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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제일병원 입원실이 산꾼들로 붐빈다. 입원한 산꾼들과 문병 온 산꾼들 때문이다. 산악인 윤대표, 심권식, 유승현, 신현대씨가 한 병실에 입원한 보기 드문 일이 생긴 것이다. 다친 부위는 모두 다르지만 이들은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산에 대한 열정이다.
윤대표, “도움 준 산악인들에게 고마움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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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돌로미테의 암벽을 오르는 윤대표. / 사진 최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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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중 맏형 격인 윤대표(61)씨는 한국을 대표하는 클라이머 중 한 명이다. 그는 1979년 아이거, 1980년 그랑드조라스와 마터호른 등 알프스 3대 북벽을 허욱(60)씨와 함께 한국인 최초로 올랐다. 외에도 1981년 바인타브락2봉 등반, 1983년 틸리초피크 등정, 1984년 샤르체 등정, 1986년 K2 등반 등 1970~1980년대에 해외 고산과 벽 등반에 열정을 불살랐다. 빙벽등반에 있어서도 그의 실력은 손꼽힌다. 1985년 설악산 대승폭과 1986년 한라산 영실 중앙폭을 초등했으며 1978년 설악산 토왕폭을 국내에서 세 번째로 완등했다.
그는 8월 6일 후배 손용식씨와 함께 이탈리아 돌로미테 치마그란테(3,003m) 북벽 등반을 마치고 하산 도중 10여 m 추락했다. 돌로미테를 찾은 것은 세 번째였기에 생소한 등반지는 아니었다. 자일파트너였던 손용식씨와 과거에 함께 돌로미테 등반을 한 적도 있었다. 다만 과거에 비해 난이도가 높은 루트를 택하다 보니 까다로운 점이 있었다. 암질도 다르지만 낙석이 많아 손을 짚거나 발을 디딜 때 늘 조심해야 했다. 가장 힘든 것은 확보물 찾기였다. 그냥 지나치거나 어떨 때는 확보물에서 10m 넘게 올랐는데도 다음 확보물을 찾지 못해 초조한 상태로 등반하기도 했다. 밑에서 확보를 보던 손용식씨는 제발 떨어지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할 정도로 긴장을 요하는 순간이 지나곤 했다.
그럼에도 윤대표씨는 “오버행에 각진 바위가 많아 오히려 국내 화강암 등반보다 더 즐거웠다”고 한다. 그러나 “난이도가 높고 위험한 면이 많아 극도로 긴장한 상태에서 등반해야 했다”며 “하강할 때도 슈퍼트렉션으로 다시 올라가거나 로프를 던져서 확보물을 잡고 탈출하는 등 의도치 않은 위험한 상황이 두 번 있었다”고 했다. 한 번은 걸어서 하산하다 주먹만 한 낙석을 만났는데 하나를 피하자 다른 돌멩이가 총알처럼 달려들어 헬멧에 구멍이 나고 얼굴이 살짝 긁혔다. 그는 “세 번의 위기를 넘겼는데 네 번째 위기는 넘지 못했다”고 한다.
사고 당시 그는 로프하강을 하지 않고 클라이밍다운하다 사고를 당했다. 이에 대해 그는 극도로 말을 아꼈다. 그는 “내 말로 인해 사람들에게 오해 사거나 피해를 주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같이 온 최원일이나 손용식은 40대고 나는 60대니까 나이 차가 꽤 났죠. 등반을 같이 한 적은 있지만 같은 산악회도 아니고 해서, 불편해질까봐 되도록 팀워크를 맞추려 했어요.”
그는 충격으로 추락 당시의 상황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크고 좋은 홀드가 하나 있어서 그걸 두 손으로 잡았는데 돌이 빠진 건지 부서진 건지 모르겠는데…, 테라스에 추락하고 나서 숨을 못 쉬겠어요. 똑바로 누워 호흡하려 했어요. 추측이지만 잠깐 기절했다가 깬 것 같아요. 호흡이 돌아와서 얼른 하강하려 했더니 못 일어나겠는 거예요. 무릎걸음으로 이동해서 용식이한테 내려달라고 해서 한 피치를 내려갔는데 더 이상 하강할 수 없어서 헬기를 불러 달라고 했어요.”
헬기로 후송된 그는 허리 척추와 오른쪽 다리와 뒤꿈치 등에 골절상을 입었다. 이탈리아 현지에서 큰 수술을 두 번 했고 다행히 수술 경과는 좋다고 한다. 특히 이탈리아 현지에서 산악인 임덕용씨가 큰 힘이 되어줬다고 한다. 임덕용씨는 병원에 달려와 수술 진행상황을 알려 주고, 영사관에 연락해 귀국 문제를 도와주는 등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아픈데 이탈리아에서 말은 안 통하지, 시계가 없으니 날짜도 모르겠고, 며칠 동안 아무것도 모른 채 암울했어요. 그래도 큰 걱정은 안 했어요. 오로지 재활해서 내년에 다시 등반해야겠다는 생각만 했어요. 몸이 아파도 등반은 여전히 나를 버티게 하는 힘이었어요.”
그는 돌아가신 어머니가 평생 꿈에 세 번 나왔다고 한다. 그중 한 번이 사고 나던 날인 8월 6일 새벽이었다. 그는 “도움주신 분들께 지면을 통해서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었다”며 “생각지도 못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도와줘서…. 악우회 후배들이 참 많은 도움을 줬어요. 김영도 선배님도 찾아와 주시고 이인정 회장님도 격려해 주시고, 토왕빙폭을 같이 올라갔던 60대 실버 팀과 임덕용, 유한규씨도 도와주시고, 우리 조카도 큰돈을 주고…. 한두 사람이 아니에요. 사실 인간관계를 잘하지 못했다고 생각했기에, 한편으론 고개도 못 들겠고….”
그는 “몸이 회복되면 이젠 무조건 국내 등반만 할 것”이라며 “일흔 살까지 등반하고 싶다”고 한다. 비록 지금은 악조건이지만 “앞으로도 어영부영 쉬운 걸 좇아서 등반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고 낮은 목소리로 힘주어 말한다.
유승현, “이번 겨울에 얼음을 꼭 오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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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수봉 의대길을 선등으로 오르는 유승현. / 사진 유승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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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대씨와 유승현씨는 이에 비해 가벼운 부상이다. 코오롱등산학교 동문산악회 중 하나인 앙끄르산악회 유승현(57) 회장은 8월 25일 인수봉에서 추락해 오른쪽 발목 복사뼈 골절을 당했다. 동양길의 크럭스인 3피치를 선등해서 오르다 추락했다.
그는 “미끄러지면서 볼트를 잡았는데 중심이 무너져 몸이 돌아가면서 게이트가 열려 추락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그는 큰 추락이 아니었기에 인대가 늘어난 줄 알고 야영장까지 걸어왔으나 더 이상 걸을 수 없어 구조대에 업혀서 내려왔다.
유승현씨는 2008년 아내와 함께 코오롱등산학교를 수료하고 앙끄르산악회 활동을 시작했다. 산업디자인 전문회사 디자인와우의 대표이며 유한대 산업디자인과 교수인 그는 1970년대 배재중 산악부 활동을 하며 바위맛을 속으로 품고 있다가 생활이 안정되면서 ‘체계적으로 다시 산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해 등산학교에 입교했다. 수료 이후 목말랐던 산을 열정적으로 올라 지난해에는 키르기스스탄 악사이산군 원정에 원정대장으로 참가, 4,000m대 봉우리 2개를 등정하는 성과를 거뒀다.
유 교수는 “변변찮은 부상이니까 통과의례로 생각한다”며 “앞으로도 알파인스타일의 해외등반을 계속 하고 싶다”고 한다. 그는 디자인 전문가답게 “등반과 디자인은 창의력을 요하는 게 같다”며 “거창하게 큰 의미를 두기보다는 내가 즐거우니 하는 것”이라 말한다.
마침 기자가 찾은 날이 그의 퇴원날이었다. 그는 “앞으로 2~3개월 깁스를 더 해야겠지만 재활해서 이번 겨울에 얼음을 꼭 오르고 싶다”고 한다. 몸이 불편한 와중에도 유 교수는 등반 얘기만 나오면 마치 중학교 산악부신입생처럼 눈을 반짝이며 웃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