956년 이승만대통령시절 짓기 시작해 5년의 공사끝에 1961년 11월에 준공해 처음에는 이승만대통령의 호인 우남회관이라고 명명했으나 이듬해인 1962년 박정희군사정권이 들어선후 서울시민회관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서울시민회관은 지하1층 지상4층에 3000석 규모로 이곳에서 대중문화의 요람역할을 톡톡히 해 이미자, 패티김, 남진, 나훈아 등 정상급 가수들의 무대가 펼쳐지곤했다. 특히 남진과 나훈아의 라이벌무대가 열리면 구로공단의 여공원들이 몰려와 자신들의 우상에게 열렬히 응원하면서 최초로 "오빠부대"가 형성됐다
매년 년말이면 지상파방송에서 각종 방송대상 시상식이 열리곤 한다. 그 원조는 MBC로 1966년부터 '10대가수가요제'(나중에 10대가수청백전으로 바뀜)이란 타이틀로 방송하면서 비롯했다. 이것은 일본의 NHK방송의 '10대가수홍백전'을 그대로 답습한 것으로서 TBC에서도 이에 영향을 받아 '7대가수 가요대상'이 뒤따랐을만큼 폭발적인 인기였다.
1972년 12월2일에도 남진, 이상렬, 이용복, 정훈희, 조미미, 하춘화 등이 당내 스타 가수들이 총출동한 10대 가수 청백전이 이곳에서 열렸다. 관객 3000여명이 몰려들었다. 저녁 8시 28분 10대 가수 청백전이 다 끝난 뒤 펑하는 소리와 함께 무대 위에 설치된 조명장지가 터지면서 불꽃이 튀었다.
원인은 전기 과열로 인한 합선이었다. 화재가 날 때 관객 대부분은 빠져나간 상태였다. 그러나 불이나자 허둥대던 주최 측이 막을 내리면서 불길이 막으로 옮겨 붙어버렸다. 불이 더 크게 번지면서 시민회관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남아있는 관객들이 앞다투어 빠져 나오느라 계단 위에 넘어진 사람들이 많았고, 2층과 3층에서 유리를 깨고 뛰어 내리기도 했다.
불이 나자 서울시 소방본부는 고가사다리차 6대를 비롯해, 미군소방차까지 모두 소방차 72대와 소방관 400명을 투입했다. 군 병력 170명과 군 헬기까지 동원했다. 지하 1층 지상 4층의 본관과 10층 옥탑으로 이뤄진 건물 전체로 불길이 순식간에 번졌다.
소방시설은 무용지물이었다. 사람들은 창문에 매달려 구조를 애타게 기다렸다. 결국 화재발생 2시간만에 진화했지만 미처 화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53명이 숨졌고 76명이 부상을 당했다. 계단에서 다른 관객에게 밟히거나 무대 뒤 또는 옥탑 근처에서 근무 중이던 사람들이 주로 희생됐다. 재산 피해액은 2억 5000만 원으로 추산되었다.
서울시민회관 화재는 한 장의 사진으로도 지금까지 긴박함이 고스란히 전해져 남아있다. 당시 3층 창문 창틀에 왼쪽 허벅지가 끼어 거꾸로 매달린 여섯 살 어린 아이가 있었다. 시민들이 안타까운 비명을 지르는 사이, 처음 도입된 고가사다리차를 이용해 소방관들이 극적으로 소녀를 구했다.
당시 한국일보 사진부 박태홍 기자가 거꾸로 매달려 구조를 기다리던 아찔한 순간을 찍었다. 이 사진은 계엄령 하에서 국내 신문에는 실리지 않았고 AP통신을 통해 해외에 보도되었다. 극적으로 구조된 사진 속 주인공 조수아양은 ‘기적의 소녀’로 불리기도 했다.
1961년 11월에 준공한 서울시민회관은 세종로에 지어진 당시 대표 건축물이었다. 하지만 화재 뒤 소방시설은 형편이 없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눈에 보이는 시설에는 투자하고 눈에 띄지 않은 안전시설은 소홀히 한 것이다. 게다가 사고 발생 6개월 전 1972년 6월 서울시소방본부가 발족한 이후 처음으로 바로 불이 난 시민회관에서 고층건물, 시장, 백화장, 대형극장 관계자 등 460여명을 모아놓고 ‘빈틈없는 소방태세’를 지시했었다.
큰 불 대부분이 소방 시설 미비로 일어난다며, 서울시소방본부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소방시설을 갖추고, 자체 방화를 위한 안전관리를 철저히 하며, 자체 소방요원을 확보해 훈련시키라고 지시했다. 만일 이를 어기는 장소는 행정력을 동원해 단속하고, 업주나 방화관리자를 법에 따라 처벌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정작 이런 특별 지시를 내렸던 장소인 서울시민회관은 큰 불의 사각지대였던 셈이다.
53명의 생명을 앗아간 이날 화재는 1971년 대연각호텔 화재, 1974년 청량리역 대왕코너 화재와 더불어 1970년대 서울시내 3대 화재로 기록되고 있다.
이로인해 당분간 공연장이 없는 상황에서 6년후인 1978년 세종문화회관이 새롭게 지어져 기대를 부풀게 하였지만 대중문화 공연은 허가를 불허하는 바람에 지금의 서울시의회 건물 부민관에서 공연에 갈증을 해소할수 있었다.
이렇듯 우여곡절을 겪은 'MBC 10대가수 청백전'이 2005년 전격 취소됐다. 갑작스레 없어진 내막은 10대가수 후보로 올라있던 SG워너비가 "10대가수청백전'이 MBC에 적극 협조하는 가수에게 편애하고 편파적이라는 이유로 참석을 거부하자 이에 동조한 윤도현, 보아 동방신기가 불참하면서 생방송이 펑크나는 사태까지 초래했다. 이에 MBC는 긍여지책으로 "10대가수청백전'을 전격적으로 폐지시켜 38년만에 역사속으로 사라져 갔다.
1976년 'MBC 10대가수 청백전' - 김훈
첫댓글 광화문 시민회관 그당시에 연예인들이
공연을 많이 햇었지요
제일 기억남는거는 대형화재사건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