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전쟁 발발 후
링컨은 로스차일드와 그의 미국 측 대리인이
제시한 24~36%라는 고금리의 융자를 거절하고
재무부에 ‘미국 정부권’,
즉 그린백을 발행할 권한을 주었다.
1862년 2월에 통과한
‘법정화폐 법안(Legal Tender Act)’ 으로 재무부는
1억 5,000만 달러의 그린백을 발행했으며,
1862년 7월과 1863년 3월에
다시 각각 1억 5,000만 달러를 발행해
남북전쟁 기간 동안 총 4억 5,000만 달러를 발행했다.
링컨의 달러 발행은
국제 금융계의 벌집을 쑤셔놓은 격이어서
은행재벌들은 격분했다.
그러나 일반 국민과 산업 부문에서는
달러 발행을 환영했다.
링컨의 새 화폐는 1994년까지 유통되었다.
1863년 전쟁이 중요한 시점에 이르자
링컨은 더 많은 돈을 필요로 했다.
세 번째의 화폐 발행 권한을 얻고자
그는 부득이 의회의 은행가 세력에게 고개를 숙였고,
타협 결과 1863년 ‘국가은행법’ 에 서명했다.
이 법안의 내용은 정부가 국립은행에
통일 표준의 은행권,
즉 발행 은행의 명칭이 다른 것만 제외하고
그린백과 똑같은 은행권을
발행할 권한을 준다는 것이다.
이들 은행은 실질적으로 미국의 국가화폐를 발행하게 될 것이다.
중요한 점은 이들 은행이 미국 정부 채권을 은행권 발행의 준비금으로 삼아
미국의 화폐 발행과 정부 채무를 연동시킴으로써
정부가 영구적으로 채무를 상환할 수 없게 한 것이다.
미국의 유명한 경제학자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John Kenneth Galbraith)는
이를 날카로운 어조로 지적한다.
“남북전쟁이 끝난 후 오랜 시간동안
연방정부의 재정은 매년 큰 흑자를 기록했다.
그러나 채무를 완전히 상환하거나
정부 채권을 회수할 수 없었다.
그러면 국가화폐를 담보로 할 채권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채무를 상환한다는 것은
화폐 유통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과 같았다.”
국제 은행재벌들이
미국에도 잉글랜드은행 같은 방식을 복제하려는
음모는 마침내 성공했다.
이때부터 미국 정부가 영구적으로 상환해야 할 채무
이자의 증가는 미국인들의 목을 무겁게 짓눌렀으며,
그 압박은 점점 심해졌다.
2006년에 미 연방정부는
8조 6,000억 달러라는 천문학적인 채무를 기록했다.
4인 가족 한 가구당 11만 2,000달러의 빚을 진 셈이다
. 게다가 이 국채는 1초당 2만 달러의 무서운 속도로
늘어나고 있다. 미 연방정부가 국채 이자로 지급하는
비용은 의료보험과 국방비 다음으로 많다.
1864년부터 은행재벌들은
자손 대대로 국채 이자라는 열매의 단맛을 톡톡히
보고 있다.
정부가 직접 화폐를 발행하는 것과
정부가 채권을 발행하고 은행이 화폐를 발행하는 것의
차이, 언뜻 보기에는 별것 아닌 차이 때문에
인류 역사상 최대의 불공정한 결과가 초래된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은행가들에게
간접세를 내는 이유가 피땀 흘려 일해 번 재산과
화폐 때문이라니, 이런 아이러니도 없다.
링컨은 이 같은 영구적인 위험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미봉책을 쓴 것이다.
링컨은 원래 1865년 연임에 성공한 후
이 법안을 폐지하려고 했으나,
대선에서 승리하고 나서 불과 41일 만에 암살당하고
말았다.
그후 의회에서 은행가들의 세력은
더 기승을 떨치며 링컨의 달러화를 폐지하려고 했다.
1866년 4월 12일,
‘긴축법안’ 을 통과시킨 의회는
유통 중인 모든 달러화를 회수해
금화로 환전하며 국제은행가들이 절대적 우위를
점하는 금본위제를 부활하려고 시도했다.
* 금본위제
금의 일정량의 가치를 기준으로
단위 화폐의 가치를 재는 제도
오랫동안 전쟁을 치르느라
사방이 폐허로 변한 나라에서
통화 긴축처럼 황당한 정책도 없을 것이다.
통화 유통량은
1866년 18억 달러(일인당 50.46달러)에서
1867년 13억 달러(일인당 44.00달러)로 줄어들었다가
1867년 6억 달러(일인당 14.60달러)로,
결국 1886년 4억 달러(일인당 6.67달러)까지
줄어들었다.
미국은 전쟁의 상처를 치유해야 했으며,
경제 회복이 무엇보다 시급했다.
게다가 이때는 인구가 급증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그런데 인위적으로 통화 공급을 줄여버린 것이다.
사람들은 번영과 쇠퇴가 경제 발전의 규칙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국제 금융재벌들이
통화 공급량을 손에 쥐고 조였다 풀었다 하는 것이
문제의 근원이다.
1872년 겨울, 국제 금융재벌들은
어니스트 새드(Ernest Seyd)를 미국으로 파견했다.
그는 1873년 고위 관리들을 돈으로 매수해
‘1873년의 악법’ 이라고 불리는 ‘화폐주조법’ 이
통과되도록 힘썼으며,
이 법 전문의 초안을 직접 맡기도 했다.
미국은 이 법안에 따라 은화를 화폐 유통에서
배제하고 금화를 유일한 기축 화폐로 삼았다.
그렇지 않아도 심각하게 부족한 화폐 유통에
설상가상의 효과를 불러올 것이 뻔했다.
훗날 어니스트는 의기양양해서 말했다.
“1872년 겨울에 나는 미국에 가서 은화를 폐지하는
화폐주조법을 통과시켰다.
내가 대변하는 것은 잉글랜드은행 이사들의 이익이다
. 1873년이 되자 금화는 유일한 금속화폐가 되었다.”
은화를 폐지해
국제 화폐 유통 분야에 영향을 미치도록 한 것은
국제 금융재벌들이 세계의 화폐 공급량에
대한 절대적 통제력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점점 많아지는 은광의 발굴에 비해 금광의 채굴량은
미미하기 짝이 없었다.
세계의 금광 채굴을 완전히 장악한 국제 금융재벌들은
당연히 통제하기 어려운 은화 때문에 세계 금융에서
차지한 자신들의 패권적 지위가 흔들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 따라서 은은 1871년부터
독일, 영국,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폐지되어
각국 화폐 유통량이 큰 폭으로 감소했다.
이로 말미암아 유럽에서는
20년이나 지속되는 심각한 경제 불황이 초래되었다.
미국에서는 ‘긴축법안’ 과 ‘화폐주조법’ 이
1873~1879년 경제 대불황을 직접 촉발했다.
3년 동안 미국의 실업률은 30%로 치솟았다.
미국인들은 링컨의 지폐와 은화를 연동하는 시대로
돌아가자고 강력히 요구했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백은위원회와
그린백당(Greenback Party)을 조직해,
전국적으로 은화와 금화를 병행하는 제도의 회복과
국민의 환영을 받는 링컨 지폐의 재발행을 요구했다.
백은위원회는 보고서를 통해
다음과 같은 내용을 발표했다.
“암흑의 중세기는 화폐 부족과 가격 하락이
그 원인이었다. 화폐 없이는 문명이 발생할 수 없으며,
화폐 공급이 줄어들면 문명이 소멸한다.
로마의 기독교 시대에 제국은
총 18억 달러에 상당하는 금속화폐를 유통했다.
15세기 말까지 유럽의 금속화폐 유통량은
2억 달러에 불과했다.
역사상 로마제국이 암흑의 중세기에 접어든 것보다
더 큰 재난은 없었다.”
미국은행가협회의 태도는
이와 선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이 협회는 모든 회원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우리는 여러분에게 유명한 신문과 언론을
적극 지지하기를 권합니다.
특히 농업과 종교 분야의 언론을 선동해
정부의 화폐 발행을 결사적으로 반대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정부의 화폐 발행에 반대를 표명하지 않은
후보자에 대한 후원을 즉각 중지해야 합니다.
은행의 화폐 발행을 폐지하거나
정부의 화폐 발행권을 부활하면
정부가 국민에게 화폐를 공급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 은행가들과 대출업자는
큰 손해를 볼 것입니다.
지금 당장 여러분 지역의 의원을 만나
우리의 이익을 보호하라고 요구하십시오.
그래야 우리가 입법을 통제할 수 있습니다.”
1881년, 경제 불황 가운데 취임한
미국의 20대 대통령 제임스 가필드(James Garfield)는
문제의 핵심을 확실하게 짚어 말했다.
“어떤 나라나 화폐의 공급을 통제하는 쪽이
모든 공업과 상업을 주도하는 절대 주인이다.
모든 화폐 시스템이 극소수에 의해
이런저런 방법으로 쉽게 통제된다는 사실을 알면,
그것이 곧 통화 팽창이나 긴축의 근원임을 알 수 있다.”
이 말을 하고 채 몇 주일 지나지 않은
1881년 7월 2일, 가필드 대통령은
또 한 사람의 ‘정신병 환자’
찰스 기토에게 피습을 당했다.
두 발의 총알을 맞은 가필드는
9월 19일 마침내 사망했다.
19세기 유럽의 국제 금융재벌들은
‘신성한 금권으로 신성한 왕권을 대체’ 하는 데
성공했다. 이제 그들은 미국에서 ‘신성한 금권으로
신성한 민권을 점차 와해’ 하는 데 성공했다.
국제 금융재벌들이 미국 민선 정부와 100년에 걸쳐
벌인 치열한 힘겨루기는 이미 그들이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는 것으로 끝났다.
미국의 역사학자들은 미국 대통령의 사망률이
노르망디 상륙 당시 미군 선봉부대의 평균 사망률보다
높다고 지적한다.
은행가들은 1863년에 ‘국립은행법’ 을 흐뭇하게 손에
쥐고 미국에도 제2의 잉글랜드은행을 복제한다는
최종 목표의 달성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미국 화폐 발행을 완전히 관장할 민영 중앙은행,
은행가들의 개인은행이 미합중국의 지평선 너머로
서서히 떠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