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가 323장 (구 355장) / 사도행전 24 : 1 - 9
*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하겠습니다.
* 찬송가 323장을 함께 부르겠습니다.
* 하나님 말씀은 사도행전 24장 1절 – 9절입니다.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1. 닷새 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어떤 장로들과,
한 변호사 더둘로와 함께 내려와서 총독 앞에서 바울을 고발하니라.
2. 바울을 부르매 더둘로가 고발하여 이르되,
3. 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또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으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로 개선된 것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크게 감사하나이다.
4. 당신을 더 괴롭게 아니하려 하여 우리가 대강 여짜옵나니,
관용하여 들으시기를 원하나이다.
5.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
6. 그가 또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하므로 우리가 잡았사오니,
7. (6하반 - 8상반 없음)
8. 당신이 친히 그를 심문하시면 우리가 고발하는 이 모든 일을 아실 수 있나이다 하니,
9. 유대인들도 이에 참가하여 이 말이 옳다 주장하니라. 아멘!
사도 바울이 3차에 걸친 선교여행을 매듭짓고, 그 결과를 예루살렘교회에 보고하고, 이방 교회들의 헌금을 전달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방문하였다가,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의 고발로 체포되어 심문을 받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임이 밝혀지므로 최악의 고문을 면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에서 바울을 암살하려는 시도까지 발생합니다. 그 정보를 입수한 로마의 천부장은 로마 시민권자인 바울을 보호하기 위해 로마 총독부가 있는 가이사랴로 호송하게 되고, 거기서 약 2년 여의 옥중 생활을 지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에서 고소자들이 도착한 후, 가이사랴에서 진행된 바울의 재판 장면입니다. 그들은 바울을 애매하게 고발하고 있지만, 오히려 그 고소 내용이 바울이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보여 줍니다. 재판 석상에서의 바울의 모습은 참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사도 바울은 복음의 영향력을 확산시키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5절에 보면, 바울에 대한 첫 번째 고소 내용이 나옵니다.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 - 이렇게 고소자들이 인정할 만큼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은 전염병처럼 급속하게 퍼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라는 표현을 할 만큼,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이 당시 세상에 흩어진 유대인들 사이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습니다. 결국 이런 유대인들에 대한 영향력을 두려워한 유대교 전통주의자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는 복음은 진리이기에, 우리 사람을 자유하게 하고, 우리 사람을 변화시키는 강력한 능력을 발휘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도 진리였기에 사람을 구원하고 변화시키고, 유대인 사회를 격동시켰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는 복음이,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세상에 영향을 끼치고, 변화의 능력을 나타내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복음의 감격을 회복하고, 구원의 복음, 자유하게 하는 복음, 변화시키는 능력의 복음을 세상에 널리 전해야 합니다. 복음의 거룩한 영향력으로 세상을 뒤흔들어 놓아야 합니다. 여러분! 아멘입니까?
둘째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중심의 인생을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시 오늘 본문 5절에 보면, 또 하나의 고소의 제목으로 사도 바울을 가리켜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 고 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았음을 역설적으로 반증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별명이 바로 ‘나사렛 사람’ 이었기 때문입니다.
“열린다 성경” 이라는 책을 씨리즈로 출간하고 있는 류모세 이스라엘 선교사는 나사렛이란 단어가 바로 메시아 곧 그리스도를 의미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본래 나사렛은 히브리어로 ‘나쯔라트’ 인데 이는 올리브 나무의 뿌리에서 나온 가지인 ‘네쩨르’에서 온 말로 본래 메시아를 의미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 11장 1절의 예언에서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고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라고 증언합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바울을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로 지목한 것은 그만큼 철저하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만을 구원자 메시아로 높이고 증거하였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솔직히 우리가 살아가면서, 정말 우리의 대화, 우리의 교제, 우리의 삶의 마당에서 예수 그리스도만을 높이고,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랑하고, 예수 그리스도만을 증거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를 생각하면 그렇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1장에 안디옥교회 성도들이 처음으로 불신자들에 의해 그리스도인이라고 일컬음을 받았던 것처럼, 우리도 불신자들의 인정을 받을 만큼,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아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이 신앙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아멘! 아멘!
셋째로, 바울은 영혼 사랑에 모든 것을 건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에 대한 세 번째 죄목이 무엇이었습니까? 오늘 본문 6절에 보면 “성전을 더럽게 한 죄 때문에 우리가 잡았다.” 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출신 이방인 드로비모를 데리고 이방인의 뜰을 거닐고 있었는데, 유대인들은 바울이 그를 데리고 성전에 들어갔다 나온 것으로 넘겨 집고 오해했던 것입니다.
당시 성전 법은 이방인과 유대인의 구별을 엄격히 하고 있었습니다. 이방인이 이방인의 뜰을 지나 성전으로 들어가거나 이들의 출입을 도와주는 유대인들은 돌에 맞아 죽거나 사형에 처해지는 것이 당시의 법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법을 잘 알고 있었고 그런 실수를 범할 리 없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사건으로 바울은 가이사랴 감옥에서 2년 동안이나 같혀 있어야 했고, 다시 로마의 감옥에서 2년의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성경 어디에도 이 사건을 후회했다는 흔적은 없습니다. 사실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다만 구원의 복음에 대한 감격과 생명의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높이기 원했습니다. 그리고 한 영혼 한 영혼을 참으로 사랑하였기에 생명을 걸고 복음을 전했고, 달려가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 생명의 복음의 영향력을 끼치는 그리스도인, 오직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영혼을 사랑하고 영혼을 구원하는 사명에 생명 거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으로 간구하고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