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
"이스라엘아, 들어라! 너희는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
<신명기의 말씀 6,2-6>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2 “너희와 너희 자손들이 평생토록 주 너희 하느님을 경외하고,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그분의 모든 규정과 계명을 지켜라.
그러면 오래 살 것이다.
3 그러므로 이스라엘아,
이것을 듣고 명심하여 실천하여라.
그러면 주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약속하신 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희가 잘되고 크게 번성할 것이다.
4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6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말을 마음에 새겨 두어라.”
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영원히 사시기 때문에 영구한 사제직을 지니십니다."
<히브리서의 말씀 7,23-28>
형제 여러분,
이전 계약의
23 사제들은 죽음 때문에 직무를 계속할 수가 없어 그 수가 많았습니다.
24 그러나 그분께서는 영원히 사시기 때문에 영구한 사제직을 지니십니다.
25 따라서 그분께서는 당신을 통하여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을 언제나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늘 살아 계시어 그들을 위하여 빌어 주십니다.
26 사실 우리는 이와 같은 대사제가 필요하였습니다.
거룩하시고 순수하시고 순결하시고 죄인들과 떨어져 계시며 하늘보다 더 높으신 분이 되신 대사제이십니다.
27 그분께서는 다른 대사제들처럼 날마다 먼저 자기 죄 때문에 제물을 바치고 그다음으로 백성의 죄 때문에 제물을 바칠 필요가 없으십니다.
당신 자신을 바치실 때에 이 일을 단 한 번에 다 이루신 것입니다.
28 율법은 약점을 지닌 사람들을 대사제로 세우지만,
율법 다음에 이루어진 맹세의 그 말씀은 영원히 완전하게 되신 아드님을 대사제로 세웁니다.
복음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 12,28ㄱㄷ-34>
그때에
28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29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30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1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32 그러자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34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
그 뒤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그분께 묻지 못하였다.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참된 예배는 계명을 지키기 위해 나의 뜻을 봉헌하는 것>
‘사랑받는 남편 10계명’이란 것이 있어서 소개합니다.
1. 같이 자라-한 침대에서, 한 이불을 덮고, 같은 시간에 부부관계는 밤에 달려 있다.
2 .밥을 다 먹어라-맛있게, 맛있어 하면서, 남기지 말고 다 먹어라.
3. 아내의 말을 귀담아 들어주자-가로막지 말고 맞장구 쳐주자.
4. 아침을 활기차게 시작하라-남편의 활기는 금방 아내에게 전달된다.
아내가 깨워야 일어나지 말고 미리 일어나 창문을 열어라!
5 .처가에 가서는 싱글벙글 하라-갈 때는 선물을 잊지 말 것! 처가에 가서는 가장 늦게 나올 것.
6. 동반모임을 즐겨라-부부모임은 가능한 한 참가하여 즐겨라. 밝고 예절 바르게
7. 잘못했으면 곧 사과하라-곧 사과하라! 지금 곧.
8. 아내 편을 들라-어쨌든 일단은 아내의 편을 들고 나서 잘잘못을 따져라.
9. 생일 결혼기념일을 잊어버리는 것은 간 큰 남자!!
10. 결혼반지를 빼지 말라.
[출처: ‘사랑 받는 남편 10계명’, 블로그 코이네]
‘한 사람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저런 노력을 해야 하다니.’
다 맞는 말이라는 생각과 함께 사제가 돼 다행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리고 ‘저걸 다 한다고 해서 아내가 만족할까?’라는 생각도 듭니다.
한 사람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바라는 모든 것을 해 주어야합니다.
남편의 십계명이라고는 하지만 이것은 ‘아내가 남편에게 바라는 열 가지’로 바꾸어도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저런 거 다 빼고 아내는 남편이 자신만을 사랑해주는 것을 바라지 않을까요?
그리고 남편으로서 해야 하는 것, 성실히 일하여 돈을 잘 벌어오면 되지 않을까요?
그러면 저 나머지 계명들은 어쩌면 기억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면 다 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하고 묻습니다.
수많은 하느님의 계명 가운데 무엇이 핵심인지 궁금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에 들려면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 또 그 사람이 가장 원하는 것을 해 주는 것밖에 없습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바라는 것이 자신만을 사랑하며 돈을 성실히 벌어오는 것이라면, 하느님도 당신만을 사랑하며 이웃에게 잘해 주라는 것밖에 없습니다.
나머지는 다 부차적인 것입니다.
계명은 다른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의 마음에 들려면 이것은 해 주었으면 좋겠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계명은 하느님의 공동체에 속하게 만드는 지령과 같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께 마음에 들어 하느님 품 안에서 같은 공동체를 만듭니다.
이 공동체가 교회이고 하느님 나라입니다.
제가 대학생 때 데모집회에 한 번 나가본 적이 있었습니다.
처음 집결해야 했던 곳은 서울시청 앞이었습니다.
그런데 전철을 내렸을 때 한 여학생이 저의 손바닥에 자신의 손가락으로 무언가 쓰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뭐라 쓰는지 몰라서 빤히 쳐다봤더니 또 다시 뭐라고 쓰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집중을 해도 뭐라 쓰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뭐라 쓴 것이냐고 물었더니, 그 여학생이 주위를 살피며 조금은 화가 난 표정으로,
“아~ 이거 다른 사람이 알면 안 되는데 ... 집회 장소가 명동성당으로 바뀌었다고요. 빨리 그리로 이동하세요.”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명동근처까지 갔다가 그냥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뉴스를 보니 명동성당에 들어간 이들이 경찰병력에 둘러싸여 나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성당에 들어간 이들이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저는 그 하늘나라 공동체에 섞이지 못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지령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령을 따르지 않고 나의 뜻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 여학생은 하느님을 전하는 사람이었고 손바닥에 써 준 것은 계명입니다.
계명만이 하늘나라에 도달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한 순간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당신 나라로 이끄시기 위해 지령을 내려 보내셨습니다.
그 지령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구약의 모세는 이 지령을 가슴에 품고 기쁜 마음으로 자신의 민족이 있는 곳으로 내려왔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민족들은 그 지령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의 뜻대로만 살고 싶어서 하느님까지도 ‘황금송아지’로 만든 상태였습니다.
하느님을 소로 만들었다는 것은 자신이 하느님을 조정하는 주인이 되고 싶다는 의도입니다.
자신이 하느님을 조정하고 싶은데 하느님의 지령에 관심이 생길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제 더 이상 쓸모없게 돼버린 계명 판을 깨뜨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계명이 깨졌다는 말은 하늘나라에 들어갈 방법이 없어졌다는 말과 같습니다.
하느님의 계명은 내 뜻과 반대됩니다.
내 뜻을 버리지 않으면 하느님의 계명은 내 안에서 성취될 수 없습니다.
계명을 주시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주인이 되시겠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이들은 계명에 집중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품에 안고 내려오던 모세는 그 계명을 어떤 마음으로 안고 왔겠습니까?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처럼 안고 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귀한 계명을 단 한 순간도 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사랑을 하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라고 하십니다.
이 ‘다하는 마음’이 참된 예배입니다.
나의 온 에너지가 소진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계명을 위해 내가 봉헌되는 것이 예배입니다.
나의 봉헌은 이렇게 계명의 성취로 이어져야 합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사제와 레위인은 강도 만나 쓰러져 있는 사람을 외면하고 예배를 봉헌하러 갑니다.
하지만 예배를 드릴 수 없는 처지인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을 극진히 도와줍니다.
하느님의 지령은 예배를 보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예배로 봉헌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지령은 외면한 채 미사만 보러온다면 그 사람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계명이 우리를 그분 나라에 들여보내 주는 것이지 외적인 예배가 아닙니다.
우리도 이제 그분의 계명을 알았다면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해야”겠습니다.
모세가 이 계명을 가슴에 품고 시나이 산에서 내려왔듯이
우리도 우리를 구원할 유일한 계명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결코 잊는 일이 없어야겠습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사랑이란 결국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을 버리는 일입니다>
장거리 운전중에 하도 잠이 와서, 휴게소 들러 그 유명한 7080 가요 시디 한장을 사서 듣기 시작했습니다.
정말이지 깜짝 놀랐습니다.
스무곡 가까운 노래들 가운데, 사랑을 주제로 하지 않은 노래는 단 한 곡도 없었습니다.
틈만 나면 사랑이란 단어가 반복되었습니다.
끝사랑, 바보같은 사랑, 거지같은 사랑, 중독된 사랑, 금지된 사랑, 그 잘난 사랑, 사랑없인 난 못살아요.
따지고 보니 우리는 틈만 나면 사랑을 노래하고, 사랑을 가르치고, 사랑을 추구하고 있지만,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진정한 사랑을 하기 위한 노력은 참 부족한 것 같습니다.
그저 유행가 가사 정도의 통속적인 사랑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최근 존경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젊은이, 신앙과 성소 식별’이란 주제로 시노드를 개최하셨는데,
폐막 미사 강론에서 참으로 감동적인 말씀을 우리에게 남기셨습니다.
“우리가 행여나 젊은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면,
또 우리 마음을 열지 않은 채 젊은이들 귀만 가득 채우려고 했다면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
생각할수록 우리 양떼를 향한 사랑으로 충만하신 분인듯 합니다.
그분의 말씀 속에 참사랑,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잘 녹아들어있다고 생각합니다.
참 사랑은 우리가 생각하는 통속적인 사랑, 유행가적인 사랑을 넘어서서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는 사랑입니다.
우선 참사랑은 상대을 향해 마음의 창을 여는 사랑입니다.
참사랑은 상대와 눈높이를 맞추는 노력을 그치지 않습니다.
참사랑은 상대방의 아주 작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참사랑은 상대방의 말을 잘 경청합니다.
오늘 참사랑의 전문가요, 사랑 자체이신 주님께서도
빈약한 사랑으로 인해 늘 허전해하는 우리를 향해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마르코 복음 12장 29~31절)
우리의 사랑이 좀 더 큰 사랑, 좀 더 사심없는 공평한 사랑, 좀 더 폭넓은 사랑, 좀 더 주님 마음에 드는 사랑, 참 사랑이 될 수 있도록 늘 고민하고 성찰해봐야겠습니다.
“사랑이란 보다 단순한 것입니다.
사랑이란 사랑하는 사람을 실망시키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사랑하는 사람과의 작은 약속을 지켜나가는 일입니다.
사랑이란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의 원치 않는 행동을 자제하는 일입니다.
사랑이란 상대방의 마음으로, 상대방의 마음 안에서, 상대방의 마음을 통해서 상대방의 이름으로 행하여 주는 일입니다.
사랑이란 결국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을 버리는 일입니다.”
(최인호 베드로, ‘사랑의 기쁨’)
- 살레시오회 한국관구장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시다>
오늘 <말씀전례>는 우리 신앙의 원천을 밝혀줍니다.
곧 우리 신앙의 근거가 되는 그 바탕이 무엇인가를 말해줍니다.
<제1독서>에서는 유다인들에게 가장 거룩한 말씀이라고 불리는 ‘셰마 이스라일’을 들려줍니다.
사실, 유다인들은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 맨 먼저 배우는 것이 “들어라 이스라엘아”로 시작되는 바로 이 “셰마”라는 신앙고백문입니다.
그들은 적어도 아침과 저녁, 하루에 두 번 이 기도를 정해놓고 드립니다.
그리고 경건한 유다인들은 모세의 말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 이를 기억하고 마음에 새기기 위해
이마와 왼쪽 팔에 강구갑을 부적처럼 붙들어 매고 다녔고(신명 4, 8-9 참조), 옷자락에 술을 달고 다녔습니다(민수 15, 37-39).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 십계명은 6백 조항이 넘게 보태어져 실천할 수 없게 되었고, 또 어느 계명이 큰 계명인지 토론이 계속되었는데,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도 이 질문을 예수님께 던집니다.
“모든 계명 가운데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마르 12, 28)
이에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들려주었던 계명으로 대답하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시다~.”
(마르 12, 29)
이 말씀은 “첫째가는 계명”인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말씀하시기에 앞서 밝히신 ‘하느님의 존재’ 와 ‘우리의 존재와의 관계’에 대한 계시입니다.
곧 행동의 원리로서의 사랑의 계명에 앞서, 먼저 왜 사랑을 해야 하는지, 그 근거와 이유를 밝혀줍니다.
그것은 ‘한 분이신 우리 주님 하느님’이신 분과 ‘그분의 것, 그의 소유’인 우리와의 관계에서 사랑의 계명이 흘러나옴을 밝혀줍니다.
곧 우리 신앙의 원천이요 근거요 바탕이 바로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이며, 바로 이 관계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임을 밝혀줍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예수님께서는 슬기롭게 대답하는 율법학자에게
“너는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와 있다.” (12, 34)고 할 뿐 ‘하느님 나라에 들어와 있다’고는 말씀하시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율법학자에게 아직 ‘사랑의 실천’이 남아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더 근본적으로는 <구약>의 ‘사랑의 계명’은 <신약>의 ‘사랑의 새 계명’으로 완성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곧 모세가 말한 구약의 계명과 예수님의 새 계명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구약>의 사랑의 계명과 <신약>의 사랑의 새 계명은 어떻게 다를까?
우선, <구약>에서의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레위 19, 18)는 둘째 계명의 ‘이웃 사랑’은 제한적입니다.
곧 여기서 말하는 ‘이웃’이란 동포로 한정하거나 함께 사는 이방인들까지를 포함시킬 뿐입니다(레위 19, 34).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루가 10, 30-37)에서 보여주듯이
무제약적, 무차별적인 이웃에 대한 사랑일 뿐만 아니라, 원수까지도 포함하는 ‘완전한 사랑’을 말씀하십니다(마태 5, 44-48).
또한 <구약>에서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여 ‘이웃 사랑’의 시금석으로 ‘자신에 대한 사랑’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를 완전히 바꾸어 새 계명으로 주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한 13, 34; 15, 12)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이웃사랑’의 시금석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우리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제시하십니다.
더 나아가서, 오늘 <복음>에서 보여주듯이,
예수님께서는 <신명기>의 ‘하느님 사랑’(6, 4-5)과 <레위기>의 ‘이웃 사랑’(19, 18)을 한데 묶으시면서 근본적으로 새로운 관점을 요구하십니다.
곧 사랑의 새로운 변혁, 새로운 틀의 패러다임을 요구하십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이웃’을 남으로 보지 않는 관점입니다.
아니, 애시 당초 ‘남’이란 없다는 관점입니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이 있을 뿐,
한 아버지 안에 있는 한 형제자매가 있을 뿐이라는 관점입니다.
사실, 우리가 ‘한 몸’이라는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이웃도 내 몸처럼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웃 사랑은 흔히 생각하는 남에게 베푸는 시혜나 자선이 아니라, 바로 ‘한 몸’으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과 같아집니다.
물론, 이 때 ‘한 몸’이란 ‘너의 몸이 내의 몸이고 나의 몸이 너의 몸’이라는 혼합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요한 바오로 2세 교종께서 [새 천년기](24항)에서 표현한 대로,
“나의 일부”인 형제들이란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곧 ‘한 몸의 지체’로서, 나와 ‘한 몸’을 이루고 있는 나의 일부이기에,
나의 일부인 형제의 아픔이 바로 나 자신의 아픔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형제가 나의 일부이듯 하느님의 일부가 되고,
형제 사랑이 곧 하느님 사랑이 되며,
그러기에 하느님 사랑이 곧 형제 사랑이 됩니다.
좀 더 확장해서 표현해본다면, 형제가 곧 하느님이라는 표현을 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석 유영모 선생님의 표현을 빌려본다면,
남편에게는 아내가 하느님이요, 상인에게는 손님이 하느님이요, 본당신부에게는 본당신자들이 하느님이요, 대통령에게는 국민이 하느님이요, 나에게는 공동체 식구들이 하느님이 됩니다.
그리고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 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됩니다.
이처럼 ‘사랑의 이중계명’은 새로운 관점, 새로운 틀을 요구합니다.
곧 ‘남’인 이웃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인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의 전환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의 소명입니다.
아멘.
-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 -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우리는 방금 화답송에서 하느님 사랑을 고백했습니다.
"하느님 내 힘이시여, 내 당신을 사랑하나이다."
오늘 복음의 첫째 가는 계명은 유다교인들이 아침 저녁으로 바치는 신앙고백분 ‘셔마’의 일부입니다.
우리도 매주 토요일 끝기 도때마다 듣는 말씀입니다.
첫마디 ‘들어라’가 히브리말로 셔마이기에 셔마 신앙고백문이라 일컫습니다.
신앙고백문 전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오늘 내가 명령하는 이 말을 마음에 새겨 두어라.
너희는 집에 앉아 있을 때나 길을 갈 때나, 누워 있을 때나 일어나 있을 때나, 이 말을 너희 자녀에게 거듭 들려 주어라.
또한 이 말을 너희 손에 표징으로 묶고 이마에 표지로 붙여라.
그리고 너희 집 문설주와 대문에도 써 놓아라.”
(신명 6,4-9)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하느님 사랑을 첫째로 두고 밤낮으로 마음에 새겼는지 실감나게 전달됩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 믿는 이들에게도 여전히 큰 울림을 주는 권고 말씀입니다.
주 우리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아니 우리 삶의 모두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실 하느님을 사랑하여 알아가는 평생 사랑 공부보다 더 중요한 공부는 없습니다.
아무리 하느님 사랑을 공부해도 여전히 초보자인 우리지만 죽는 그날까지 공부해야 하는 사랑의 하느님입니다.
올해의 가을 단풍은 유난히 곱고 밝고 맑습니다.
한국 어디나 절경의 하늘 나라 천국같습니다.
수도원 고백상담실 문앞에 단풍도 너무 아름다워 많은 이들이 찬탄을 금치 못합니다.
사랑하면 예뻐진다는 가사가 생각납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사랑은 아름다움으로 유감없이 표현되고 있습니다.
어제 어느 자매와의 면담 중 생각나는 대목이 있습니다.
“네 자신을 사랑하라 하는데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전에도 이와 비슷한 말을 듣고 말문이 막힌 적이 있습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어떻게 사랑해야 합니까?”
너무 뜬금없는 그러나 진정성 있는 물음이 많은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사랑도 능력이구나. 사랑도 받아야, 체험해야 할 수 있겠구나’, 너무나 자명한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지음 받는 우리 인간이기에 마음 깊이에는 사랑할 능력이 주어져 있습니다.
다음 하느님 사랑을 목말라하는 시편 내용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제 영혼이 하느님을,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합니다.
그 하느님의 얼굴을 언제나 가서 뵈올 수 있겠습니까?"
이런 하느님의 사랑이 목말라, 이런 하느님의 얼굴을 뵙고 싶어 미사에 참석한 우리들입니다.
사랑할 때 사랑도 받습니다.
사랑하고 사랑받을수록 정체성 뚜렷한 삶에 자존감 높은 삶입니다.
곳곳에서 하느님 사랑도 발견하고 체험합니다.
만병의 근원이 사랑결핍이요 만병통치약이 사랑입니다.
지금도 선명히 생각나는 기억이 있습니다.
1998년 12월25일 성탄절에 빨간 칸나를 선물 받고 즉흥적으로 흘러나왔던 ‘늘 당신의 무엇이 되고 싶다’라는 시입니다.
“당신이/꽃을 좋아하면/당신의 꽃이
당신이/별을 좋아하면/당신의 별이
당신이/하늘을 좋아하면/당신의 하늘이/되고 싶다
늘/당신의 무엇이/되고 싶다”
당신이 지칭하는 대상은 두말할 것 없이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우리 삶의 모두입니다.
특히 우리 수도자들은 더욱 그러합니다.
하느님만을 찾는 삶이라 정의되는 수도생활입니다.
하느님 찬미의 맛으로, 기쁨으로 살아가는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한마디로 하느님은 우리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삶의 중심, 삶의 의미라 정의합니다.
어찌 수도자뿐이겠습니까?
믿는 모든 이들에게 해당되는 영원불변의 진리입니다.
이런 하느님이 빠진 인생이라면 허무와 무의미의 어둠의 심연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온갖 정신질환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인생 허무에 대한 답은 하느님 사랑 하나뿐입니다.
하느님 없이 인간 신비는 결코 해명되지 않습니다.
하느님이, 사랑이 답입니다.
그러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사람으로 살기 위해 하느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참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 하느님 사랑은 필수 의무입니다.
갈림없는 마음으로 마음을 다해, 목숨을 다해, 정신을 다해, 힘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고맙게도 첫째 하느님 사랑 계명에 하나 더하여 둘째 이웃 사랑의 과제를 부여해 주십니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을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 하나로 묶어 우리 모두에게 선물이자 과제로 부여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이 사랑의 이중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습니다.
사실 예수님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영원히 빛나는 모범이십니다.
바로 주님의 십자가가 이의 빛나는 상징입니다.
수직의 하느님 사랑, 수평의 이웃 사랑이 주님의 십자가 안에서 하나가 되고 있지 않습니까?
바로 오늘 지금 여기서 미사를 집전하시는 십자가와 부활의 파스카 예수님께서,
우리의 영원한 대사제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부족한 사랑을 도와 주십니다. 그러니 좌절은 금물입니다.
히브리서가 고백하는 그대로입니다.
“그분께서는 영원히 사시기 때문에 영구한 사제직을 지니십니다.
따라서 그분께서는 당신을 통하여 하느님께 나아가는 우리들을 언제나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늘 살아 계시어 우리를 위하여 빌어주십니다.
그분은 거룩하시고 순수하시고 순결하시고 죄인들과 떨어져 계시며 하늘보다 더 높으신 분이 되신 대사제이십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당신 안에 완성하신 대사제 예수님께서 우리를 도와 주십니다.
그러니 용기를 내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실천에 매진합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으며 하느님 사랑의 열매는 무엇입니까?
하느님 찾는 열정의 사랑은 표현을 찾습니다.
제 강론 역시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칸톨 수사님의 아름다운 성가도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문간 안내 수사님의 친절한 환대도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모든 수행이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사랑의 표현이기에 아름다운 수행입니다.
하느님 사랑은 막연한 추상이 아닙니다.
사랑의 표현은 우리의 본능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해 하느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랑을 담아 그렇게 이웃을 사랑하고 기도하고 일하고 공부하고 모두를 하라는 것입니다.
하여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하느님 사랑의 표현이 되고 저절로 성화가 뒤따릅니다.
바로 여기서 참으로 중요하게 부각되는 것이 우리 공동체가 평생, 매일, 규칙적으로, 끊임없이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시편성무일도와 미사의 공동전례기도입니다.
이런 기본적 수행보다 하느님 사랑의 표현에 좋은 수행은 없습니다.
하느님 사랑의 찬미와 감사가 우리의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앎을 날로 깊게 함으로
참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행복하게 합니다.
하느님 사랑이 우선입니다.
모든 신비의 열쇠가 하느님 사랑에 달렸습니다.
사랑할 때 압니다.
사랑할 때 마음의 순수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할 때 하느님을 알게 되고 하느님의 우리 향한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비로소 나를 사랑하여 알 수 있게 되고 더불어 이웃도 사랑하여 알게 됩니다.
하여 무지로부터의 해방도 이뤄집니다.
참으로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 치명적 병이자 죄이자 악이 바로 무지입니다.
살 줄 몰라, 볼 줄 몰라 어리석음 이요 불행입니다.
살 줄 알면, 볼 줄 알면 행복이요 지혜로운 삶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여 하느님을 알아가고 나를 사랑하여 알아가고 너를 사랑하여 알아갈 때 비로소 무지로부터의 치유요 해방입니다.
그러니 무지의 병에 대한 최고의 처방은 하느님 사랑뿐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사랑하여 알아가고 나와 너를 사랑하여 알아가는 공부보다 더 중요한 평생공부는 없습니다.
이 모든 공부의 전제가 바로 하느님 사랑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할 때
저절로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한량없는 사랑을 깨닫게 되고 나를 사랑하여 알게 되고
이어 하느님의 자녀들인 이웃 형제들을 사랑하여 알게 되니 바로 거기서 실현되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우리 모두에게 부여된 필수 의무입니다.
오늘 신명기에서는 물론 복음에서 예수님의 분명한 명령의 어투입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주님은 ‘사랑해야 한다’로 못박듯이 사랑의 필수 의무 과제를 부여하십니다.
사실 이 두 계명을 능가할 수 있는 계명은 없습니다.
십계명과 모든 율법도 이 사랑의 이중계명으로 요약됩니다. 이런 사랑이 있고서야 번제물과 희생제물도 있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항구하고 충실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끝으로 하느님 사랑의 고백과도 같은 행복기도문을 나눔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주님/사랑합니다/찬미합니다/감사합니다/기뻐합니다
차고 넘치는 행복이옵니다/이 행복으로 살아갑니다
주님/눈이 열리니/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느님의 나라 천국이옵니다
곳곳에서/발견하는/기쁨, 평화, 감사, 행복이옵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나이다
끊임없는/찬미와 감사의 삶중에
당신을 만나니/당신은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며
기쁨과 평화, 희망과 자유를 선사하시나이다.
주님/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생명, 저의 사랑,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이제 당신을 닮아
온유와 겸손, 인내의 사람이 되는 것이
제 소망이오니 간절히 청하는 제 기도를 들어주소서
당신께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