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역 폭발사고
(裡里驛 爆發事故)
Iri Station Explosion
발생일:
1977년 11월 11일
사고일로부터+16576일
발생 위치:
이리시 이리역(現 익산시 익산역)
유형: 폭발
원인: 열차 화재
인명피해:
사망: 59명
부상: 1,343명
1. 개요
폭발 사고 이전의 이리역
이리역 폭발 사고 혹은 폭발 사건.
1977년 11월 11일 21시 15분
전라북도 이리시(현 익산시)
이리역(현 익산역)에서 발생한
대형 열차폭발 사고.
59명이 사망하고
1,343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이재민 1,647세대
7,800여 명이 발생하였다.
2. 사건의 경위
당시 광주역으로 가던
한국화약의 화물 열차가
정식 책임자도 없이
다이너마이트와
전기 뇌관 등
고성능 폭발물 40톤을 싣고
이리역에서 정차하던 중
폭발 사고를 냈다.
수사 당국의 발표에 따르면
호송원 신 모씨가 어둠을 밝히기 위해 밤에 열차 안에 켜놓은 촛불이 다이너마이트 상자에 옮겨 붙은 것이 원인이었다. 이게 큰 사고로 발전하기까지 과정을 살펴보면 두말할 나위 없는 인재(人災)였다.
원래 이런 사고를 막기 위해 폭약과 뇌관은 함께 운송할 수 없으나 이 원칙이 무시되었다.
철도역 화차 배정 직원들이 기관사를 비롯한 같은 철도 직원들에게 '급행료'라는 명목으로 뇌물을 받고자 화물열차를 역 구내에 40시간 동안 강제로 대기시켰다. 당시 철도법 제61조상 화약류 등 위험물은 역 내에 대기시키지 않고 바로 통과시켜야 하며, 지금도 위험물 운송차량은 대통령 전용열차 다음으로 우선순위가 높다.
이렇게 대기시간이 기약 없이 길어지자 화가 난 호송원이 술을 마시고 열차 화물칸에 들어갔다. 화약을 실은 화차 내부에는 호송원조차 탑승할 수 없고, 호송원은 총포 화약류 취급 면허가 있어야 하며 흡연자, 과다 음주자를 쓸 수 없는데 이런 규칙 역시 모두 무시되었다.
호송원 신 씨는 화차 내에 화기를 들일 수 없는 규칙을 무시하고 그 안에서 촛불을 켜고 잠이 들었다.
불이 옮겨붙은 상황에 잠에서 깨어난 호송원이 침낭으로 불을 꺼 보려 했으나, 불은 오히려 더 크게 번졌다. 위험물을 운반하는 열차에 소화기처럼 유사시 사용할 제대로 된 소화기구가 없었다.
화약 열차에 불이 붙었음을 알고 철도 요원들은 모두 도망쳐 버렸고, 검수원 7명이 불을 끄기 위해 화차로 달려가 모래와 물을 끼얹었으나 폭발을 막지 못했다.
3. 사건의 여파
결국 열차 내 불이 붙어 다이너마이트 등의 폭탄 등이 연쇄적으로 터져 대폭발이 일어났다.
폭발사고로 이리역에는 지름 40 m, 깊이 15 m에 이르는 거대한 구덩이가 파였고, 반경 500 m 이내 건물이 대부분 파괴되었다. 기관차 본체는 폭심지로부터 700 m 떨어진 민가까지 날아가버렸고, 일부 파편은 직선거리가 7 km나 되는 춘포면까지 날아갔다고 한다.
역 주변은 큼지막한 건물조차 형체만 남아있는 정도로 대파되었다. 역에서 근무하던 철도 공무원 16명을 포함하여 59명이 사망하였고 1343명이 중상 및 경상을 입었으며 이재민 1647세대 7800여 명이 발생하였다. 이는 그때까지 발생한 폭발사고 중 피해규모로는 최대였다. 사건 전 이리역 주변은 철인동으로 불렸는데 판자촌과 홍등가가 난립해 있었다. 이리에서 오래 거주한 사람들에게 철인동을 물어보면 혀를 내둘렀을 정도이다. 하지만 폭발이 사람도 건물도 모조리 휩쓸어버려 역 주변이 이전과 비교가 안 될 만큼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중요 시설물들도 당연히 피해를 많이 입었다. 이리역 역사(驛舍)를 비롯하여 구내의 객화차 사무소, 보선 사무소 및 구내에 정차 중이던 기관차/객화차 등 117량이 파괴되었고, 선로 1650 m가 파손되었으며, 주택 675채가 완파, 1288채가 반파되었다. 한편 당시 이리시 창인동에 있던 익산군청이 폭발의 진동으로 건물 전체에 균열이 가는 피해를 입었는데, 1979년 익산군청이 함열로 신축 이전하는 계기가 되었다.[1] 철도 바로 옆에 있었던 남성여중과 남성여고가 폭발사고의 직격탄을 맞아 교사가 파괴되었고[2] 본래 이리고등학교 앞에 있던 남성고등학교의 건물 일부가 붕괴되어 1979년 현재의 소라산 자리로 옮기고, 남겨진 자리에 남성여중과 남성여고가 임시 입주하여 소라산 신교사가 완공되는 1985년 4월까지 임시 교사로 활용되다가 이후 철거되고 그 자리에 남성맨션이 들어섰다.[3] 폭발지점으로부터 반경 4 km 이내 건물들의 유리창이 깨지고 주변 1 km 이내로 부서진 철도 레일 및 객화차의 파편이 날아들었다. 또한 이리시와 인접한 익산군 오산면, 황등면, 삼기면 및 김제군 백구면 등에서도 창문이 덜컹거릴 정도의 진동이 느껴졌고, 20여 km 거리인 군산 및 백 리(40 km) 밖 논산군에서도 폭발음이 들렸다고 한다.
불행 중 다행도 있었다. 사고 당일 승객 600여 명이 탄 여객열차[4]가 김제 부용역에 정차 중이었는데, 이 열차가 제 시간대로 운행되었다면 사고시각에 이리역으로 들어왔어야 했다. 그런데 기관사가 폐색 구간 진입시 통표를 분실하는 바람에[5] 폐색 구간 통과를 할 수가 없어 부용역에 계속 정차했다. 사고 발생 약 5분 후, 통표 회수 누락을 무전으로 보고하던 중 "이리역에 화재 발생, 들어오지 말라." 하는 답변을 받았다. 운행이 늦어진 탓에 기관사는 초조해져서 "화재 정도가 심하지 않으면 진입해도 되지 않느냐." 하고 문의했지만, 이리역 역무원은 "상황이 심각하니 무조건 대기하라." 답하였다. 그러나 해당 여객열차는 오지 말라는 무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출발하였다. 한편 이리역 역무원 송석준은 폭발 때문에 기절했다가 간신히 의식을 되찾은 후 해당 열차가 들어온다는 사실을 깨닫고 철로를 따라 1 km를 달려가 이리역으로 진입하려던 열차를 향해 윗옷을 펄럭이며 정지 신호를 보내어 가까스로 열차를 세웠다고 한다. 이 일 때문에 송석준 역무원은 2013년 코레일 철도안전 명예의 전당에 등재되었다.
또한 사고 당시 이리역 구내에 석유를 가득 실은 유조열차가 정차 중이었는데, 마침 이리역 인근에 살던 기관사가 화재가 일어났다는 연락을 받고 부랴부랴 달려나와 열차를 대전역 방면[6]으로 몰고 가 인근의 황등역으로 신속히 대피시켰다. 만일 열차가 구내에 계속 남아 있었다면 그 유조열차마저 폭발하면서 역 일대가 완전히 불바다가 되었을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이리역(현 익산역)은 호남선, 전라선, 군산선을 연결하는 집결지였기 때문에 가장 먼저 선로 복구에 나서서 사고 다음날인 11월 12일 열차 통행을 재개하였다. 이후 11월 20일에 모든 철로와 입환선의 복구를 완료했다.
대규모 폭발이 예고도 없이 순식간에 일어난 데다, 예나 지금이나 이리역은 호남선, 전라선, 군산선을 연결하는 요충지였기에 이리 지역 사람들은 북한군의 공습인 줄 알고 서울에 사는 친지들의 안부를 걱정했다고 한다. 당시 이리에 주재하던 어느 기자는 서울 본사에 연락을 넣어 "이리는 쑥밭이다! 서울은 무사하냐?"라고 외쳤고, 이리 주민들도 다른 지역에 사는 친척들에게 전화해서 "거기도 폭격 맞고 있느냐?" 하고 묻는 사람이 속출했다.
4. 사고 이후
사고가 발생하자 당시 한국화약그룹의 현암 김종희 회장[7]은 즉각 대국민 사과를 하였고, 그 당시 자신의 모든 재산인 약 90억 원[8]을 모두 피해자와 이재민들을 위해 사용하였다. 그리고 당시 한국화약그룹의 모든 직원들을 피해자들을 위해 헌혈시켰으며, 이리역에 직접 파견을 나가게 했다고 한다. 또한 한국화약그룹의 모든 직원들에게 회사에서 지급된 보너스를 다시 반납시켰고, 직원들의 11월 급여 중 2%를 재해 기금으로 각출하였다.
사고 때문에 이리역은 1년 뒤인 1978년 11월, 당시의 위치에서 떨어진 곳에 신설되었다. 후에 이리시와 익산군이 통합하여 익산시가 출범하자 역 이름도 익산역으로 바뀌었는데[9], 이리시가 익산시로 바뀌게 된 이유가 이리하면 이리역 폭발사고가 연상되기 때문이라 카더라. 사실 1995년 2차 시, 군 통합 당시 통합에 부정적인 분위기가 우세했던 군 지역의 여론을 달래기 위한 측면이 강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보면 익산군은 익산이란 명칭을 이리에 뺏긴 셈이 되어 버렸다. '익산'이라는 명칭이 붙었던 여러 기관들이 그 이름을 이리에 있는 동종 기관에 넘겨주고 새 이름을 써야 하기도 했고,[10] 이리시와 익산군은 1994년 1차 시군 통합 당시 익산군 지역의 반대 여론이 과반이었기에 무산된 적이 있다.
폭발 사고의 당사자인 호송원 신 모씨는 사고 직후 도망쳤다가 검거되어 이듬해 2월 법원은 부작위에 의한 폭발물파열죄(개정형법에 따르면 부작위에 의한 폭발물사용죄)를 인정해 징역 10년 형을 선고 받았고[11] 1987년 만기 출소하였다. 시민들은 신 씨로 말미암아 많은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재판장에게 선처를 호소하고 이후 복역 중인 신 씨를 면회하는 등 의외로 우호적인 모습을 보였다.[12]
이리역 폭발 사고로 집을 잃은 이재민들을 수용하기 위하여 이듬해(1978)에 이리시 최초의 주공아파트인 모현주공아파트를, 또 이듬해(1979)에 창인주공아파트를 건설했다. 이중 모현주공1단지는 재개발 공사로 철거되었고 그 자리에는 대림산업에서 익산 e-편한세상 아파트가 들어섰다. 창인주공아파트도 재개발 승인이 난 상태.
이리역 앞 삼남극장.
한편 폭발 사고가 일어났을 당시 가수 하춘화가 이리역 앞 삼남극장에서 공연 중이었는데, 공연을 시작한 지 약 15분 만에 폭발사고가 일어났다. 폭발 사고가 일어난 직후 극장 지붕이 무너져 내리고 정전이 되어 사방이 암흑 천지였는데, 이때 같이 있던 코미디언 이주일이 본인도 피를 흘리면서 하춘화를 업고 뛰어 가까스로 사고 현장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당시 이리 시내에는 종합병원 규모의 의료 기관이 없었던지라[13] 이들은 군산으로 이동하여 도립 의료원에서 응급치료를 받고 나서는 서울로 올라왔는데, 이때 외부와 연락이 두절된 관계로 언론에서는 한바탕 하춘화가 실종되었다는 속보를 내보냈고, 이 때문에 한때 하춘화의 생사 여부가 국민적 관심사로 떠올랐던 적이 있었다.
사고 다음날 현장에 내려온 박정희 대통령도 하춘화의 생사 여부와 관련된 보고를 수시로 받았다고 한다. 하춘화의 당시 인기는 요즘의 어지간한 톱가수들 이상인 '국민 가수'급이었다. 하춘화는 6살 때 데뷔했는데 그때부터 스타였고, 이 시점에는 이미 데뷔 16주년이었다. 하춘화의 생존이 언론을 통해 공식 확인된 것은 사고 다음날(12일) 저녁 때였다. 한편 상경한 이후 한양대 병원에서의 정밀진단 결과 하춘화는 다행히 큰 부상이 아니었지만 오히려 이주일이 두개골이 함몰되는 중상으로 4개월 이상 치료를 받아야 했다. 이후 이주일은 '하춘화를 구한 남자'로 유명해져서[14] 1980년대 들어서 전성기를 맞았다.
사고 당시 한국과 이란의 아르헨티나 월드컵 아시아 예선전[15]이 TV를 통해 방송되고 있었고, 폭발이 일어난 후 이 경기를 중계하던 KBS에서는 자막으로 이리역 폭발 사고를 속보로 알렸다. 해당영상 그리고 한국 vs 이란전 덕분에 목숨을 건진 학생도 있었는데, 사고 직전 자기 방에서 공부를 하던 중 그 학생의 아버지가 축구 중계를 보고 공부하라며 권유하여 안방으로 건너가 TV를 보던 중 폭발이 일어났고, 굉음과 함께 학생의 방 쪽에서 진동이 느껴져 달려나와 보니 이리역에서 날아온 집채만 한 기차 화통이 학생의 방을 덮쳤다고 한다. 만약 그 학생이 계속 공부를 하고 있었다면 그 자리에서 즉사했을 것이다. 그 학생 입장에서는 천년감수를 한 셈이다.
사망자 중 역무원이었던 한인석 씨는 부친 역시도 철도공무원이었고 광주역에서 무단횡단하던 어린이를 구하려다 순직한 바 있다. 이후 정부는 유가족에게 재건된 역의 매점운영권을 주었다.
이 사고로 최경록 교통부장관이 경질되고, 후임에는 민병권이 임명되었다.
씁쓸한 후일담이지만, 사고 이후에 이리역 주변 아이들 사이에서 '보물찾기'가 유행했다고 한다. 폐허가 된 집 근처에서 목걸이나 반지 같은 패물을 주워 횡재한 아이들이 나오면서 아이들이 너도나도 보물을 찾겠다고 폐허를 뒤적거렸는데, 보물뿐만 아니라 인체의 조각도 발견되었다고 한다. 훗날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에서도 재현된 풍경이다.
대재해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위험이 진정되자, 동네 어르신들이 진두지휘하고 청년들이 군말 없이 따르며 각 가정에서 경황 없는 사람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등, 혼란이 빠르게 수습되었다.
임시 대피소 건설을 위해 군은 물론이고, 인근 공업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징발하여 전기 공사 등을 시켰다고 한다.
이 사건 이후로 익산역에는 이 사고의 희생자 추모비가 섰다.
2017년 11월 11일 이리역 폭발 당시 군의관으로서 현장에 달려간 윤장현(전 광주광역시장)이 '이리역 폭발사고 40주년 추모행사'에서 익산 명예시민증을 받았다. # 당시 윤장현은 다급한 마음에 파견 명령도 받지 않은 채 인원과 장비를 챙겨서 독단적으로 이리시에 가서 의료 활동을 하였다. 법적으로는 탈영이지만, 서종철 국방부장관이 훌륭한 초동 출동이라며 크게 칭찬하고 격려를 받아서 넘어갈 수 있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