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붕 위의 식사
이 근 화 (1976~)
나는 나인 듯 어느 맑게 개인 날에 시금치를 삶고 북어를 찢는다 골목마다 장미가 피어나고 오후에는 차를 마신다 어느 맑은 날에는, 낮잠을 자고 어김없이 목욕을 하고 나는 또 나인 듯이 외출을 한다 나는 나에게 다 이른 것처럼 클랙슨을 울리고 정말 나인 것처럼 상스럽게 중얼거린다 국부적으로 내리는 비, 어느 날엔가 나는 머리카락을 매만지고 빗방울은 말없이 떨어진다 나는 내가 아닌 것처럼 손등을 어깨를 훔쳐본다 나는 나에게 이르러 늦은 저녁 식사를 하고. 내가 갈 수 없는 곳들의 지명을 단숨에 불러본다 내가 나에게 이른 것처럼 마치 그런 것처럼
- 시집〈칸트의 동물원〉민음사 -
칸트의 동물원 - 예스24
2004년 《현대문학》에 「칸트의 동물원」 외 4편을 발표하며 등단한 이근화의 첫 시집이다. 등단작 5편을 포함한 시 57편을 3부로 나누어 실었다. 「칸트의 동물원」, 「왕의 항아리」, 「유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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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화 시집 〈칸트의 동물원〉민음사 | 2006
코 미 디
이 근 화
얼마나 많은 콩나물이 저녁의 식탁에 오를까 우리가 죽어가는 날까지 딱딱 이를 부딪치며 씹어야 할 것들이 자라고 매일 발걸음을 딛는다 우리가 본 것들은 순서대로 하나씩 사라지겠지 실랩스틱에 대한 우리의 기호 때문일 거야 고춧가루를 넣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잠시 망설였던가 한 사람이 쓰러지고 두 사람이 쓰러지고 폭소와 폭소 사이에 밥알이 흩어진다 구르고 짓이겨지고 들러붙는다 손 끝에 화장지에 엉긴 웃음은 다 소화되지 않는다 오늘 저녁 식탁에서 미끄러져 영원히 죽고 싶다는 듯 한 사람이 쓰러지고 두 사람이 쓰러지고 콩나물은 길고 가늘고 노랗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억지로 입은 속옷이나 엉성하게 붙인 콧수염처럼 어색하고 어색해서 이제 곧 찢어지거나 떨어질 것들이 있다 꼭꼭 씹어 삼키지 않아도 쉽게 넘어가는 것들이 있다
-《한밤에 우리가 / 2013 현대문학상 수상시집》-
한밤에 우리가 - 예스24
제 58회 현대문학상 수상시들을 모은 시집이다. 수상작인 이근화 시인의 작품에는 다 말하지 않고 다 드러내지 않으면서 무언가를 여백에 남겨두고 묻어둔다. 그 고요한 여백 속에 말하지 않은
이근화 등 저《한밤에 우리가 / 2013 현대문학상 수상시집》현대문학 / 2012
제발 이 손 좀 놔주세요
호박죽 포장을 들고 있었다 오토바이가 쓰러졌고 한참을 미끄러져 나갔다 쿵 소리가 먼저였던가 계산하던 아줌마가 영수증을 건네주다 놀라서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아이고 어떡해 어떡하지 어떡하나 헬멧을 벗은 사람은 초로의 남자였다 오토바이 밑에 깔린 다리를 빼지 못했다 설탕 트럭을 피하려다가 속도를 줄이지 못한 걸까 트럭 운전수가 오토바이를 들어 올렸다 사람들이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경찰서인지 병원인지 모를 곳으로 손가락을 놀렸다 호박죽은 식어가는데 죽집 아줌마가 내 손을 놓지 않았다 나는 서둘러 가야 하는데 혈압이 오르락내리락 엄마한테 가야 하는데 얼마나 다쳤는지 보험을 들어놨는지 걱정은 누구의 몫일까 영원히 일어서지 못하면 어떡해 설탕 트럭이 걱정을 우수수 쏟아냈다 아줌마 제발 이 손 좀 놔주세요, 말하지 못했다 죽은 식어가는데 엄마가 오르락내리락 기다리는데 남자의 죽은 누가 포장해 갈지 빚쟁이 딸이 있으면 어떡해 달콤하지 않은 걱정들이 쏟아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