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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돌아본 ‘그때 그곳’] 동아시아 전란 중 태어난 ‘화신백화점’
원로 사진작가 김한용 씨가 1960년대 찍은 화신백화점과 종로2가 거리 풍경. 화신백화점 외벽에 내걸린 ‘미미크림’ 광고는 당시에도 화장품이 백화점의 주력상품이었음을 보여준다. 김한용사진연구소 제공
“지하 1층에는 식료품부와 식기부가 있다. 지하층으로부터 옥상까지 이르는 15인승 최신식 엘리베이터 3대와 2대의 에스컬레이터가 운행한다. 1층부터 6층까지 각층의 매장에는 상품이 종류별로 진열되고 통로 좌우에는 쇼윈도가 나란히 줄지어 상품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백화점의 안내문이다. 요즘 것이 아니고 77년 전의 것이다. “서울 한복판 종로 네거리에 우뚝 솟은 근대식 건물. 네온과 일루미네이션이 쉬지 않고 빛나는….” 화신백화점의 자기소개서였다. 불탄 옛 건물 자리에 더욱 크고 화려하게 새로 지어 올린 최신식 백화점이 근 3년 만에 완공되어 재개장에 들어간 1937년 가을이었다. 설명은 자랑스레 이어진다.
“서울 장안의 명소로 화신을 빼놓을 수 없듯이 화신의 명소로 5층의 대식당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6층에 자리 잡은 그랜드홀은 집회장으로 쓰고 영화도 상영하며, 옥상에는 상설 화랑과 미장원이 있고, 분수와 수목으로 조성된 옥상 정원이 시원한 전망대 구실을 한다. 옥상 꼭대기에 설치한 높이 25척의 불꽃 모양 일루미네이션은 장안 어디에서나 한눈에 볼 수 있으며 길이 65척의 전광뉴스판은 국내 초유이며 동양 최대….”
때는 바야흐로 중일전쟁 중이었다. 일찍이 개전 초기 여름에 북경과 천진이 함락된 이래 상해를 둘러싼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때 경성의 화신백화점은 화려한 낙성식을 갖고 영업 제2기를 맞이한 것이었다. 평안도에서 기반을 일구어 23세에 상경한 박흥식이 11년간의 서울 생활에서 고군분투 끝에 이뤄낸 결실이었다. 경성상계의 천재라 불린 그에게 상권 쟁탈은 곧 전쟁이었다.
이미 스무 살 무렵에 고향 땅에서 쌀 무역으로 부호의 반열에 오른 그는 3·1만세 다음 해부터 수요가 폭주하는 인쇄업으로 기민하게 전환해 사업의 기틀을 잡았고, 그 여세를 몰아 서울에 입성해 지물도매업을 벌여 신문사에 신문용지를 공급하는 수완을 보였다. 그 결실로 목조 2층 기와집 화신상회를 인수한 것이 1931년이었다. 그때 만주사변이 터졌다.
그로부터 시작된 일본의 중국 침략이 만주를 넘어 중국 전역으로 뻗어 가고 마침내 동남아와 태평양으로 번져나가는 동안 시대는 1940년대로 넘어갔고, 거기서도 박흥식과 화신백화점의 중흥 가도는 죽 이어졌다.
그렇게 새롭게 태어난 화신백화점과 중일전쟁이 개막 첫해를 넘기던 그 겨울, 상해에 이어 일본군에 점령된 남경에서 대학살이 벌어졌다. 그렇게 1938년의 봄이 찾아왔다.
4월 24일이었다.
동경에서 일시 귀국한 영친왕 이은이 화신백화점을 방문했다. 부부동반으로 오전 9시에 종각 맞은편 화신백화점 현관을 들어선 육군대좌 이왕(李王)은 박흥식 사장의 안내로 귀빈실에서 현황보고를 받았다. 그리고 매장을 일일이 돌아보고 상품 여러 점을 구매하며 1시간을 머물다 돌아갔다. 만약 마케팅을 위한 이벤트였다면 빅 이벤트라 할 만했다.
처음부터 ‘유일한 조선인 백화점’을 표방하고 출범했던 화신백화점은 민족에 호소하지 않고는 생존할 수 없는 유통업체였다. 기라성같이 버티고 있는 일본백화점들에 비교조차 되지 않는 초라한 매출로 출발했지만 급속히 그들을 따라잡는 중이었다. ‘민족 백화점’ 화신을 떠받드는 지주는 조선인 소비자들이었고 이들이 구매하는 상품의 주종은 외래품이었다. 소비는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미덕이었다. 박흥식이 화신상회를 합병해 화신상회를 탄생시킨 것처럼 화신백화점은 병합조선의 일부분 이상은 아니었다.
“브라질 커피 알갱이 파는데 가서 드르륵 갈아오고…지하층 전체가 식료품 매장이었다. 일본식 고로케를 비롯해 고기 다져서 동글동글하게 하나씩 먹게끔 만든 민찌보루, 고기만두를 잘 빚어 통에다 열 개씩 놓아 쪄내는 슈마이, 거기에 곰보빵…4층에 가면 고급식당이 있고, 시노다 돈부리, 오야코 돈부리가 나온다.”
이즈음의 화신백화점의 광경이 어떠했는가는, 예를 들어 ‘민족과 욕망의 랜드마크’(염복규·2011년 12월) 같은 잘 짜인 논문 몇 쪽만 훑어보아도 대강의 파악이 가능하다.
화신에 밥 먹으러 가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지만 누구도 뿌리치기 힘든 선망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쇼핑장의 구경은 돈 없이도 가능했다.
“사야 할 물건이 없어도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를 타 보려고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어른보다 아이들이 많았다. 몰려다니면서 진열장에 손을 대고 이것저것 만지고 흩트려 놓는다. 에스컬레이터는 곤두박질칠 것 같아 타기를 꺼렸고 승강기는 배 멀미하듯 어지러워하는 이가 많았다. 6층 지붕 위 옥상에서 내려다보면 현기증이 왔다. 신기했다. 밖에 나와서 건물을 올려다보면 또 어지러웠다. 까맣게 높다고들 했다. 6층 꼭대기의 전광판이라는 것이 또 신기했다. 촘촘히 꽂힌 전구에 불이 켜지고 꺼지고 하면 마치 글자가 나타나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행인들이 걸어가며 그를 쳐다보았다. 정문 현관 위 이삼 층에 걸쳐 화신의 브랜드인 꽃모양 마크가 네온으로 빨갛게 빛났다.” (아동문학가 어효선의 체험담).
동아시아 대전란의 한가운데에 태어난 화신백화점은 그 모양 그대로 50년을 더 이어갔다. 그 반 백 년 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고 화신과 박흥식은 그를 목격하며 거기 죽 있었다. 거기서 해방을 맞이하고, 졸지에 민족반역자 1호로 몰려 민족의 심판대에 오르고, 결국 무죄 석방되고, 민족의 전쟁을 겪고, 이런저런 독재를 경험한 뒤에, 독재가 거의 사라지고 민주주의라는 햇살이 비추기 시작하는 1988년에 화신은 철거되었다.
여기까지는 기록이 전하는 바다. 말하자면 내 스스로 보고 듣고 겪어서 아는 것이 아니라, 기록이 대신 전해주는 것을 사실이라는 전제하에 조각 맞추기처럼 정리해본 그림이라 하겠다.
기록이 반드시 정확한 것만은 아니라고 한다면 기억 역시 그러하지 싶다. 1988이라는 연도를 대하고 보니 그런 생각이 더욱 든다. 1930년대의 화신백화점이야 목격할 수 없었지만 1980년대의 화신백화점은 자주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기억은 희미할 뿐이어서 목격했노라 말하기가 멋쩍을 정도다. 거기서의 어떤 특별한 경험이 없이 다만 스쳐 지나기만 해서 그런가 싶기도 하다. 편리한 인터넷의 기능으로 지금 과거 신문의 기사를 쉽게 들추어보니 ‘1988 화신’에 관해 두 가지를 금방 알게 된다.
철거된 화신백화점 땅에 임시주차장을 조성해 서울올림픽 기간 중 활용한다는 소식, 그리고 공평재개발지구라는 이름의 그 기한부 폐허에는 길 건너 영풍재개발지구와 더불어 올림픽 휘장을 수놓은 꽃동산 띠를 둘렀다는 기사이다. 아울러 충무로 1가의 제일은행 본점 건물을 도심재개발로 철거하려는 움직임은 철회되어야 옳다는 문제제기도 보인다. 옛 본정 1정목의 미쓰코시백화점 곁에 붙어선 그 건물은 옛 조선저축은행으로서 유서 깊은 곳이니 화신백화점의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된다는 조언이었다.
무엇이 철거되고 무엇은 철거되지 않는다는 기준은 예나 지금이나 그리 분명해 보이지 않는다. 분명하지 못한 것은 내 기억도 마찬가지다. 나는 그 시절 화신 앞을 무수히 지나다녔건만 그 철거와 관련된 기억이 없다.
더구나 나는 88년도 이전 화신백화점이 존속하고 있었을 80년대 중반의 상당 기간을 종각네거리를 지나치는 여느 사람들처럼 화신을 시야에 넣고 다녔다. 그런데도 망막을 거쳤을 그 영상들이 기억의 필름에 저장되어있지 않은 것이다. 과연 내 눈으로 직접 목격한 현상이 기록을 통해 전해 듣는 사실보다 더 신뢰할 만한 것이라 고집할 수 있을까.
화신백화점을 숱하게 보았는데도 못 본 것처럼 느껴진다고 했는데, 정반대의 기억도 있다는 말을 지금부터 해야겠다. 신기하게도 그 기억은 80년대보다 더 멀리 있는 70년대의 일에 관련된 것이다.
나는 그때 고등학생이었고 버스를 45분가량 타고 서울의 동남부 지역에서 서북쪽 지역 간을 횡단하는 통학을 조석으로 주 6회씩 왕복하고 있었다.
한참을 달려 사대문 안으로 진입한 버스는 청계천 복개도로 위로 청계고가도로를 이고 달리다 3·1빌딩에서 우회전하여 종로로 건너간다. 겨우 서울의 냄새로 접어드는 기분이다. 저기 낙원상가의 4층 이마팍에 멀리서도 보일만치 큼지막이 나붙은 할리우드 영화간판을 바라보며 종로2가와 3가 사이 네거리에서 좌회전하여 종로 2가로 진입한다.
즐비한 건물들 속에 우로 YMCA 좌로 종로서적이 가장 먼저 눈에 띄곤 했다. 그리고 이내 종각 네거리에 근접하는 순간 우측에 초대형 건물이 있었으니, 바로 화신백화점이었다. 그 우람하며 듬직하며 멋들어진 그 건물 속으로 들어가 무얼 사볼 일은 없지만, 그래도 그 건물은 지나치는 것만으로도 어쩐지 후광을 비춰주는 무엇처럼 여겨졌다.
단 한번 거기 화신 정문 말고 오른 편 작은 입구로인가 해서 들어가면 교복 파는 상점이 있었던 것 같은데 거기서 교복을 구경했던 기억이 흐릿하게 있다. 3년간 입을 교복은 입학 때 딱 한번 큼지막한 것으로 사는 것이었고, 내가 졸업할 때까지도 헐거웠을 정도로 처음부터 큼지막했던 그 교복은 재래시장 안에서 어머니와 함께 오랜 흥정 끝에 구입했던 일을 기억하므로 화신 건물 안에서 샀던 것은 아닌 게 분명하다. 나는 왜 거기 화신에 들어갔던 것일까.
그때 정황은 정확히 떠오르지 않으나, 다만 당시 매우 유행하던 선경 학생복이 걸린 상점을 무심코 바라본 일은 있었던 것 같다. 남녀 학생이, 진짜 서울학생같은 청소년 남녀가, 선경 (지금은 SK지만) 마크 선명한 교복을, 교복이라기보다는 신사 숙녀복처럼 보인 의상을, 배우들처럼 입고 나온 그 광고가 아직 잔상이 남아있다.
그리고 장학퀴즈의 주관사였는지 텔레비전 흑백 화면 속에 차인태 아나운서의 서울스러운 마스크의 후광 아래 영롱한 남녀 학생들이 자웅을 겨루던 퀴즈대회와 그 교복상표의 광고가 오버랩 되어 어른거린다. 나는 서울학생이 되고 싶었나 보다. 서울에 편입되어와 몇 년째 살고 있으면서도 마치 병합된 조선의 사람들이 일본스러운 그 모던한 풍물에 속하고 싶었던 것처럼.
아, 그리고 그 노래…CM송이라고 하는…이겼다 또 이겼다, 승리의 스마트―다…!
스마트! 상표 이름은 스마트 학생복이었다. 스마트하게 되는 것이 아마도 70년대 청소년들의 내밀한 욕망이었나 보다. 그들의 모습은 지금 자녀 세대의 눈에는 별로 스마트하게 보이지 않을지 모르지만, 스마트폰은커녕 삐삐조차 상상할 수 없던 날들에 스마트한 꿈을 키웠던 그들은 삐삐와 인터넷과 핸드폰과 스마트폰을 차례로 만들어내는 세대가 되었다. 우리는 미래에 대해 아는 게 있는가. 그렇다면 과거에 대해서는.
화신백화점을 말하는 마당에, 사라짐이 안타깝다고 해야 그럴듯하겠지만 지금도 사라지는 것 투성이라 뭐라 할 말이 없다. 특히 광화문 네거리 비각에서부터 종로 네거리의 화신이 있던 자리 사이 약 5백미터 구간, 즉 종로 1가 주변 청진동은 도심재개발의 동시 진행으로 먼지의 거리로 화한지 오래다.
미세먼지를 무색하게 하는 건축분진으로 한국의 정중앙은 장기간 뒤덮였고 그나마 박제처럼 붙박여 남아있던 몇몇 유물은 이번 기회에 완전 소멸했다. 땅바닥 몇 미터인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숙이 파고들어 가 뒤엎으면서부터 시작하는 현대적 공법으로 인하여 지층의 흔적까지 송두리째 파헤쳐져 과거는 물리적으로도 완전 사멸했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토탈 리콜!
욕망 앞에 건축물은 난파선처럼 폐기된다. 그 자리에는 별로 나아 보일 것도 없어 보이는 거죽 번지르르한 대체물들이 낯을 들이민다. 건물은 사람의 생명보다는 긴 것이 보통인 줄 알았는데, 요즘은 그 반대가 보통인 세상이 되었나 보다.
박흥식은 80년 전에 시대인의 욕망을 대변해 화신을 축성했고 그를 사실 잘 모르는 오늘의 우리는 물신(物神)의 화신(化身)이 되어 화신(和信)의 옛터 주위에 배회한다. 그 아름다운 이름의 화신을 대체하여 21세기형 아바타로 들어선 새로운 형태의 건축물들이 뜻 모를 이름표를 저마다 높이 달고 구름 위 신전처럼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고, 오늘 우리는 봄바람 속 먼지 너머 그를 까마득히 올려다보며 그에 경배한다.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혹은 그들의 어머니 아버지가 그 자리에서 그랬던 것처럼.
박윤석 / 작가 <경성 모던타임스> 저자
1940년 서울의 모습
'종로타워'에 얽힌 사연
첫댓글 예전 종로에 화신 백화점 꽤나
유명햇었지요
건너에 신신 백화점도 있었구요
그당시에 화신백화점 기억은
중학교 들어갈때 제일모직
골덴텍스 원단으로 교복을
맞추러간것이 기억에 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