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돌아본 ‘그때 그곳’] 동대문 실내스케이트장
1972년 한 주간지에 실린 동대문 실내스케이트장 내 식당 광고(왼쪽). 1964년 1월 초 ‘동대문 실내스케이트장 개장’을 알리는 신문광고(가운데), 1964년 1월 25일자 신문에 실린 동대문 실내스케이트장 광고(오른쪽). 문화일보 자료사진
새벽잠을 설치며 소치의 빙판을 수놓는 김연아를 봤다. 첫 경기, 쇼트프로그램이었는데 역시나 아름답고 우아했다. 자꾸만 넘어지는 다른 나라 선수들은 스포츠맨의 투혼이 돋보였다. 그녀들은 열심히 ‘경기’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같은 무대에 오른 김연아는 달라 보였다. 작품을 한달까, 유희를 한달까, 춤을 춘다고나 할까. 연아는 경기를 넘어선 예술행위를 하고 있었다. 스테이트 오브 아트(state of art)라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무대였다.
어느 분야에서든 국제무대에 오른 우리 모습은 늘 안쓰러웠다. 축구의 본고장에서 활약하는 박지성이 대견하기는 했지만 그는 스타가 아니었다. 경기에 출장하는지가 우리들 고국 사람들의 주관심사였다. 야구의 류현진도, 또 누구도 많은 선수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 예술 분야는 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삼성과 현대의 사업 실적조차 국제무대라면 경기를 대하듯 애타게 응원하는 우리였다. 한번 이겨보고 싶다. 다른 나라를 앞서보고 싶다. 그러나 언제나 국제와 세계의 문턱은 높았다.
그러니 이런 경험은 처음이다. ‘김연아적’이라고 표현해야 할까. 압도적으로 우월한 존재로서 여유를 보이며 온 세계의 찬사를 한 몸에 받는 일. 온갖 악조건을 눈물의 투혼으로 이겨냈다는 식의 미담에 의존할 필요가 없는 일. 어쩌다 한번 잘한 기록으로 행운을 빌며 가슴 죌 필요 없이 모두가 우월한 자의 기분으로 여유롭게 무대를 즐길 수 있는 경험 말이다. 가만 있자. 우리들에게 스케이트란 무엇을 의미했지?
한국인에게 시간의 진행은 언제나 발전과 성장을 의미했다. 어제보다 오늘과 내일이 더 나아지고 많아지고 다양해지는 것을 의미했다. 그런데 거꾸로 가는 분야도 있는 모양이다. 스케이트가 그렇다. 어린 시절 우리들의 겨울은 스케이트 타는 계절을 의미했다. 스케이트장은 널려 있었다. 덕수궁, 창덕궁, 장충단 공원 등의 연못이란 연못은 죄다 아이스링크였고 도심 변두리의 논밭도 한겨울이면 화사한 스케이트장으로 변신했다. 공식처럼 남자애는 롱, 여자애는 빨간색, 흰색 피겨를 신고 경쾌하게 흐르는 팝송을 배경으로 얼음춤을 추다 넘어지고 깔깔거렸다.
오뎅(어묵)과 떡볶이와 핫도그는 빙판의 주식이었고 스케이트장 입구에는 날을 갈아주는 아저씨들이 길게 줄을 지어 쓱쓱싹싹 스케이트 날을 갈았다. ‘전승현’이라는 브랜드의 스케이트를 소유한 아이는 으쓱댔고 대여 스케이트를 신은 아이는 발이 맞지 않아 쩔쩔맸다. 그런 한겨울 풍경이 사라져 버렸다. 물론 스케이트를 탈 형편이 되지 못해서가 아니라 더 재미있는 놀거리가 많아졌기 때문일 것이다. 빙판 입장에서 보자면 참 거꾸로 흘러온 세월인 셈이다.
잠깐 옛 기사 검색을 해서 정황을 살펴보자. 지난 1968년 1월 18일자 대한일보에 ‘서울의 스케이트장 안내’ 기사가 있다. ‘겨울철 대표적인 스포츠로 온 가족이 함께 즐기는 스케이팅’이라는 리드에 이어 서울운동장, 효창운동장, 동대문 실내스케이트장, 경복궁, 한강 스케이트장 등의 개·폐장 시간, 입장료, 수용 인원 등이 자세히 소개된다.
20원부터 100원짜리까지, 통상 오전 8시에 개장해서 오후 6시까지 문을 열었다. 그 많은 링크들이 사람들로 꽉꽉 들어찼다는 건데, 옛날 한국 사람들은 물을 얼릴 공간만 있으면 죄다 스케이팅에 몰두했었나 보다. 그런데 그 스케이트장에 무얼 하러 갔지? 운동하러 간 건가? 정말 스케이팅은 청소년과 연인들의 운동 경기였던가?
천만의 말씀이다. 우리들의 스케이팅은 놀이였다. 특별히 잘 타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보였지만 아무도 그 실력에 눈길을 보내지 않았다. 빙판 위의 사람들은 누구나 어린애로 돌아가 잘 웃고 마구 장난치고 넘어지고 다쳐도 개의치 않았다. 아마 한국의 빙판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일 것 같은데, 스케이트장에 다녀본 경험이 있다면 누구나 기차놀이를 해봤을 것이다.
무리 지어 앞사람의 허리를 붙잡고 길게 행렬을 만들어 지치는 건데 남녀노소,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불문이었다. 누구라도 뒷줄에 남의 허리를 붙잡고 가담하면 되는 건데 그 흥겹고 너그러운 개방성이라니! 규모가 큰 링크에서는 이 골치 아픈 행렬을 끊어버리는 ‘알바’들까지 고용했다. 중간쯤에 툭 치고 들어와 허리를 자르는 ‘알바’가 침투하면 ‘와와’ 폭소로 뒤덮이는 야유가 쏟아지곤 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머리 좋은 사업가들이 가만 있을 리가 없다. 왜 이토록 즐거운 놀이를 꼭 겨울까지 기다려야 한단 말인가. 사시사철 스케이팅을 즐길 방법은 없을까. 그 발상이 실현된 때가 놀랍게도 까마득한 1964년이었다. 그해 1월 우리나라에서 첫 실내 아이스링크가 개장했다. 정식 명칭은 동대문 실내스케이트장.
통상 동대문이라고 부르는 창신동 문구류 도매상, 의류 제품집, 대형 원단집들 한가운데 웅장한 규모로 들어선 실내링크는 커다란 화제였다. 연중무휴로 오전 8시에서 오후 9시까지, 입장권 10원, 활주권 20원, 대화권 30원이라는 개장 안내 전단지가 남아있다. 입장권, 활주권은 알겠는데 대화권은 뭘까. 스케이트 타면서 대화를 나누면 따로 돈을 내야 한다는 뜻인가? 그건 아니고 대화권은 신발을 빌릴 수 있는 표다.
그 실내스케이트장의 위치가 나에게는 행운이었다. 창신동과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는 황학동 광희중학교(홍명보를 배출했으니 명문이로다!)를 다니는 바람에 그곳에서 체육 수업을 꽤 자주 했다. 열성파 체육과목 이기중 선생님은 말을 안 듣는 아이들에게 호통을 쳐가면서 기본자세며 넘어질 때 낙법의 요령 등을 상세히 가르쳤다.
한 번 배우면 평생 잊히지 않는 기능들이 있다. 자전거를 한번 배우면 평생 간다. 스케이팅이 그렇다. 처음 얼음 위에 서면 벌벌 떨지만 속도에 몸을 싣고 아랫도리에 균형 잡는 방법만 알면 달리기보다 훨씬 수월한 것이 스케이트 타기다. 초등학교 때부터 동네 스케이트장을 누볐던 나는 중학교 체육시간의 심화학습을 거쳐 스케이트를 꽤 잘 탄다. 그 실력을 사시사철 뽐낼 수 있는 곳이 바로 동대문 실내스케이트장이었다.
과거 남자애들이 여학생을 헌팅하는 3대 명소가 있다. 극장, 로라장, 스케이트장이 그곳이다. 모두 평소의 긴장과 억압이 풀리는 장소다. 로라장은 롤러스케이트장의 한국식 발음인데 껌 좀 씹는 여자애들이 설치는 좀 무섭고 불량한 놀이터로 기억된다.
반면에 사계절, 특히 여름철의 실내스케이트장 분위기는 좀 달랐다. 무언가 고급하달까. 불량기는커녕 옷차림에서 몸동작까지 최대한 멋스러움을 뽐내는 분위기가 실내를 감돌았다. 나처럼 제법 탄다고 자부하는 아이들에게 멋의 관건은 코너를 돌 때였다. 사실 프로 선수도 아니고 엄청난 속도를 내는 것도 아니니 공연한 허세였다. 코너를 돌 때 양손을 선수처럼 한 방향으로 크게 죽죽 뻗는 동작인데 그 필요없는 폼들은 필시 집에서 거울 보고 연습한 동작 같다. 실은 나도 그랬으니까.
“호호호 깔깔깔!”
망신도 개망신이다. 고교시절 어느 땐가 동대문 스케이트장에서 양손을 휘두르며 멋진 코너링을 반복하는 나를 향해 한 무리의 여학생들이 수군거리는 걸 눈치로 알았다. “쟤 잘 탄다”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나는 점점 더 속력을 올렸고 갈수록 더 손동작을 크게 키웠다. 그러나 예상했듯이 ‘콰당’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넘어져도 아주 제대로여서 주변의 여러 사람을 와르르 쓰러뜨리는 대형 민폐가 벌어진 것이다. 어찌해야겠는가. 나는 그날 거의 도둑처럼 도망치듯이 슬그머니 동대문을 빠져나와야 했다.
동대문 실내스케이트장은 부침의 역사를 기록했다. 개장 후 1년 만에 운영난으로 휴장을 하기도 했고 그곳을 지키자는 각계의 성원으로 폐장, 재개장을 반복했다. 여름철에는 롤러장으로 변형되기도 하고, 냉장고 보급이 덜 된 탓에 식용 얼음을 제조하는 공장으로 전용된 적도 있다. 가게에 가서 얼음을 사다 먹었다면 요즘 아이들은 꽤 신기해할 것이다. 그 많은 양을 한때 동대문 실내스케이트장이 공급했던 것이다.
링크가 재개장될 때마다 영업 활성화를 위해 얼음 위에선 화려한 공연이 펼쳐졌다. 지금 우리가 아는 아이스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빙상을 살리자는 취지로 구봉서, 박노식, 김희갑, 서영춘 같은 당대의 인기 희극인과 배우들이 대거 나서 쇼무대를 펼친 것이다. 옛날 자료 사진을 보면 록밴드 공연도 펼쳐지고 포크그룹 쉐그린의 정겨운 공연 사진도 남아있다. 아이스링크에서의 콘서트! 멋지고 로맨틱하지 않은가.
역사를 들춰보면 우리나라가 의외로 스케이트의 불모지가 아니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세상에 피겨스케이트가 처음 등장한 것이 1850년 유럽인데 우리에게 소개된 것이 불과 40년 후인 1890년 대한제국 시기였다. 경복궁 향원정에서 고종과 명성황후를 모시고 외국인들의 시범 경기가 펼쳐졌는데 그 신기한 운동놀이를 일컬어 ‘빙족희(氷足戱)’라고 했다(예스러움을 살려 스케이팅을 빙족희라고 다시 부르면 어떨까 싶다).
그후 스케이트 보급이 점차 이루어진 가운데 1920년대에는 빙상 선수권대회도 열리고 일본 유학생이 귀국하여 ‘피겨 스케이트 구락부’를 결성하기도 한다. 1923년 동아일보가 주최한 대동강 빙상대회에는 수많은 관중이 운집했다고 전한다.
이런 배경으로 점차 스케이팅은 온 국민의 겨울철 스포츠가 되었고 1964년 동대문 실내스케이트장 개장에 이어 1971년 태릉선수촌에 국제 규격의 빙상경기장이 건립되기에 이른다. 각종 사료와 기사들은 이런 과정을 놓고도 빙상 불모지 운운하는데 과거 우리나라 모든 영역의 전체적인 낙후성에 비해서는 오히려 앞서 나간 분야가 스케이팅이었다고 판단된다.
온 국민이 애호하던 겨울철 스케이트 열풍이 점차 시들해지면서 동대문 실내스케이트장은 1990년대 중반쯤 문을 닫았다. 그곳은 이제 원단집, 예식장, 찜질방이 결합된 복합 플라자 건물로 변신했다. 원단도 예식도 찜질도 다 필요한 것이지만 스포츠를 빙자한 즐거운 놀이공간이 하나 사라진 건 애석한 일이다.
친구나 연인들이 만남을 정할 때 허구한 날 홍대 카페만 찾을 것이 아니라 ‘수요일 두 시 동대문링크에서 만나!’도 근사하지 않은가. 물론 목동과 잠실에 실내링크가 존재하지만 동대문의 정겨움만 하겠는가. 추억의 실내스케이트장이여!
김갑수/시인·문화평론가
1967년 겨울 스케이트장을 찾은 어린이들(위). 1960년대 서울 동대문 실내스케이트장 풍경(가운데). 1967년 2월 정장을 입은 채 스케이트를 타고 있는 신사들(아래). 문화일보 자료사진
California dreaming - Mamas and Papas
첫댓글 동대문 스케이트장 젊음이폭발하던
시절에 스케이트 타러 갔었던 추억의
시간으로 돌아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