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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출처: 여성시대 데본아오키
어느 날 오후 루이즈는 깜짝 놀라 잠에서 깬다. 너무도 깊은 잠이었다. 깨어날 때 슬프고, 방향을 잃고, 몸에 울음이 가득 차는 그런 잠. 너무도 깊고 어두운 잠, 자기가 죽는 것을 보는 잠, 식은땀으로 흠뻑 젖는 잠, 자고 났는데 오히려 녹초가 되는 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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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걷고 싶은 욕구가 하루하루 조금씩 더 커져가는 것이 느껴졌고, 거리로 나가 미친 여자처럼 울부짖고 싶었다. 때로 그녀는 속으로 '애들이 날 산 채로 잡아먹는구나.'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녀는 남편을 시기했다. 저녁이면 그녀는 문가에서 애타게 그를 기다렸다. 아이들이 너무 울어댄다고, 아파트가 너무 좁다고, 한시도 쉴 틈이 없다고, 한 시간씩 푸념을 늘어놓곤 했다. 마침내 남편이 입을 열 수 있게 돼서 한 힙합 그룹과 아주 멋지게 녹음을 마쳤다는 말을 해주면 그녀는 "당신은 좋겠네."라고 쏘아붙였다. 그의 대답은 이랬다.
"아니지, 당신이 좋은 거지. 난 애들이 크는 걸 너무나 보고 싶은데."
이 게임에서 이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밤이면 폴은 그녀의 옆에서, 하루 종일 일한 뒤 마땅히 푹 쉬어야 할 자의 깊은 잠을 잤다. 원망과 서운함이 그녀의 마음을 갉아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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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이런저런 책무와 완수해야할 계약, 잊으면 안될 약속의 연속이 되었다. 그들의 삶은 용량을 초과해서, 남은 자리는 겨우 잠을 위한 것일 뿐, 무언가를 응시할 자리는 전혀 없다.
우리가 지금까지 몇 번이나 사랑을 나누었는지 헤아려보았다. 사랑을 할 때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이 우리 관계에 보태어진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동시에 쾌락의 행위와 몸짓이 더해지는 만큼 확실히 우리는 서로 조금씩 멀어져가고 있었다. 우리는 욕망이라는 자산을 서서히 탕진하고 있었다. 육체적인 강렬함 속에서 얻은 것은 시간의 질서 속에 사라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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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것들이 서서히 스러지기 시작한다. 살아 있는 텍스트였던 그것들은 결국은 찌꺼기와 작은 흔적들이 되어버릴 것이다. 언젠가 그 사람도 다른 사람들처럼 내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리겠지.
"트라우마에 관한 한 우리는 주체가 아니라 대상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나는 트라우마를...'이라는 문장은 애초에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직 '트라우마는 나를...'이라고 겨우 쓸 수 있을 뿐이다. 한 인간이 어떤 과거에 대해 '주체'가 아니라 '대상'이 되어버리는 이런 고통이 얼마나 참혹한 것인지 당사자가 아닌 이들은 짐작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이 공부하고 더 열심히 상상해야 하리라. 그러지 않으면 그들이 '대상으로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잊는다. 그걸 잊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말한다. 이제는 정신을 차릴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더 이상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지 말라고. 이런 말은 지금 대상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주체가 될 것을, 심지어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주체가 될 것을 요구하는 말이다. 당신의 고통이 나를 불편하게 한다는 말은 얼마나 잔인한가. 우리가 그렇게 잔인하다.
세상에 아무것도 아닌 것은 없는데, 다른 친구들은 무언가 됐거나 되고 있는 중인 것 같은데, 저 혼자만 이도 저도 아닌 채,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불안해져요. 아니 어쩌면 이미 아무것도 아닌 것보다 더 나쁜 것이 되어 있는지도 모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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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지난 10년간 여섯 번의 이사를 하고, 열 몇 개의 아르바이트를 하고, 두어 명의 남자를 만났어요 다만 그랬을 뿐인데, 정말 그게 다인데. 이렇게 청춘이 가버린 것 같아 당황하고있어요. 그동안 나는 뭐가 변했을까. 그저 좀 씀씀이가 커지고, 사람을 믿지 못하고, 물건 보는 눈만 높아진, 시시한 어른이 돼 버린 건 아닌가 불안하기도 하고요. 이십대에는 내가 뭘 하든 그게 다 과정인 것 같았는디, 이제는 모든 게 결과일 따름인 듯해 초조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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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내가 죽어가고 있다는 걸 모른다는 고립감. 그리고 그걸 누구에게도 전하지 못한다는 갑갑함이 밀려왔다.
쓰러진 아버지를 발견하고 병원에 가서 형직적인 위세척을 했지만 아버지가 살지 못할 걸 마을 사람 모두가 알았다. 마을에는 그라목손을 먹고 죽는 사람들이 주기적으로 꼭 있었다. 그라목손은 어떤 억센 것도 살아남지 못하게 하는 맹독성 식물 전멸제였다. 일반 지초제와는 비교도 안되게 효과가 좋아 일손이 부족한 마을에서 효자 노릇을 제대로 했다. 마을 어디에든 그라목손이 뿌려져 있었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누누이 일렀다. 눈둑에 난 쑥 같은거 함부로 뜯어 먹으면 큰일 난다고. 그러면서도 그들은 막다른 골목에 서면 그라목손에 의지해 죽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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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선으로 해가 진다. 나무의 그림자가 맞은편 산을 뒤덮는다. 하루의 빛이 사라지기 직전, 모든 것들이 가장 반짝이는 순간. 목련은 드디어 괄약근이 완전히 풀어지면서 움직임이 멎는다. 포개진 꽃잎이 저녁을 준비하는 오후의 막바지. 언덕 아래로 밀잠자리가 걷히고 구름이 새털처럼 풀어지며 하늘을 채운다. 귀를 후비는 괴성만이 능선을 타고 미끄러진다. 마을 어디에서나 나무와, 나무에 매달려 죽은 목련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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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련은 몸을 뒤로 돌린 채 칠흑을 응시한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눈에 눈물이 차오른 채로 언제까지나.
흰 눈 위에 죽어 있는 까마귀는 아름답기까지 했다. 요코는 숨을 죽이고 까마귀를 내려다보았다. 살아 있는 까마귀가 한마리도 없는 것이 몹시 쓸쓸했다. 눈 속에 묻혀 죽어 있는 까마귀도 있었다. 눈 밑의 까마귀를 생각하자, "쓸쓸해." 라고 요코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자기의 죽음과 까마귀의 죽음과는 도대체 어던 차이가 있을까 하고 요코는 생각해 보았다. 인간의 죽음이나 까마귀의 죽음이나 모두 똑같다고 생각하기는 어딘지 쓸쓸했다.
'인간은 많은 추억을 안고 죽는구나.'
어떤 추억을 간직하고 죽는다면 그 추억은 싸늘한 시체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 있지 않을까 하고 요코는 생각했다.
요코는 조용히 눈 위에 앉았다. 눈은 아침 햇살에 반짝이면서 옅은 분홍빛을 띠고 있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눈 속에서 죽을 수 있다니.'
'얼마나 고통스럽게 죽을까?'
만약 고통스럽게 죽어 죄가 없어진다면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좋다고 생각하면서, 요코는 눈 위에 드러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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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모든 문제의 해결일까?'
마사키의 자살 또한 그가 말한 대로 개인의 존재 가치는 이 세상에서 무와 같다고 느끼는 문제의 해결은 되지 못한다.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개인의 인격이나 가치는 무시당한다. 그 사람이 아니면 안 되는 분야는 점점 좁아질 뿐이다.
'죽음은 해결이 아니라 문제의 제기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특히 자살은 그렇다.'
그녀는 놀라울 만큼 호기심이 없었고, 그 덕분에 어느 상황에서도 평정을 지킬 수 있는 것 같았다. 새로운 공간에 대한 탐색도 없었으며, 당연할 법한 감정의 표현도 없었다. 그저 자신에게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충분한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그녀의 내면에서는 아주 끔찍한 것,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어, 단지 그것과 일상을 병행한다는 것만으로 힘에 부친 것인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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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각자의 열정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이 공간에서 누가 가장 고통스러운지를 묻는 것은 분명히 우문일 것이다. 그러나 현답을 알려줄 누군가를 향해 이 우문을 그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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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서 끝없이 새어나오는 선혈이 그것을 증거한다고 믿었을 때 그녀는 이미 깨달았었다. 자신이 오래 전부터 죽어 있었다는 것을. 그녀의 고단한 삶은 연극이나 유령 같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그녀의 곁에 나란히 선 죽음의 얼굴은 마치 오래 전에 잃었다가 돌아온 혈육처럼 낯익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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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그녀는 이 순간을 수엇이 겪은 듯한 기시감을 느꼈다. 고통에 찬 확신이 마치 오래 준비된 것처럼, 이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그녀 앞에 놓여 있었다.
이 모든 것은 무의미하다.
더 이상은 견딜 수 없다.
더 앞으로 갈 수 없다.
가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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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은 정상적인 인간인가. 또는 제법 도덕적인 인간인가. 스스로를 제어할 수 있는 강한 인간인가. 확고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이 질문들의 답을 그는 더이상 안다고 말할 수 없게 되었다.
인간은 간혹 충족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욕망을 위해 일생을 바쳐 버리기도 한다. 그것을 어리석다고 비웃는 자는 필경, 인생에 대한 방관자에 불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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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래프는 어느 틈에 길 한복판에 다리를 벌리고 서서는, 끝없이 이어지는 자동차와 인파를 가랑이 사이로 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이 갓파마저 발광을 한 건가 싶어 놀라서 래프를 일으켰습니다. "미쳤나? 이게 무슨 짓인가?" 하지만 래프는 눈을 비벼 가며 뜻밖에도 침착하게 대답을 했습니다.
"아뇨, 너무 우울해서 거꾸로 세상을 바라본 거예요. 그래봤자 마찬가지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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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보는 자의 귓가에 자연히 엄청난 울부짖음 소리가 전해져 오지 않을까 싶을 만큼, 그림은 입신의 경지였습니다. 아아, 바로 이것이지요. 이것을 그리기 위해 그 끔찍한 일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또 그렇지 않았더라면 아무리 요시히데라 할지라도 어떻게 그런 생생한 나락의 고통을 그릴 수 있었겠습니까? 그 사내는 이 병풍 그림을 완성한 대신 목숨을 끊을 만한 비참한 일을 당했습니다. 말하자면 이 그림의 지옥은 이 나라 제일 화가 요시히데, 자신이 언젠가 떨어질 지옥이었던 것입니다.
절망적이었다. 나는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는데 거기는 수영장도 바다도 아니었다. 나는 분명히 익사하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런 하찮은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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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근면하고 쾌활한 워킹클래스였다. 그건 그들이 자신의 존재 이유나 가치에 아무런 회의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들은 인생을 바쳐 죽도록 일했고 그리하여 살아남은 자신들을 무척이나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나와는 완전히 달랐다. 일단 그들은 책을 읽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책만 읽었다. 그들은 쾌활했다. 그리고 나는 우울했다. 그들은 아주 잘 잤다. 그리고 나는 불면증에 시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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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나는 책을 너무 많이 읽었던 것이다. 결국 나는 당황했고, 상처를 받았고, 바보같이 울음을 터뜨렸다. 그 모든 갈 견디기에 나는 지나치게 낭만적인 인간이었다. 그래서 난 도망쳤고, 붙잡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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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두려웠던 건 내 두려움의 원인을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뭘 두려워하고 있는 거지? 아마도 그걸 찾는 데 난 젊음을 통째로 소모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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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처럼 나는 여전히 누군가, 아니 무언가가 날 구해주길 바라며 최악의 선택을 하고 있었다. 어떤, 그러니까 신 같은 존재가 날 여기서 꺼내어줄 거라고, 만약 그런 게 있다면. 분명히 그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 난 그렇게 기적을 기다리며 바보 같은 짓을 멈추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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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봄이 왔다. 겨우내 굳어 있던 도시가 깨어났다. 북쪽에서 날아온 흙먼지들이 깨어난 도시를 가득 채웠다. 햇살 아래 드러난 모든 것이 추했다. 도시 어디에도 아름다움은 없었다. 봄은 서울에 어울리는 계절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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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끝난 뒤에도 삶은 이어졌다. 그것이 영원히 지속되리라는 걸, 우리는 마침내 깨달아버렸다.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로, 더이상 어떤 기쁨도 놀라움도 설렘도 없이, 영원히, 이어질 것이다. 끝내 우리는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 채로 늙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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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자꾸 그런 생각이 들어. 그냥 그렇게 생각하면 안 돼? 바보같이 살면 좀 안 돼? 꼭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 해? 그냥 꿈속에서 살면 좀 안 돼? 어떤 건 그냥 아름답다고 하면 안 돼? 아름다운 거 맞잖아? 느껴지잖아? 거짓말이 아니잖아? 그런 삶이 정말 그렇게 나쁜 거야? 그렇게 살면, 사람들 말대로 정말 비참하게 살다가 고통 속에서 외롭게 죽어가는 거야? 무서워. 다들 그렇게 말하잖아.
우리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사랑할수록 죄가 되는 날들. 시들 시간도 없이 재가 되는 꽃들. 말하지 않는 말 속에만 꽃이 피어 있었다. 천천히 죽어갈 시간이 필요하다. 천천히 울 수 있는 사각이 필요하다. 품이 큰 옷 속에 잠겨 숨이 막힐 때까지. 무한한 백지 위에서 말을 잃을 때까지. 한 줄 쓰면 한 줄 지워지는 날들. 지우고 오려내는 것에 익숙해졌다. 마지막은 왼손으로 쓴다. 왼손의 반대를 무릅쓰고 쓴다. 되풀이되는 날들이라 오해할 만한 날들 속에서. 너는 기억을 멈추기로 하였다. 우리의 입말은 모래 폭풍으로 사라져버린 작은 집 속에 있다. 갇혀 있는 것. 이를테면 숨겨온 마음 같은 것. 내가 나로 살기 원한다는 것. 너를 너로 바라보겠다는 것. 마지막은 왼손으로 쓴다. 왼손의 반대를 바라며 쓴다. 심장이 뛴다. 꽃잎이 흩어진다. 언젠가 타오르던 밤하늘의 불꽃. 터져 오르는 빛에 탄성을 내지르며. 나란히 함께 서서 각자의 생각에 골몰할 때. 아름다운 것은 슬픈 것. 슬픈 것은 아름다운 것. 내 속의 아름다움을 따라갔을 뿐인데. 나는 피를 흘리고 있구나. 어느새 나는 혼자가 되었구나. 되돌아보아도 되돌릴 수 없는 날들 속에서. 쉽게 찢어지고 짓무르는 피부. 멍든 뒤에야 아픔을 아픔이라 발음하는 입술. 모래 폭풍은 언젠가는 잠들게 되어 있다. 다시 거대한 모래 폭풍이 밀려오기 전까지. 너와 나라는 구분 없이 빛을 꽃이라고 썼다. 지천에 피어나는 꽃. 피어나면서 사라지는 꽃. 하나 둘. 하나 둘. 여기저기 꽃송이가 번질 때마다. 물든다는 말. 잠든다는 말. 나는 나로 살기 위해 이제 그만 죽기로 하였다.
고군분투하고 있는 가엾은 사람들, 자기도 모르는, 각자의 인생을 살고 있는 수십억 명의 사람들을 다 감싸 안는 것 같은 슬픔이었다. 매일매일이 너무나 힘들 때에도, 상황이 너무나 비참할 때에도, 사방에서 사람들이 살기 위해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 생각하면 느끼게 되는 경탄과 경외심이 뒤섞인 그런 슬픔이었다. 인생이란 너무 슬프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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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인생이 그에게 용서해달라고 빌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인생을 원망하지 않도록 온갖 아름답고 근사하고 바라던 물건들로 그를 질식시키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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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음. 케일럽과의 보낸 시간의 또 다른 잔재. 몇 년 동안 그는 울음을 통제할 수 있었지만, 그날 밤 이후의 그는 늘 울고 있거나 울기 일보 직전이거나 울지 않으려고 기를 쓰는 상태 중 하나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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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분만.” 주드가 말하며 이불 밑으로 들어왔고, 윌럼은 그의 양복을 구기지 않으려고 조심하며 팔로 그를 안고 눈을 감았다. 이것 또한 그는 사랑했다. 그 순간 주드를 행복하게 해주고 있다는 게 좋았다. 주드가 애정을 원하고 있고, 그걸 주도록 허락받은 사람이 자기라는 게 좋았다. 이건 오만일까? 자만일까? 자축일까?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상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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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이런 점이, 여전히 압도당할 수 있는 능력이, 성인이 되어서도 인생에서 놀라운 경험이 계속 주어질 거라는, 대단한 시절은 아직 오지 않았다는 믿음이 부러웠다. 처음 성게 알을 먹었을 때 그들의 반응을 보면서 조바심과 강렬한 질투를 느꼈던 기억도 난다. 어른이면서 여전히 세상의 기쁨을 발견할 수 있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나는 내 안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살고자 했을 뿐이다. 그것이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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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지금은 안다.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을 가는 것보다 사람이 더 싫어하는 일은 없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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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같은 심연으로부터 비롯된 시도이며 투척이다. 하지만 각자가 자기 나름의 목표를 향하여 노력한다. 우리가 서로를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삶의 의미를 해석할 수 있는 건 자기 자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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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애원해도 안 되고 요구해서도 안 됩니다. 사랑은 그 안에 확신하는 힘이 있어야 해요. 그러면 사랑은 더 이상 끌려가지 않고 끌어당기게 되죠. 싱클레어, 당신의 사랑은 내게 이끌리고 있어요. 그 사랑이 나를 끌어당기면 나는 기리고 갈 거예요. 나는 나 자신을 선물로 주고 싶지 않아요. 이끌리기를 원해요.
나는 다케오가 나간 후에도 울부짖지 않았다. 일도 쉬지 않았고 술도 마시지 않았다. 살이 찌지도 야위지도 않았고,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긴 시간 수다를 떨지도 않았다. 무서웠던 것이다. 그 중 어느 한 가지라도 해버리면 헤어짐이 현실로 정착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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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하지 않은 것은 부엌뿐. 나머지는 전부, 전부 변했다. 긴장감도 없었다. 시간이 많이 흐른 것이다. 슬프지는 않았다. 나는 옛날보다 더욱 다케오를 좋아하고 있었다. 엄마처럼, 친구처럼, 그리고 그래도 역시 연인처럼
아무래도 이젠 도저히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은 초조감. 이런게 바로 불안이라는 감정일까? 가슴에 고통스러운 파도가 몰아쳐 마치 소나기가 그친 하늘에 허둥지둥 흰 구름이 잇달아 질주해 나가듯 내 심장을 옥죄었다 풀었다 하고, 맥박과 호흡이 흔들리면서 눈앞이 가물가물 어두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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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다는 게 슬퍼서 견딜 수 없어. 외롭다느니 쓸쓸하다느니 그런 한가로운 게 아니고, 슬퍼. 음침한 탄식의 한숨이 사방 벽에서 들려올 때, 자신들만의 행복 따위 있을리가 없잖아? 자신의 행복도 영광도 살아있는 동안엔 결코 없다는 걸 알았을 때, 사람은 어떤 기분일까? 노력, 그런 건 그저 굶주린 야수의 먹잇감이 될 뿐이지. 비참한 사람이 너무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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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가는 사람은 아름답다. 산다는 것. 살아남는다는 것. 그건 몹시 추하고 피비린내 나는, 추접스러운 일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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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 아아, 인간의 생활에는 기뻐하고 화내고 슬퍼하고 미워하는 여러 가지 감정이 있지만, 그래도 그런 건 인간 생활에서 겨우 1퍼센트를 차지할 뿐인 감정이고 나머지 99퍼센트는 그저 기다리며 살아가는 게 아닐까요. 행복의 발소리가 복도에 들리기를 이제나저제나 가슴 저미는 그리움으로 기다리다, 텅 빈 공허감. 아아, 인간의 생활이란 얼마나 비참한지!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편이 좋았겠다고 모두가 생각하는 이 현실. 그리고 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헛되이 뭔가를 기다려요. 너무 비참해요. 태어나길 잘했다고, 아아, 목숨을, 인간을, 세상을 기꺼워해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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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다만 제 생명이 이런 일상생활 속에서 마치 파초 잎사귀가 떨어지지 않고 썩어 가듯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선 채 절로 썩어가는 모습이 생생하게 예감되는 것이 두렵습니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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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 그걸 도무지 알 수 없어요. 살고 싶은 사람만 살면 돼요. 인간에게는 살 권리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죽을 권리도 있을테죠. 나의 이런 생각은 전혀 새로울 게 없고 너무나 당연해서 그야말로 근원적인 사실인데도, 사람들은 이상하게 두려워하면서 분명하게 대놓고 말하지 않을 뿐입니다.
"언젠가 당신은 그를 사랑하지 않게 될 거예요. 그리고 언젠가 나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게 되겠죠."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고독해지겠죠. 그렇게 되겠죠. 그리고 한 해가 또 지나가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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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 이건 말이 안 돼요. 우리 모두 무슨 짓을 한 거죠?......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 이 모든 것에 무슨 의미가 있죠?"
조제가 상냥하게 대답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안 돼요. 그러면 미쳐버리게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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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감히 '그녀가 나를 사랑했던 시간'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럴 만큼 그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은 사랑을 주는 사람이고 그녀는 사랑을 받는 사람이라고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가까스로 정립한 다음과 같은 명제에서 쓰라린 만족감을 이끌어냈다. '그녀가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은 결코 할 수 없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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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조제에게 이렇게 말할 생각이었다. '당신이 필요해요.' 그 말은 진실일 테지만,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할 터였다. 그가 그녀에게 그들의 사랑에 대해 말하자, 그녀는 그에게 사랑의 짧음에 대해 말했었다. "일 년 후 혹은 두 달 후, 당신은 날 사랑하지 않을 거예요." 그가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 오직 그녀, 조제만이 시간에 대한 온전한 감각을 갖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격렬한 본능에 떠밀려 시간의 지속성을, 고독의 완전한 중지를 믿으려고 애썼다. 그리고 그 역시 그들과 같았다.
우리가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는 거의 모든 말은 백인, 남성, 중산층, 성인, 비장애인, 이성애자의 시각에서 구성된 것이다.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언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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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은 그렇게 거창하거나 '무서운'것이 아니다. 이제까지 잘 들리지 않았던 여성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보자는 것이다. '다른 목소리'는 혼란이 아니라 다양성과 창조력의 원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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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지배 이데올로기나 대중매체에서 떠드는 것 이상을 알기 어렵다. 알려는 노력, 세상에 대한 애정과 고뇌를 유보하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타인에게 상처를 준다. 한나 아렌트가 말했듯이, 사유하지 않음. 이것이 바로 폭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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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는 피해자가 직접 말하는 것, 사회적 약자가 기존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을 참지 못한다. 여성뿐만 아니라 10대, 동성애자, 장애인, 이주 노동자, '학벌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 견디지 못한다. 이들이 지배 규범에서 벗어난 다른 목소리라도 내려 하면, 그 작은 소리마저 폭력이라며 흥분한다.
모든 금지된 것은 유혹이고 아름다움이다. 죽음조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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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에게 주제를 알라고 충고할 때 대개의 경우 주제는 바로 외모를 뜻한다. 그 얼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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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은 불행한 여자들이 모두 희생이나 인내를 진실로 미덕이라고 믿었을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 그녀들은 단지 힘이 없었을 뿐이다. 생각해 보라. 힘 있고 권력 있는 자들이 희생과 인내를 감수한 적이 과연 있었던가. 그 두꺼운 역사책 어디에도 그런 기록은 없다. 약자가 택할 길은 희생이나 인내밖에 아무것도 없는 세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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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뿐이 아니다. 언론이 즐겨 사용하는 말에 '사회 지도층 인사'라는 것이 있다.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는 영 비위가 상한다. 단언하건대, 사회를 어지럽히는 인사는 있을지언정 사회를 지도하는 인사는 없다. 대단찮은 학식이나, 상업주의 언론에 이름을 팔은 속된 명성으로 자신을 지도층 인사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나는 가장 혐오한다.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난다.
그 누구도 어떤 다른 사람을 지도할 수 없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방식대로 살뿐이다. 선각자는 있어도 지도자는 없는 것이다. 자신을 내던져 새로운 것을 깨우치는 일은 존중받을 수 있으나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은 채 남을 지도하려 드는 일은 조롱받아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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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어지면 안 된다. 떨어질 수 없다. 떨어지면 위험하다.
공중에 높다랗게 줄을 늘어뜨리고, 하얀 버선발로 줄을 타는 곡예사의 생각은 오직 한 가지다. 떨어질 수 없다.
외줄 타기에는 절대 금기가 하나 있다. 줄 아래를 보지 말 것. 아래를 내려다보면 떨어지고 만다. 까마득한 그 아래에 실패가 있는 것이다. 곡예사의 세계는 외줄에 닿아 있는 두 발을 경계로 그 위다. 두 발 아래는 아닌 것이다.
그는 세계의 중심을 버선발에 모은다. 외줄의 팽팽한 긴장에 목이 타는 순간에도 그는 자신의 절망을 호흡한다. 들여 마신 절망은 어쩔 수 없이 희망의 모습으로 다시 버선발에 모인다. 그에게 희망은 절망의 다른 옷이다.
삶은 곡예다.
맞는 말이다. 삶이란 아무리 다른 수식을 달아도 인수분해를 해 버리면 곡예의 곱하기, 또 곱하기인 것이다. 누구의 삶도 분해할 수 있다.
외줄 타기의 곡예사가 외줄과 대결하듯이 인간도 삶의 외줄과 대결한다. 이 대결에서도 절망은 버려야 할 대상이다. 대결자들은 멀리는 보지만 굴러떨어질 나락을 보아서는 절대 안 된다. 이미 대결은 시작되었고, 남은 것은 이기는 일뿐이다. 다른 것은 없다.
_강민주의 노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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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의 동물적인 욕정, 노출된 여자들은 모두 노리개로 파악하는 공공연한 매춘, 구애의 권리는 남성에게만 있는 것으로 아는 이 사회의 고정 관념을 나는 역으로 깨부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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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만, 아주 조금만 깨어나면 되는 것이다. 어려울 것은 아무것도 없다. 갖춰야 할 사전 지식이나 배움도 필요 없다. 단지 아주 조금만 이 세상을 바로 보면 된다. 남자가 여자의 위에 있다는 논리가 허위사실의 유포였다는 것만 알아도 반은 이루어지는 것이다. 언제나 시작이 어렵다는 말은 진리이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도 역시 새겨둘 만하다. 누군가 시작을 해야 한다. 언제까지나 책상 앞의 토론으로 머물러 있을 것인가. 언제까지나 시기상조론에 파묻혀 있을 것인가. 기회는 누군가 시작할 때, 바로 그때가 적당한 시기인 것이다. 나는 많은 것을 원하지 않는다. 나는 단지 하나의 시작을 보여주고 싶을 뿐이다. 그래서 시작했다. 그러므로 나는 이미 반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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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건설한다. 이것이 운명론자들의 비굴한 굴복과 내 태도가 다른 점이다. 나는 운명을 거부한다. 절망의 텍스트는 그러므로 나의 것이 아니라 당신들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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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우리 모두가 주인공인 비극 말이다. 한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에 맞춰, 비극을 상연하는 무대의 커튼은 스르르 위로 말려 올라간다. 죽음만이 그 커튼을 다시 내릴 수 있는 지겨운 공연. 앙코르도 받을 수 없는 단 한 번의 공연.
할 수 있는 일은 이 비극이 황홀해지도록 노력하는 길밖에 없다. 사람마다 가치가 다르듯이 황홀함에 다른 척도도 물론 다르다. 모두 자기 방식대로 내용을 완성하고 자기주장대로 형식을 이끌어간다. 평가는 오직 신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평가는 신이 내린다 해도 절정을 느끼는 것은 삶의 주인공인 바로 우리다. 황홀함은, 다른 모든 것은 다 절대자가 관장한다 하더라도, 그 감정만은 우리가 소유한다. 인간이 움켜쥘 수 있는 유일한 것. 그래서 모든 비극은 황홀감을 지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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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으로는 열심히 인신매매를 성토하면서 바로 그런 수단으로 공급된 밤의 여자들을 끼고 앉아 세상을 논하는 유능한 여러분들. 술자리에서도 어김없이 집에 전화를 걸어 내 딸과 마누라가 무사한지 잘도 챙기는 착한 여러분들.
기회만 닿으면 남의 부인이건 남의 귀한 외동딸이건 가리지 않고 성의 파트너로 삼고자 하는 여러분들의 그 고귀한 기회균등의 정신 앞에서 저는 참으로 보잘것없는 일 하나를 해치운 것에 불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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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찍는 카메라가 있다면, 짓눌리고 억압받는 정신을 촬영하고 인화할 수 있는 과학이 있다면, 렌즈를 들이대고 분명히 찍어두어야 할 여성의 깊은 상흔은 일일이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어디에서 어디까지를 찍어야 상처가 증거가 되는지 알 수 없을 만큼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억압은 고요하고 복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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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그대로 해석하시면 됩니다. 나는 억압받는 자들 쪽에 서 있어요. 진실을 향한 끝없는 모색과 투쟁이 결국은 이 세상의 불평등을 없애려는 노력인 것은 당신도 알고 있겠지요."
나는 글을 쓴다고 생각하면서도 한 번 도 글을 쓰지 않았다. 사랑한다고 믿으면서도 한 번도 사랑하지 않았다. 나는 닫힌 문 앞에서 기다리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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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아직도 죽고 싶을 만큼 열렬했고, 그것은 이젠 위로할 길 없는 희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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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낮에 대해서는 잘 기억하지 못한다. 햇빛이 모든 색깔을 퇴색시키며 짓누른다. 밤에 대해서는 잘 기억한다. 밤의 푸른빛은 하늘이 더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 하늘은 세상의 본질을 덮고 있는 모든 불투명함의 저편에, 그 너머에 있다. 나에게 하늘은 밤의 푸른빛을 가로지르는 순수한 광채와 모든 색깔을 초월한, 차갑게 녹아드는 빛을 떠오르게 한다.
나는 쉽게 흥분하지 않고, 분노하지 않고, 놀라지 않는다. 쉽게 미워하거나, 기분 나빠하거나, 슬퍼하거나, 초조해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일들에 대해 그럴 수 있다고, 최악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쉽게 감동하지 않고, 즐거워하지 않고, 기뻐하지 않는다. 무엇에도 마음을 잘 싣지 않고, 어차피 모든 것이 지나가버릴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이렇게 되어버린 것은 내 탓이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고 있지만, 실은 내 어딘가가 훼손되었으며 마음을 잃어버렸음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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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게 화무십일홍인 거라. 후회하고 원망하고 애끓이면 뭐 해. 좋은 날도 더러운 날도 다 지나가. 어차피 관 뚜껑닫고 들어가면 다 똑같아. 그게 얼마나 다행이냐.”
어머니는 밥을 먹고 있는 내 등을 쓰다듬었다. 밥이 가득한 입 속으로 어머니의 말을 따라 중얼거렸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이 복잡했던 날들을 생각했다. 차마 다 기억할 수도, 돌이킬 수도 없는 그것들은 명백히 지나가버렸고, 기세등등한 위력을 잃은 지 오래다. 살아 있어 다행이다. 다행이라 말할 수 있어 정말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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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으로 맞은편 아파트의 불빛들이 보였다. 거실에는 스탠드 하나만 켜져 있었고 우리가 말을 멈추자 주위는 더 어둡고 고요하게 느껴졌다. 자정이 넘은 시각에 연호와 둘이 거실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이 낯설었다. 낯설고 이상한 감정. 적절하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이 시간이 영원히 지속되길 바라는 순간이 있다. 이런 기분을 전에도 느껴본 적이 있는데, 그게 언제였더라.
첫댓글 우와 발췌해준 문장들 다 넘 좋다… 읽어본 소설들도 여시가 발췌한 문장들로 다시 보니까 새로워보여…!! 신형철 평론집 제목만 많이 들어보고 읽어보진 않았는데 꼭 읽어봐야겠어…
비행운 예전부터 계속 읽어야지 생각만ㅠ... 보고싶은 책 많다... 내가 읽었던 책도 이렇게 보니까 또 느낌이 다르네! 고마워
와 너무 좋다
여시 너무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