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방규 (비전향장기수, 전 통일광장 대표) 빨치산 출신의 비전향장기수 임방규(79) 선생의 자서전 ‘광주형무소 이가사’가 29회째로 마감됐습니다. 이번 주부터는 그 후속으로 필자가 지난 시기 빨치산 격전지 현장을 답사하며 사라져가는 빨치산 역사를 재건하려는 노력을 계속해 온 결과물인 ‘빨치산 격전지 답사기’를 연재합니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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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 3월 26일 노조 사무실에 5시까지 대기 위해서 서둘렀다. 약속시간을 겨우 지켰는데 한 분이 급한 사정으로 두 시간이나 늦어버렸다. 봉고차에 나까지 13명이 타고 떠났다. 서울을 빠져나가자 바로 어두워져서 주변 경치를 볼 수가 없었다. 서해안 고속도로라 가다가 서해바다 툭 트인 수평선을 볼 수 있는데 조금은 아쉬웠다.
밤 열한시가 넘어서야 성수산 수목 요양원의 한 작은 숙소에 짐을 풀었다. 우리는 밥상둘레에 앉아서 자기소개를 했다. 전원이 노조 소속 상근 간부였다. 특히 통일 담당 일꾼이 여러 명이었다. 이번 행사의 성격은 수련회를 겸한 통일 역사기행이라고 했다. 나는 자기소개를 하면서 간략하게 몇 마디 언급을 했다. 빨치산 투쟁에 대하여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있는 일꾼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나라 역사를 보면 고래로 한나라, 수나라, 당나라, 원나라, 일본(임진왜란) 일제 때 해방 이후 등 여러 차례에 걸쳐서 침략을 받았다.
그 때마다 외래침략자들과 치열하게 싸워서 조국을 지켰으며 수많은 희생을 냈다. 한편 일부 분자들은 외세와 결탁하여 권력과 부를 누렸으며 침략자의 앞잡이로 외세에 충실한 주구 노릇을 했다. 역사는 그들을 반역자로 규정했으며 침략자를 조국 강토로부터 축출하기 위해서 가열차게 싸운 분들을 애국자로 남북이 추앙하고 있다. 애국과 반역의 기준점은 침략자 외세와 맞서서 싸웠는가 아니면 외세와 결탁했는가에 의해서 가름하는 것이다. 강대국가가 약한 나라에 군대를 파견하는 것은 지배하기 위한 목적 이외에 다른 뜻이 없다.
서울 복판에, 전 후방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은 우리 군대가 아니다. 이 땅의 지배를 무력으로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필리핀과 쿠바를 식민지로 가지고 있던 미제는 1945년 9월 8일 이 땅의 점령군으로 들어왔다. 전쟁시기 남쪽 군대의 통수권을 장악했으며 삼백 여만 명의 양민을 학살했다. 지금까지도 지배자로 군림하고 있다. 최근의 몇 가지 사실만 보아도 그 점이 명백하다. 효순이와 미선이 어린 두 여학생을 탱크로 무참하게 깔아죽여 놓고도 죄가 없다고 판결한 놈들은 우리 대학생들이 맨몸으로 제 놈들의 탱크 위에 올라가서 “미군은 물러가라”고 외치자 그게 무슨 대죄인양 엄벌에 처하라고 압력을 가한 자들이 아닌가. 또한 남북 간에 금년 안으로 도로와 철도가 연결되면 남북을 오고가는 사람은 제 놈들에게 보고해야 하고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강제하는 자들, 이게 뉘 땅인데 우리가 오고갈 때 놈들에게 보고하고 승인을 받아야 하는가.
노무현 대통령이 부시를 만나러 갈 때였다. 부시라는 자는 노무현이 일국의 대통령인데 남북 관계는 부분적으로 허용한다고 했다. 상전처럼 말이다. 군 통수권을 쥐고 있는 그들. 미제를 몰아내야 민족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이 땅의 평화를 실현할 수 있으며 노동자, 농민, 빈민 문제를 기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의 일단을 피력하고 곧 잤다.
다음날 28일 아침 7시에 일어나서 라면을 삶아먹고 숙소를 떠났다. 상의암을 둘러보았다. 내가 9.28 후퇴 시에 성수산 상봉에서 상의암으로 내려왔을 때는 스님 한 분이 있었고 나무껍질로 엮어 놓은 암자 지붕이 처음이라 신기하게 여겼던 기억이 새로웠다. 해후소도 아시람하게 낭떠러지 위에 걸려있었다. 상의암은 전설을 안고 있는 암자다.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에 지리산 운봉에 숨어 들어와서 노략질을 자행하던 왜놈들을 토벌하고 돌아가던 중에 성수산 상의암터에서 왕이 되게 해 달라고 백일기도를 했다고 한다. 상봉을 향해서 가파른 산길을 올라갔다. 상봉에 이르자 삼각산과 팔공산이 가깝게 보였다.
만감이 교차했다. 1951년 12월에 이 정상으로부터 각 능선에 동무들이 배치되어 골짜기와 능선을 타고 기어오르는 적과 치열하게 싸웠던 곳, 그들 비행기 기총 사격으로 하마터면 죽을 뻔한 곳이다. 전투가 끝난 후에 배낭에 매어 놓은 모포를 펼쳐 보았더니 무려 구멍이 18군데나 나 있었다. 수많은 희생자를 낸 적들은 4시경에 철수하였다. 그런가하면 원통산에서 성수산으로 나갔던 2대대 6대대가 날이 셀 무렵 골짜기에서 적의 집중 사격을 받아 죽고 모두 분산된 곳이기도 하다.
나는 성수산에서 분산된 병력을 귀합하라는 참모장 동지의 명령을 받고 성수산에 갔었다. 또한 충남 빨치산이 포위하고 올라오는 적과 처절하게 싸운 곳이다. 수많은 동지들이 전사했다. 이 상봉에서 도당 지도부를 보위하기 위하여 결사전을 단행한 곳. 전투를 지휘한 충남 참모장 이욱 동지가 잡힌 곳이다. 이욱 동지는 사형을 받고 한 방에 있을 때 그 당시의 전투 상황을 들려주었다. 상봉에서 능선을 타고 내려갔다. 대략 방향을 잡고 가파른 경사를 힘겹게 내려갔다. 여성들은 산에 익숙하지 못해서 여러 번 넘어졌다. 기억에 뚜렷한 장소라 헤매지 않고 찾았다. 바위가 죽 내려온 끝 부분에 작은 바위굴이 있는데 적의 기습으로 4명이 희생된 곳이다. 함께 간 일군들이 편하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니까 1951년 2월 말경이었어. 원통산에서 전투를 하다가 분산된 나와 두 동지가 성수산으로 왔네. 성수에서 6명을 만나게 되었고, 그 날은 장수 남부 유격대와 우리들 9명이 산서에 나가서 사업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저 앞 능선 너머에서 저녁밥을 지어먹고 이곳에 온 거야. 시간은 새벽 3시경. 일단 자리를 잡았으니까 보초를 세우려고 하자, 동무들은 적이 꼬리를 물고 왔으면 저녁밥을 해 먹을 때 기습했을 것이 아닌가 하고 여기야 사방 이십 리 밖에 지서가 있고 얼마 안 있으면 날이 셀 텐데 그냥 자자고 했네. 그러나 원칙은 지켜야지. 보초를 서야 한다는 거듭된 나의 주장에 박근주 동무와 38유격대 출신으로 육사에 편입하여 낙동강 전선에 나갔다가 입산한 변 동지가 약간 떨어진 곳에 넓적한 바위가 있고 바위 밑에 두 사람이 누울 수 있는 공간이 있는데 거기서 자겠다고, 적이 기습하기 위해서는 그곳을 통과하기 때문에 보초 역할을 할 수 있으니 괜찮지 않겠는가 하는 안을 내 놓았어. 그래서 승낙을 했네.
두 동지는 가고 우리는 이 굴에서 불을 피워놓고 안 잤나. 그런데 콩 볶듯 한 총성과 함께 바위가 부서져서 돌 조각이 쏟아지는 거야. 입구에 있던 동무들은 엉겁결에 밖으로 나갔다가 기어와서 내 총 내 총 하지 않겠나. 안쪽에 있던 나는 총을 한 자루씩 내어주고 이상훈하고 두 사람이 남았어. 아직 어두운 때라 그들이 총을 쏠 때마다 총구에서 불빛이 나오데. 그 지점을 겨냥하고 따발을 드르륵 드르륵 갈겨댔지. 동무들이 아래로 튀었기 때문에 나는 바위벽에 붙어서 살금살금 위로 올라갔어. 가다가 보니까 잘라진 곳이 있어서 넘어갔네. 퍼뜩 머리있는 적 지휘관이라면 위 봉우리에 병력을 배치했으리라고 예상했던 거야. 그런데 바위를 넘어가니까 낭떠러지가 아니겠나.
날은 밝아오지 되돌아 나올 수도 없고 그 때 바위 위 소나무를 감고 있는 칡넌출이 눈에 들어오더구만. 두 손으로 넌출을 힘껏 잡아당겼어. 풀리던 넌출이 멈추데. 얼른 따발을 거꾸로 메고 칡넌출을 잡고 아래로 뛰어내렸지. 내 팔 힘보다는 체중이 무거웠던 것인지 칡넌출이 주루룩 풀리다가 멈췄네. 동시에 앞으로 나갔던 몸이 바위를 때렸어. 바위와 허리 사이의 따발 탄창이 허리를 타격한 모양이야. 일 미터 높이에서 떨어졌네.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고 허리가 끊어질 듯 통증이 심한데다가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어. 적이 오면 꼼짝없이 잡히겠더구만. 우그러진 탄창을 빼고 여유탄창으로 갈아 끼웠네. 한동안 허리를 주물렀더니 조금은 움직일 수 있게 되었어. 나는 억새풀을 헤치고 기어서 위험한 곳을 빠져나갔네. 시간이 지나면서 허리가 정상으로 돌아왔어. 한 능선을 넘어서 위로 올라가는데 저 아래까지 얼음이 빙판을 만들어 놓았데. 단번에 뛰어서 건널 수가 없고 한 번 빙판을 디뎌야 갈 수 있는 곳에서 머뭇거리다가 살짝 얼음을 딛고 뛰었네. 그러고는 뒤를 돌아보았어. 평상시에는 엄두를 못 낼 일이야. 미끄러지면 박살날 것이 뻔하거든. 살아서 통일이 되면 꼭 와보리라고 마음먹었지.
성수산 상봉에서 얼마간 떨어진 양지바른 곳에 자리를 잡았네. 종일 마른 풀을 위에 덮어놓고 잠을 잤지. 해가 지고 어두움이 깃들어서야 일어나서 제 1선인 성수산 상봉으로 올라갔네. 빨치산은 어느 곳에 가던 분산되었을 때의 집결 장소로 1선, 2선, 3선까지 정해놓거든. 상봉에 올라가서 두루 살폈으나 아무도 없었어. 동무들이 몇 명이나 다쳤을까. 바람에 잡목이 부딪히는 소리만 들릴 뿐 첩첩산중에 혼자 앉아서 동무들을 기다렸네. 얼마나 지났을까. 부시럭 소리가 들리지 않겠나. 누구야? 격발기를 당기며 따발총을 꼬나들었지. 그러자 내 목소리를 알아차린 듯 군호를 대더구만. 이상훈이었네. 그는 바위벽을 타고 곧장 올라가서 숨어 있다가 오는 길이래. 몇 마디 주고받다가 말이 멎어 버렸어.
삼십 분, 한 시간이 지나도 인기척은 없고, 모두 희생된 것인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어. 두 시간이 넘자 더 기다려도 소용이 없다고 막 떠나가려는데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지 않겠나. 누구야? 우리 동무 같아서 가만히 물었네. 군호를 대는 목소리가 이동욱 동무였어. 얼마나 반가웠던지 쫓아가서 부둥켜안았네. 다른 동무들은 어떻게 됐는가 물었더니 변 동지가 허벅지에 총을 맞고 저 아래 골짜기에 있다고 하더구만. 얼른 가자고 재촉했네. 또 모르니까 이상훈은 고지에 남겨두고 둘이서 바삐 내려갔지. 한참 내려가는데 무엇이 바스락거리는 거야. 가만히 옆에 숨어서 보았네. 사람은 아니고 커다란 물체가 기어오는데 자세히 보니까 글쎄 박근주 동무가 아니겠나. 엠완총을 목 뒤로 걸고 기어오고 있데. 쫓아가서 일으켰어. 발에 총상을 입었데. 다른 동무들은 못 봤냐고 물었더니 총에 맞아서 멀리 못가고 혼자 덤불속에 숨어 있다가 오는 중이라고 하더구만. 놈들이 서둘러서 갔기에 망정이지 수색을 했더라면 죽었을 것이라고 하데. 뒤에 들었는데 지휘관이 죽었대. 둘이 박 동무를 부축해서 힘들게 상봉에 올라갔네.
박 동무를 상봉에 놓아두고 또 골짜기로 내려갔지. 얼마나 갔을까. 골짜기가 쩌렁쩌렁 울리게 만세 소리가 들리더니 팡팡 총성이 두 번 들리지 않겠나. 한 발이면 오발이겠지만 두 발이라 오발은 아니고 어떤 총성인가 혹시 동지들의 시체를 찾으러 밤에 우리가 올 것을 예견하고 적들이 매복하고 있다가 변 동지를 쏜 것은 아닐까. 불길한 생각을 하면서 삼십 여분을 기다려도 전혀 기척이 없었어. 그래서 변 동지를 찾아갔지. 쓰러진 나무에 걸터앉아서 자결했네. 상체는 뒤로 총은 앞으로 넘어져 있었어. 총알이 심장을 관통했더구만.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몰라. 이미 동지는 싸늘하게 식어있고 묻어드릴 삽이나 곡괭이가 있어야지. 동지를 들어서 반듯이 뉘어놓고 나뭇가지를 꺾어서 덮어 놓고는 돌아섰네. 아마도 이동욱 동지가 떠난 지 오래 되었는데 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동지들이 다 희생당한 것은 아닌지 허벅지에 총을 맞았으니 살아있어도 동지들에게 짐만 될 뿐 유격전을 할 수 없는 자신이라 목숨을 끊는 것이 동지들을 위한 것이라고 결심하고 만세를 부르고는 한 발은 공포, 한 발은 발로 방아쇠를 걸어서 자결하신 것 같아.
나로 인해서 돌아가셨네. 그 날 적에게 살해당한 네 동지 모두가 나 때문에 돌아가셨어. 각기 다른 중대, 소대 소속이었지만 내가 지휘해야 할 위치에 있었거든. 피곤한 동지들이 무어라 하던 원칙대로 보초를 세웠다면 오지에 들어온 적을 사전에 발견할 수 있고 또 적에게 타격을 줄 수도 있었을 텐데. 전적으로 내 책임이야.”
동지들이 돌아가신 장소에 와서 다시금 뼈저리게 자책을 했다. 노조 일꾼들이 가져온 소주 한 잔을 따랐다.
“후에 우리는 장수 유대와 선을 달아서 함께 이동을 했네. 성수산 넘어 팔공산에서 뻗은 능선아래 소쿠리 속처럼 오목한 곳에 트를 만들어 놓고 부대가 한동안 지냈어. 경사진 곳을 파서 뻬찌카를 만든 트도 있었고 나무를 베어다가 둥글게 세워놓고 이엉을 두른 트, 산죽 안에 땅을 파고 만든 트 등 각기 다른 트에서 생활했지. 삼십여 미터 떨어진 작은 능선에 보초를 세워놓고 지냈네.
어느 날 새벽이었어. 초소에서 비명소리와 함께 콩튀듯 총성이 볶아대는 거야. 다급한 나는 따발만 가지고 양손으로 나무와 이엉을 제치고 빠져 나와서 막 튀는데 나를 부르더구만. 박근주 동지가 트 밖으로 몸을 반쯤 내놓고 부르는 거야. 순간 돌아가서 들쳐 업었지. 그 사이에 동지들은 다 뛰고 나와 내 등에 업힌 두 사람만 쳐졌어. 놈들은 총을 쏴대고, 나는 박 동무한테 따발총을 주면서 갈기라고 했네. 따발도 불을 뿜고, 앞뒤로 사방에 총알이 날아와서 박히더구만. 총 한발에 두 사람이 꿰뚫릴 수 있는 위급한 상황인데 급하면 도리어 걸음이 더딘 것인가. 근주 몸둥이는 왜 또 그리 무겁고. 실개천 안으로 들어갔네. 조금만 가면 모퉁이라 총알을 피할 수 있거든. 그런데 물속에 돌들이 이끼가 끼어서 딛는 대로 비틀거리다가 엎어지는 거야. 서너 발 가다가 엎어지고 또 엎어지고 가까스로 모퉁이를 돌아가는데 아, 동욱 동무가 장총을 꼬나들고 혼자 올라오지 않는가. 긴장이 확 풀리더구만. 동지를 구출하기 위해서 총알이 퍼붓는 적진에 단신으로 들어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거든. 쉬운 일이 아니고말고.”
혼잣말처럼 이야기를 마쳤다. 물속에 들어갔다가 나온 사람처럼 줄줄이 흘러내리는 땀을 한 발만 딛고 서서 수건으로 닦아주던 박근주 동지, 총을 꼬나든 이동욱 동지의 모습이 어려왔다. 산을 내려왔다. 찬 냇물에 얼굴도 닦고 점심때가 훨씬 지나버렸다. 남자들은 아침에 라면이라도 삶아 먹었지만 여성들은 굶었기 때문에 지쳐 있었다. 훈련을 단단히 한 셈이다. 성수면에 식당이 변변치 않아서 임실읍으로 갔다. 쌍둥이 식당이라는 간판을 보고 들어갔다. 시장한데다가 음식이 맛깔스럽고 또 인심이 후해서 점심을 잘 먹었다.
오류리를 거쳐서 회문산으로 갔다. 그들이 관광용으로 만들어 놓은 전북 도당 트에 가서 설명을 하고 곧 차로 헬기장까지 갔다. 나는 내일 여분산 등산 때문에 지쳐있는 여성들과 차로 중간 헬기장까지만 가고 청년들은 위 봉우리까지 다녀왔다. 저녁은 지난 해 가을 민가협 후원회 회원들과 먹고 잤던 음식점에 갔다. 주인 내외분이 알아보고 반갑게 맞아주었다. 메기탕으로 저녁을 먹는데 주인님이 꿀단지를 들고 왔다. 토산품이니 가지고 가서 자시라고 한다. 뜻밖의 선물이었다. 떠날 때에도 이곳에 오시거든 식사를 안 하시더라도 들려서 차라도 들고 가시란다. 흐뭇했다.
국죽묵 동생의 집이 멀지 않아서 곧 도착했다. 이재복 누이가 반가워했다. 유기진 선생, 한재룡 선생, 이철진, 김영준이와 그의 여자친구가 와 있었다. 술상 둘레에 앉아서 각자 소개를 했다. 아무래도 초면이라서 서먹하던 분위기가 술잔이 오고가면서 누그러졌다. 농도하고 웃고 나는 고향에 온 듯 허물이라고는 없이 편하게 잤다. 다음날 아침 식사 후에 노조 간부들이 가야한다기에 떠나보내고 우리는 여분산에 오르기 위해서 민제로 갔다. 전화가 왔다. 어제 5년 만에 통화가 된 정화가 2시까지 쌍치에 온단다. 마을 앞에 차를 세워놓고 가뿐하게 차리고 떠났다.
여분산도 작은 산은 아니다. 제법 가파른 산이다. 길이 없는 곳으로 가시밭과 잡목을 헤치며 올라갔다. 땀을 뻘뻘 흘리며 올라갔다. 방어하기에 유리한 지점에는 어김없이 전호 흔적이 보였다. 상봉 밑에서부터 갈지자형 참호 자국이 뚜렷이 드러나 있었다. 아 동지들이 묻혀 있는 곳. 철진이한테 비디오 카메라에 담으라고 했다. 해발 780여 미터의 정상에 올라갔다. 헬기장이 있고 산불 감시초소가 있었다. 주위에 산이 첩첩 멀리 지리산이 보이고 광주 무등산, 추월산, 내장산, 잡방산, 국사봉, 투구봉, 서자봉이 보였다. 상치 일원과 운암저수지가 눈 아래에 보였다. 잠시 땀을 식히면서 지형 설명을 했다. 우리는 양지쪽 마른 억새풀 위에 앉았다.
“여기 여분산은 우리 민족사에 영원히 기록될 전적지네. 혹 남부군 영화를 봤나. 잘못된 것이지만 거기 보면 1951년 3월 19일인가 국방군 대 병력이 회문산을 포위하고 비행기 폭격에 포격을 가하면서 개미떼처럼 능선을 타고 산골짜기로 공격하는 장면이 나오네.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진 거야. 장비 면에서나 수적으로 월등한 적에게 회문산을 내주고 전북 도당과 산하 기동부대가 덕유산으로 이동하던 때였어. 무장부대가 적의 포위망을 뚫고 빠져나가는데 저 아래 금산골 대시멀 등 고라당에는 적이 원 포위해서 압축해왔기 때문에 장성, 담양, 정읍, 순창, 임실 등지에서 쫓겨 온 지방 기관 및 투쟁인민들 만여 명이 집결해 있었대. 그 많은 사람이 무장 부대의 뒤를 따라가다가는 그들에게 짤려서 다 죽을 것이고. 사령부에서는 안전지대인 쌍치로 비무장 대열을 빼돌리기로 작전을 세웠던가 봐. 이 여분산을 지키고 있던 기포병단(후에 407연대) 한 개 중대에 여분산을 포기하면 수많은 인민이 희생된다. 인민들이 쌍치 안전지대로 이동을 완료할 때까지 여분산을 사수하라는 엄중한 전투 명령이 하달된 거야. 여분산 상봉을 빼앗기면 그 수많은 인민이 죽임을 당하거나 생포될 수밖에 없었거든.
그래서 이 여분산 전투가 남쪽 유격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이 치열했던 거야. 비행기 폭격에 수백발의 포탄이 날아오고 열세 번이나 기어오른 적을 반 돌격해서 물리쳤대. 온종일 육박전도 하고. 여기에 보루가 있었어. 보루 안에 막심중기를 걸어놓고 중기분대가 정상에서 결사전을 하다가 다 전사하고. 중기부사수였던 여(汝) 동무만 혼자 중기를 부여잡고 쏘아댔는데 출입구에서 손들어라 하고 총을 쏘더래. 거의 동시에 땅에 떨어져서 구르는 쇠소리가 들려오고. 휙 돌아보니까 군인이 총을 꼬나들고 있었다는구만. 미제 엠완은 마지막 탄알이 나가면 자동으로 케이스가 밖으로 튀어 나가게 되어 있지 않나. 총을 다룬 동무라 적의 총에 총탄이 없다는 것을 알지 않겠어. 그냥 총알처럼 달려 나갔대. 아마 눈에서 불꽃이 튀었을 거야. 무섭게 달려들자 겁 먹은 국방군이 흠칫 뒤로 물러섰고 그 틈에 여 동무는 눈이 남아있는 저 북쪽 급경사로 굴러서 살아남았대. 한 개 중대 전원이 전사하고 단 한사람이 살아 남은거야.
적이 여분산을 점령했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물고 인민들은 다 안전지대로 빠져 나갔대. 뒤에 여 동무가 우리 중대 소대장으로 왔을 때 여 동무로부터 여분산 전투에 대해서 자세히 들었구만. 아마 그 해 6월이나 7월이 아닌가 싶네. 우리가 이 여분산 상봉에 올라왔는데 전호 속에 하얀 뼈만 쌓여 있었어. 육탈이 된 머리와 팔, 다리, 몸의 뼈 토막이 섞여서 쌓여있더구만. 60여 동무들의 백골을 접한 우리는 피 터지는 아픔으로 눈물을 흘렸어. 어금니를 물고 동무들의 뒤를 따르리라 결의를 다졌네. 주변에 흩어져 있던 유골을 모아다가 함께 묻어 드렸어. 인민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자기 목숨을 아낌없이 바친 영웅들. 이곳에 동지들을 영원히 기리기 위한 탑을 세워야 할 텐데, 여러분 몫인지도 몰라.”
말을 마치고 우리는 사진을 찍었다. 시간이 넉넉지 않아서 곧 내려왔다. 올라온 길과 다른 길을 택했다. 사단 본부와 연대 본부가 있던 곳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여분산에서 벌동산으로 뻗은 능선에 제법 평평한 곳이 있다. 오락회도 하고 출정식도 했던 곳이다. 특히 기억나는 것은 군용 열차를 전복시키고 수만 발의 탄약과 포탄을 노획해서 전남 지리산, 충남 지역에 보내주었는데 답례로 전남 예술 단원들이 먼길에 와서 공연했던 자리이기도 하다. 연대 대대 중대가 자리잡고 지냈던 트 자리가 아직도 확연하게 남아있다. 트 자리에 신문을 깔아놓고 한재룡 동지가 가지고 온 제물을 차렸다. 조국과 인민을 위해서 한 몸을 온전히 바친 영령들을 추모하는 예식을 가졌다.
빠른 걸음으로 내려왔다. 들미나리를 캐는 할머니와 전쟁 때 이곳에서 살았는지 몇 마디 주고받았는데 점심 걱정을 하셨다.
“시장하실 텐데 어쩔까요?”
우리 민족의 고유한 미풍양속이 시골에 남아있어서 말만으로도 흐뭇했다. 차를 타고 꼬불꼬불 밤 한말을 먹으며 넘었다는 전설의 고개. 밤재를 넘어서 쌍치로 달려갔다. 정화가 와 있었다. 무척 반가웠다. 남편과 많이 큰 두 딸 은별, 은솔이 인사를 했다. 대학 시절의 친구라고 한 여인과 여인의 딸을 소개했다. 반가운 만남이었다. 우리는 식당에 가서 이야기꽃을 피웠다. 나이가 들수록 아이들이 더 귀엽게 보이는 것일까. 그 녀석들하고 손잡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돌고개에 올라갔다. 보루대 자리도 보고 전호도 보고. 1951년 당시의 쌍치, 돌고개 전투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들려주었다. 내리앉은 보루대, 흩어진 돌 위에 앉아서 아이들을 안고 사진을 찍었다. 티없이 맑고 천진한 우리 아이들에게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지. 정화는 하루 저희 집에서 쉬었다가 가라고 하는 것을 하는 일도 별로 없는데 바쁜 몸이라 다음에 만날 약속을 하고 쌍치에서 헤어졌다.
정읍으로 가는 도중에 쌍치 시산 앞을 지났다. 김정근 동지가 혼자 외롭게 지내고 있는 곳이다. 전화를 했더니 자전거를 타고 달려왔다. 서로 끌어안고 반가워했다. 대전 감옥 특별사 병실에서 함께 살았던 동지다. 차는 바로 출발했다. 일요일 오후라 상경길이 막힐 것 같아서 서둘렀다. 열 시경에 서울에 도착했다. 차를 끌고 다니느라고 철진이가 애썼다. 혼탁한 서울, 전철 안에 앉아있지만 언제나처럼 맑은 물에 씻은 듯 마음의 별들이 총총하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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