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세종대왕과 무의공 이순신 장군에 대한 글을 올렸었는데요..
제가 제일 안타깝게 생각하는 소현세자에 대한 이야기도 한번 해보고자 합니다..
아마도 살아서 조선의 왕이 되었다면 세종대왕 정조대왕에 버금가는 임금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소현세자가 왕이 되어 자신의 꿈을 실현했다면 우린 일본보다 더 빨리 세계화에 적응 하여 강대국이 되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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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전된 조선, 부강한 조선을 꿈꾸었던 비운의 왕자 - 소현세자
1. 소현세자는 누구인가?
조선 제 16대 왕 인조의 첫째 아들이자 세자이다.
1637년, 병자호란으로 인해 자신의 비와 함께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간다.
그때 세자의 나이 스물여섯.
대신들은 다른 것은 몰라도 나라의 근간인 세자만큼은 절대 보낼 수 없다고 반발하였으나
더 이상 일이 커질 것을 걱정한 소현세자가 자청해서 가기를 청하였다.
청나라에서 볼모 생활을 하는 동안 청의 선진 문물에 눈을 뜨고 그 발전된 문화를 조선으로 도입하기 위하여 애썼으나 결국 독살로 삶을 마감하게 된다.
소현세자는 인품 또한 뛰어나, 볼모시절에 그를 옆에서 감시하던 청나라 장수 용골대가 그의 인품에 반하여 소현세자 사후 그의 아들을 데리고 가서 기르겠다고까지 했다고 한다.
2.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접한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세자빈).
소현세자는 청나라에서 이 세상에는 성리학 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매력적인 학문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감명받았다.
그리고 그에게 큰 가르침을 준, 청나라에 거주하던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에게 선물받은 지구의를 보며 세계는 중국과 조선, 왜만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을 알고 크게 놀랐다.
아담 샬과 교우하며 지내며 선진 문물을 많이 배운 소현세자는 이러한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 부강해질 조선을 꿈꾸었다.
소현세자와 더불어 민회빈 강씨도 뛰어난 외교능력을 갖추었었고 무역의 여왕이라 불리울 만큼 대단한 경제감각의 소유자 였다.
천주교 사상에 매력을 느낀 소현세자는 신부들을 조선에 데려가려 했으나 청나라에도 신부가 부족하여 대신 천주교 신자들인 청황실의 내관들과 궁녀들을 대동하고 가기로 했다.
청나라 정부에서 마침내 소현세자를 조선으로 영구히 보내기로 결정한 것이다.
소현세자는 여러 서양 서적과 물품들을 가지고 청나라 황제의 전송까지 받고는 9년간의 볼모 생활을 마치고 마침내 34세의 나이로 조선으로 귀국하였다.
3. 소현세자의 큰 꿈과 그런 세자를 받아들이기에 너무 작았던 조선.
조선은 선각자인 소현세자 부부를 받아들이기엔 너무도 작은 그릇이었다.
인조는 9년만에 돌아온 소현세자 부부의 귀국 환영 행사를 베풀어주지 않았다.
인조는 오히려 세자가 가져온 서양문물들을 보고 세자를 배척하기 시작하였다.
인조는 세자가 청나라 황제에게 선물받은 벼루를 내놓자 격분한 나머지 그 벼루로 세자의 이마를 내리치기도 했다.
그만큼 인조는 자신에게 치욕을 준 청나라를 극도로 증오하였다.
소현세자가 청나라에서 새로운 조선을 꿈꾸는 동안에 인조는 자신의 아들이 청나라에 가담하여 역적이 되지 않을까 두려워 하였다.
인조는 돌아온 소현세자가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가져온 것을 보고는 소현세자가 자신을 끌어내릴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 결과 소현세자는 9년동안의 볼모생활에서 벗어나 자신의 조국으로 돌아온 지 불과 두달만에 독살로 삶을 마감하게 된다. 아마도 그 독살을 지시한 자는 인조, 소현세자의 아버지일 것이다.
4. 소현세자가 독살 되었다는 것의 증거는?
사실 소현세자는 학질로 삶을 마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것은 인조가 조작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학질은 이미 성장한 소현세자에게 별다른 위험이 되지 않는 질병이었는데, 그 작은 질병으로 소현세자가 삶을 마감하였다고는 믿을 수가 없다.
그리고 소현세자를 진료한 의원이 소현세자빈 민회빈 강씨와 사이가 좋지않던 인조의 후궁 조귀인이 추천한 자라는 것도 의심스럽다.
그리고 인조는 세자 사후에 그 의원 이형익이 돌팔이이면서 세자를 죽였다는 상소가 올라오자 이형익을 감싸며 오히려 상소를 올린 김광현을 좌천시켜버린다. 좌천의 이유는 세자빈 강씨의 조카사위인 김광현이 강씨의 사주를 받고 모함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조는 세자의 시신을 안치한 관의 명칭을 재궁이라 하지 않고 널이라고 부르게 했다.
또한 세자를 안장한 장소를 세자의 묘역을 뜻하는 원이라고 부르지 않고 묘라고 쓰게 했다. 세자가 죽으면 세자 부모인 왕과 비도 3년간이나 상복을 입어야 했는데 인조는 불과 1주일만에 상복을 벗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인조실록에서 소현세자가 죽었을 때, 신체 아홉구멍에서 피가 흐르고 사체가 검은 빛으로 변색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독살로 보여지는 결정적 증거이다.
5. 아들을 죽이고도 만족하지 못했던 아비, 인조
인조의 악행은 소현세자를 죽이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인조는 남편을 잃은 세자빈 강씨를 자신을 저주하고 청나라와 결탁하였다는 죄목으로 폐출하였고, 그날로 당장 사약을 내려 사사하였다.
소현세자와 함께 부강한 조선을 꿈꿨던 신여성 민회빈 강씨는 이렇게 허망하게 시아버지의 손에 죽었다.
게다가 인조는 세자빈을 죽인거로도 모자라 세자빈 강씨의 형제, 모친까지도 처형하는 극악스러움을 보여주었다. 결국 민회빈 강씨의 집안은 인조로 인해 멸문하였다..
여기서도 멈출줄 몰랐던 인조는 세자가 죽으면 제 1 왕위계승자가 되는 소현세자의 큰아들 석철이 아닌 자신의 둘째아들 봉림대군을 세자에 책봉한다.
그리고 자신의 손자들인 소현세자의 세 아들마저 제주도로 유배시킨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첫째 석철과, 둘째 석린은 유배지에서 의문사하게 된다.
이 역시 인조의 소행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청나라에서 소현세자의 죽음을 극히 안타까워하였고 앞서 말했던 청나라 장수 용골대가 소현세자의 아들을 맡아 기르겠다고 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는 아마 소현세자의 아들들이 자신에게 복수할까봐 두려워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인조는 자신의 왕위를 지키기 위해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던 자신의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그 일가를 참살한다..
더욱 억울한 것은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는 인조의 병적인 증오의 대상이 되어 함께 묻히지도 못하였다.
지금도 두 묘는 서로 다른 곳에 위치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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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왕자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
선진 문물에 눈떴던 그들이 조선의 왕과 왕후가 되었더라면 역사는 뒤바뀌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조선이 일본보다 훨씬 앞서 선진화되어서, 일제치하라는 원통한 역사는 써지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는 우리 역사의 아픈 기억입니다.
조선이 놓쳐버린 기회입니다..
비나이다ㅠㅜ.swf
첫댓글 이미 지나간 일은 어찌할 수 없지만 소현세자 얘기는 항상 날 씁쓸하게 만드는듯 ㅠㅠㅠㅠ 안타까운 삶이다 진짜
하.. 인조.. 애증의 인조...
ㅠㅠ 이거 kbs에서 소현세자에 대해서 역사스페셜? 그거나온거봤었었는데 ㅠㅠ안타깝더라진짜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