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쾌하면서도 어딘가 날카로운 가야금 소리가 울려퍼졌다. 어느새 병판을 제외한 다른 양반들은 모두 제 기생을 껴안고 쓰러져
잠에 빠져 있었다. 술이 과해 몸에서 열이 나는지 두 뺨은 발그레 달아올랐고 갓은 잔뜩 엉클어져 머리가닥가닥이 흘러내렸다. 지금 멀쩡한 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은 병판 고 선과 설용, 그리고 몇시간동안 가야금을 연주하는 기생 뿐이였다.
기생의 손가락 끝은 가야금 줄을 수도 없이 튕겨낸 덕에 빨갛게 변해버렸고 이마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혀있었으나 설용과 병판 그 어느 누구도 기생의 노고를 칭찬해주기는 커녕 알아주지도 않았다. 그저 흘러나오는 가야금 소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할뿐,
존재 자체도 의식하지 않고 있었다. 설용이 병판에게 다가가 빈 잔에 술을 따른다. 쪼르륵, 시냇물이 흐르는 것 만큼 자연스럽고 우아한 곡선을 이루며 술이 주전자에서 잔으로 흘러 내려갔다.
"오늘 제 아이들이 본의 아니게 무례를 범하였사옵니다."
"어미 얘기를 전혀 몰랐던 모양인데 그렇겠지."
병판이 말을 마치고 잔 속의 술을 한 입에 털어내었다. 설용이 빈 잔을 다시 채운다.
"헌데 오늘 도련님도 같이 오셨다 들었습니다."
설용이 주전자를 내려 놓으면서 슬쩍 병판의 눈치를 보았다. 병판이 눈을 치켜들어 설용을 잠시 날카롭게 쳐다보다가 채워지는
잔을 보며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는다. 설용이 잔을 다 채우자 다시 한 입에 술을 들이킬 뿐이였다. 잔을 탕 소리나게 내려놓고
나서 숨을 깊게 들이쉬다가 천천히 내뱉는다.
"고씨 성을 가진 천하의 망나니를 얘기하는거라면, 이 교방 어딘가에서 어슬렁 거리고 있겠지.
하라는 공부는 아니하고 기생들 옷고름이나 풀어 다니는 놈보고 도련님이라니."
"어찌 망나니라 하십니까. 어렸을 때는 천재라는 소리도 줄곧 들어오신 분이라 들었습니다.
거기다 남중일색이라는 소문이 자자하옵니다."
병판이 호탕하게 웃었으나 그 미소에 무언가 지친 기색이 보였다. 그 표정을 놓치지 않은 설용은 병판을 잔뜩 동정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바라보더니 다시 잔에 술을 채운다. 주전자를 내려놓고 다과 하나를 집어 두손으로 병판의 입에 넣어준다. 아무 말
없이 설용이 넣어주는 다과를 입에 넣고 잘게 부숴질 때까지 꼭꼭 씹던 병판이 술로 입을 헹군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갓을 고쳐
쓰는 병판을 올려다보며 설용이 기생 특유의 콧소리로 입을 연다.
"가시렵니까?"
병판은 대답하지 않고 쓰러져 있는 양반들을 지나쳐 문 앞까지 걸어간다. 설용이 재빨리 일어나 병판의 뒤를 따랐다. 병판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 설용을 바라본다.
"네 년의 속셈은 잘 알고 있다. 나나 내 아들놈을 잡아 돈 냄새좀 맡아 보려는 모양인데 녀석은 건들지 말거라.
바로 세워줘도 시원찮을 놈, 흔들지 말란 얘기다."
설용이 그 붉은 입꼬리를 하늘 높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올린다. 병판이 헛기침을 크게 한번 하고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다시 발걸음을 돌려 방을 나가려 하는데 설용의 말이 그를 붙잡는다.
"소인이 어찌 감히 그러겠습니까. 다만, 피가 진할 뿐입니다."
병판이 살며시 고개를 옆으로 돌리면서 설용의 말을 귀담아 듣는다. 두 눈은 땅을 향해 있었으나 땅을 바라보고 있지는 않았다.
설용을 바라보고 있는것 또한 아니였으나 설용과 병판 사이에 흐르는 분위기는 마치 설용과 눈싸움이라도 하는 듯 했다. 그러다
다시 앞을 바라보며 알수 없는 설용의 말에 깊은 생각에 빠진다. 피가 진하다는 것이 자신을 가르키는 건지, 은월을 가르키는 건지 알수 없었다.
병판이 답을 할꺼라는 설용의 기대와는 달리 병판은 그저 헛기침을 한번 크게 하고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방을 빠져나갔을 뿐이였다. 밖에서 병판의 시종이 방을 나선 병판을 보고 굽신거리며 모시는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를 들으며 설용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모든 것은 반복 될 뿐이지요."
중얼거리는 설용의 얼굴이 마치 수풀속에서 먹이를 잡아 먹을 기회를 호시탐탐노리는 한 마리의 뱀과도 같아보였다.
건 월 동 풍 05. 영춘화 밑에는 달과 바람이, 소나무 뒤에는 겨울이.
날씨가 제법 차가워졌다. 봄이라고는 하나 아직 겨울의 때가 완전히 가시지 않아서 그런지 밤이 되자 온도가 뚝 떨어졌다.
차가운 공기 때문에 달리는 동이의 숨이 턱하니 막혀왔으나 동이는 한번도 달리는 걸 멈추지 않았다. 은월이 기다리니까. 나를
기다리다가 은월이가 고뿔에라도 걸리면 안되니까. 정말로 동이의 머릿속에는 은월이 하나뿐이였다.
한참을 달려 은월과 자주 노닐던 정원에 도착한 동이는 잠시 멈춰 서서 숨을 고르고 희끗희끗보이는 노란 영춘화를 향해 또
한번 달려갔다. 영춘화가 잔뜩 피어있는 곳에 도착하자 고개를 살짝 들어 달을 바라보고 있는 은월의 모습이 보였다. 서서히
달리던 걸음을 늦추고 자신도 모르게 떠오르는 미소를 느끼면서 은월에게 한걸음씩 다가가던 동이가 갑자기 멈춰섰다. 은월이
옆에 누군가 있었다. 그 옆에 후가, 다정하게 웃으면서 은월이를 바라보는 후가 있었다. 후가 뭐라고 말을 하자 은월은 고개를
떨구며 입을 움직였고 그런 은월이를 바라보는 후의 눈빛은 너무나도 애잔했다. 그런 후의 눈빛을 느꼈는지 은월이 고개를 들어
후를 바라보며 웃었지만 어째 웃음이 웃음같지 않았고 결국에 후의 미간이 찡그러진다.
표정… 맨날 비슷하던 후였는데, 후에게 저렇게 많은 표정이 있었던가. 멀리서 그 둘을 바라보는 동이의 가슴이 쿡쿡 쑤셔왔다. 아까 은월이를 바라보면서 아팠던 것하고는 너무나도 달랐다. 다른 고통이지만 아픔은 더 컸다.
동이가 입을 꼭 다물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숨을 깊게 들이쉬고 내뱉으면서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그 둘을 향해
한 발자국 다가가려던 찰나, 후가 은월의 팔을 자신쪽으로 잡아당기면서 은월이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후의 표정이
달빛을 받아 너무나도 선명히 보였다. 힘든 표정. 포기하고 싶은 그런 표정. 동이의 숨이 순간 멎었다. 영춘화가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곳에서 청명한 달빛을 받은 그들의 모습이 너무나도 아름답고 또 애처로웠다. 멀리서 보아도 알수 있을 정도로 후는
은월이를 꽉 껴안고 있었고 거부하지는 않았지만 후를 안아주지도 않았던 은월이도 슬픔이 복받쳐 오는지 결국에는 후를 꼭
껴안는다. 후의 어깨를 꼭 붙들고는 후의 목에 얼굴을 파묻는다. 은월의 어깨가 떨렸다. 동이의 숨이 멈춘듯 쉬어지지 않았다.
더이상 그들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동이가 제일 가까이 있던 소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소나무에 등을 기대더니 다리에 힘이
풀리는지, 머리가 어지러운지 휘청했다. 두 손을 뒤로 해서 나무결을 어루만진다. 두 손에 잡힐리 없는 나무 기둥을 움켜쥐려
노력했다. 두 눈을 질끈 감았지만 새까만 세상위로 은월과 후가 꼭 껴안은 그 모습만이 계속 떠올랐고 동이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면서 뻣뻣하게 굳은 목에서 아픔이 느껴졌다. 적어도 동이는 이 아픔이 목에서 느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두 눈을 지긋이
감고 지금 제 온몸을 감싸는 외로움과 머릿속을 비우려 한다.
"먼저 들어가. 동이는 내가 데리고 들어갈게."
동이의 머릿속이 정리되어 갈때쯤, 어느새 동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은월과 후의 발소리가 들렸다. 잠시 멈춰섰는지 둘의 발걸음
소리는 들리지 않고 대신 따뜻하게 말하는 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이의 눈이 번쩍 뜨였다. 자신을 본것일까봐 겁이 났었던
동이는 이내 상황을 깨닫고 씁쓸한 웃음을 머금는다. 나를 보고 나를 향해 걸어오는 것이 아니라 은월이를 방으로 데려다주는
것이였구나. 착각을 했었다. 어쩌면 착각이 아니라 후와 은월에게 동이가 기대했던 것일지도 몰랐다. 나를 알아봐주기를. 내
마음을 알아주기를. 동이의 얼굴에 맥빠진 웃음이 떠올랐다. 은월을 향한 미움이 체한것을 가라앉히기 위해 바늘로 딴 손에서
나는 피처럼 찔끔찔끔 마음속에서 솟아나왔다. 시원스레 뿜어나오지도 않고 그렇다고 꾹 눌러지지도 않는 이 마음. 이해되지도
않고 다스려 지지도 않아 더욱 혼란스러운 감정이였다.
"기다렸다가 같이 들어가지 않구."
"춥잖아."
은월이 후의 옷자락을 붙잡고 말했다. 약속이라 하기는 그렇지만 영춘화 밑에서 동이를 기다리기로 했는데 먼저 들어가기가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였다. 또 이 추운날씨에 후 혼자 두고 가는 것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지만 후는 고개를 저으면서 작게
말했다. 그런 후를 보면서 은월은 고마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동이, 옷이 편하지 않아. 설용 그것이 동이를 데리고 무슨 짓을 한건지. 동이 치마자락이라도 네가 잡아줘야 될거다."
은월이 웃으며 장난스레 말하고는 뒤돌아 천천히 제 방을 향해 걸어갔다. 소나무 뒤에 숨어있던 동이 옆으로 은월이 지나갔다.
그 모습이 마치 동이에게 그림 속 선녀같이 몽롱하고 아름다움과 동시에 어딘가 아쉬운 느낌이 들게 했다. 은월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때까지 아무말도 하지 않고 제 자리에 멈춰 서 있던 후는 은월의 모습이 더 이상 보이지 않자 입을 연다.
"너 거기 있는거 다 안다."
동이가 흠칫 놀라며 어깨를 움찔했다. 좁아진 어깨가 펴질 생각을 하지 않았고 머릿 속이 또 다시 혼란스러워졌다. 일어나야
하는건지, 아니면 계속 모르는 척 해야 하는건지 고민하고 있는 중에 길 건너 수풀이 들썩거렸다.
"들켰네?"
이 목소리…? 동이의 엉덩이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들썩 하는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동이의 고개가 아픔도 잊은 체
목소리가 나는 곳으로 퍼뜩 돌아갔다. 한 사내가 제 머리에 잎파리 몇조각을 붙이고 수풀 사이에서 일어난다. 저 능글맞은
웃음… 저 장난끼 가득한 목소리…. 동이의 입이 쩍 하고 벌어졌다.
저놈, 아까 그 망나니놈이였다.
* 덧글달아주신 쉣시영구 님, 퀴담 님, chic리요 님, 후안 님, 소피아 님, 아이 엔 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ㅠ_ㅠ
여러분의 소중한 덧글 하나하나가 저에게는 정말 큰 힘이 됩니다.
기대에 보답할수 있도록 더 달달한 러브라인과 더 시큼한 소설내용을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오타는 쪽지로 살포시 말씀해주시길 바라며, 덧글 다시면 자동 업쪽처리 됩니다~
그게 싫으신 분들은 덧글끝에 ^ㅁ^ 달아주세요~
여러분 모두 사랑해요 ><
첫댓글 이거이거 당췌 로맨스가 어떻게 되는건지......ㅠㅠㅠㅠㅠㅠㅠㅠ
호호호호호호호호 *_* 아직 로맨스 라인을 판단하시기에는 이르지요~.~ ㅋㅋㅋㅋㅋㅋ 계속지켜봐주세요~ 덧글 감사해요 ^ㅇ^
앗 그럼 후가 거기있는거 안다고 한 말은 동이를 가르키는 말이 아니였나요ㅠ3ㅠ? 동이가 후를 완쥰 좋아하구있나보누ㅔ요..요즘 은월이보다 동이한테 더 끌리구 호감이에효ㅋ 가튼 여자루 왠지 안됫다구 할ㄲㅏ..설용이 몬 일을 또 꾸밀까보ㅏ ㅇ1젠 겁디 다 나네yo..피가 진하다니 뭔가 또 사건이 터질것같아서 가슴이 콩닥콩닥 두근세근 ㅎㅏ눼요ㅋ 다음편 기대하고있을게욤ㅋ
그렇죠, 동이가 있는줄은 모르고 그 망나니 사내가 있는줄 알았던거져~ 그나저나 메인 주인공은 은월이인데 (동이도 메인이긴 하지만/ㅁ/) 너무 동이만이뻐하지는 말아주셔요 ㅋㅋㅋㅋㅋㅋㅋ언제나 쉣시영구님의 덧글에 힘을 얻습니다!!!
묘한 사이네요 넷. 전 제발 동이가 샛길로 빠져들지 않기만을 기도하겠습니다. 솔직히 제가 원하는 커플은 은월-후,동-건 후후... 뭐 나중의 일이니깐요.
흠흠 그렇게 꼭 집어서 말씀하시면 저는 어찌해야할지 ☞☜... ㅋㅋㅋㅋㅋ 이번에도 덧글달아주셧네요! 너무 반가워요~ 동이의 샛길이라면 어떤걸 말씀하시는지 ㅇ.ㅇ ??
흐음.. 동이가 후를 좋아하는군요 ㅠㅠ 하지만 전 동이를 애끼기 때문에.. 동이가 동이를 좋아해주는 사람과 잘됐으면 해요 ㅎㅎ
후도 동이좋아해여ㅠㅠ아직은모르는일인거져~.~ㅋㅋㅋㅋ덧글감사해요^.^*
안.돼!!!!!!!!!!!!!!!!!!!!!!!!!!!!!!!!!!!!!!!!!!!!!!!!!!!!!!!!!!!!!!!!!!!!!!!!!!!!언니의속셈을잘알규잇저..후가은월이를좋아하지마ㅏ으능..ㅠㅠ동이가후를좋아하는거지????그럼이대로흘러가...승호가동이를조아하게해선안댄담ㄴ말야..그런다만랴..ㅠㅠㅠ헝
야 조용히하지못해?!!!!!!!!! 그런건 너 혼자 키핑해두란 말야 다른사람까지 오해하게하지말고 ㅋㅋㅋㅋㅋㅋㅋ 원래 사랑이란건 움직이는거야... 그리고 지금 오편밖에 안됐는데 너 자꾸이럴텨?!! 빨리 무법자의 가변 6편이나 때려줘 아니면 나한테 업쪽을 안준겨? 왜 나한테 업쪽안줘!!! 비록 내가 쪽지를 잘 보지 못하고지우기는 하지만 ㅋㅋㅋㅋㅋㅋㅋㅋ 여튼 너 내 소설의 러브라인을 멋대로 정하지말도록... ㅋㅋㅋ
...................뿡뿡뿡 넘넘 재밌어용 근데 왜 이런데에서 끊는거야욤 ㅠㅠㅠㅠㅠ 어찌 되었든!!!! 재밌습니당
처음뵙는분!!!! 독자분들의 애간장을 나름대로 애끓게 만들부분이라고 생각해서 끊었는데 마음에 안드세요? 다음편이 기대되지 않으세요?ㅎㅎㅎㅎㅎ 덧글 감사하구요 다음에도 덧글부탁드려요!
흠 건은 동이좋아는건가요?아님나중에 은월이를좋아하게되나요?아궁금해영ㅠㅠ
앗 그런 일급비밀은 말 못해드려요 >< 다만 계속 지켜봐주신다면 뭐... 제가 말안해도 저절로... 덧글 감사드려요!! 비,눈오는날 님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할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ㅎㅎㅎㅎ은월이는내스탈이에염ㅎㅎ동이가건이를좋아하게될줄알았는데흠...후를좋아하는거엿군요...ㅎㅎㅎ건이와은월이와동이의삼각관계에후가은월이를좋아한다고생각했느데..ㅎㅎㅎ아닌건가용~~ㅎㅎ
어머 정말요? 이거 왠지 기분좋은데요~ 독자분들의 예상 러브라인대로 제가 쓰고 있지 않다는 점... 글쓴이로서 굉장히 흐뭇흐뭇 ㅋㅋㅋㅋㅋ 덧글 감사하구요 좋은 저녁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