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관 성품의 천진각, 초원 스님
나라 안팎이 울림픽으로 들떠 있었던 1988년 초가을이었다. 당시 내가 토굴 생활처럼 살고 있는 원적정사로 전화가 왔다. 울진 불영사에서 여름 한철 안거를 마치고 상경한 초원 스님이었다. 가락동 어디쯤이니까 나오라는 전화였다. 오랜만에 얼굴이나 한번 보자는 것이다. 나는 갑작스런 전화라 내일 나가겠다고 했고, 초원 스님은 시간이 없다고 했다. 나는 그러면 스님이 원적정사로 오시라고 했다. 그것도 힘들고 무조건 나보고 빨리 나오라고만 했다. 결국 나는 나가지 않았고 그것이 초원 스님의 음성을 들은 마지막이었다.
뒤에 안 일이지만 그 때 이미 초원 스님은 병이 상당히 깊어 있었다고 한다. 전부터 몸이 허약하여 늘상 병을 달고 다녔지만 그 때는 불치병인 암이었다. 병 치료 차 서울에 올라왔다가 나를 한번 보고 가고 싶어서 전화를 했는데 나는 그것도 모르고 귀찮다는 생각으로 나가지 않았던 것이다.
초원 스님은 비구니 스님이다. 통도사가 있는 양산 천성산 아래의 내원사가 본사다. 나와의 인연은 참으로 오래됐고 깊다.
내가 어느 해 겨울 어린 나이로 소천 노사를 찾아가 스님을 만들어 달라고 했을 때, 초원 스님은 천진각이라는 이름의 보살로 노스님 시자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 이듬해 봄에 소천 스님께 사미게를 받았고 2년여의 세월을 같은 절에서 살았다. 그 때 내 나이는 열여덟 살이었고 천진각 보살은 서른 셋의 노처녀였다.
엄하기만 하고 별로 잔정이 없으신 노스님 아래서 어린 나는 항상 힘들어했다. 아직 출가자로서의 자세라든지 소위 사문의 물이 덜 들어 있을 때라 갈등과 방황도 많았고, 엉뚱한 실수와 잘못을 범할 때도 많았다.
그 때마다 내게 격려를 아끼지 않은 사람이 천진각 보살이었다. 때로는 큰누님 같고 어머니 같은 마음으로 나를 돌보아 주었다. 성격이 부드럽고 천진하여 매사에 사심이 없이 행동했다. 큰스님께 심한 꾸중을 들은 날은 노스님 몰래 내가 좋아하는 영화 구경도 같이 가주고 했다. 나는 영화 구경을 매우 좋아했는데 노스님이 아시게 되면 몹시 꾸중을 듣곤 했다.
무엇보다 나는 그 때 초발심에서 치문까지를 노스님 아래서 천진각 보살하고 같이 배웠다. 스승 소천 스님은 아시다시피 당대 한국 불교 최고의 불교 사상가이며 학승이시다. 천진각 보살은 이런 노스님 아래서 노스님의 까다롭고 어려운 구술 원고를 쓸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으니 그 실력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
그러니 나와 같이 초발심을 배우고 치문을 배우는 것은 순전히 노스님과 나를 위한 보살님의 배려였다.
한번은 내가 선원에서 공부하는 운수납자가 되어 보각사에 다니러 갔을 때였다. 보살님이 나를 불러서 매우 중대한 의논이 있다고 했다. 그것은 결혼을 해야 하느냐 아니면 출가해서 스님이 돼야 하느냐는 것을 고민하는 중이라는 것이다. 나는 그 때 이미 출가 사문으로서의 자긍심이 하늘을 찌를 때였고, 누구에게나 출가를 권하고 싶은 때였다. 그래서 당연히 천진각 보살에게 결혼보다는 출가 사문이 되는 것을 권했다. 내 권유가 받아들여진 것일까? 천진각은 그 때 가을 천성산 내원사로 출가를 했다.
비구니 초원 스님이 된 것이다. 은사이신 소천 스님은 1978년에 열반을 하셨다.
초원 스님이 한 번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불교는 물을 떠나서 살 수 없습니다. 우리들 출가 사문이 물고기라면 우리가 살아가는 인간 사회는 물이라고 할 것입니다. 따라서 출가 사문은 세상을 떠나 있는 것 같지만 기실 세상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것입니다. 또 파도는 물에서 나와 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물이 없었다면 파도도 없습니다. 그러니 스님이 진정한 수행자가 되기 위해서는 수행과 인간의 삶이 둘이 아님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노스님(소천)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님은 부디 참다운 수행자로서 세상의 목탁이 되십시오.“
노스님이 열반하신 해에 내 나이는 스물 일곱 살이었다. 나는 이미 다 성장해 있었고, 사문으로서 또는 수선납자로서 큰소리치는 교만함까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초원 스님은 내가 아직 어린데 노스님이 돌아가셨으니 고아가 되었단 듯이 측은해 했다. 그리고 기회 있을 때마다 노스님의 사상에 대하여 이야기 해주고 또 토론도 많이 했다. 그러나 그 때 나는 초원 스님의 물고기는 물을 떠나서 살 수 없다는 말의 의미를 깊이 있게 생각하지 못했다. 이제 초원 스님까지 열반하고 없는 지금에 와서야 그 때 그 물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며 우리 스님의 사상이 무엇인지를 겨우 조금 알 듯하게 되었다.
소천 노스님의 사상에서 물은 바로 민족이었고 민중이었으며 중생이었다. 아니 그것은 보다 큰 의미로 일체만법이 불교 아님이 없다고 하는 불법의 큰 바다였다. 그리고 모든 사물의 실상이며 본체라고 할 수 있다. 본체를 떠나서 작용이 있을 수 없듯이 사문은 중생을 떠나고 민중을 떠나서 혹은 민족을 떠나서 불도를 성취할 수 없는 것이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것과 같이, 나는 비구였고 초원 스님은 비구니인 관계로 자주 만날 수는 없었다.
부산 범어사에 있을 때였던가. 한번은 그리운 마음에 내원사로 초원 스님을 찾아간 일이 있다. 그것도 혼자가 아니라 도반들과 같이 말이다. 초원 스님은 그 때 아마 서기 겸 회계라는 소임을 보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우리 일행이 온 것을 보고 반가워하면서도 매우 냉정하게 대했다. 나에게 어찌 비구승이 특별한 볼일 없이 여스님들이 계신 절에를 왔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이내 돌아가라고 해서 우리 일행은 차 한 잔도 못 얻어 마시고 돌아오고야 말았다. 이 일을 두고 뒷날 나에게 몇 번이나 미안하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또 비구니 스님들 처소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그 후 나는 지금까지 비구니 스님들 처소에 가는 것을 극히 조심하고 있다.
그리고 나 역시 그 때는 운수객이라 일정한 처소가 없었으니 초원 스님이 나를 찾아올 수 있는 형편도 아니어서 일년에 한번 정도 노스님 제사 때나 되어야 겨우 얼굴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1989년에 나는 인천에 있는 어느 절에 잠시 머물고 있었다. 어느 날 스님과 가장 가까운 한 보살로부터 초원 스님이 중병으로 오늘 내일 한다는 전화가 왔다. 지난 가을에 만나자고 했을 때 못 만난 일도 있고 해서 급하게 내원사로 내려갔다. 그 때 이미 스님의 병은 골수 깊이 침투하여 있었던 모양이다. 그토록 병이 깊어졌는데 나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인천서 내원사는 여간 먼 길이 아니다. 밤늦게 도착하여 하룻밤을 아래 마을 여관에서 잤다. 비구니 처소에 비구승이 밤늦게 찾아가는 것이 결례이기 때문이다. 그 이튿날 아침에 절에 올라가니 그 날 따라 환자는 어느 용하다는 의원의 치료를 받아 본다고 아침 일찍 출타했다는 것이다. 기다렸다가 만나고 오려고 객실에 안자 있었더니 지객 스님이 와서 환자는 오후 늦어서야 돌아오니 기다리지 말고 돌아가라는 것이다. 병자의 방이나 한 번 들여다보자고 했더니 그것도 거절을 했다. 모두들 비구니가 아픈데 주책없이 무엇 때문에 비구승이 찾아 왔느냐는 듯이 대했다.
할 수 없이 다음날을 기약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그 보살과 언제 다시 한 번 같이 가자고 약속을 해놓고 있었는데 며칠 지나지 않아서 열반했다는 전갈이 왔다.
그런데 일이 묘하게 되느라고 소천 스님 슬하로 말년에 출가한 고봉 스님이 같은 날 부산 범어사에서 열반을 했다. 밤길을 달려서 내원사에 도착하니 새벽이었다. 그 날 역시 나는 비구라는 이유로 다른 여러 장례식 손님 가운데서 가장 불청객이었다.
삼일장을 했는데 범어사 고봉 스님 장례로 인해서 초원 스님 장례는 겨우 다비장에 가보는 정도였다. 사십구제 때는 아예 참석조차 못하고 말았다. 지금도 기일이 돌아오면 제사에 참석해 보고 싶지만 불청객 대접받는 것이 싫어서 못 가고 있다. 그래도 내원사에서는 장례식이며 사십구제를 매우 잘 했다고 한다. 선객으로 사중에 덕망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이제 갓 출가하여 수행자의 길을 가야 하는 그 스님의 어린 상좌(제자 스님)들이었다. 소천 스님이 열반하신 뒤 나를 그렇게 안쓰러워 하더니 초원 스님 역시 아직은 어린 상좌들을 두고 겨우 오십 초반의 나이에 열반에 든 것이다.
뒷날 사형인 창봉 스님이 전하길 초원 스님의 발병 원인은 소천 스님의 문집발간을 위해 원고를 정리할 때 지나치게 무리한 탓이라고 했다. 나 역시 그렇다고 생각한다. 원래 약한 몸에다가 칠팔천 매의 원고를 혼자서 불철주야 정리했으니 병이 안 나겠는가 .소천 스님의 제자로 자기 책무를 다 한 것이라고 해야하겠다. 그러고 보면 나도 초원 스님의 발병에는 책임이 있다. 원고 정리를 권한 것은 나였으니까.
우여곡절 끝에 금년 봄 소천 스님의 문집이 발간되었다. 초원 스님이 열반한 지도 벌써 몇 년이라는 세월이 훌쩍 흘러갔다. 소천 스님은 8.15 이후 불교 사상가로는 최고봉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우리 불교계에 소천을 빼놓고 그 동안 사상가가 있기나 했는가? 스님의 문집이 우여곡절 가운데 나왔으나, 문집을 펴내 집단 이익을 챙기려는 지극히 보수적인 무리들이 소천의 진보적인 사상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있기나 한 것인지 모르겠다.
어찌 되었거나 스님의 문집이 나오기까지 제일 힘을 썼고 가장 기뻐할 사람은 역시 초원 스님인데 이미 세상에 없다.
아니 문집을 앞에 놓고 생각하니 소천 스님의 활공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는 초원 스님이 없는 것이 더욱 아쉽다.
초원 스님이시여! 부디 명복 있으시라.
출처 ; 효림 스님 / 그 산에 스님이 있었네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