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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 기황후 貢女 奇皇后
“모진 비바람에 쓸리고 할퀴어 마모된 돌멩이가 더욱 야물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37
새로 바뀐 거처는 더욱이 적응이 되지 않아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은의 사정이야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와중에 눈뜬 구경거리가 되는 것을 염려한 황제의 배려였다고는 해도 잠자리에 예민한 것은 어쩔 도리가 없다. 은은 이불을 걷어내고 또 버릇처럼 홀린 듯 제 방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달빛을 좇아 한참을 걸었다. 황제궁은 위엄있고, 웅장하고, 거대했으며, 그만큼 복잡한 곳이기도 하다는 것을 잊은 채.
꼭 같은 시각. 은이 아주 좋아하는, 황제궁의 지리에 익숙지 못한 누군가 역시 불편한 잠을 밀어내고 홀로 복도를 걷고 있었다. 마주칠 사람이 없으니 한밤중이 더 편하게 황제궁을 익혀둘 기회이기도 하다는 것으로 굳이 핑계를 만들었다. 길눈이 밝아 이미 어지간한 구조는 눈에 익었지만 말이다. 서성이듯 얼마쯤 걸었을까, 황제궁의 것이라기엔 아주 작고 아담한 연못을 낀 정원이 나타나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달빛이 내려 눈부시게 반짝이는 연못이 잘 내려다보이는 곳, 커다란 기둥 하나를 등에 기대섰다.
그리고 그런 그의 모습을 은이 잠자코 지켜보고 있었다. 팔짱을 낀 채 편안히 그 정경들을 바라다보는 그의 얼굴을. 그의 시간들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그 평온한 분위기가 외려 은을 돌아설 수 없도록 만들었다. 한 발 두 발, 고양이가 된 것처럼 살금살금 다가가 그가 기대선 기둥을 사이에 두고 마찬가지로 등을 기대섰다.
“‘지원 나으리.’”
은근한, 장난스런 은의 목소리에 그가 뒤돌아섰다. 정말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했다는 반응이다. 우겸은 기둥에 가려진 은의 작은 어깨를 확인하고는 다시 제 위치를 되찾는다.
“이렇게 늦은 시각에 이리 다니시면 안 될 텐데요?”
“내게만 적용될 말은 아닌 것 같구나.”
은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작게 웃었다.
“잠 이루기가 참 어려운 곳이에요.”
“그렇더구나.”
“전 꽤 오래돼서 적응됐을 줄 알았는데, 잠자리가 옮겨지고 보니 다시 시작인 것 같아요.”
“또 무엇이 너를 설레게 하는 모양이구나.”
우겸이 연못의 수면위로 잔잔하게 피어오르는 물안개를 바라보며 말했다.
“설레다니요?”
“오래 전, 네가 그랬었지. 설레고 기대되는 일을 앞두고는 잠이 잘 오질 않는다고.”
과거를 상기시키는 우겸의 그 말이 은에게는 어쩐지 뼈가 있는 말로 저를 찌르는 것 같아 곧바로 답을 내어놓을 수 없었다. 그럴 일 없다고 바로 반박하지 못한 저조차 화가 났다. 설렐 일은 아무것도 없는데. 기대할 것도 아무것도.. 없을텐데.
“단지 잠자리가 바뀌어서 그런 것뿐이에요, 전 그냥-”
“은아, 죄책감 가질 것 없다. 황후가 되겠다는 네 선택을 존중했고, 그런 네 곁에 남기로 한 것도 모두 내 의지가 아니냐.”
은은 우겸의 말뜻을 이해했다. 방법은 다르지만, 영원히 함께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같으니 올바른 길로 가고 있다고 그는 말하고 있었다. 은은 저도 모르는 사이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속 깊이 깨닫고 있었다. 제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사람인지를. 그가 곁에 있어줌으로써 저는 평생 천군을 얻은 것 같은 든든함으로 이 낯선 땅에서 위안을 얻겠지만, 정작 그에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
“여기까지 온 이상, 황후가 되기 위해서 무엇이든 밟고 일어서겠다고 다짐했어요. 어쩌면.. 그게 오라버니가 될지도 몰라요.”
“그래야만 한다면 기꺼이.”
“..오라버니.”
우겸은 은이 무엇을 염려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에게 결코 득이 없는 길만은 아니었다. 그녀의 인생에 있어서 사라져서는 안 될 커다란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 이미 그런 존재가 되었다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었다. 제가 없던 동안 생에의 의욕을 잃은 채 무너져 내렸다던 은의 얘기를 태감으로부터 전해 들었을 때 그리 생각했다. 은을 슬프게도, 기쁘게도 할 수 있는 남자. 은이 전적으로 믿고 기댈 수 있는 단 한 사람이 ‘황제’라는 이름의 그가 아니라 자신이라면 괜찮았다. 아직은.
“각오한 일이니, 반드시 황후가 되거라.”
꼭 그래야만 한다는, 믿음과 당부가 동시에 실린 그 말에 은은 신뢰와 부담을 동시에 느꼈다. 그리고 조금은 성급하게, 서툴게 그에게 말했다.
“되고 말거예요. 그리고, 사랑하지 않을 거예요.”
“........”
“오라버니 이외의 다른 누구도 사랑하지 않아요.”
은의 성마른 고백에 우겸은 쓰게 웃는다.
“그런 약속은 조금 이르지 않겠느냐.”
“어째서 믿지 않으세요, 정말이에요..! 폐하를 사랑해서 황후가 되려는 게-”
“아니라는 걸 안다. 감정이란 언제나 변할 수 있는 것이지 않느냐.”
“변하지 않아요. 맹세코 변하지 않는다구요.”
정말 그의 말대로 이건 어린 치기에 불과한, 성급한 고백에 불과한 것일까. 은은 절대 제 마음에 불순함이란 요만큼도 없다고 굳게 믿으면서도, 그가 보고 있을 것 같아 뒤돌아보지 못했다.
“어째서예요.. 기쁘지 않으세요..?”
“나중에, 아주 먼 나중에도 그 맘이 변하지 않았을 때, 그 때 다시 말해다오. 기다리마.”
우겸은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은 어조로 덤덤하게 말했다. 은은 꽉 움켜쥔 두 손으로 제 마음에 강하게 다짐했다. 절대 변하지 않을 마음이라고, 지금이라도 증명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지만 그의 말처럼 언젠가 지금 그대로의 마음으로 꼭 다시 보여주리라고. 증명해보이겠다고.
“너무 늦었구나. 바래다주진 않으마, 돌아가 쉬거라.”
은은 우겸의 ‘냉정해보이려는’ 말과 행동들이 모두 제게서 그동안 들인 정을 떼려는 것이라고 무작정 믿어버렸다. 오라버니는 그런 사람이니까.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니까. 절대 제게서 영영 멀어지려는 것이 아니라는 걸아니까. 은은 불현듯 방향을 돌려 서서는, 벌써 저만치까지 성큼성큼 가버린 우겸의 등을 향해 소리쳤다.
“이 머리장식이 증명할거예요, 하루 한 시도 떼어놓지 않겠어요, 절대루요..!!”
우겸은 멈추지 않은 채 손을 흔들며 사라진다. 조금은 원망스런 눈으로 그런 그를 지켜보는, 그 때의 은은 알지 못했다. 그에게서 받은 머리장식을 늘 곁에 지니고 있는 것으로 제 마음까지 영원히 곁에 묶어둘 수는 없다는 것을.
//貢女 奇皇后//
새 날이 밝자, 아침나절이 조금 지난 뒤 고 환관의 저택으로 진 대인이 찾아왔다. 등청을 서두르고 있던 고 환관에게는 조금 뜻밖의 일이었지만 그를 정중히 맞이했다.
“게으른 환관으로 낙인찍어 저를 내쫓으실 심산이십니까.”
“뭘 그렇게 성급히 구시는겐가. 폐하께서도 지원을 두시어 이제 더 이상 자네를 볶으실 일도 없고, 오늘은 정전 회의가 크고 길어질 것 때문에라도 재상들이 그리 서둘러 등청하진 않을걸세.”
새로운 황후의 입후를 논하게 될 중요한 날이기 때문에라도 서로를 견제하기 위해 얼굴 마주치는 일은 적을 것이라 예상했는데, 외려 그가 아침부터 찾아오고 보니 이 능구렁이의 속내를 파악할 수 없어 고 환관은 긴장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이 늙은이가 또 무슨 꼼수를 부리려는 것인지 궁금한 것도 사실이었다.
“게다가 이렇게 서둘러 간대도 폐하께서는 지금 중요한 손님을 맞고 계시느라 바쁘실 걸세.”
거드름을 피우듯 말하는 진 대인. 황제의 모든 일정에 관해 빠삭한 고 환관이 알기로 오늘 황제궁을 찾을 주요 인사는 없었다.
“제가 모르는 중요한 손님이 있을 리가 없을텐데요.”
“아, 그게 그렇게 되었네. 오늘 꼭 뵙게 해 드려야 할 사람이 있어서 말일세.”
“그럼 대인께서 독단으로 그런 일을 꾸미셨단 말입니까.”
고 환관의 표정이 굳어지자 진 대인은 별 일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으며 말한다.
“그리 딱딱하게 굴 것 없네. 폐하께서 정히 이 일로 심기가 불편하시다면 후에 내가 나서서 벌을 청하겠네.”
“대인께선 폐하께서 그리 하지 않으실 분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계시잖습니까.”
고 환관은 거미줄에 걸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확실하게는 알 수 없지만, 그의 계획대로 놀아난 것 같은 불쾌한 기분에 서둘러 제 하던 준비를 마저 했다. 분명 폐하를 찾아갔다는 그 인사 때문에 제 발을 묶어두려고 일찌감치 찾아온 것이리라. 고 환관은 진 대인을 남겨두고 먼저 방문을 나선다.
“부지런을 떨어야 하는 처지라, 먼저 나서겠습니다. 그럼.”
...
단아한 자태. 진주빛 치맛자락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물결처럼 흔들리고, 지나치지 않은 단정한 장신구들이 박자감 있는 소리를 낸다. 말끔하게 빗어 내린 긴 머리칼이 옅은 바람결에 나부끼며 곁을 스쳐가는 모습을 궁인들은 넋을 놓은 채 지켜보았다. 그것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저들도 모르는 새에 허리를 굽혀 인사를 건넸다. 살굿빛으로 말갛게 화장한 작은 볼은 옅은 미소로써 화답할 뿐이다. 그래서 모두는 그녀의 발걸음이 황제궁으로 향하는 것에 아무런 의심을 두지 않았다. 가까이서 지켜보는 이들은 그런 모습에 매료되었고, 멀리서 보는 이들은 7귀 가운데 하나일 것이라 여겼던 것이다.
그즈음 황제는 제 방에서 곤복을 갖춰 입고 정전에서 있을 회의에 대하여 줄곧 생각하고 있었다. 때문에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라도 고 환관을 기다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등청했을 터인데 아직도 나타나지 않는 그를 의아하게 여기며 바깥으로 나가볼 요량으로 문을 열었을 때였다. 언제부터인지도 모르게 문 앞을 지키고 서있는 작고 동그란 얼굴에 황제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사람의 모습을 한 인형 같은 말간 얼굴의 소녀의 모습에 황제는 반걸음 쯤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곧 평정을 되찾고는, 제 앞을 가로막고 선 화사한 미소를 머금은 소녀를 향해 낮게 물었다.
“누구냐.”
소녀는 흠잡을 데 없는 모양으로 예를 갖추고 자그마한 입술을 열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폐하. 그러나 소녀를 기억하지 못하시는 것은 조금 서운합니다.”
“........”
“‘소홍’이옵니다, 폐하.”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이미 황제의 공간 안으로 한 발을 들여놓았다. 그의 손에서 문고리가 놓아지고, 문은 힘없게 조용히 닫혀버렸다. 소홍. 저를 향해 여전히도 방긋방긋 웃는 얼굴에서 황제는 기억의 강을 거슬러 익숙한 한 장면을 끄집어냈다.
“아-”
철없는 꼬마였던 태자시절. 스승이었던 진 대인의 저택으로 학문을 하러 우연히 들르는 날이면, 꼭 기다렸다는 듯이 대문을 열어 저를 반가이 맞아주던 저보다 작은 소녀가 있었다.
첫댓글 헐.잘되나 싶더니 소홍이라는 것이 우리 은이 앞을 막네요 ㅜㅜㅜ
정정정정니 님★ 다음화도 확인해주세요, 꼬릿말 감사합니다^^
꼬옥 찾아서 보는 연재물이예요. 잘 보았습니다.
이탈리안블루 님★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꼬릿말 감사합니다^^
'그에게서 받은 물건을 늘 곁에 지니고 있는 것으로
제 마음까지 영원히 곁에 묶어둘 수는 없다'
가슴히 찡~합니다ㅠㅠ 또 이렇게 운명의 수레바퀴가 굴러가는군요...
그나저나 소홍이 황제에게 그저 어린날의 추억이어야 할텐데...
Tiare★ 님★ 아슬아슬한 관계들에 또 다른 변화가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다음화에서 뵐게요, 꼬릿말 감사합니다^^
역시 작가님이세요. 황후로 끝날리가 없죠 ㅜㅜ 그렇죠 ㅜㅜ 어우어우 소홍인 어떤 여자일까요 싫어해야 될까요 안타까워해야할까요 다시 혼란의 도가니로~~~~~~~~~~~~ㅜㅜ
헤르티아 님★ 점점 꼬여만 가네요, 다음화도 꼭 확인해주세요. 꼬릿말 감사합니다^^
누구니...넌?
햇살따뜻한마루 님★ 다음화도 확인해주세요, 꼬릿말 감사합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별이 님★ 별이님 때문에라도 우겸을 제 맘대로 다룰 수 없게 되었으니 이건 분명 일부러 그러시는거죠'-' 언주 이름 두번만 불렀다가는 큰일날 분위긴데요. 부디 미치지 마세요;; 꼬릿말 감사합니다^^
또 다른 적이네요... 소홍이... 진 대인의 막내딸이라는 아이인가보죠? 흐음... 앞으로 소홍이가 어찌하는지 쭉 지켜보겠습니다ㅎㅎㅎ
유리별미곰 님★ 소홍이 아주 알쏭달쏭 하실거예요, 지켜봐주세요. 꼬릿말 감사합니다^^
..소홍....... 또 다른 적인건가요 ㅠㅠㅠ
후안 님★ 적 아니면 아군, 둘 중 하나겠죠? 다음화도 확인해주세요, 꼬릿말 감사합니다^^
-0-누군가여~~~~ 근데 묘사된 모습은 제가 희망하는 여성상 ㅋㅋ부럽당
까불지마ㅋ 님★ 청순가련형이시군요, 계속 지켜봐주세요. 꼬릿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