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가 325장 (구 359장) / 사도행전 24 : 10 - 21
*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하겠습니다.
* 찬송가 325장을 함께 부르겠습니다.
* 하나님 말씀은 사도행전 24장 10절 – 21절입니다.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10. 총독이 바울에게 머리로 표시하여 말하라 하니,
그가 대답하되 당신이 여러 해 전부터 이 민족의 재판장 된 것을 내가 알고,
내 사건에 대하여 기꺼이 변명하나이다.
11. 당신이 아실 수 있는 바와 같이,
내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올라간 지 열이틀밖에 안 되었고,
12. 그들은 내가 성전에서 누구와 변론하는 것이나,
회당 또는 시중에서 무리를 소동하게 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니,
13. 이제 나를 고발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그들이 능히 당신 앞에 내세울 것이 없나이다.
14. 그러나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리이다 나는 그들이 이단이라 하는 도를 따라,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15. 그들이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니이다.
16. 이것으로 말미암아 나도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나이다.
17. 여러 해 만에 내가 내 민족을 구제할 것과 제물을 가지고 와서,
18. 드리는 중에 내가 결례를 행하였고 모임도 없고 소동도 없이 성전에 있는 것을,
그들이 보았나이다 그러나 아시아로부터 온 어떤 유대인들이 있었으니,
19. 그들이 만일 나를 반대할 사건이 있으면 마땅히 당신 앞에 와서 고발하였을 것이요.
20. 그렇지 않으면 이 사람들이 내가 공회 앞에 섰을 때에,
무슨 옳지 않은 것을 보았는가 말하라 하소서,
21. 오직 내가 그들 가운데 서서 외치기를 내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오늘 너희 앞에 심문을 받는다고 한 이 한 소리만 있을 따름이니이다 하니,
각 종교마다 특징이 있습니다. 불교는 5계, 즉 다섯 가지 계율이 있습니다. 살생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음행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술을 마시지 말라는 오계를 중심으로 한, 자비의종교입니다. 유교는 사서삼경을 중심으로 인의예지 - 어질고, 의롭고, 예의바르고, 지혜로운 사람을 강조하는 예의의 종교입니다. 이슬람교는 알라에 대한 믿음만을 강조하는 전투적인 종교입니다. 이들은 크게 두 종파가 있는데 첫째는 수니파, 흔히 정통파라고 하는데 90%가 여기에 속합니다. 다른 하나는 시아파로 10%가 여기에 속하는데 더 전투적인 사람들입니다. 끝으로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믿음의 종교입니다. 믿음의 종교이기 때문에 때로는 도덕적 행위 자체를 무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2장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비판했습니다. 그러므로 참 믿음은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참 믿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변화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적어도 5가지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또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첫째는 생각의 변화, 둘째는 삶의 방향의 변화, 셋째는 인격의 변화, 넷째는 행동의 변화, 다섯째는 습관의 변화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잘못된 변화만 일어나고 있습니다. 첫째 말을 더 잘 합니다. 둘째는 말만 더 많아집니다. 셋째로 불평과 원망의 노래를 더 잘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다 잘못된 변화입니다.
그러면 바울의 신앙은 어떤 신앙입니까? 바울은 철두철미한 그리스도 중심의 신앙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인들의 신앙을 보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1) 첫째로 물질주의 중심이고, 2) 둘째는 개인주의 중심이고, 3) 셋째는 이 세상중심이고. 4) 쾌락주의 중심인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철두철미한 그리스도 중심의 신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참 변화가 일어나는 그리스도 중심의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신앙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1) 자기의 왕국을 세우려고 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왕국을 세우려고 힘씁니다. 2) 오직 예수 중심의 신앙은 삶의 목적을 그리스도의 영광에 둡니다. 자기의 체면, 자기의 이익, 자기의 인정에 두지 않습니다. 3) 보는 초점과 가치관을 그리스도에게 둡니다. 우리의 눈은 밖에 있기 때문에 밖에 있는 것만 보이고, 그것도 앞에 있는 것만 보입니다. 그러나 오직 예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보는 초점과 가치관을 바울이 고백한대로 “사는 것도 그리스도요 죽는 것도 그리스도” 라는 관점에서 보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성숙한 신앙생활입니다.
다음으로 사도 바울의 신앙은 부활신앙입니다. / 오늘 본문 15절 말씀을 봉독하겠습니다. “그들이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니이다.” 아멘! - 기독교의 신앙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창조신앙, 즉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서 창조했다, 나도 하나님의 창조물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것이다.” 라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둘째는 십자가 신앙입니다. 십자가는 모든 것의 핵심이요. 열쇠입니다. 인류의 모든 문제도 십자가로 말미암아 해결되었습니다. 죄의 문제도 십자가로 말미암아 해결되었고, 죽음의 문제도 십자가로 말미암아 해결되었고, 의미의 문제도 십자가로 말미암아 해결되었습니다. 따라서 모든 소망도 십자가로 말미암아 옵니다. 세 번째 신앙은 부활신앙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건은 부활을 통해서 완성되었습니다.
이 부활신앙의 첫 번째 특징은 역동적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명사형이 아니라 동사형입니다.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움직이는 역동적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신앙이 있는 사람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물론 사회에서도 활동적입니다. 아무리 여성적 성격이라도 섬기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됩니다. 부활신앙의 두 번째 특징은 소망 찬 삶을 삽니다. - 부활이란 동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소망이 있기 때문에 입에는 찬송이 있고, 기도가 있습니다. 현재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알기 때문에 기쁨이 있고,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는 감사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입니다. 따라서 불평하는 불신앙적 관습을 버려야 합니다.
부활신앙의 세 번째 특징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이 죽음이 두렵기 때문에 때로는 비겁하게라도 살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그 죽음이 천국에 들어가는 현관문인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용기가 납니다. 부활신앙의 네 번째 특징은 미래지향적 삶입니다. - 노인들은 보면 과거 지향적입니다. 모이면 하는 말이 다 옛날에 내가 돈도 많이 벌고, 얼마나 유명했고 하면서 과거를 중심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젊은이들은 미래지향적입니다. 과거에 젖 먹던 것 외에 무엇을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자연히 미래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젊게 살려면 항상 미래지향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부활신앙을 가진 자의 특징입니다.
바울의 신앙은 그리스도 중심의 신앙, 부활의 신앙임과 동시에 양심에 꺼림이 없는 신앙이었습니다. / 오늘 본문 16절 말씀을 봉독하겠습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나도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나이다.” 아멘! - 그러나 오늘날의 교인들의 신앙을 보면 그렇지 못합니다. 그러면 오늘날의 교인들의 신앙은 어떤 신앙입니까? 1) 위선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남에 대해서는 많이 비판하지만 자신의 잘못은 관대합니다. 2) 인본주의적입니다. 교회에서도 계속 칭찬을 기대합니다. 아니 이 세상에서 다 칭찬하고, 상을 받으면 천국 가서는 받을 것이 없을 것이 아닙니까?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고, 사람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 인본주의 신앙에서 우리는 신본주의로 돌아가야 합니다. 3) 많은 교인들이 신앙과 생활이 분리되어 있습니다. 생각은 불교식이고, 생활은 유교식이고, 믿기는 무당식이고, 가기는 교회에 가고. 그래서 신앙과 생활이 분리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좋게 말하면 아직 뿌리가 없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다중인격입니다. 변화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양심에 꺼림이 없는 생활을 했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말한바 양심은 무엇입니까? 톨스토이는 “양심은 하나님의 음성이다.” 라고 했습니다. 지금 가만히 보면 두 가지의 양심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본래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양심이고, 다른 하나는 범죄 한 양심입니다. 즉 범죄 한 다음에 변질된 양심이 있습니다. 그 양심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양심을 가진 사람은 수시로 변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본래적 양심은 변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바로 이 양심을 따라 살았습니다.
그러면 오늘날의 양심은 어떤 양심입니까? 두 양(兩)자, 마음심(心)의 양심, 즉 두 가지 전혀 다른 마음을 가지고 삽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처럼 바른 신앙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오직 그리스도 중심의 신앙, 부활신앙, 양심에 거리낌 없는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우리들이 다 되시기를 원합니다. 그러려면 우리의 범죄한 양심이 본래적 양심으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본래적 양심을 회복해야 합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첫째로 중생할 때 본래적 양심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둘째는 영안이 밝아져야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영안은 항상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하는 심령에게만 주어집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라야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라기는 우리 모두 바울의 신앙을 본 받기를 원합니다. 그의 그리스도 중심의 신앙, 부활신앙, 무엇보다도 본래적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그런 삶을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으로 간구하고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