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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을 회개시키러 왔노라
눅 5:27-39
27 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28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
29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아 있는지라
30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3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33 그들이 예수께 말하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
34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
35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36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어울리지 아니하리라
3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못쓰게 되리라
38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39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눅 4:27-39 / 눅 4:27 또한 엘리사는 도움이 필요한 이스라엘인 나병환자들이 많이 있었는데도 그들을 제쳐놓고 오히려 수리아 사람 나아만을 고쳐 주지 않았더냐?' 28) 이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화가 나서 29) 뛰어 일어나 예수께 몰려들었다. 그리고 동네 끝에 있는 벼랑으로 끌고 가서 아래로 밀쳐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30) 그러나 예수께서는 군중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그곳을 떠나셨다. 31)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시다;막 1:21-28] 예수께서는 갈릴리의 가버나움으로 되돌아가서 안식일에 회당에 나가 설교하셨다. 32) 여기서도 사람들은 예수의 말씀에 놀랐다. 예수께서는 단순히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인용하지 않고 그분 자신의 말로 확신 있게 진리를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33)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 하나가 있다가 예수께 소리 질렀다. 34) `나사렛 예수여! 우리를 이대로 놔두시오. 당신은 우리를 멸하려고 오셨습니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압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거룩한 아들이십니다.' 35) 예수께서는 그를 꾸짖으며 `조용히 하라! 그리고 그에게서 나오라' 하고 명령하셨다. 귀신은 군중이 지켜보는 앞에서 그 사람을 내동댕이치더니 더 이상 그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고 떠나가 버렸다. 36) 사람들은 눈이 휘둥그래져서 `이 분의 말씀에는 도대체 무슨 능력이 있기에 귀신까지도 복종하는가?' 하였다. 37) 예수께서 행하신 이 일은 화젯거리가 되어 그 온 지방으로 퍼져 나갔다. 38) [많은 사람을 고치시다; 마 8:14-17, 막 1:29-34] 회당에서 나오신 예수께서 시몬의 집으로 가셨다. 마침 시몬의 장모는 심한 열병을 앓고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제발 이 부인을 고쳐 주십시오' 하고 간절하게 애원하였다. 39) 예수께서 그 부인 곁에 서서 열병을 꾸짖자 곧 병이 떠나 체온이 정상으로 되돌아왔으며 그 부인은 일어나서 그들을 위하여 식사를 준비하였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는 말씀은 예수님 사역의 본질을 드러내는 핵심 구절입니다.
세리 레위의 부르심(27-28) 예수님은 당시 가장 경멸받던 한 세리를 제자로 부르십니다. 세리는 로마를 위해 일하는 정치적 배신자, 과도한 세금을 거두는 경제적 착취자, 그리고 이방인과 접촉하는 종교적으로 부정한 자로 여겨졌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권위 있는 부르심으로 세리 레위를 초대하십니다. 레위는 즉시 순종하며 안정된 직업과 수입을 포기합니다. 세리라는 멸시받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받은 것은 의미가 깊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이 세상의 가치관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나 현재 상황에 상관없이 우리를 부르십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있습니까?
죄인들과의 식사와 예수님의 선언(29-32) 레위는 자신의 집에서 예수님을 위한 큰 잔치를 베풉니다. 많은 세리가 이 잔치에 참석했습니다. 당시 유대 문화에서 함께 식사한다는 것은 단순한 음식 섭취를 넘어 친교와 수용을 의미했습니다. 이 모습을 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이를 비난합니다. 그들에게 부정한 사람들과의 접촉은 의식적 부정함을 초래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하게 선언하십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예수님께서 부르신 사람은 자신을 의롭다고 여기는 자들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새 것과 낡은 것의 비유(33-39)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는 이유를 묻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세 가지 비유로 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신랑에 비유하셨습니다.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은 금식할 때가 아니라 기뻐할 때입니다. 이는 메시야가 오신 지금이 기쁨의 시간임을 의미합니다. 새 옷과 낡은 옷, 새 포도주와 낡은 가죽 부대를 말씀하셨습니다. 새 천을 낡은 옷에 붙이지 않습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않습니다. 이 비유들은 예수님이 가져오신 새로운 은혜의 복음은 기존의 형식적인 율법주의로는 담아낼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선포하셨습니다.
적용: “주님, 저는 의사가 필요한 병자임을 고백합니다. 제 죄를 회개하며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합니다. 세상의 가치관과 편견을 내려놓고 주님처럼 모든 사람을 품는 넓은 마음을 갖게 하소서. 주님이 주시는 새 생명 안에서 살게 하소서. 아멘.”
교회의 생명력과 영광은 기도에 달려 있습니다. 신자의 생명은 기도에 달려있으며 하나님의 임재는 기도로 보장되고 유지됩니다. 기도의 사역으로 거룩하게 되는 곳이 교회입니다. 기도가 없다면 교회는 생명이 없고 능력도 없습니다. 교회는 기도가 있을 때 하나님도 그 안에 계십니다. 교회는 연합하여 기도하기 위한 곳이지만 개개의 신자들을 위한 곳이 교회입니다. 기도가 없으면 교회의 건물은 건축물에 불과합니다. 기도가 있을 때 하나님의 집은 다른 모든 것이 부족하더라도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 설 교 >
호크마 주석
=====4:27
엘리사 때에...수리아 사람 나아만뿐 - 왕하 5:14의 내용이다. 엘리사의 경우도 엘리야의 경우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그때에 이스라엘의 다른 많은 문둥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수리아의 장수 나아만만이 깨끗함을 얻었다. 이 역시 하나님이 엘리사를 통해서 이방인에게 베푸신 은혜라고 예수는 명백히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은 예수의 가르침은 구약성경에 예언되었던 구속사의 새시대가 도래하였음을 명확하게 알려주는 것이다. 즉 민족이나 국가를 초월하여서 진실되게 '예수께로 나오는 모든 자들에게' 구원의 문이 활짝 열리게되었음을 의미한다(마 8:11;요 6:37). 오늘날 성도들에게 있어 이방인의 구원이라는 주제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이해되지만, 당시 배타적 선민 사상으로 무장되어 있었던 유대인들에게는 일대 충격이고 도전이었다. 이 이방인의 구원이라는 주제는 예수로 말미암아 처음 선포된것이 아니라 구약 속에 이미 태동되어 있었던 구속사의 한 주제였다(사 43:5, 6;49:12;59:19; 1:11;미 4:1, 2;슥 8:20-23). 한편 나아만 장군의 치유사건은 예수께서 로마백부장의 종을 고치신 경우와 유사하다(7:1-10).
=====4:28
회당에...분이 가득하여 - 예수의 말씀이 선민 의식에 가득차 있는 유대인들에게는모욕과도 같은 언사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회당은 일시에 수라장으로 변해 버렸다. 예수의 말씀을 청종하고 겸손한 태도로 자신들에게 축복을 내려 주시길 간구해야 할 청중들은 냉소적이고 불신에 찬 태도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맹목적인 증오와 분노의 태도로 돌변한다.
=====4:29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 분노가 극에 달하면 살의(殺意)를 띠게 된다. 처음엔호의적인 태도로 말씀을 듣던 청중들이 어느새 폭도가 되었다. 이는 예수를 향하여 호산나 찬양을 외치던 군중들이 종국에 가서는 '십자가에 못박으소서'라고 외치는 적대 무리로 돌변하는 장면과 대비해 보면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한편 나사렛은 갈릴리 구릉의 남쪽 경사면의 낭떠러지 위에 위치하였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를 이 낭떠러지에서 밀어 떨어뜨림으로써 오히려 그들의 배척과 살해 행위를 정당화하려 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께서 이방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외쳤기 때문에 예수가 민족 반역죄를 범한 것으로 몰아 유태 전통상 반역자를 처단하는 형벌 제도인(대하 25:12) 벼랑에서 아래로 사람을 밀쳐 죽이는 형벌을 집행 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후에 십자가의 형장으로 갈 때와 마찬가지로 이성을 잃은 무리가 자신을 마을 밖으로 몰아내는 것을 묵묵히 허락하셨다.
=====4:30
예수께서...지나서 가시니라 - 아직은 예수께서 죽음을 맞이하실 때가 아니었다. 본문은 예수께서 그 죽음의 상황을 어떻게 모면하셨는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으므로 그 상황에서 예수가 어떤 기적적인 탈출을 시도하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저자 누가는 단지 무리가운데로 걸어서 지나 가셨다고 전한다. '가시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포류에토'(* )는 미완료 시제로 사용되어 '예수께서 가시고자 하시는 길로 계속 가셨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분이 어떻게 죽음의 위기를 넘겼던간에 우리는 여기서 죽음의 난관에 봉착(逢着)해서도 그 뜻을 굽히지 않고 자신의 사역에 충실하며 복음의 사역을 위해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예수를 보게 된다. 또한 선교활동 초기부터 난관에 부딪혀도 의연하게 대처하는 그의 모습에서 이후에 지속적으로 봉착하게 될 어려움을 지혜롭게 해결해 나가시리라는 예측도 가능케 한다. 아울러 사역 초기에 당한 어려움을 통해 그가 십자가에 달릴 때까지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인가도 감지하게 된다. 한편 나사렛에서의 쓰라린 경험을 갖고 예수는 가버나움으로 행로를 잡는다. 이에 대해 플루머(Plummer)는 예수가 이후 다시는 나사렛으로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4:31
갈릴리 가버나움 동네 - 나사렛 북동쪽으로 약 40Km 떨어진 곳, 갈릴리 연안에 위치한 도시로 예수께서 광범위한 사역을 수행하신 곳이다(마 8:5, 14;요 6:55-59). 예수의 수많은 이적을 목격하고서도 회개치 않음으로인해 가버나움에는 장차 화가 임할 것이 예언되기도 했다(마 11:23).
내려오사 - 이 표현은 갈릴리 바다가 지중해의 수면보다 약 200m 정도가 낮기 때문에 높은 곳에 위치한 나사렛에서 해변의 평지에 이르는 길이 내리받이 경사였음을 보여준다.
가르치시매(* , 엔 디다스콘) - 본 구절의 원문 표현은 완곡한 미완료 시제로서 그 뜻이 '가르치고 있는 중이었다'가 된다. 이는 예수께서 회당에 참석하여 가르치는 것이 그의 습관이었음을 암시한다(33, 38절;막 1:21). 한편 우리는 31-41절에서 예수의 사역이 하루종일 쉴틈없이 진행되었음알 수 있다. 예수는 오전에 회당에 들어가서 권세있는 말씀으로 교훈을 베푸시고 귀신을 축출하셨으며, 오후에는 시몬의 집을 방문하여 그의 장모를 치유해 주셨다. 그리고 해가 진 이후로부터 밤 늦도록까지는 몰려든 수많은 병자들을 일일이 치유하시느라 조금도 쉴 틈이 없었다.
=====4:32
권세가 있음이러라 - 마가복음 평행절(막 1:21, 22)은 예수의 가르침이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고 전한다. 랍비 정도도 못되는 사람이 독특한 권위로써 가르치는 것에 대해 사람들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대다수의 랍비들은 그들의 선임자들의 견해를 다시 인용함으로써 자신들의 가르침을 누적된 전승(tradition)의 기초 위에 세웠었다.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은 랍비들의 가르침과는 판이하게 달랐고 그 가르침 자체에 독자적인 권능이 담겨있었다. 이렇듯 예수의 말씀 전파는 그의 생애 전체를 통하여 항상 권세와 능력을 수반하고 있다(36절).
=====4:33
더러운 귀신들린 - 귀신 '들린'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코'(* )는 '가지다', '소유하다', '잡다' 등의 의미를 나타낸다. 귀신들린 상태에 관해서는 성경에서 자주 언급할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도 간혹 목격되는 바이다.
이 상태는 '전혀 이질적인 타인격이 사람 속에 들어와서 그 사람의 영혼과 육신을 지배하는 상태'라고 정의내려질 수 있다. 따라서 귀신들린 자가 귀신이 되는 것이아니라 다만 그 귀신에 의해 인격이 지배당하게됨을 의미한다.
귀신이 어떤 특정한 사람의 죽은혼인 것처럼 나타날 때가 있지만 이는 속임수에 불과한다. 인간의 영혼이 귀신의 형태로 활동한다는 것은 비성경적 견해이기 때문이다. 한편 귀신들린 자의 상황은 완전히 미친 상태, 병걸린 상태, 혹은 귀신을 빙자한 주술적 능력을 지닌상태 등이다. 귀신은 세상 끝날까지 잠시 동안은 인간보다 영적 능력이 더 우월한 상태로서 인간을 괴롭힐 수 있지만, 우리는 예수의 이름으로써 귀신을 추방하고 정복할 능력과 특권을 지니고 있다(약 4:7). 그런데 축사 신학에서 주의할 사항은 그 어떤 경우에도 인간이 귀신을 쫓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의 이름으로만 귀신이 축출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4:34
아(* , 에아) - 이는 놀라움이나 두려움, 분노 등을 표현하는 감탄사이며 본 문장에서는 악마적인 무서운 비명을 나타낸다.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 수사적 용구인 본 구절은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나이까', '왜 방해하시나이까' 등의 의미이다. 즉 예수의 출현으로 인해 귀신의 입지가 위협을 받게 되자 그 긴장과 불안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말이다. 귀신들은 그들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임재(臨在)하여 있는 것만으로도 자신들의 존재 거점의 근거를 잃어버려 두려움에 떨게되는데 이는 하나님의 나라의 특성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와 그분의 권위 아래 사단의 어두운 지배와 군림이 사라지는 곳이다. 따라서 지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상징되어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곳에는 사단이 떨며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 복음서에서는 그리스도를 증거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여러 가지것들이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를 증거해 주는 경우가 종종 나타난다. 귀신의 입에서 나온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는 말은 예수의 신성을 인식한 것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귀신은 마 8:29에서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서 막 5:7에서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로 말하고 있다. 한편 이 말은 '더러운 귀신'이라는 말과도 대조를 이룬다.
=====4:35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 예수께서는 귀신이 자신의 정체에 대해서 이야기하자 침묵할 것을 명령하신다. 우리는 여기서 때가 이르기 전에 자신의 정체를 알리는 것을 금하는 예수의 행동 가운데 그 첫번째 것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 함구령을 거듭내리신(마 8:4;막 1:34) 이유는 다음 몇가지로 짐작된다. (1) 정해진 때가 이르기 전에 대적들과의 불필요한 충돌에 직면하게 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예수의 사역이 확대되어감에 따라 당신을 추종하는 무리들이 점점 늘어갔으며 더욱이 예수의 교훈은 전통적인 유대교의 가르침을 초월한 내용이 많았다. 따라서 유대교 지도자들은 날이 갈수록 예수께 대한 의혹과 경계의 눈초리를 나타내었다. (2) 호의적인 무리들의 잘못된 메시야관을 경계하시기 위함이었다. 당시 예수를 따랐던 자들은 거의가 육신상의 문제를 해결받기 위해 몰려들었으며, 그 중에는 예수를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원해줄 위대한 민족적 영도자(領導者) 곧 정치적 메시야로 여기고 추종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3) 예수는 자신이 입으로 증거되기 이전에 당신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신령한 권능으로 인해 자연히 증거되기를 원하셨다. 더욱이 본문의경우 예수는 굳이 더러운 귀신의 입을 빌어 당신의 신분을 중거케하기를 원치 않으셨음이 분명하다. 넘어뜨리고...상하지 아니한지라 - 예수의 행동은 소위 전문적인 '악령 추방'(exorcism)이 아니었는데 그것은 그가 어떤 주문을 외운다거나 다른 이의 권위를 끌어들이지 않은데서 알 수 있다. 대신 예수는 단 한마디 명령하는 말씀으로써 귀신을 내어 쫓았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의 말씀이 얼마나 권세있는 것인가 알 수 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듯이 예수께서도 당신의 말씀으로써 죽은자를 살려내기도 하시는 등(8:49-56) 인간의 어떤 불가능도 가능케 하신 것이다.
=====4:36
다 놀라 - 이 구절에 해당하는 헬라어 '담보스'(* )는 두려움이 섞인 놀라움을 뜻한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나는 말씀과 권세와 능력에 대한 놀라움이다. 귀신을 축출하는 이례적인 사건을 통한 예수의 신적능력을 경험한 군중들은 예수에게서 범접(犯接) 할 수 없는 권위를 보게 된다. 물론 당시 사회에서는 귀신을 달래거나 위로하는 주문과 주술적 행위를 통하여 일시적 또는 거짓으로 악령추방이 행해지기도 했지만 이러한 행위는 단순히 환자를 잠시 잠들게 하는 것 뿐으로 오히려 또다른 귀신의 힘을 비는 경우도 있어 귀신들린 사람으로 하여금 악순환을 되풀이 하게 했다. 그러나 예수는 주문이나 주술적 행위가 아닌 일방적인 명령을 귀신에게 던졌다. 그것은 하늘의 권세와 능력으로 말미암은 불가항력적인 명령이었다.
=====4:37
소문이...퍼지니라(* , 여세포류에토 에코스) - '퍼지니라'를 나타내는 '여세포류에토'는 원형 '여포류오마이(* )의 미완료 중간태로서 '계속 퍼져나가고 있다'는 뜻을 나타낸다. 그리고 '소문'을 나타내는 '에코스'에서 영어의 '메아리'를 나타내는 '에코'(echo)가 파생되었다. '에코스'는 해변가의 파도 소리를 나타내는데 사용되던 단어이다. 즉, 예수의 소문은 자연스럽게 그리고 폭넓게 퍼져 나갔다는 것을 말해준다. 실제로 예수의 권능과 말씀을 가버나움회당에서 직접 목격하고 체험한 사람들은 가는 곳곳마다 이 경험을 이야기했을 것이다.
=====4:38
시몬의 장모 - 저자 누가는 이전까지 베드로에 대한 아무런 언급도 없이 본서를 기록하다가 본 구절에서 갑자기 아무런 소개없이 베드로를 언급한다. 그것은 누가가 본 복음서를 기록할 시기는 이미 초대교회 시대였기 때문에 선교활동을 통해 베드로의 이름이 온 교회에 널리 알려져 있었으므로 이곳에서 갑자기 그의 이름을 언급해도 별다른 무리가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인 것같다. 한편 본 구절과 고전 9:5은 베드로가 이미 결혼한 사람이었음을 말해준다. 전설에 따르면 그의 부인의 이름은 컨콜디아(Concordia)나, 또는 펄페튜아(Perpetua)였다고 한다.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그녀가 베드로보다 일찍이 순교당하였다고 전한다.
중한 열병 - 문자적 의미로는 '높은 열병'(high fever)이다. 누가가 이런 표현을 사용한것으로 보아 그는 열병의 정도를 구별하는 데 있어서 고대의 의학적 관습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는 누가가 전문 의사였음을 차증해준다.
붙들린지라(* , 쉬네코메네) - 이 동사는 헬라 의학 저술에서 흔히 사용이되는 동사로 의학 전문 용어이며 '어려움을 겪다', '억눌리다'는 뜻인 '쉬네코'(* )의 미완료 과거 수동태로서 열병이 계속되었음을 시사한다. 아마 시몬의 장모는 만성병(慢性病)에 시달린 듯하며 당시에는 매우 중태였던 것 같다. 베드로의 장모의 중병이 그 가정에 위기를 가져왔지만, 그 위기 상황은 또한 예수가 그병을 고칠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4:39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 원문상으로는 예수께서 환자의 머리 곁에 서서 허리를 굽혀 진단하고 있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예수는 주술적 행위나 무당의 무속적 행위에 의해서 질병을 치료하시는 것이 아니라 의학적 판단에 의거한 정확한 진단과 완전하고도 즉각적인 치료를 하신다.
열병을 꾸짖으신대 - 본 구절을 두고서 혹자는 이 열병의 배후에는 악한 귀신이 자리한 것이라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굳이 그렇게 볼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하늘과 홍해를 꾸짖으셨다고 해서(욥 26:11;시 106:9) 하늘과 홍해 뒤에 귀신의 영향력이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열병을 꾸짖었다'는 표현은 열병을 내모는 행위 자체를 더욱 생생히 부각시키기 위해 열병을 의인화시키거나 아니면 누가가 예수의 말에 힘이 있었음을 강조하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있다.
일어나 저희에게 수종드니라 - 만성 질병이었던 열병은 사람을 탈진(脫盡)시키고 매우 심약하게 만드나 환자는 치료 즉시 일어나 시중을 든다. 이는 예수의 치유 권능이 즉각적이고도 완전한 효력을 나타내었음을 잘 보여준다. 한편 병상에서 일어난 환자가 예수 일행을 위해 수종들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우리의 영적 의무에도 적용해볼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새로이 영적 건강을 회복하게 된 사람은 그리스도의 지체들을 위한 봉사에 헌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감사로 주를 수종들라
눅 4장 38~39절 / 피영민목사
서론
추수감사절 예배는 미국에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원래는 영국에 살고 있던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국가교회가 심한 핍박을 가하자 그 환란을 벗어나기 위해서 종교의 자유가 있던 화란(네덜란드)으로 1608년에 이주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들을 역사에서는 분리주의자들이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신앙의 자류를 찾아 국가교회에서 분리되어 나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화란에서 분리주의자들이 12년 동안 살면서 화란에 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자녀들의 교육적인 문제도 힘들어지자 또 다시 새로운 나라를 찾아서 떠나가게 됩니다. 이때에 용감한 102명의 사람들이 메이플라워호라는 180톤 정도의 조그마한 배를 타고 신앙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를 찾아서 무려 65일간의 항해 끝에 드디어 오늘날의 미국인 신대륙에 도착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들을 필그림 파더(Pilgrim Fathers) 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기름진 땅과 풍성한 음식이 아니었습니다. 공교롭게도 도착한 시기가 추운 바람이 무섭게 몰아치는 한 겨울이었고,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먹을 음식을 구하기란 하늘의 별을 따는 것처럼 어려웠습니다. 청교도들은 추위와 배고픔과 싸워가면서 한 겨울을 보내었지만 그 기간 동안 절반에 가까운 52명의 사람들이 안타깝게도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교도들은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신앙의 열정을 포기하지 아니하고 인디언들의 도움을 받아서 열심히 씨를 뿌리고 황무지와도 같은 땅을 경작해 나갔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듬해에 청교도들은 신대륙에서 풍성한 곡식을 추수하게 되었습니다. 이때에 청교도들은 제일 먼저 그동안 자신들을 지켜주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여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서 수확한 풍성한 곡식들을 쌓아 놓고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추수감사절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제16대 대통령인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이 추수감사주일을 미국의 전역에서 시행할 것을 법적으로 공포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지금에 와서는 전 세계적으로 각 교회마다 추수감사주일이 지켜지고 있으며, 특별히 우리나라에서는 정기적으로 매년 11월 셋째 주를 추수감사주일로 정하여 지난 한 해 동안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감사는 단순히 마음으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감사는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표시가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신약성경을 통해서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열명의 문둥병자가 예수님의 은혜로 기적적인 치유를 입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홉 명의 문둥병자는 예수님께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도 없이 그대로 제 갈 길을 찾아서 떠나가 버렸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도 아닌 이방인 문둥병자가 예수님 앞에 와서 감사하다는 표시를 드러냈습니다. 이때에 예수님께서는 그 이방인 문둥병자를 더 크게 축복해 주셨다는 사건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문둥병자는 자신의 육신뿐만 아니라 영혼까지도 고침을 받고 구원을 얻는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에 대하여 진정으로 감사의 표시를 주님께 드릴 때에 작은 감사가 더욱 더 큰 감사로 나타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읽었던 본문 말씀인 누가복음 4장 38-39절을 보시면 가장 두드러지게 눈에 들어오는 한 단어가 있습니다. 그 단어는 바로 ‘수종’이라는 단어입니다. ‘수종’이란 단어의 뜻은 어떤 한 사람을 옆에서 섬긴다는 의미입니다. 즉 병고침을 받은 베드로의 장모가 감사한 마음으로 예수님께 수종을 들었다는 말씀입니다. 이 수종이라는 단어는 성경의 여러 부분에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33장 11절을 보시면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그 수종자 눈의 아들 청년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고 기록하였습니다. 또한 열왕기상 19장 21절에서는 “엘리사가 저를 떠나 돌아가서 소 한 겨리를 취하여 잡고 소의 기구를 불살라 그 고기를 삶아 백성에게 주어 먹게 하고 일어나 가서 엘리야를 좇으며 수종들었더라”고 증거하였습니다. 그리고 마가복음 1장 31절에서도 “나아가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저희에게 수종드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구약시대의 레위지파 사람들은 성전에서 여호와를 수종드는 일을 감당하였습니다. 로마의 카톨릭과 구별되는 개신교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표현으로 ‘전 신자의 제사장 직분’이라고 부릅니다. 이와같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직접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본분이요 사명이요 가장 기본적인 직책은 바로 하나님을 수종드는 삶입니다.
즉 하나님을 수종드는 삶이야말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영광스러운 직책이라는 사실입니다.
오늘의 본문이 기록된 누가복음 4장에는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금식기도하신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4장 1절에서는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라고 증거합니다. 의사인 누가는 예수님의 성령충만에 초점을 맞추어 관찰을 하였습니다. 도대체 예수님께서 성령충만으로 어떠한 기적을 행하셨는가에 누가는 집중하였습니다. 의사인 누가의 눈에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사역이 크게 두 가지로 두드러지게 보였습니다. 첫 번째는 귀신을 쫓아내는 축사의 권능을 예수님께서 행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두 번째는 육신에 병든 사람을 성령의 권능으로 치유하시는 치료자의 역할도 예수님께서 감당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의사인 누가가 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는 그 어느 복음서보다도 더 많은 축사의 현상과 질병 치유의 역사가 두드러지게 부각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우리교회도 늘 성령으로 충만하여서 이 두 가지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의 충만한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축사의 역사와 육신의 병을 고치는 치유의 역사가 우리 교회에도 많은 성도님들이 모여서 기도하는 가운데에 동일하게 임할 줄로 믿습니다. 이 같은 성령의 충만한 역사를 위해서 더 열심히 모여서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이 기록된 누가복음 4장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귀신을 쫓아내신 축사의 역사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권능에 대한 소문이 사람들의 입을 타고 그 마을에 순식간에 퍼지고 말았습니다. 누가복음 4장 37절을 보시면 “이에 예수의 소문이 그 근처 사방에 퍼지니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때에 예수님께서는 회당을 나가셔서 시몬의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이 시몬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입니다. 시몬의 집에는 마침 장모가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그 집을 방문했을 때에는 중한 열병에 붙들려 있는 상태였습니다. 이때에 예수님께서는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열병이 즉시 떠나고 시몬의 장모가 곧 일어나 예수님을 수종드는 놀라운 기적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치유의 역사에 대한 시몬의 장모의 행동은 곧 일어나 수종을 드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면서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좀 더 잘 수종 들 수 있을까?’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고자 합니다.
수종은 은혜받은 사람의 첫 번째 표식이다.
이같은 질문에 대하여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발견할 수 있는 첫 번째 진리는 바로 ‘예수님을 수종드는 것은 은혜받은 사람의 첫 번째 표식이다’는 사실입니다. 정말 예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이 하지 말라고 해도 자발적으로 주님을 수종드는 사람입니다. 베드로의 장모가 주님께로부터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습니까? 그 집안 전체가 예수님의 크신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의 장모는 은혜받기 전에는 예수님을 수종들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수종드는 일은 은혜받은 이후에 오는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시몬의 집이 예수님의 은혜를 받기 전에는 참으로 비참한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사위인 베드로는 바다에 나가서 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밤새 수고를 다 하여도 고기 한 마리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고기를 잡을 수가 없으니 경제적으로도 궁핍한 상태였습니다. 대가족이 오직 어부인 베드로만 바라보고 의지하고 있는데 생계의 수단인 고기를 잡을 수가 없으니 매우 어려운 형편이었습니다. 거기에다가 베드로의 장모는 지금 사위의 집에 눈치를 살피면서 살고 있는데 중한 열병까지 걸려서 누워만 있으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현실입니까! 경제적으로도 힘들고 육신적으로 병이 든 주위를 둘러보아도 도와 줄 구석이 없는 참으로 암담한 상황이었습니다.
저도 작년 이맘때에 열병으로 말미암아 한 달 동안 고생을 한 적이 있습니다. 입맛도 없고 몸에 기운도 없고 매우 힘든 나날들을 보내었습니다. 고도로 발달한 현대 최고의 의학기술로도 무려 2주 이상의 치료기간을 요하는 것이 바로 열병의 고통이었습니다. 하물며 예수님 당시에 살던 사람들은 그 얼마나 열악한 환경에 살고 있었습니까? 지금처럼 좋은 병원도 없고 훌륭한 의사고 없고 마땅한 약도 없이 그저 병에 걸리면 집에 가만히 누워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소망없는 시몬의 집에큰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 변화의 중심에는 바로 예수님의 방문이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불러서 예수님께서 시몬의 집으로 오신 것이 아닙니다. 시몬의 장모가 사람들을 청하여서 예수님을 모신 것도 아닙니다. 동네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모시고 시몬의 집으로 들어가신 것도 아닙니다. 여기에 대하여 본문 38절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입니다.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먼저 찾아오셔서 살피시는 것이 우리 주님의 은혜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여 오는 은혜도 있지만 가장 큰 구원의 은혜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섭리 가운데에 주권적으로 주님께서 우리를 먼저 찾아오셔서 구원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는 마땅히 주님께 수종을 들어야만 합니다.
지금 베드로의 집이 이와 똑같습니다. 아무런 부탁이 없어도 모든 사정을 다 알고 계신 주님께서 미리 찾아오셔서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순식간에 고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일 이후에 한낱 어부에 지나지 않던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 중에서도 수제자가 되어서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도의 반열에 올라서는 큰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형제인 안드레도 사도가 되는 엄청난 축복을 받았습니다. 한 집안에서 예수님의 제자인 사도가 2명이나 나오는 영광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은 첫 번째 증거가 바로 베드로의 장모가 곧 일어나서 예수님께 수종드는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는가 아니면 받지 못하였는가를 가장 확실하게 알 수 있는 방법은 지금 현재 우리가 기쁜 마음으로 주님을 수종들고 있느냐 하는 사실입니다. 주님을 감사한 마음으로 수종들고 있다면 그 사람은 틀림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방언의 은사와 신유의 은사와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감사한 마음으로 주님께 수종들지 않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참된 은혜의 첫 번째 표식은 바로 주님을 수종드는 일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베드로의 장모는 자신을 고쳐준 사람이 누구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고쳐 주셨습니다. 또한 베드로의 장모는 자신이 무엇으로부터 구원 받았는지도 잘 알았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었던 질병에서 구원받았음을 확실하게 깨달았습니다. 바로 죽음의 문턱에서 구원을 얻었음을 베드로의 장모는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장모는 무엇 때문에 구원을 받았는지도 잘 알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을 수종들기 위해서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장모는 치유의 은혜를 입은 그 즉시 곧 일어나 예수님을 수종들게 되었습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이러한 상상을 한번 해 보았습니다. 만약에 베드로의 장모가 질병에서 치유함을 받고 일어나서 예수님을 향하여 이렇게 말을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니, 예수님 왜 이 좁고 가난한 집에 와서 민폐를 끼치십니까? 우리도 먹을 양식이 없는데 제자들까지 데리고 와서 음식을 축나게 하십니까? 내가 아파서 누워 있을 때에는 일하지 않아도 사위가 불평하지 않았는데 이제 건강한 몸이 되었으니 일할 수 있는 일거리도 주십시오.” 이런 것을 가리켜서 우리는 ‘적반하장’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속담으로는 ‘물에 빠진 사람 건져내니 보따리 내 놓으라고 그런다’고 표현합니다.
제가 미국에서 목회를 하면서 뉴올리언스 신학교를 다닐 때의 일입니다. 한번은 차를 타고 가는데 길에서 미국 거지가 손을 흔들고 차를 태워달라는 신호를 보내었습니다. 목사 체면에 그냥 갈 수도 없고 주님의 사랑으로 그 거지를 차에 태우고 무려 1시간 30분 동안 달렸습니다. 그리고 목적지에 무사히 내려 주었습니다. 그런데 거지가 이제는 배가 고프니까 밥을 사먹을 수 있는 돈을 달라고 저에게 요구를 하였습니다. 이왕 도와 준 거 끝까지 도와주자는 심정으로 지갑을 뒤져보니까 어제 교회에서 설교를 하고 받은 사례비 5달러가 있어서 전부 다 거지에게 주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고 자랑하는 사람들 가운데에 상당부분 이런 요소들이 있습니다. 죄와 질병과 고통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주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까지 희생을 하셨건만 그분의 사랑으로 구원받은 소위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늘 감사하지 못하고 때로는 현실이 힘들다고 해서 불평하고 또 때로는 사업이 잘 안된다고 해서 원망만 한다면 이와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받은 사람들이 진심으로 기뻐하며 감사한 마음으로 주님을 수종드는 것은 너무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이 수종이야 말로 우리가 주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귀한 믿음의 예물이 될 줄로 믿습니다.
수종의 네 가지 특징
그렇다면 베드로의 장모가 주님을 수종드는 그 모습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1. 일상성이 있습니다.
베드로의 장모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한 일은 자신이 집에서 평소에 하던 일이었습니다. 누추한 시몬의 집까지 들어오셔서 자신의 병을 고쳐주신 예수님을 위해서 틀림없이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서 대접을 했을 것입니다. 인간의 육신을 입고서 이땅에 오신 예수님의 시장기를 덜어 드리기 위해서 늘 하던 대로 맛있는 음식을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여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편안하게 주무실 수 있는 방을 마련하기 위해서 깨끗하게 집안 청소를 하였을 것입니다. 걸레도 빨고 먼지도 털면서 존귀하신 예수님을 조금이라도 청결한 곳에서 모시기 위하여 최선의 서비스를 하였을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특별한 행동이 아닙니다. 단지 시몬의 장모가 날마다 하던 일상적인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이와 같이 평소에 자신이 하던 작은 일이지만 감사한 마음으로 수종드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작은 일을 통하여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신실한 믿음의 자녀들에게 점점 더 큰일을 맡겨 주십니다. 바로 이것을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법칙입니다.
오늘날의 교회에서 봉사하는 사람들도 이와 같은 자세를 갖고서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각자의 직분에 대하여 최선을 다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 다른 사람은 큰 직분을 감당하고 나에게는 남들이 인정해 주지도 않는 작은 일을 맡긴다고 불평하며 원망하는 사람은 결코 주님의 칭찬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아무리 오랫동안 교회를 다녀도 큰 사명을 맡을 수가 없습니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아무리 눈을 뜨고 찾아봐도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왜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까? 기도도 못한다는 말입니까! 아무런 직분이 없어도 교회에서 감당할 사명이 없어도 교회에 와서 무릎을 꿇고서 얼마든지 기도를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교회의 부흥과 영혼구원을 위해서 얼마든지 기도할 수가 있습니다. 주위에 병든 사람들을 위해서도 얼마든지 기도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일거리가 없다고 불평만을 하십니까? 우리도 베드로의 장모처럼 일상적인 일들을 통해서 주님께 수종을 들 수가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여러분 모두가 특별한 일이 아니어도 일상적인 삶의 모습을 통하여 감사한 마음으로 주님을 수종드시기 바랍니다.
2. 즉시성이 있습니다.
베드로의 장모는 곧 일어나서 수종을 들었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베드로의 장모는 시간을 지체하지 않았습니다. 조금도 지체하지 않았습니다. 오랜 시간동안 병들어서 연약해진 육신의 기력을 회복하지도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주님을 수종들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베드로의 장모가 곧 일어나 수종을 들었다고 분명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들의 마땅한 삶의 모습이라고 믿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사람의 특징은 그 즉시 수종드는 사람이라고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진실로 구원받은 사람은 자연스럽게 주님을 위하여 수종을 들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들도 날마다의 신앙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일들이 있으면 그 즉시 일어나 주님께 마땅히 수종을 드는 삶을 살아야만 될 줄로 믿습니다.
2. 자발성이 있습니다.
베드로의 장모는 주위의 사람들이 억지로 시켜서 주님을 수종든 것이 아닙니다. 중한 열병으로부터 고침을 받은 그 순간에 베드로의 장모의 마음속에는 자신을 일부러 찾아오셔서 병을 고쳐주시고 따뜻한 사랑을 베풀어주신 주님을 향하여 스스로 수종들기를 원하는 자발적인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 마음은 그 누가 시켜서 생겨난 마음이 아니라 마음 깊은 중심속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난 것입니다. 유명한 다윗왕도 시편 51편 12절을 통해서 주님을 향한 자발적인 섬김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을 하였습니다.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우리 하나님은 먼저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은혜받은 그 영혼이 자원하는 심령으로 수종들기를 간절히 원하시는 분이심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4. 감사성이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을 향한 베드로의 장모의 수종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주님을 수종드는 사람의 가장 필수적인 요건은 마음의 깊은 데서 우러나오는 감사입니다. 시편 50편 23절에서는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고 증거하였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이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짐승을 잡아서 제사를 드릴 때에 하나님을 향하여 이렇게 불평하며 원망을 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 왜 우리처럼 돈도 없고 권세도 없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비싼 소를 잡아서 제사를 드리라고 요구하십니까? 우리는 지금 먹고 살기도 힘이 듭니다. 하나님 그렇게 맛있는 고기를 잡수고 싶으십니까?” 성도 여러분! 이러한 제사를 우리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요? 죄송한 말씀이지만 이러한 마음으로 제사를 드리는 것은 차라리 드리지 않는 것만 못합니다.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이 불평과 원망의 마음을 갖고서 제물을 드린다면 그것은 가인의 제사에 지나지 않습니다. 가인의 제사에는 하나님의 어떠한 축복도 역사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면서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여러분 모두는 스스로의 마음을 한번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옆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그 사람의 마음과 믿음의 분량을 짐작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여러분 각자의 마음만을 겸손히 들여다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내가 이시간 어떠한 마음을 갖고서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나와 왔는지를 체크해 보시기 원합니다. 혹시라도 여러분 마음속에 불평과 원망과 시기와 질투와 미움이 있다고 한다면 겸손한 마음으로 십자가 앞에 다 내려놓으시고 주님의 보혈로 깨끗함을 받으시고 그 마음속에 오직 하나님을 향한 감사로 충만히 채우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무엇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는지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면서 다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는 지옥의 형벌과 권세로부터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의 공로와 수고와 노력으로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라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사실을 생각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평생을 갚아도 만분지일이라도 갚을 수 없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구원의 은혜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시간 무조건 여러분의 마음을 감사로 충만히 바꾸십시오.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갖고서 살아가는 믿음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 늘 임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범사에 감사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구약시대에 살았던 욥은 그 어려운 고난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하여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끝까지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의 삶을 살았습니다. 입술로 하나님께 범죄하지 아니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신실한 믿음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 결과 욥은 고난을 극복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자신이 이전에 누렸던 축복의 갑절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구원받은 성도들은 늘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야만 합니다.
우리 성도에게 있어서 한 가지 별명이 있다고 한가면 그것은 바로 감사입니다. 입술을 벌릴 때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향하여 감사의 찬양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무엇을 하든지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기쁨과 영광을 위하여 행하시기 원합니다.
그런 믿음의 삶을 살아가시는 모든 분들에게 더욱 더 큰 감사의 조건들을 우리 하나님께서 풍성하게 허락하여 주실 줄로 믿습니다.
주님을 위한 수종은 가장 큰 은혜요 영광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수종드는 일은 너무나 큰 영광입니다. 피조물인 우리가 창조주인 주님을 감히 수종든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세상의 대통령을 수종드는 것도 그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우리는 그 사람을 가리켜서 비서관이라고 부릅니다. 아마도 대통령을 수행하며 비서로 섬기는 비서관은 개인적으로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비서관이라고 하는 그 직책에 대한 큰 기쁨과 감사의 마음을 소유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토록 세상의 대통령을 5년 동안 수행하는 사람들도 그토록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데 하물며 영원무궁토록 만왕의 왕이 되시는 주님을 수종드는 일이야말로 그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주님을 수종드는 일은 이 세상의 아무나 할 수 있는 하찮은 일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진실로 경험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참으로 복된 사명임을 믿음으로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도 바울도 자신이 주님을 수종들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무한한 영광으로 여겼던 사람입니다. 디모데후서 1장 12절을 보시면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라고 증거합니다. 또한 고린도후서 3장 9절에서는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율법을 가지고 사람을 정죄하는 직분도 영광이 있지만 더욱 더 큰 영광은 복음을 가지고 주를 수종드는 일이야말로 지극히 큰 영광이 있다는 진리를 사도 바울은 담대히 고백하였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수종이야말로 이 땅에서 가장 큰 영광임을 확실하게 깨닫는 귀한 은혜의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저는 만약에 대통령이 와서 자신의 직분과 저의 직분을 바꾸자고 부탁한다면 일언지하에 거절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대통령도 그 직분이 귀하고 소중하지만 주의 종이 되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길 수 있는 직분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영광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베드로의 장모가 주님을 수종든 일은 자신에게도 큰 축복이 되었지만 궁극적으로는 그 가정 전체가 하나님의 축복을 넘치도록 받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가난과 질병으로 신음하던 시몬의 집이 이제는 그 마을전체에 위대하신 예수님의 권능을 증거하는 복음의 센터가 되었습니다. 전에는 시몬의 집이 마을 사람들의 동정을 받았던 비참한 신세였지만 이제는 그 가정에 모든 병자들과 육신의 연약함과 영혼의 심각한 문제를 갖고 있던 사람들이 수없이 몰려들게 되었습니다. 시몬의 집에 모든 사람들이 한번이라도 들어가기를 소원하는 귀한 축복의 가정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이처럼 놀라운 축복을 받은 시몬의 장모를 존경하며 진심으로 부러워하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시몬의 장모는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도인 베드로의 장모가 되어 성경에 기록이 되는 엄청난 축복의 주인공이 되었음을 믿음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시몬의 장모처럼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즉각적으로 일어나 주님을 수종드는 사람들에게도 이와 동일한 축복과 역사가 일어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 주님을 수종드는 신실한 믿음의 백성들을 결코 배반하거나 버리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세상의 권력자들은 필요에 따라서 밑의 사람을 부리다가도 개인적인 출세와 명예와 유익을 위해서라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버리는 무자비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토사구팽’이라는 고사성어도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우리 주님은 영원무궁토록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연약함과 부족함으로 배반하고 부인할지언정 주님은 결코 사랑하는 당신의 자녀들을 단 한 순간도 포기하지 않는 영원한 구세주이심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결론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께서 하늘의 영원한 영광과 존귀를 사모하신다면 주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수종드는 삶을 날마다 살아가십시오. 예수님을 먼저 섬기시고 그 다음으로는 주님의 사랑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가 된 교회의 성도들을 겸손한 마음으로 섬기십시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체험한 믿음의 백성들이 반드시 실천해야만 하는 마땅한 본분이요 사명인줄로 믿습니다. 교회에서 사랑이 부족하다면 여러분께서 주님의 사랑으로 그 부족한 부분들을 채우십시오. 교회가 낡아서 보수할 곳이 있다고 한다면 여러분 각자의 헌신으로 말미암아 그 떨어진 부분들을 새롭게 세워나가시기 바랍니다. 교회가 이 사회를 위한 봉사와 섬김이 부족하다고 한다면 여러분이 소유하고 있는 물질과 시간과 열정을 통하여 봉사하시기 원합니다. 바로 이것이 감사한 마음으로 주님을 향한 수종드는 아름다운 성도의 삶의 모습인 줄로 믿습니다. 오늘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해서 이 자리에 참석한 우리 모두는 마음속에 ‘감사의 수종’이라는 다섯 글자를 깊이 새겨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베풀어주신 구원의 은혜와 이 세상에서 풍성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신 모든 축복들을 되돌아보는 가운데에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다시 한번 주님을 향한 ‘감사의 수종’을 새겨보시기 바랍니다. 비단 추수감사주일인 오늘만 주님을 위한 ‘감사의 수종’을 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는 최후의 순간까지 날마다 ‘감사의 수종’을 드리는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에 하늘의 신령한 축복을 항상 풍성하게 체험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누가복음 강해 제45강(눅 4:38-39)
눅 4:38-39 /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갈릴리의 중심도시는 호수의 북쪽 호안에 위치하고 있는 가버나움입니다. 그곳에는 분봉 왕 헤롯 안디바의 궁궐이 있으며 약 2만명의 주민이 살고 있습니다. 그곳 가버나움에는 가나안 북쪽의 국제간 물동량에 대하여 로마황제에게 바칠 관세를 부과하고 있는 세관을 비롯하여 갈릴리 분봉 왕의 여러 관공서가 있습니다. 또한 종교적으로는 유대인들의 큰 회당이 자리를 잡고 있는데 그곳에는 갈릴리 지역의 유대교를 관할하고 있는 산헤드린 공회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가버나움은 상당히 번성한 소비도시이며 그곳의 주민들은 갈릴리 지방의 귀족들이며 유지들입니다.
이에 따라 가난한 갈릴리의 어부들은 물가와 집값이 비싼 대도시 가버나움에 살지를 못하고 그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벳새다에 많이 살고 있습니다. 가버나움에서 벳새다까지의 거리를 대체로 9.6km로 보고 있습니다. 참고로 사도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서 벳새다 어부출신인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요1:42),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요1:44). 그러므로 갈릴리의 가난한 어부출신인 제자 시몬의 집은 벳새다에 위치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안식일 날 가버나움 대 회당에서 하나님말씀을 선포하고 그 뜻을 풀어서 회중들에게 가르치시던 예수님이 제자 시몬으로부터 급한 전갈을 받게 됩니다(눅4:31, 38). 시몬이 벳새다 자신의 집에 함께 모시고 살고 있는 장모님이 열병으로 위독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치유의 능력을 지니고 계시는 스승 예수님의 내방을 급히 요청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버나움 대 회당을 떠나서 급히 벳새다로 가십니다. 오늘의 본문은 시몬의 집에서 어떠한 치유와 복음사역이 발생하고 있는가에 대하여 진술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본문말씀은 공관복음에 공히 기록이 되고 있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이제부터 본문말씀을 다른 복음서와 비교하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을 앓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예수께 구하니”(눅4:38);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가버나움 대 회당에서 하나님말씀을 선포하시고 그 뜻을 풀어서 회중들에게 가르치시고 계십니다. 그런데 제자 시몬으로부터 급한 전갈을 받게 됩니다;
(1) 시몬은 자신의 장모가 위독하시므로 스승이신 예수님에게 빨리 벳새다 자기 집으로 함께 가시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요청은 두 가지의 문제를 지니고 있습니다;
1) 안식일에는 유대인들이 성전이나 회당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날입니다. 랍비가 히브리정경에 대하여 읽고 풀이를 해줍니다. 그러면 회중들은 그 말씀의 뜻을 깊이 묵상하는 날입니다. 그 외의 일은 일체 삼가를 합니다. 따라서 병자를 문병하고 치유하는 행위도 당연히 금지가 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훗날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날 때부터 소경인 자를 실로암 못으로 보내어 고쳐주시자 유대인들은 그것이 심각한 율법위반행위라고 시비를 걸고 있습니다(요9:6-7, 14-16). 유대인들의 율법생활이 그러한데 그 위험을 감수하시고서 예수님이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려고 그 집에 들어가십니다(눅4:38a).
2) 안식일에는 예배에 참석하기 위하여 자신의 집에서 성전이나 회당을 왕복하는 정도의 거리이동만을 율법적으로 허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버나움에서 벳새다까지 9.6km를 걸어서 이동한다고 하는 것은 심각한 율법생활의 위반행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안식일에 가버나움에서 벳새다까지 그 먼 길을 걸어서 가십니다.
3) 참고로, 훗날 그와 같은 안식일 위반에 대하여 시비를 걸고 있는 유대인들의 말이 다음과 같습니다;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요5:10),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막2:24).
4) 하나님의 깊은 뜻을 드러내고 있는 예수님의 답변이 다음과 같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막2:27-28),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 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막3:4-6).
(2) 예수님의 제자 시몬은 가난한 갈릴리의 어부입니다. 그는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데 같은 집에 장모님을 모시고 있습니다(눅4:38b). 그리고 그 집에 동생 안드레도 함께 살고 있습니다;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있는지라”(막1:29-30). 식구가 많은 집입니다.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잡이를 하여 그들 모두를 부양하기에 힘이 많이 들고 있습니다. 그와 같이 시몬과 같은 힘든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동네가 바로 벳새다임을 알 수 있습니다.
(3) 시몬의 장모가 평소 어떠한 사람인지를 의사 누가가 절묘하게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제자와 이웃) 사람들이 그(시몬의 장모)를 위하여 예수께 구하니”(눅4:38c); 어째서 그 자리에 함께하고 있는 야고보와 요한 등의 제자들과 이웃사람들이 모두 입을 모아 시몬의 장모를 꼭 낫게 해달라고 예수님에게 요청하고 있을까요? 그 이유는 한 마디로, 평소에 시몬의 장모가 예수님 일행과 이웃사람들에게 덕을 많이 베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사람들을 섬기기를 힘쓰고 특히 사위 시몬과 사돈총각인 안드레의 스승이 되고 있는 예수님에게 극진한 사람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복음사역에 헌신적인 여인이므로 설령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율법위반이라고 시비를 걸어온다고 하더라도 그 위험을 감수하면서 예수님께서는 그녀의 열병을 반드시 낫게 해주고 싶으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로,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드니라”(눅4:39); 예수님께서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어떠한 방법으로 고치고 계시는지에 대하여 복음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1)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그들에게 수종드니라”(막1:31); 4복음서 가운데 가장 먼저 저술이 된 마가복음입니다;
1) 저자인 마가는 “예수님이 시몬의 장모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갔다”(막1:31a)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중병이 들어 병석에서 꼼짝하지 못하고 있는 병자를 예수 그리스도가 직접 찾아가셔서 그 손을 잡아 일으켜줄 때에 병이 낫게 된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손을 통하여 하나님의 치유의 능력이 전이되어 오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2) 그리고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병환으로 누워서 지내고 있는 것을 별로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그를 일으켜 세워서 예수님 일행을 도와 복음사역에 기여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시몬의 장모가 열병이 낫게 되자 곧바로 예수님 일행의 시중을 들어 주었다”(막1:31b의역)고 마가가 기술하고 있습니다.
(2)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 들더라”(마8:15); 마태는 마가의 복음서를 증보하면서 오히려 이 대목을 축소하고 있습니다;
1) 마가는 “예수님이 시몬의 장모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갔다”(막1:31a)고 기록하고 있는데 그것을 사도 마태는 간단하게 “예수님이 시몬의 장모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갔다”(마 8:15a)고 서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사도 마태는 병자의 손을 잡아 일으켜주는 큰 동작을 어째서 그저 손을 만져주는 작은 동작으로 바꾸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의미는 그 정도의 접촉만으로도 충분하게 하나님의 능력이 전이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말씀만 하셔도 귀신들이 쫓겨나고 병든 자들이 모두 고침을 받게 됩니다”(마8:16). 그러므로 시몬의 장모의 경우에는 예수님께서 직접 손까지 만지시니 그것은 충분하고도 넘치는 치유라고 하겠습니다.
3) 그리고 사도 마태는 “시몬의 장모가 예수 일행의 시중을 전부 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시중을 드신 것이다”(막1:31b, 마8:16b)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의미는 나이가 드신 분이 예수님의 제자들의 시중을 드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녀는 사위인 시몬의 스승이신 예수님을 대접하고 그 시중을 들어준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마가의 기록보다 사도 마태의 기록이 그 대목에 있어서는 더욱 현실적인 타당성이 크다고 하겠습니다.
(3)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드니라”(눅4:39); 의사 누가는 베드로의 증언과 사도 요한 및 안드레의 증언을 청취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 결과 조금 달리 기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시몬의 장모의 열병에 대하여 꾸짖고 있습니다. 그러자 열병을 일으키고 있던 병원균이 견디지를 못하고 떠나가고 있습니다”(눅4:39a);
1)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지니고 있는 창조주의 권능이 말씀을 통하여 피조물인 병원균을 떠나가게 만드는 능력으로 역사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대목입니다. 그 개념을 확장하면 사도 바울의 다음 증거와 같아진다고 하겠습니다;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병원균)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살리는 능력)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9).
2)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창조주의 능력이 터져 나오자 열병을 일으키고 있던 병원균이 견딜 수가 없어서 떠나가고 맙니다. 그 결과 시몬의 장모는 곧 병석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이제는 즐거운 마음으로 자신을 낫게 해준 예수님과 그 일행을 위하여 시몬의 아내인 자신의 딸과 함께 저녁식사를 준비하게 되는 것입니다(눅4:39b).
결론적으로
예수님의 공생애에 있어서 그 제자들만의 삶만을 바라볼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아들이나 사위를 예수님의 제자로 살게 하고 예수님 일행의 복음사역을 뒷받침하고 있는 훌륭한 어버이와 그 가족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헌신을 귀하게 생각하시는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지만 먼 길을 찾아가 본문에서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치유해주시고 있습니다.
시몬의 장모는 평소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나 이웃에게서 칭찬을 받고 있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에게 그녀를 꼭 낫도록 해달라고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녀의 병을 낫게 해주시자 시몬의 장모는 다시 부엌으로 들어가서 예수님 일행을 위하여 저녁식사를 준비하시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아름다운 정경을 마음속에 그려보면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됩니다; “안식일 날 병자를 치료하는 것이 율법위반이며 먼 길을 찾아가서 병자를 낫게 하는 것은 더욱 심각한 이중적인 율법위반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견해는 생명을 살리고자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에서 상당히 멀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본문의 말씀을 거듭 음미하시면서 아버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생명살림의 선한 역사에 동참하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