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녀, 기황후 貢女 奇皇后
“모진 비바람에 쓸리고 할퀴어 마모된 돌멩이가 더욱 야물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36
“은아. 저 말이야,”
“뭔데 그렇게 뜸을 들여요.”
은이 언주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나란히 짐을 안고 걸어가는 두 사람은 황제궁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은은 이제 더 이상 찻잎과는 상관없는 황제궁 소속으로, 말하자면 이례적인 강등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언주는 그런 은을 도와 짐을 옮겨주고 있는 중이었다.
“이번에 새로 폐하의 수행겸 호위로 오신 ‘지원’ 나으리 말이야.”
“아, 네.”
“그 분, 너랑 아는 사이니?”
앞을 향하던 은이 문득 고갤 돌려 언주를 본다.
“그건, 왜요?”
“아니. 아니면 됐어.”
걸음을 재촉하는 언주의 곁으로 따라붙으며 은이 말했다.
“고려에서부터 알고 지냈어요. 어렸을 적부터 저를 많이 챙겨주셨고, 저도 많이 따랐구요. 친 오라버니는 아니지만 그만큼 돈독했죠.”
“오래됐구나.”
“네. 정말, 오래됐어요.”
언주는 슬며시 은의 얼굴을 본다. 금세 추억에 빠져들어서는 깊은 눈을 하고 미소 짓고 있는 은의 얼굴을. 그녀의 말 대로다. 친 오라비는 아니라지만, 이 먼 땅 원에서 그의 존재는 은에게 분명 친 오라비 이상일 터였다. 언주는 깊이 이해했다는 듯 혼자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디들 가는 길인 게냐.”
저 앞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든 은이, 진 대인의 모습을 확인했다. 대인의 모습이나 어투에서 보아, 마치 이곳에서 제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했다. 은이 언주를 향해 눈짓을 주자 언주가 은의 짐을 받아들고 먼저 걸음을 앞세웠다. 언주가 시야에서 사라지기를 기다려 진 대인이 먼저 입을 뗀다.
“황제궁으로 옮기게 되었다지.”
“그리 되었습니다. 하온대, 제게 무슨 용건이시라도.”
고 환관의 저택에서 처음, 추문장에서 두 번째, 그리고 그 뒤로 오늘 세 번째로 대면하는 얼굴이었다. 진 대인은 늘 그렇듯 연신 웃는 얼굴이었고, 은은 표정 없는 얼굴로 그런 그를 마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고 환관의 당부를 되새겼다. 언제 어느 때라도 진 대인을 대면할 때에는 인간의 모습을 한 능구렁이를 대한다 생각하라던 말을.
“같이 있던 아이는 친한 동무인 모양이지?”
“그렇습니다.”
“그래. 절친한 벗이라도 있어야 이 험한 생활을 버텨낼 의지가 되겠지.”
또 무슨 억설을 늘어놓으려는 심산인가보다, 하고 은은 마음을 비웠다.
“내일이 무슨 날인 줄 아느냐.”
“모르겠습니다.”
“안 그래도 나라 안팎이 뒤숭숭한 마당에 내실을 이리 오래 비워둘 수야 없질 않겠느냐.”
“허면 정전에서 입후(立后)에 관한 논의가 있겠군요.”
진 대인은 두 번의 커다란 국사에 관한 해결책을 내어 놓았다던 저 작은 입술을 내려다본다. 그만한 영민함이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까지의 행동거지나 말투, 상대를 대하는 눈빛 등으로 보아서는 분명 이 아이가 지금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 아이에게 궁인이라는 옷은 터무니없는 것임이 확실해졌다.
“그 자리에서 폐하께서 누구의 이름을 꺼내놓으실 지, 너는 이미 알고 있겠지.”
“저 따위가 어찌 폐하의 의중을 알겠습니까.”
“하하, 폐하의 의중이야 당연히 나조차 모르는 일이지. 내 말은,”
“........”
“네 괘씸한 생각 속에 들어있는 이름말이다.”
진 대인은 은의 마음을 꿰뚫어 보겠다는 듯 정면으로 눈을 응시하며 단호히 말했다. 은은 순간 눈을 피할 뻔 했다. 대인은 황제가 제 이름을 거론하리라 기대하고 있는 은의 마음을 꺾어두려는 속셈이었다.
“너 스스로가 그 자리에 어울린다고 생각하느냐.”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지금 떠오르는 한 가지 생각은,”
“........”
“대인께서 지금 제게 이리 대하시는 것을, 어쩐지 훗날 후회하시게 될 것 같다는 것입니다.”
진 대인은 허리를 젖혀 목청껏 웃어버리지 않을 수 없었다. 계집들은 모두 논외의 대상이었고, 배포 두둑하다는 사내 녀석들조차 제게 이리 대놓고 본데없이 굴었던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고 환관의 뜻 모를 배짱과 우겸이라는 녀석의 맹랑함에 뒷심을 실어주는 것이 바로 이 자그마한 계집아이라고 생각하니 참을 수 없이 웃음이 터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이유들을 저조차 인정하지 않을 수 없어서였다.
“그래, 그런 날이 오는지 두고 보자꾸나. 하하!”
“그럼 저는 이만.”
“다만 한 가지, 그 길이 그리 쉽진 않을 것이니 명심해두거라.”
진 대인은 은을 등지고 뒤돌아서 가는 걸음에도 허허허, 저도 모를 웃음을 흘렸다. 그리 쉽지 않을 것이라는 엄포는, 저 스스로에게도 해당되는 것이었다.
//貢女 奇皇后//
한편, 은의 짐을 들고 먼저 황제궁으로 들어선 언주는 제겐 꽤나 버거운 짐의 무게에 걸음이 한참이나 늦어져 고생을 하는 중이었다. 은이 새로 사용하게 될 거처는 아직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툭, 하고 아슬아슬하게 두 팔에 걸쳐있던 작은 짐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이 참..”
끌어안은 짐들을 모두 내려놓고 저것을 주워야 할지를 머뭇거리며 한참 고민하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 다가와서는 떨어진 짐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제가 안은 짐의 반절 이상을 덜어주는 친절을 베풀었다.
“어디로 가져가면 되느냐.”
“...지..지원 나으리..!!”
늘 황제궁에 기거하며 황제를 호위해야 할 그가 여기 있는 것은 당연한 일임에도, 마치 못 볼 것을 본 것 마냥 화들짝 놀라서는 꾸벅 허리를 숙인다. 그 바람에 안고 있던 나머지 짐들마저 와르륵, 다 쏟아버렸다. 언주는 답지 않게 긴장까지 하며 쪼그려 앉아 집기들을 주워 담는다. 서둘러 발딱 일어서자, 우겸의 웃는 얼굴과 마주하게 된다.
“난 무서운 사람이 아니니, 앞으로는 그리 놀랄 것 없다.”
“저.. 다 왔으니 짐들은 그냥 제가 가져가도 됩니다. 이리 주시면-”
“황제궁 길도 익힐 겸이니 앞장 서거라.”
언주는 쭈뼛쭈뼛 걸음을 뗀다. 우겸은 너무 가깝지 않고, 너무 뒤처지지도 않게 적당히 거리를 두고 언주의 보폭에 걸음을 맞췄다. 우겸의 친절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었다. 그녀가 은의 가장 절친한 친구라는 점과, 은이 언주를 꽤나 의지하고 있었던 것 같다는 고 환관의 귀띔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낮의 황제궁은 이다지도 조용했다. 모두가 제 할 일에 열심인 시각이니 당연한 것이겠지만, 걸어가는 두 사람의 발소리가 여과 없이 복도를 울릴 정도였다. 언주는 터져나갈 듯 쿵쾅대는 심장이 왜 이러는 것인지 알 수 없어 마음속으로 저 스스로를 몇 번이고 꾸짖었다. 차라리 멈춰버리라고 고함이라도 지르고픈 심정이었다.
“다 왔습니다. 무거우실 텐데 그만 내려두시지요.”
“이곳이-”
“은이 사용하게 될 거처입니다.”
우겸은 작디작은 그 방을 한번 휘 둘러보고는 짐을 내려놓고 문 밖으로 나왔다. 언주가 따라나서며 말했다.
“저, 신세를 졌으니 어찌 갚아야 할지..”
수줍게 말하는 언주를 향해 우겸이 답한다.
“‘언주’라 하였지, 아마.”
“..예.”
“다음에 또 보자꾸나.”
돌아서 넓은 보폭으로 사라지는 우겸을 지켜보던 언주의 입에서 ‘아-’하고 작은 탄식 같은 것이 새어나왔다. 저 멀어지는 등이 아쉬운 이유가 무엇인지 조금 깨달아버렸다.
//貢女 奇皇后//
“폐하, 마음을 굳히셨습니까.”
“이제 와서 새삼 무슨 말인가.”
몸에 쌓인 독성을 해독시킬 탕약은 쓰디썼다. 입안의 쓴 기운이 가시지 않아 아직 미간에 주름을 그린 채로 황제가 되묻는다. 고 환관은 탕약이 담겼던 빈 그릇을 한 쪽으로 치워두며 말을 잇는다.
“내일 정전에서 그 아이의 이름이 거론 될 것을 모두가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에 대한 반발 또한 대응하셔야만 합니다, 폐하.”
“무엇보다 기대되는 것은, 진평의 반응일 테지. 난 아무렇지 않지만, 태감은 겁이 나는 모양이로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새로 지을 황후궁의 개축이나 최대한 서두르라 이르도록. 오래 기다릴 수 없으니.”
황제는 엄지로 입가를 훔쳐냈다. 자신에 찬 표정은 마치 내일 이후에 벌어질 일들을 모두 알고 있는 것만 같았다. 고 환관은 아무 말 없이 그의 방을 빠져나오며 그의 독백을 들었다.
“그곳의 주인은 하나 뿐이야.”
오타 죄송.. 수정했습니다.
첫댓글 은이겠죠? 은일 거예요! 샘솟는 기대 ㅎㅎㅎ 잘 읽고 갑니다
후안 님★ 다음화, 지켜봐주세요. 꼬릿말 감사합니다^^
아하 오타발견 ㅎㅎ 진대인과 은이 대화할때 이름이 이른이라 쓰인 곳이 있어요ㅎㅎ 그리고 분명히 언주는 황제궁에 가야되는데 황후궁이 쓰여있던데요?? ㅋㅋ 아싸~// 작가님 우겸미 불쌍허니 언주를 주시어 안쓰러울 제 마음을 달래 주시려는 것입니까요?ㅎㅎ 다음화에 진평과 황제의 언쟁이 기대되는 군요 ㅎㅎ 화이팅~!!
헤르티아 님★ 언주의 존재가 우겸에게 위안이 될 수 있을른지, 그것도 재미있는 이야기네요. 다음화에서 뵐게요, 꼬릿말 감사합니다^^
오랜만이에요~저 기억하시려나??하하^^몇달 안왔는데 다시 연재 시작하셨네요?!ㅎㅎㅎ
저..닉넴 바꿨어요~!!^^*
토순이+ 님★ 오랜만에 봬요~ 앞으로도 자주 들러주세요. 꼬릿말 감사합니다^^
드뎌 은이가 황후가 되는건가요?????
포레버영웅 님★ 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 다음 전개도 꼭 지켜봐주세요. 꼬릿말 감사합니다^^
은이가 황후가 되는 순간이 오는군요!! 설마, 이번에도 절 슬프게 하시진 않으시겠죠?? 후후 다음편 기다리고 있을게요~
유리별미곰 님★ 슬퍼하실 일은 없을거예요, 아마도요.ㅎㅎ 다음화에서 뵐게요, 꼬릿말 감사합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별이 님★ 아직 부러워할 만한 일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는데요;;ㅎㅎㅎ 좀 더 시간을 두고 지켜봐주시길. 꼬릿말 감사합니다^^
은이가 어서 빨리 황후가 되었으면 좋겠지만...일이 그렇게 쉬울까요 휴우~
그나저나 진대인이 생각하는 애지중지 '막내딸'의 좋은 혼처가 어디일지 궁금하네요!
설마...황후로 들이고 싶은걸까 라는 생각도 들고 아니면
은을 황후로 들이는걸 빌미로 우겸을 탐내고 있다는 생각도...
하하 오늘도 저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끝없는 망상을 기르고 있습니다^^;;
그치만 끝없는 망상도 즐겁네요><
Irene님 소설 항상 잘 읽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Tiare★ 님★ 추측하신 많은 내용들 가운데 가능성이 숨어있네요?^^ 북치고 장구치는 거, 저 좋아라 합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꼬릿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