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가의 운수객, 안 처사
1970년에 통도사 극락암 경봉 노스님 회상에서 살아 본 선객들은 안 처사라고 하는 재가 선객 한 사람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당시 경봉 노스님 회상에는 안 처사 외에도 아란야의 오 처사와 보살 등 재가 선객들이 출가한 스님들과 더불어 열심히 수행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안 처사는 가장 정진을 열심히 한 사람이었다. 출가한 스님이 바랑 하나를 의지하고 선지식을 찾아 구름처럼 떠돌면서 불도 수행을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비록 출가 당시는 인생을 바쳐 수행에 전념하겠다고 결심했지만 막상 스님이 되고 보면 이런저런 일들이 겹치고 사정과 여건이 맞지 않아서 운수의 길에 나서기가 그렇게 간단하고 쉬운 것이 아니다.
그런데 스님도 아닌 재가인이 스님들과 똑같이 운수객이 된다는 것은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는가. 안 처사는 이런 어려운 일을 단행한 사람이다. 내가 안 처사를 처음 만난 것은 1973년도쯤인가. 경봉 노스님 회상에서 동안거를 지낼 때였다. 큰방 몇 십 명 대중 가운데 오직 안 처사만이 유일한 재가인이었다.
대체로 선원에는 재가인의 큰방 출입을 금하고 있다. 승속이 유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 처사는 예외였다. 조실 스님의 특별한 허락이 있는데다가 대중 스님들 역시 안 처사를 재가인으로 보기보다는 같은 선객으로 생각하여 흉허물없이 지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사정이 그러하더라도 처사가 스님들과 한방에서 정진하는데는 어려움도 많았다. 선원 큰방 대중은 젊은 스님들이 주류를 이룬다. 당시 안 처사는 나이가 예순을 넘은 노인인데 젊은 스님들 사이에서 생활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처사이기 때문에 좌차를 정할 때도 항상 탁자 밑 제일 하관이었다. 거기다가 노인이면서도 젊은 스님들에게까지 항상 공손한 태도로 대해야 했다. 여간한 하심이 아니면 어려운 일이었다.
인도 바라문 사회에서는 인생을 네 단계로 나누어 산다고 한다. 첫째, 유아 학습기로서 글을 익히는 시기이고, 두 번째. 결혼하여 가업을 이어 가문을 번창하게 하는 시기이고, 세 번째. 집을 떠나 유행하면서 수행을 하는 시기이다. 그리고 마지막 말년의 시기에는 조용히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다. 앞 두 번째까지는 보통 사람도 다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정한 나이가 들어서 할 일을 다하고 현역에서 은퇴했을 때 홀연히 출가 수행자와 같은 생활을 하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런데 안 처사는 남들이 하기 어려운 이 길을 단행한 것이다.
그 해 겨울 안거 중에 처사의 막내아들이 아버지의 생신이라고 찾아와 대중공양을 내고 가기도 했다. 무척 아름답게 보이는 일이었다. 아들 딸 모두 키워놓고 세속 생활에 연연하지 않고 홀연히 집을 나와 불도를 수행하는 아버지와, 그 아버지를 찾아와 대중공양을 올리는 아들, 이 정도면 인생에 무엇이 아쉬울 것이 있으며 미련이 있을 것인가. 그 때 같이 살던 대중들도 모두 멋이 있는 일이라고 칭송했다.
안 처사는 어려서 유학을 익혔다고 한다. 그래서 한문 글을 잘했다. 가끔 정진 중에 한번씩 공부에 환희심이 나면 그것을 한문게송으로 지어서 주위사람들에게 보여 주기도 하고 조실 스님께 점검을 받아 칭찬을 듣기도 했다. 때로는 차를 마시는 시간에 큰스님께서 안 처사의 게송을 다담으로 삼기도 하셨다. 그럴 때면 조실 스님은 “일지가 또 망상을 피웠구나.”하고 웃으셨다. 이것은 조실 스님의 최고의 칭찬이다. 일지는 조실 스님이 지어주신 안 처사의 법호다. 그러나 호 일지보다는 모두 안 처사라고 불렀다.
이런 안 처사에게 스님들이 질색을 하는 버릇이 있다. 밤에 잠을 잘 때 코를 고는 것이다. 그 소리가 어찌나 요란한지 조금 과장해서 천장의 대들보가 흔들리고 지붕 기왓장이 들썩거린다고 말들을 했을 정도다. 사실 문창호지가 흔들리는 정도는 되었다.
어느 때는 객스님이 이런 안 처사의 습관을 잘 모르고 객실에서 같이 잠을 자다가 밤새도록 고생을 하기도 했다. 정진 중에도 졸다가 코를 골아서 조용히 공부하던 스님들을 놀라게 하기도 하고 첫 철을 나는 초심 수좌들이 웃음을 참지 못해 무안하게도 만들었다.
그는 항상 한복 두루마기를 입고 다녔고 말씨도 옛사람처럼 고풍스럽게 했다. 행동은 겸손하고 점잖았고 정진을 매우 열심히 했으며 계율을 엄격하게 지키려고 했다. 나와는 오대산 적멸보궁에서 일주일 동안 용맹정진을 한 일도 있다. 당시의 적멸보궁은 찾아오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야말로 고요하고 적적하여 가히 적멸한 곳이었다. 거기다가 밤이 되면 더욱 적막하고 보궁이 능선 위에 자리하고 있는 까닭에 바람이 사납고 추웠다. 마침 겨울을 앞두고 나무들이 옷을 다 벗은 무척 추울 때였다. 안 처사와 나는 보궁 안에서 누더기 두루마기를 덮어쓰고 정진을 하는데 밤이 깊어질수록 일어나 포행하기도 싫고 오직 졸음만 쏟아졌다. 내가 도저히 졸음을 참지 못하고 졸고 있으면 안 처사가 옆구리를 찔러서 잠을 깨워주었다. 잡아 일으켜 같이 포행을 돌기도 하고 어떤 때는 잣알깐 것을 손에 쥐어 주기도 했다. 잣알을 입에 넣고 살살 씹어 먹으면서 졸음이 달아나게 하라는 것이다. 안 처사가 고개를 쳐들고 예의 코를 요란하게 골면서 졸 때는 또 내가 잠을 깨워주고,,, 이렇게 우리는 일주일 동안 보궁을 오르내리며 주야로 용맹정진을 했고 그 해 겨울에는 상원사에서 겨울 안거를 했다. 참으로 구도의 열정이 뜨거웠던 시절이다.
어느 해던가. 10.27 법난 이후에 나는 토굴 속에 들어가 낮에는 정진하고 밤이며 책을 읽으면서 깊은 고뇌에 빠지고는 했다. 한번은 덕수궁 현대미술관에서 국전이 열리고 있을 때 그것을 보러 갔다. 실로 오랜만의 외출이었다. 때는 늦은 가을이라 고궁 안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이런 고궁 풍경을 보고 있는 내 눈에 저 한쪽에서 한복 두루마기를 입은 웬 노인 한 사람이 망연히 머언 쪽 하늘을 바라보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이 어찌 보면 처연하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깊고 그윽해서 범접할 수 없는 무게가 있어 보였다. 가까이 가서 보니 바로 안 처사가 아닌가? 참으로 오랜만에 만나서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서로 안부를 물었다. 그 때까지도 안 처사는 선원으로 다니면서 운수행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쩐 일로 그 곳에 왔느냐고 물으니 그에 대한 대답은 없고, 옛날에 같이 정진하던 스님들이 나이 들어 구참이 되니까 선원을 떠나고 점차 공부하는 사람이 줄어든다고 했다. 선원의 공부 분위기도 예전 같지 않다며 신심과 공부 열정이 없어져 간다는 한탄을 했다. 그는 나에게 왜 대중처소에 안 나오느냐고도 물었다. 나이 들수록 공부에 채찍을 가해야 한다고도 했다. 자기도 이제는 나이가 들어 대중생활을 하기가 힘들다는 말도 같이 했다. 당시 사회 분위기나 10.27 법난을 당한 이후의 가라앉은 절집 안 분위기가 처사로 하여금 그런 느낌과 생각을 하도록 했을 것이다. 같이 차라도 마시면서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나는 일행이 있고 해서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고 헤어졌다. 덕수궁을 나오면서 뒤돌아보니 그는 여전히 처연한 자세로 서 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한번도 그 분을 만나지 못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이미 오래 전에 육신을 버리고 적멸에 들었다고 한다. 연세로 보아도 팔십이 가까워졌을 것이니 그럴 것이라고 생각된다. 나이 칠십이면 인생을 다 산 노인이다. 인생을 잘 아는 나이이기도 하다. 그런 노인네가 발심하여 그 열기가 식지 않은 채 불도수행을 했던 것이다. 공부가 얼마나 간절하고 흐르는 세월이 얼마나 절박하게 느껴졌을까? 늦가을 고궁의 뜰에서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아래 홀로 서서 먼 산을 바라보는 노장의 모습은 무엇인가 지울 수 없는 강한 인상을 남겼다. 지금도 그 모습은 내게 어떤 상징처럼 느껴진다.
출처 ; 그 산에 스님이 있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