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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빈낙도(安貧樂道)
가난을 편안히 여기고 도를 즐긴다는 뜻으로, 재화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인생을 그저 평안히 즐기며 살아가는 태도를 이르는 말이다.
安 : 편안 안(宀/3)
貧 : 가난할 빈(貝/4)
樂 : 즐길 낙(木/11)
道 : 길 도(辶/10)
(유의어)
단사표음(簞食瓢飮)
단표누항(簞瓢陋巷)
안분지족(安分知足)
일단사일표음(一簞食一瓢飲)
청빈낙도(淸貧樂道)
출전 : 후한서(後漢書) 卷26 복후송채풍조모위열전(伏侯宋蔡馮趙牟韋列傳)
안빈낙도의 사전적 의미는 '구차(苟且)하고 궁색(窮塞)하면서도 그것에 구속(拘束)되지 않고 평안(平安)하게 즐기는 마음으로 살아감'이다
이 성어는 후한서(後漢書) 卷26 복후송채풍조모(伏侯宋蔡馮趙牟) 위표열전(韋彪列傳)에 나오는 말로, 그 대략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위표는 어려운 가정환경과 건강이 좋지 않은 속에서도 효를 행하고,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아 유종(儒宗)이라는 아름다운 칭호를 얻었다(好學洽聞, 雅稱儒宗).
효렴(孝廉)에 천거되어 낭중(郎中)이 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고 교수가 되었다(舉孝廉, 除郎中, 以病免, 復歸教授).
그는 가난하여도 그에 구속되지 않고 도를 즐기며 참된 멋을 즐기어 장안의 선비들이 그를 존경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安貧樂道, 恬於進趣, 三輔諸儒莫不慕仰之).
(後漢書/卷26 伏侯宋蔡馮趙牟韋列傳)
행실은 항상 상층을 밟을 것을 생각해야 되고, 생활하는 데는 항상 하층에 처할 것을 생각해야 된다.
만일 내가 이미 평범한 사람이라면 착한 사람 되기를 생각해야 하고 착한 사람이면 군자(君子)와 대현(大賢)이 되어 성인(聖人)이 되기를 생각해야 하니, 이는 꾸준히 노력하는 데 달렸다.
만약 큰 집에 살고 고량진미(膏粱珍味)를 먹고 지낸다면, '내가 장차 초가집에 살면서 거친 음식을 먹고 지내더라도 원망하지 않으리라' 생각해야 하고,
또 초가집에 살며 나물밥을 먹고 살면서, '내가 장차 토담집에 살면서 굶주려 죽더라도 원망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면 이는 겸손한 것이다. 대저 이와 같다면 어디 간들 편안하고 태평하지 않겠는가.
이덕무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가운데 '이목구심서 3'에 나오는 내용이다. 세상을 이렇게 살면 저자의 말대로 어디 간들 편하고 태평스럽겠다. 요즘 부쩍 안빈낙도의 길을 생각하게 되니 다 경제가 어려운 탓이다.
'논어' 옹야(雍也)편에는 '한 바구니 밥을 먹고 한바가지 물을 마시며, 누항(陋巷)에 있는 것은 사람마다 그 근심을 견딜 수 없는 일인데, 안회(顔回)는 그 즐거움을 고치지 아니하니, 어질도다 안회여!' 하였다. 여기서 나온 단사표음(簞食瓢飮)이 안빈낙도(安貧樂道)를 나타내는 말이 되었다.
'안빈낙도(安貧樂道)'란 구차하고 궁색하여도 그에 구속되지 않고 즐기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이덕무의 말도 새겨두라. '서민들이 안빈낙도하지 않는다고 책하는 것은 또한 관대하지 못한 것이다. 대저 안(安)이라는 것은 스스로 편안하게 여기는 것을 말한다.'
안빈낙도(安貧樂道)
중국의 성인(聖人) 공자(孔子)는 수많은 제자들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안연(顏淵)을 가장 사랑하고 아꼈다고 한다. '논어(論語)'에는 안연과 관련한 대목이 많이 나오는데, 공자가 안연을 애정한 이유를 알 수 있다.
'술이(述而)' 편에 '나물밥에 물을 마시고 팔을 베고 눕더라도 즐거움이 또한 그 속에 있으니, 떳떳하지 못한 부귀는 나에게 뜬구름과 같다(飯疏食飮水, 曲肱而枕之, 樂亦在其中矣, 不義而富且貴, 於我如浮雲)'라고 하여 먹는 것이 하찮아도 누리는 것이 보잘것없어도 욕심 부리지 않고 만족하는 삶을 추구하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이 점을 가장 잘 지킨 제자가 바로 안연이다. '옹야(雍也)' 편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어질다, 안회여. 한 그릇의 밥과 한 표주박의 음료로 누추한 시골에 있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그 근심을 견뎌 내지 못하는데, 안회는 그 즐거움을 바꾸지 않으니, 어질다, 안회여(賢哉回也. 一簞食一瓢飮,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不改其樂, 賢哉回也)'라고 하였다.
가난한 생활과 어려운 처지에도 부족하다 여기지 않고 겸손하게 학문에 정진하는 태도에서, 공자는 안연을 최고의 제자로 뽑았고 공자의 어록에도 그러한 평가가 많이 남아있다.
안연의 이 같은 곤궁한 처지에 구애되지 않고 자신이 가려는 길을 묵묵히 밟아나가는 삶의 태도를 가리켜 안빈낙도라고 한다. 속세를 떠나 산수에 머무는 은사(隱士)의 처세, 청빈하고 맑은 기풍을 비유하기도 한다.
비슷한 뜻으로 안분지족(安分知足), 단표누항(簞瓢陋巷), 단사표음(簞食瓢飮), 일단사일표음(一簞食一瓢飲) 등이 있다.
소확행(小確幸)과 안빈낙도(安貧樂道)
세상 많은 사람들, 돈을 행복의 기준으로 여기고 있다. 돈이 많으면 갖고 싶은 것을 가질 수 있고, 가고 싶은 곳에 갈 수 있고, 나누어 줄 것도 많아서 좋다.
그러나 돈은 쉽게 얻지도 못하고 남들 같이 많이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남과 비교하다 보면 늘 내가 덜 가진 것 같다. 그래서 더 많이 갖기를 바란다.
돈은 내가 많이 가지면 남의 것은 줄어들고, 남이 더 많이 가지면 내 것이 줄어든다. 결국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커지게 된다. 돈 때문에 다툼이 일어나고 사건이 발생하고 불행해지는 경우도 많다. 결국 돈이 진정한 행복을 가져 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반면 행복의 기준을 마음에 두는 사람도 있다. 마음은 아무리 나누어도 내 것이 줄어들지 않는다. 생각하기에 따라 마음은 쉽게 키울 수도 있고 줄일 수도 있다.
한때 트랜드로 '소확행'이라는 말이 있었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얻자'는 말이다. 크고 멀리 있는 행복을 쫓는 것이 아니라, 내 가까이에 쉽게 얻을 수 있는 행복이 있다. 그것이 소확행이다.
노자는 '만족을 아는 자가 부자이다(知足者富)'라고 했으며, 예수는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했다.
논어에서 소확행을 찾고, 가난하지만 참 행복을 누리는 자는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본다.
공자의 수제자, 안회의 안빈낙도(安貧樂道)
공자에게는 많은 제자가 있었다. 그중에서 공자는 안회(顔回)를 특별히 사랑하였다. 안회의 자(字)가 자연(子淵)이라서 흔히 안연(顏淵)으로 불린다.
논어 속에서 공자는 안회에게 한결같이 칭찬하고 있었다. 편애한 것이 아니라 칭찬을 들어 마땅할 만큼 덕행이 바르고, 학문을 좋아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안회는 30일에 아홉 끼 밖에 못 먹었을 만큼 가난하게 살았으며, 공부에 열중한 나머지 스물아홉에 백발이 되었으며, 결국은 영양실조에 걸려 일찍 죽고 말았다.
공자는 안회의 죽음을 애통해 하며, '세상이 나를 버렸구나 세상이 나를 버렸구나(噫, 天喪予 天喪予)'라며 탄식하였다.
논어 제6 옹야편에, 공자가 이르기를, '어질도다, 안회여. 한 소쿠리의 밥과 한 표주박의 물로 누추한 곳에 지내면서도 다른 사람은 그 근심을 견디어내지 못하거늘 안회는 즐거움을 잃지 않는구나. 어질도다 안회여.'
子曰 : 賢哉 回也. 一簞食 一瓢飮,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 不改其樂 賢哉, 回也.
어느 누가 대소쿠리에 담긴 깡보리밥, 표주박에 담긴 물 한모금, 허물어지고 누추하기 짝이 없는 오두막살이를 좋아하겠는가?
비록 안회라 할지라도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안회가 그렇게 가난하게 살았어도 '도(道)를 찾아가는 즐거움'을 바꾸지 않았음을 강조하는 말이다. 뜻이 더 높고 큰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안빈낙도(安貧樂道)
안빈낙도(安貧樂道)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구차하고 궁색하면서도 그것에 구속되지 않고 평안하게 즐기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 또는 '가난에 구애받지 않고 도를 즐기는 것'으로 풀이하고 있는데, 김삿갓의 한시와 논어에 나오는 글을 소개한다.
警世(경세, 세상 사람들을 깨우침)/김삿갓
富人困富貧困貧(부인곤부빈곤빈)
부자는 부로 고생이요 가난은 가난으로 고생일세
飢飽雖殊困則均(기포수수곤즉균)
주리고 배부른 것은 다를지라도 고생은 매한가지
貧富仇非吳所願(빈부구비오소원)
가난이나 부나 모두 나는 원치 않아
願爲不富不貧人(원위불부불빈인)
부자도 가난뱅이도 피해 살 수 있으면 좋겠네.
부자는 돈이 있어서 더불어 생명까지 잃지 않을까 고생이고 가난은 없어서 고생이다. 배고프면 배고파서 고생이고 배부르면 살 빼려고 고생이다. 가난도 아니고 부자도 아닌 상태는 어떤 것인가?
부자도 아니고 가난도 아닌 모든 것을 초월한 세상을 살아가고 싶은 김삿갓의 중도사상을 나타낸 시입니다.
부자도 가난뱅이도/김삿갓
평양에서 죽향(竹香)과 이별한 김삿갓은 묘향산을 향하여 북으로 가는 중이었는데 가는 곳마다 침식을 해결하기가 더욱 난감해 진다. 오십평생을 거지생활을 해 오면서도 이때처럼 돈 걱정을 해본 적이 없었다.
돈이 한 푼도 없을 때는 아무 걱정도 없었건만 임진사(林進士)가 준 노잣돈이 달랑달랑해가니 전에 없던 걱정이 생긴 것이다.
富人困富貧困貧
부자는 부자대로 걱정, 가난뱅이는 가난뱅이대로 걱정
飢飽雖殊困則均
배가 부르나 고프나 걱정하기는 마찬가지
貧富仇非吳所願
부자도 가난뱅이도 내 원치 않으니
願爲不富不貧人
숫제 빈부를 떠나서 살고 싶어라.
김삿갓은 부(富)와 빈(貧)을 초월한 세상에서 살아가고 싶은 심정을 이렇게 노래했다. 객줏집 아낙은 선돈을 받아 놓고도 무얼 하는지 저녁 줄 생각을 않는다.
마을 이름은 '안락(安樂)' 이라는데 뚫어진 창문으로 찬바람은 스며들고 종일 굶은 뱃속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난동을 처서 조금도 안락하지 못한 심정을 또 한 수의 시로 달래본다.
安樂村中欲暮天
안락촌 마을에 해는 저물어 오는데
關西儒者聳詩肩
관서지방 선비는 시를 안다고 으스대나
村風厭客遲炊飯
마을풍속 고약해 밥 줄 생각은 안 하고
店俗慣人但索錢
주막 인심 야박해 돈부터 내라네.
虛腹曳雷頻有聲
배가 고파 꼬르륵 천둥소리 요란한데
破窓透冷更無穿
뚫어진 창구멍으로 냉기가 서려온다.
朝來一吸江山氣
아침부터 진종일 산천 공기만 마셨으니
試問人間辟穀仙
나를 안 먹고 사는 신선으로 아는가 묻노라.
배가 고프면 짜증이 나게 마련이지만 점잖은 체면에 화를 낼 수도 없고, 또한 어떠한 경우에도 화를 내지 않으려는 것이 김삿갓의 생활신조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화를 달래기 위해서 비어 있는 창자를 움켜잡고 시를 읊은 것이다.
이기도득지(以其道得之)
군자는 군자끼리 모이고 소인은 소인끼리 모인다는 말은 예나 이제나 옳다. 구양수의 말대로 그것이 자연의 이치다. 소인이면서 군자의 무리에 낄 수도 있지 않은가 하고 반문할 수도 있다.
물론 잘 속인다면 가능하기는 하다. 그러나 무리에 끼여도 어울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어울리지 못한다면, 오래도록 함께하지 못한다. 군자들이 아무리 너그러운 사람들이라 해도.
거꾸로 군자이면서 소인의 무리에 끼려고 하는 이가 있을까? 공자는 '가는 길이 같지 않으면 함께 꾀하지 말라(道不同, 不相爲謀)'고 말했다.
가는 길이 같지 않으면 사사건건 충돌하여 알력이 생긴다. 제대로 굴러갈 리가 없다. 일을 꾀하지 않더라도 소인들 틈에서 군자가 무슨 즐거움을 누리겠는가?
여기서 한 가지 덧붙여야겠다. 공자와 맹자 모두 義(의)와 利(리) 곧 올바름과 이익을 대비시켰는데, 그때 이익은 공리(公利)가 아닌 사리(私利)를 가리킨다.
그러면 공리(公利)란 어떤 것인가? 그것은 도를 통해 얻는 이익이며 모든 사람에게 두루 이로운 것, 특히 백성에게 이로운 것이다. 정치를 통해 구현하려는 이익은 바로 이런 이익이다.
정치가 자신은 비록 가난하더라도 백성은 넉넉해지도록 하는 것, 이것이 정치의 길이다. 제 이익을 챙기는 것은 정치가 아니라 사업(邪業; 삿된 일)이며, 사업(詐業; 속이는 일)이다.
정치가 바로 서려면 정치가가 잠시도 도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공자도 논어(論語) 이인(里仁) 편에서 이렇게 말했다.
富與貴, 是人之所欲也.
不以其道得之, 不處也.
부유함과 귀해짐, 이는 사람들이 바라는 것이다. 허나 도로써 얻은 것이 아니라면, 누리지 않겠다.
貧與賤, 是人之所惡也.
不以其道得之, 不去也.
가난함과 천박해짐, 이는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이다. 허나 도로써 떠날 수 없다면, 떠나지 않겠다.
부유함과 고귀함, 이것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지만, 합당한 방식으로 얻은 것이 아니면 거기에 연연하여 머물지 않겠다. 빈곤함과 천박함, 이것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이지만, 정당한 사유로 만난 것이 아니면 굳이 박차고 떠나버리지 않는다.
재여부재(材與不材)와 안빈낙도(安貧樂道)
향설해(香雪海)라는 말이 있다. '향기로운 눈의 바다'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 말은 하얀 매화가 지천(至賤)으로 피어있는 것을 가리키는 옛 관용구이다. 그 말 자체로 세상에서 가장 짧은 한 편의 시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조선후기 시인(화가) 조희룡(趙熙龍)은 '매화나무 사이에 다락을 짓는 것을 향기로운 눈 바다에 누각을 띄운다(香雪海中宜泛樓)'라고 표현했다.
그 멋들어진 표현을 한 사람이 지은 책이 '향설관척독초존(香雪館尺牘鈔存)'이다. 그 책에는 의미있는 '계숙에게(與季叔)'란 글이 있다.
石有暈, 木之癭, 皆物之病也. 而人愛之.
돌의 무늬나 나무의 옹이는 모두 그 물건이 병든 곳이지요. 하지만 사람들은 이를 아낍니다.
人之有才, 木石之病. 不自愛而, 爲人所愛.
사람이 재주를 지님은 나무나 돌의 병과 한 가지입니다. 자신이 아끼지도 않건만 다른 사람이 아끼는 바가 됩니다.
久則見壓, 反不如凡, 石閒木之, 自存無恙矣.
하지만 오래되면 싫증을 내며 도리어 평범한 돌이나 보통의 나무가 편안하게 아무 탈 없는 것만 못하지요.
人之處世, 可將處材不材之間.
사람의 처세는 재(材)와 부재(不材)의 사이에 처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는 햇무리진 돌은 수석(壽石)으로 대접을 받아 좌대위에 모셔지고 나무의 울퉁불퉁한 옹이는 사람으로 치면 암세포같은 종양(腫瘍)인데 이런것이 많아야 분재(盆栽)감으로 높이 쳐준다는 뜻이다.
그뿐인가? 없는 옹이를 만들려고 철사로 옥죄고 좌대에 앉히겠다며 멀쩡한 아래 부분을 자르기도 한다. 나무나 돌의 입장에서는 큰 재앙을 만난것이나 다름없다.
게다가 사람들은 금방 싫증을 낸다. 얼마 못가서 좀더 신기한 것이 나오면 거기에 혹해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재주를 파는것은 늘 이렇다. 붕 떳다가 어느 순간 급전직하(急轉直下) 추락하고 만다. 그때가서 평범한 돌이나 보통의 나무를 부러워한들 때는 늦었다.
장자 산목(山木)편에 재여부재(材與不材)란 말이 나오는데 즉 쓸모 있음과 쓸모 없음의 사이에 처하란 뜻이다.
어느 날 노스승과 제자가 길을 가는데 산길 옆 큰 나무를 목재꾼들이 거들떠 보지도 않고 지나갔다. 연유를 묻자 '옹이가 많아 재목으로 못쓴다'는 대답이었다.
그날밤 스승과 제자는 객주집에 묵었다. 주인이 닭를 잡아오라 했는데 하인이 물었다. '잘우는 놈과 못우는 놈 중 어느 놈을 잡을까요?' 하니까 주인이 '못우는 놈을 잡아라' 했다.
이튼날 길을 나선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다. '스승님 어제 나무는 쓸모가 없어 살았고, 닭은 쓸모가 없어 죽었습니다. 스승님은 어디에 처하시렵니까?' '나는 쓸모 있음과 쓸모 없음의 중간에 처할란다. 그런데 그 중간은 얼핏 욕먹기 딱 좋은 곳이긴 하지'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언제나 그 재주가 문제이다. 남달리 뛰어나도 문제이지만 너무 우둔해도 문제인 것이다. 요즘 세태는 너무 편협해도 문제이지만 속없이 나불거리는 그 입(口)도 문제이다. 과연 그 중간은 어디쯤에 있는 것인지...
엇그제 현시국이 너무 어수선하고 좌우로 양분화되어 있어 답답한 나머지 '탄핵정국과 양시양비론'이란 제목으로 재여부재(材與不材)의 글을 올렸더니 무차별적 비판이 쏫아졌다.
양시양비론 처럼 둘다 옳고, 둘다 그를수 있다는 생각을 하루 빨리 공유한다면 극단주의, 배타주의에 치우쳐 미움과 갈등, 다툼과 분쟁을 벌이고 있는 우리 사회는 서로 양보하고 이해할수 있는 공동선을 찾을수도 있지 않을까해서 올려는데 이건 아니었다.
오로지 '도 아니면 모', '내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이분법적 극단주의와 '내것만 옳고 남의것은 다 그르다'는 이기주의 적인 의견만 팽배하여 재여부재(材與不材) 즉 중도는 설곳이 없다. 오로지 타협은 없고 투쟁만 있을뿐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이렇게 끝도 없고 길도 없는 기차길 같은 평행선만 달려 가면서 자기편 논리만 옳고 객관, 상식적이고 유일한 정의라는 것이다. 양시양비론, 중립적 자세는 비겁하며 사회발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비판아닌 비판을 서슴치 않고 있다 어찌하면 좋을런지?
황소가 아무리 힘이세도 외나무 다리에선 힘을 못쓰고, 물고기가 아무리 빨라도 뭍에서는 거북이 보다 느리다는 사실을 왜 모를까?
사물은 언제나 다른 각도에서 보면 다르게 보일때가 있다. 거기서 해답을 찾을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재여부재(材與不材) 중도가 필요한 것인데...
옛말에 삼인문수(三人文殊)라는 말이 있다. 3인이 모여 논하면 지혜를 다스리는 문수보살과 같은 좋은 생각이 떠오른다는 말이다.
우리 모두 이 난국을 타개 하기위해선 지혜를 모아야 한다. 태산같은 자부심을 보이다가도 풀잎처럼 누울때도 있어야 한다.
아니면 모두가 나몰라라 백년하청(百年河淸)이나 해야 되나? 황하가 맑아지기만을 기다린다는 뜻인데 천년을 붉게 물들인 황하가 백년이 흐른들 맑아 질까?
그렇다. 그저 손놓고 초야에 묻혀 안빈낙도(安貧樂道)나 하는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가난한 처지이지만 평안한 마음으로 도를 지키며 즐긴다는 뜻이다.
안빈낙도(安貧樂道)
우리는 선거에서 풍운(風雲)의 뜻을 품은 인재들이 입신(立身)을 위해 분투하는 것을 볼 수있다.
그 사람들 대부분은 부(富)를 움켜잡았든, 명성(名聲)을 얻었든, 남다른 지혜를 가졌든, 하여간 보통 사람인 우리보다는 많은 것을 가진 사람들임에 분명할 것이다.
그런데도 지극히 보통 사람에 불과한 우리에게 와서 깊숙이 머리를 숙이고 한 표를 부탁하는 양을 보면서 애처롭다는 생각을 지울 길이 없었다.
아마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우리 같은 보통 사람을 높게 보아서 하는 것은 절대 아닐 것이니, 그들이 그렇게 하여 얻고자 하는 것이 대단히 귀한 것임에 틀림없다.
옛날부터 입신양명(立身揚名)은 모두가 바라는 것이었다. 하여 남들보다 조금 더 많은 권세를 누리고자 무고한 사람들을 가차 없이 짓밟는 일도 불사(不辭)하였던 처절한 역사를 알고 있다.
그런데 나는 입신양명의 최고봉인 대통령에 대해 불쌍한 마음을 갖고 있다. 지금도 이 나라의 가장 뛰어난 인재들이 대통령이 되고자 암중에서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을 터인데, 나 같은 촌부가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을 불쌍하다고 하면 누가 동의 하겠는가만 진실로 나는 그렇게 느낀다.
이제 나는 그 이유를 설명하고자 한다. 먼저 대통령의 자리라는 게 보통 골치 아픈 것이 아니다. 몇 명 되지 않은 시골교회에서도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함께 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데 무려 사천 팔백만 명의 사람들을 통합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겠는가!
저마다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 다투는 집단들을 중재하여 최상의 가치를 창출하여야 하는 일은 보통의 지혜를 가지고는 난망하기 그지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마치 외줄타기를 하는 것처럼 아슬아슬한 외교적인 문제는 얼마나 많은가! 그런 문제들을 인내하며, 채근하며, 설득하며 풀어가야 하는 자리라는 데 이르면 그만 나는 머리가 아파지기 시작한다.
대통령은 국가의 먼 미래를 위해 대중들의 저급한 욕구를 물리쳐야 하기도 하고,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크고 작은 현안들을 슬기롭게 풀어가야 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감히 비교한다는 자체가 성립될 수 없겠지만 나 또한 극히 작은 집단의 지도자로 있기에 그런 이해를 해 본 것이다.
우리 교회는 불과 수십 명의 교인들이 모인 작은 집단이다. 그런데 그 작은 집단 안에서도 사람들은 저마다의 욕구를 가지고 있다.
성경이라는 절대적인 기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제각기의 욕구를 은밀하게 표출해내곤 한다. 그런 그들을 사랑이라는 끈으로 하나로 묶는 일은 쉬운 게 아니다.
가정집에도 경제가 있듯이 교회도 재산과 경제가 있다. 경제를 도외시하는 사람은 무능한 가장이듯이 교회에도 때로는 훌륭한 경영이 필요하다.
오해하지 말길 바란다. 나는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처럼 교회를 이윤을 추구하는 회사처럼 생각하여 하는 말은 아니다. 교인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담긴 헌금을 어떻게 하면 가장 효율적으로, 선한 용도로 쓸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는 점에서 경영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때로는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기획하여 교인들이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도록 도와야 한다. 그저 스스로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가는 가정교육 없이 자녀를 기름같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스스로 할 수 있도록 동기만 부여하고 기다려야 할 때도 있다. 이 모든 일을 적당하게, 지혜롭게 하여야 한다. 그것이 지도자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 같이 무능한 사람은 큰 교회의 목사가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 사람은 저마다의 능력에 맞는 자리에 있어야 한다. 그것이 옳다.
대 심어 울을 삼고 솔 가꾸니 정자로다
백운(白雲) 덮인 데 날 있는 줄 제 뉘 알리
정반(뜰 언저리)에 학(鶴) 배회하니 긔 벗인가 하노라
조선 명종조때의 거유(巨儒) 김장생의 詩이다. 그는 능력이 출중한 학자였으나 벼슬자리를 마다하고 전원에 돌아가 호젓한 삶을 살았다.
나 같은 사람이 그와 비교하는 것은 절대 가당찮은 일이다. 그는 능력이 있었으나 스스로 벼슬을 버렸던 사람이고, 나는 인정받을 능력이 없는 사람이다.
그는 스스로 자연을 벗 삼아 살았으나 나는 무능하면서도 명리(名利)를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니 그와 같은 사람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불성립(不成立)된다.
그럼에도 나는 굳이 자연의 호젓함을 즐기는 심정은 같다고 주장하고 싶어 한다. 내가 살고 있는 집 주위의 산은 소위 명산(名山)이라 불리는 산은 아니다. 그저 조그마한 소나무며 여러 가지 낙엽송들이며 잡목들이 서로 뒤섞여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녹음으로 짙은 산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청명(淸明)함으로 가득 찬다. 창밖으로 바라보이는 호수의 잔잔한 물결에 욕망의 찌꺼기는 깨끗이 씻겨버린다.
이쯤에서 나는 명리를 초탈하지 못했으면서도 명리를 좇는 사람들을 불쌍하다고 하는 자가당착(自家撞着)을 범하고 있다고 솔직히 고백해야 한다.
내가 감히 대통령을 불쌍하다고 했으니 심해도 보통 심한 모순(矛盾)을 범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 나는 절대로 입신할 수 있는 능력자가 아니다.
그럼으로 나는 더욱 그들을 불쌍하다고 폄하해 버리고 내 삶을 즐기는 억지스런 주장을 펴고 있는 것이다.
운무에 가린 청산이 말없는 미소로 부른다/ 하늘에 어깨 기대고 호수에 발을 담그고나/ 청풍명월을 어깨 둘러 친구가 되자 한다
서투른 솜씨로 제법 시를 짓는 시늉을 내 보기도 한다. 그렇다. 능력이 있든 없든,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기쁨을 누리고, 자연을 벗 삼아 노래를 흥얼거리며 즐거움으로 살면 족하지 않은가.
성경은 '인생은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벤바 되어 마르는 들의 꽃과 같다'고 한다. 짧은 인생길에서 좋은 벗들을 만나고 자연에 묻혀 사는 안빈낙도(安貧樂道)를 하리라.
어떤 것이 안빈낙도일까?
집이란 눈과 비를 피하고 바람을 막아 주면 되고, 옷이란 추위와 추함으로부터 보호를 받으면 되며, 음식은 먹고 살 만큼만 있어도 족하다는 것이 안빈사상이다.
가난하지만 맘 편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우리네 선비들의 주장이었다. 그래서 나라가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다고 말할 때, 이 모양 이 꼴이 어때서 그러냐고 대들면 어찌할 것인가?
부귀영화가 잘 사는 것일까?
믿음과 사랑이 없어도 잘 먹고 잘 살면 단가?
사자는 한 번 포식하면 일주일을 굶어도 상관없지만, 사슴이나 양은 그렇지 않다.
사자는 한 번의 먹이를 얻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지만 사슴이나 양은 그렇지 않다. 누가 더 강하고 더 약한지는 구분이 가지만 누가 더 행복하고 불행한지는 알 길이 없다.
개 팔자, 상팔자라 했다. 꼬리만 치면 단가? 개의 주인은 사람이다. 개만도 못한 인간일지라도 개보다는 값이 더 나간다. 개는 안락사 시켜도 되지만 사람은 그렇게 못한다. 못 살아도 사람이고 못 나도 사람이다.
안빈낙도(安貧樂道)라, 나물 먹고 물마시고 팔베개하고 하늘의 별을 쳐다보니 이게 바로 낙이니, 의롭지 않은 부와 영광은 뜬구름에 지나지 않는다.
공자의 제자 안희가 안빈낙도 했다. 쌀 뒤쥐는 항상 비어 있었지만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곳곳하게 살았다. 끼니 거르기를 밥 먹듯 하면서도 가난을 탓하지 않았다.
구차스럽게 끼니를 잇는 것보다 굶주려도 좋으니 도나 닦겠다, 이거 아닌가! 우리네 선비들도 그랬다. 굶어도 글이나 읽으면서 유유자적했다. 그래야 양반다우니깐.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돈 없음 양반도 상놈 되는 건 시간문제다. 부자가 행복하다 할 수 없듯이 가난뱅이가 불행하다 할 수 없다. 돈이 절대 조건이 될 수 없지만 먹고 사는 것이 일단 해결이 되어야 행복이라는 것을 운운하게 된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는데 행복한척 해봐야 얼마나 행복할 것인가. 양반 티내려는 것일까 아니면 돈 벌줄 몰라서 그럴까?
박지원이가 허생전에서 이것을 풍자했다. 허생원이 10 년을 작정하고 공부를 하던 중 7년 되던 해에 그의 부인이 돈 벌줄 모르면 도적질이라도 해오라 바가지를 긁는다. 이에 허생원은 빚을 얻어, 매점매석을 하여 큰돈을 번다.
박지원이가 중국을 여행하면서 열하일기를 쓸 때, 혹 탈레스에 대해 뭔가 들은바 있었을까? 허생원이가, 풍년을 예상하고 올리브 기름틀을 매점하여 대박을 터트렸던 철학의 아버지 탈레스를 많이 닮았으니 말이다.
안빈하려면 불편한 것도 많고 고통스러운 것도 많다. 마음은 편할지 몰라도 육체는 불편하다. 나만 좋다고 그럴 수는 없다. 처자식이 있다면 무능, 그 자체이다. 그게 아니면 무책임, 바로 그 것이다.
나 하나 간수 못하는 것은 나의 게으름이라 쳐도, 나의 무능으로 처자식이 제대로 된 삶을 영위하지 못하는데 공부는 왜 하며, 도는 왜 닦는가?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공부를 한다면 볕 탈 없지만, 도는 그러면 큰 탈난다. 도는 잘 먹고 잘 사는 것과 멀다. 잘 먹지 못하고 잘 살지 못해도 상관없다. 도만 닦으면 된다.
인도에 가면 그런 사람들 많다. 수행자인지 거지인지 아니면 게으름뱅이인지 도통 분간이 안 가는 그런 사람들 말이다. 그들은 놀고 먹는다. 안빈낙도는 저리가라다. 얻어먹고 사는 사람들은, 선행을 베푸는 사람들이 그들의 공덕을 쌓기 위해 적선을 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고맙게 여기지 않는다. '고맙다', '미안하다'가 입에 붙은 사람들이 볼 때는 무례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그들은 적선하는 사람들을 위해 구걸을 한다. 구걸하는 사람이 있어야 적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묘한 이치다.
안빈낙도도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보는 시각이 좀 달라진다. 안빈낙도도 적당히 하면 더 할 나위 없다. 일하기 싫어서, 아니면 글이나 읽고 글이나 쓰고 싶어서, 안빈낙도를 운운하지만 않는다면 이처럼 좋은 것이 또 있을꼬?
그러나 안빈낙도도 저마다의 기준에 따라 달라지니, 과연 어떤 것이 안빈낙도(安貧樂道)일까?
안빈낙도(安貧樂道)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도를 즐겨 지킴을 말한다.
이 성어의 출전(出典)은 어디일까? 논어(論語) 선진편(先進篇)에는 공자(孔子)가 안연(顔淵)의 생활관을 평한 구절이 있다. 주희(朱熹)가 이 구절을 풀이하면서 사용한 말로 보인다.
공자(孔子)의 수제자 안회(顔回)는 어찌나 열심히 학문을 하였는지 나이 29세에 벌써 백발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았으며 특히 덕행(德行)에 뛰어나 스승인 공자도 때로 배웠다고 할 정도였다.
평생토록 끼니 한번 제대로 잇지 못했고 지게미조차도 배불리 먹어 보지 못했을 만큼 가난하였다. 그럼에도 누구를 탓하거나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현실에 순응(順應)하면서 성인의 도를 추구할 뿐이었다.
안타깝게도 그는 서른 한 살에 요절(夭折)하고 말았다. 그의 호학(好學)과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생활 자세는 누구도 능가(凌駕)하기 곤란한 부분이다.
도를 추구하는 사람은 가난을 부끄러워 하거나 욕심 때문에 양심을 저버리지 않는다. 사리(私利)를 멀리하고 공의(公義)를 추구하며 착한 일에 말보다 행동을 앞세운다. 집안에서는 안빈낙도(安貧樂道)하고 사회에 나아가서는 살신성인(殺身成仁)하는 것이 그들의 모습이다.
고려 중기의 함유일(咸有一)은 몹시 가난해 항상 해진 옷을 입었다. 벼슬을 하면서도 곤궁한 생활이 여전하자 신세타령을 늘어놓는 부인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평생 누구의 도움을 받지 않았으며, 근검(勤儉)하고 지조(志操)를 지킴으로써 가문의 이름을 지켰소. 자식들도 그저 정직하고 절약하며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스스로의 운명을 기다릴 것이니 어찌 빈곤한 것을 걱정하겠소?'
광해군 때 곧은 행실로 명망을 얻은 이위경(李偉卿)은 광해군의 인목대비 폐위(廢位)에 반대하다가 생활고를 핑계로 이이첨(李爾瞻)의 무리에 휩쓸렸다. 덕분에 등과(登科)해 벼슬을 얻었으나 사람들은 그를 욕하였다.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그는 형장(刑場)으로 내몰리면서 이렇게 절규(絶叫)하였다. '세상 사람들이여! 굶주림을 참을 줄 알라!'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삶
삶에 대한 유교적 인생관은 오복(五福)사상에 잘 드러나 있다. 수(壽), 부(富),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이 그것이다.
동서고금, 종교의 다름과 무관한 인간의 보편적 욕망으로서 결코 나쁘지 않다. 그러나 이 모두를 충족시킨 인생을 살다간 이가 역사상 몇이나 있었겠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동방의 의인으로 일컬었던 욥도 완벽했던 행복한 삶이 어느 날 송두리째 깨지고 파멸의 자리로 내몰렸던 것처럼, 그것은 신의 영역과 닿아있기 때문이다.
그리스 신화의 무녀, 시빌(Sybil)의 역설처럼 인간의 욕망은 끝내 불행을 자초하기에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인류의 선각자들은 여기에 수많은 주석(註釋)을 두고 있다.
성서의 시편에,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서 우리가 날아갑니다.'
바울 서신에, '돈을 사랑함은 일만 악의 뿌리가 됩니다.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찌릅니다.'
공자의 제자 안희는 뒤주에 쌀이 항상 비어 있어도 자신의 빈곤한 처지를 비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며 오히려 주어진 환경에 감사하는, 청빈한 삶으로 성인(聖人)의 도(道)를 실현한다.
안빈낙도 사상은 안분지족(安分知足)의 경지, 일상의 평범하고 아주 작은 행복에 감사하는 무욕의 삶이기도 하다. 낙엽진 가을 숲의 텅 빈 고요, 소림 황엽(疎林 黃葉)의 맑은 마음과 같다.
취업이 힘들고 삶이 어려운 젊은이들에게 마치 운명론으로 몰아가는 작금의 '금수저, 흙수저' 세태는 변형된 욕망의 오복사상이며 바람직하지도 않다.
두보(杜甫)의 '덕망이 높아도 기회는 오지 않아, 이름이 전해진들 무슨 소용 있으리'라는 취시가(醉詩歌)처럼, 우리의 시인 손곡 이달(李達)은 평생을 비주류 아웃사이더 방외인(方外人)으로 살았으니 신분적 한계로 인한 분노와 허망함은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컸으리라.
그러나 좌절 낙담하지 않고, 충담(沖淡)하고 침착(沈著)하며 고고(高古), 광달(曠達)한 시품(詩品)의 품격을 자신의 시문학 예술에 온전히 투영시켜 '궁극의 시학'을 완성한다.
차운하다 (次韻)
處困常歡若(처곤상환약)
어려움에 있어도 늘 즐거운 것 같고,
居貧每晏如(거빈매안여)
가난 속에 살면서도 언제나 편안하다.
東風寒食淚(동풍한식루)
한식날 봄바람 맞으며 눈물 흘렸지만,
不覺滿衣裾(불각만의거)
옷자락 적시는 것도 몰랐어라.
▶️ 安(편안 안)은 ❶회의문자로 사람이 무릎꿇고 깍지끼어 신을 섬기는 모습의 女(여자)가 건물의 지붕, 신을 모시는 곳을 뜻하는 집(宀) 안에 있는 모양으로 편안함을 뜻한다. 安(안)은 사람이 사당에서 신을 섬기는 일, 나중에 女(녀)를 여자라 생각하여 安(안)은 집속에 여자가 고요히 앉아 있는 모양에서 평안함이라 설명하게 되었다. ❷회의문자로 安자는 '편안하다'나 '편안하게 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安자는 宀(집 면)자와 女(여자 여)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갑골문에 나온 安자도 지금과는 다르지 않았다. 安자는 여자가 집에 다소곳이 앉아있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편안하다'나 '안정적이다'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그래서 安(안)은 성(姓)의 하나로 ①편안(便安) ②편안하다 ③편안(便安)하게 하다 ④안존(安存)하다(아무런 탈 없이 평안히 지내다) ⑤즐거움에 빠지다 ⑥즐기다, 좋아하다 ⑦어찌 ⑧이에(乃), 곧 ⑨어디에 ⑩안으로, 속으로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편할 편(便), 편안할 녕(寧), 편안 강(康), 편안할 온(穩), 편안할 정(靖),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위태할 위(危)이다. 용례로는 편안히 보전함을 안보(安保), 편안하여 탈이나 위험성이 없음을 안전(安全), 일이나 마음이 평안하게 정하여 짐을 안정(安定), 근심이 없고 편안함을 안이(安易), 편안하고 한가함을 안일(安逸), 걱정이나 탈이 없음을 안녕(安寧), 걱정이 없이 마음을 편안히 가짐을 안심(安心), 평안함과 평안하지 아니함을 안부(安否), 정신이 편안하고 고요함을 안정(安靜), 안심이 되지 않아 마음이 조마조마함을 불안(不安), 몸이 괴롭거나 아프거나 힘들거나 하지 않고 편하여 좋음을 편안(便安), 나라를 편안하게 다스림을 치안(治安), 위로하여 마음을 편안하게 함을 위안(慰安), 안전을 유지하는 일을 보안(保安), 오래도록 평안함을 구안(久安), 무사히 잘 있음을 평안(平安), 웃어른에게 안부를 여쭘을 문안(問安), 편안한 때일수록 위험이 닥칠 때를 생각하여 미리 대비해야 함을 이르는 말을 안거위사(安居危思), 구차하고 궁색하면서도 그것에 구속되지 않고 평안하게 즐기는 마음으로 살아감을 일컫는 말을 안빈낙도(安貧樂道), 자기 분수에 만족하여 다른 데 마음을 두지 아니함을 이르는 말을 안분지족(安分知足), 평화롭고 한가하여 마음 내키는 대로 즐김을 일컫는 말을 안한자적(安閑自適), 편안한 가운데서도 늘 위험을 잊지 않는다는 뜻으로 늘 스스로를 경계하여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어려움에 대처함을 이르는 말을 안불망위(安不忘危), 편안히 살면서 생업을 즐김을 일컫는 말을 안가낙업(安家樂業), 마음 놓고 있을 집과 사람이 지켜야 할 바른 길이라는 뜻으로 인의를 비유해 이르는 말을 안택정로(安宅正路), 어찌 그러치 않으랴 또는 마땅히 그러할 것이다란 뜻으로 하는 말을 안득불연(安得不然), 확실한 안심을 얻어서 마음이 흔들리지 아니함을 이르는 말을 안심결정(安心決定), 반석과 같이 든든하여 위태함이 없음을 일컫는 말을 안여태산(安如泰山), 조용하고 편안하게 아무 일 없이 지냄을 일컫는 말을 안온무사(安穩無事), 부자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빈자를 구하여 물품을 베풀어 줌을 일컫는 말을 안부휼궁(安富恤窮) 등에 쓰인다.
▶️ 貧(가난할 빈)은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조개 패(貝; 돈, 재물)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分(분; 나누는 일)으로 이루어졌다. ❷회의문자로 貧자는 '가난하다'나 '모자라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貧자는 分(나눌 분)자와 貝(조개 패)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런데 금문에 나온 貧자를 보면 宀(집 면)자 안에 分자만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집안에 아무것도 나눌 것이 없다는 뜻이다. 금문에서는 집안에 쌀 한 톨조차 나눌 것이 없다는 뜻을 표현한 것이었다. 이후 소전에서는 貝자와 分자가 결합한 형태로 바뀌면서 나누어 주고 나니 아무것도 없다는 뜻의 貧자가 되었다. 그래서 貧(빈)은 재산이 나누어져서 적어지다, 가난함 등의 뜻으로 ①가난하다 ②모자라다 ③부족(不足)하다 ④빈궁(貧窮)하다 ⑤결핍(缺乏)되다 ⑥구차(苟且)하다 ⑦천(賤)하다 ⑧품위가 없다 ⑨인색(吝嗇)하다 ⑩말이 많다 ⑪수다스럽다 ⑫가난 ⑬빈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곤할 곤(困), 다할 추(湫), 다할 극(極), 다할 진(殄), 다할 진(盡), 다할 궁(窮), 다할 갈(竭),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부유할 부(富)이다. 용례로는 가난하고 궁색하여 살기 어려움을 빈곤(貧困), 가난함과 넉넉함을 빈부(貧富), 피 속의 적혈구나 혈색소의 수가 적어지는 현상을 빈혈(貧血), 가난하고 천함을 빈천(貧賤), 가난하고 힘이 없음을 빈약(貧弱), 가난하여 궁함을 빈궁(貧窮), 가난한 백성을 빈민(貧民), 가난한 나라를 빈국(貧國), 가난한 사람을 빈자(貧者), 가난한 집을 빈가(貧家), 가난한 사회를 빈국(貧局), 가난한 농가나 농민을 빈농(貧農), 야구에서 안타를 잘 치지 못하는 것을 빈타(貧打), 가난하고 쓸쓸함을 빈한(貧寒), 가난하고 고생스러움을 빈고(貧苦), 가난한 사람이 많이 사는 고을을 빈촌(貧村), 음식이 넉넉하지 못한 부엌이라는 뜻으로 가난한 살림을 이르는 말을 빈주(貧廚), 성품이 깨끗하여 가난함을 청빈(淸貧), 천하고 가난함을 천빈(賤貧), 몹시 가난함을 극빈(極貧), 아주 가난하여 아무 것도 없음을 적빈(赤貧), 집이 가난함을 가빈(家貧), 더할 수 없는 가난을 철빈(鐵貧), 극히 가난한 사람을 구제함을 구빈(救貧), 가난하지 아니함을 불빈(不貧), 가난할수록 더욱 가난해 짐을 빈익빈(貧益貧),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이룬 거리를 빈민가(貧民街), 살림이 가난한 백성으로 된 사회의 계층을 빈민층(貧民層), 지극히 가난한 사람을 극빈자(極貧者), 넉넉한 사람의 재물을 빼앗아다가 어려운 사람을 구원하여 주는 도둑의 무리를 활빈당(活貧黨), 가난한 사람이 밝힌 등불 하나라는 뜻으로 가난 속에서도 보인 작은 성의가 부귀한 사람들의 많은 보시보다도 가치가 큼을 이르는 말을 빈자일등(貧者一燈), 내가 가난하고 천할 때 나를 친구로 대해 준 벗은 내가 부귀하게 된 뒤에도 언제까지나 잊어서는 안된다는 말을 빈천지교(貧賤之交), 가난한 몸이지만 하늘의 뜻으로 알고 도를 즐김을 일컫는 말을 빈이낙도(貧而樂道), 가난함과 부유함이나 귀함과 천함을 일컫는 말을 빈부귀천(貧富貴賤), 가난한 사람은 굽죄이는 일이 많아서 뻣뻣하지 못한 까닭에 저절로 낮은 사람처럼 된다는 말을 빈자소인(貧者小人), 빈한함이 뼈에까지 스민다는 뜻으로 매우 가난함을 일컫는 말을 빈한도골(貧寒到骨), 자기자신을 과소 평가하는 망상으로 자기가 가난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이르는 말을 빈곤망상(貧困妄想), 가난해도 세상에 대한 원망이 없음을 일컫는 말을 빈이무원(貧而無怨), 구차하고 궁색하면서도 그것에 구속되지 않고 평안하게 즐기는 마음으로 살아감을 일컫는 말을 안빈낙도(安貧樂道), 청렴결백하고 가난하게 사는 것을 옳은 것으로 여김을 일컫는 말을 청빈낙도(淸貧樂道), 가난하기가 마치 물로 씻은 듯하여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음을 일컫는 말을 적빈여세(赤貧如洗) 등에 쓰인다.
▶️ 樂(노래 악, 즐길 락/낙, 좋아할 요)은 ❶상형문자로 楽(락)의 본자(本字), 乐(락)은 간자(簡字)이다. 현악기를 본뜬 글자, 신을 모시는 춤을 출 때 손에 가지는 방울을 본뜬 글자, 북 따위의 타악기를 본뜬 글자 등의 유래가 존재한다.기본 음가는 악이고, 전주된 음가로 락과 요가 있다. 락은 주로 형용사로 사용될 때, 요는 좋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락이 두음법칙이 적용되면 낙으로 표기된다. ❷상형문자로 樂자는 '음악'이나 '즐겁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樂자는 본래 악기의 일종을 뜻했던 글자였다. 갑골문에 처음 등장한 樂자를 보면 木(나무 목)자에 絲(실 사)자가 결합한 모습이었다. 이것은 거문고처럼 실을 튕겨 소리를 내는 악기와 줄을 표현한 것이다. 금문에서는 여기에 白(흰 백)자가 더해지게 되는데, 이것은 줄을 튕길 때 사용하는 피크를 뜻하기 위해서였다. 또 음악을 들으면 즐거우므로 '즐겁다'라는 뜻도 파생되었다. 그래서 樂(악)의 경우는 ①노래, 음악(音樂) ②악기(樂器) ③연주하다 ④아뢰다(말씀드려 알리다) 등의 뜻이 있고, 樂(락/낙)의 경우는 ⓐ즐기다(락) ⓑ즐거워하다(락) ⓒ편안하다(락) ⓓ풍년(豐年)(락) ⓔ즐거움(락) 등의 뜻이 있고, 樂(요)의 경우는 ⓕ좋아하다(요) ⓖ바라다(요)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노래 가(歌), 노래 요(謠), 노래 구(謳)이다. 용례로는 인생을 즐겁게 여기거나 세상을 밝고 좋게 생각함을 낙관(樂觀), 아무런 걱정이나 부족함이 없이 살 수 있는 즐거운 곳을 낙원(樂園), 늘 즐겁게 살 수 있는 곳을 낙토(樂土), 재미 붙일 만한 일을 낙사(樂事), 경기 등에서 힘들이지 않고 쉽게 이기는 것을 낙승(樂勝), 세상이나 인생을 즐겁게 생각함을 낙천(樂天), 노래의 곡조를 악곡(樂曲), 음악 기구를 악기(樂器), 작곡에 관한 착상이나 구상을 악상(樂想), 음악에서 연주되는 음의 배열을 악보(樂譜), 노랫소리 또는 가락스런 소리를 악음(樂音), 음악을 연주하는 단체를 악단(樂團), 물을 좋아함을 요수(樂水), 산을 좋아함을 요산(樂山), 즐기기는 하나 음탕하지는 않게 한다는 뜻으로 즐거움의 도를 지나치지 않음을 일컫는 말을 낙이불음(樂而不淫), 즐거움도 극에 달하면 슬픔이 생긴다는 말을 낙극애생(樂極哀生), 타향의 생활이 즐거워 고향 생각을 하지 못함을 이르는 말을 낙이사촉(樂而思蜀), 즐거움은 언제나 걱정하는데서 나온다는 말을 낙생어우(樂生於憂), 안락은 고통의 원인이라는 말을 낙시고인(樂是苦因), 천명을 깨달아 즐기면서 이에 순응하는 일을 일컫는 말을 낙천지명(樂天知命), 즐겨서 시름을 잊는다는 뜻으로 도를 행하기를 즐거워하여 가난 따위의 근심을 잊는다는 말을 낙이망우(樂而忘憂), 즐거움에 젖어 촉 땅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쾌락 또는 향락에 빠져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는 어리석음을 비유하는 말을 낙불사촉(樂不思蜀), 즐거움 속에 삶이 있다는 뜻을 나타냄을 일컫는 말을 낙중지생(樂中之生), 좋아서 하는 일은 아무리 해도 지치지 않음을 이르는 말을 요차불피(樂此不疲), 산을 좋아하고 물을 좋아한다는 뜻으로 산수 경치를 좋아함을 이르는 말을 요산요수(樂山樂水) 등에 쓰인다.
▶️ 道(길 도)는 ❶회의문자로 책받침(辶=辵; 쉬엄쉬엄 가다)部와 首(수)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首(수)는 사람 머리와 같이 사물의 끝에 있는 것, 처음, 근거란 뜻을 나타낸다. 道(도)는 한 줄로 통하는 큰 길이다. 사람을 목적지에 인도하는 것도 길이지만 또 도덕적인 근거도 길이다. ❷회의문자로 道자는 '길'이나 '도리', '이치'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道자는 辶(쉬엄쉬엄 갈 착)자와 首(머리 수)자가 결합한 모습이다.首자는 '머리'라는 뜻이 있다. 道자는 길을 뜻하는 辶자에 首자를 결합한 것으로 본래의 의미는 '인도하다'나 '이끌다'였다. 그러나 후에 '사람이 가야 할 올바른 바른길'이라는 의미가 확대되면서 '도리'나 '이치'를 뜻하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여기에 寸(마디 촌)자를 더한 導(이끌 도)자가 '인도하다'라는 뜻을 대신하고 있다. 그래서 道(도)는 (1)우리나라의 지방 행정 구역의 하나. 예전에 8도이던 것을 고종(高宗) 33(1896)년에 13도로 고쳤고, 다시 대한민국 수립 후에 14도로 정함 (2)우리나라의 최고 지방자치단체 (3)도청 (4)중국 당(唐) 대의 최고 행정 단위. 당초에는 10도로 나누어 각 도마다 안찰사(按察使)를 두었으며 734년에 15도로 늘려 관찰사(觀察使)를 장관(長官)으로 두었음 (5)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 (6)종교 상으로, 교의에 깊이 통하여 알게 되는 이치, 또는 깊이 깨달은 지경 (7)기예(技藝)나 방술(方術), 무술(武術) 등에서의 방법 (8)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길 ②도리(道理), 이치(理致) ③재주 ④방법(方法), 술책(術策) ⑤근원(根源), 바탕 ⑥기능(機能), 작용(作用) ⑦주의(主義), 사상(思想) ⑧제도(制度) ⑨기예(技藝) ⑩불교(佛敎) ⑪승려(僧侶) ⑫도교(道敎) ⑬도사(道士) ⑭교설(敎說) ⑮~에서, ~부터 ⑯가다 ⑰가르치다 ⑱깨닫다 ⑲다스리다 ⑳따르다 ㉑말하다 ㉒완벽한 글 ㉓의존하다 ㉔이끌다, 인도하다 ㉕정통하다 ㉖통하다, 다니다 ㉗행정구역 단위 ㉘행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길 도(塗), 거리 항(巷), 거리 가(街), 네거리 구(衢), 길 로/노(路), 길 도(途), 길거리 규(逵), 모퉁이 우(隅)이다. 용례로는 사람이나 차가 다닐 수 있게 만든 길을 도로(道路), 사람이 마땅히 행해야 할 바른 길을 도리(道理),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 도덕(道德), 일에 쓰이는 여러 가지 연장을 도구(道具), 도를 닦는 사람을 도사(道士), 사람이 마땅히 행해야 할 도덕 상의 의리를 도의(道義), 일반에게 알리는 새로운 소식을 보도(報道), 차가 지나다니는 길을 궤도(軌道), 부모를 잘 섬기는 도리를 효도(孝道), 사람이 행해야 할 바른 길을 정도(正道), 차가 다니도록 마련한 길을 차도(車道), 도를 닦음을 수도(修道), 임금이 마땅히 행해야 될 일을 왕도(王道), 바르지 못한 도리를 사도(邪道), 사람이 다니는 길을 보도(步道), 일에 대한 방법과 도리를 방도(方道), 길에 떨어진 것을 줍지 않는다는 뜻으로 나라가 잘 다스려져 백성의 풍속이 돈후함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도불습유(道不拾遺), 길거리에서 들은 이야기를 곧 그 길에서 다른 사람에게 말한다는 뜻으로 거리에서 들은 것을 남에게 아는 체하며 말함 또는 깊이 생각 않고 예사로 듣고 말함을 일컫는 말을 도청도설(道聽塗說), 길가에 있는 쓴 자두 열매라는 뜻으로 남에게 버림받음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도방고리(道傍苦李), 먼 길을 달린 후에야 천리마의 재능을 안다는 뜻으로 난세를 당해서야 비로소 그 인물의 진가를 알 수 있음을 이르는 말을 도원지기(道遠知驥), 길에는 오르고 내림이 있다는 뜻으로 천도에는 크게 융성함과 쇠망함의 두 가지가 있다는 말을 도유승강(道有升降), 구차하고 궁색하면서도 그것에 구속되지 않고 평안하게 즐기는 마음으로 살아감을 일컫는 말을 안빈낙도(安貧樂道), 시장과 길거리에서 이루어지는 교제라는 뜻으로 이익이 있으면 서로 합하고 이익이 없으면 헤어지는 시정의 장사꾼과 같은 교제를 일컫는 말을 시도지교(市道之交), 청렴결백하고 가난하게 사는 것을 옳은 것으로 여김을 일컫는 말을 청빈낙도(淸貧樂道), 말할 길이 끊어졌다는 뜻으로 너무나 엄청나거나 기가 막혀서 말로써 나타낼 수가 없음을 이르는 말을 언어도단(言語道斷)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