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지금부터 제 2회 의존교회 말씀잔치를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강의 할 것은 “지옥구덩이에서 건져내 주심” 여기에 대하여 강의하겠습니다. 이 구덩이가 무슨 구덩이냐 하면 지옥 구덩이입니다. 이것을 아주 어려운 한자말로 소명이라고 합니다. ‘불러주심’, ‘불러내심’입니다.
그림으로 그리면 우물이 있는데, 우물 밑에 보면 물이 있고 깊숙이 빠져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여기서 올라오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중간쯤 올라오고, 어떤 사람은 올라오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올라오다가 또 떨어지고, 올라오다가 또 떨어지고, 아무리 기어 올라오려고 해도 이 우물 밖으로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해도 빠져 나올 수 없을 때는 어떻게 하면 빠져 나올 수가 있습니까? 좋은 수가 있지요! 여기 우물에서 한번 빠져 나왔던 어떤 분이, 예수님이지요! 예수님의 팔이 길어서 죽죽 계속 늘어나서 마징가 제트처럼 움켜쥐고 쑥 꺼내면 되겠지요! 여기 한 아저씨가 있는데 팔아! 늘어져라! 죽죽 늘어나라 해서 우물 속에 있는 사람을 딱 낚아채서 끄집어 내어주면 그 사람은 지옥 구덩이에서 빠져나온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 빠져나오려고 하면 빠져 나올 수 있을 까요? 없을 까요? 자기 힘으로는 빠져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팔을 내밀어서 빠져나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팔을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오른팔이라고 합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오른팔입니다. 그래서 구약 성도들에게 어떻게 구원받느냐고 물어보면 하나님의 오른팔로 구원받는다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왼팔? 아니죠! 무슨 팔? 오른팔(어린 이들의 대답이 나옴, 지금 주일 학생들이 함께 강의 듣고 있는 중임), 하나님의 오른팔로 저를 구원하셨습니다. 또는 여호와의 오른팔이 저를 이 지옥 구덩이에서 구원하시니 감사합니다. 라고 구약 성도들이 하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날 사람들은 어떻게 구원 될까요? 옛날 구약 사람들은 누구의 오른팔? 하나님의 오른팔로 구원받았다면, 오늘 날 사람들은, 예수님 이후의 신약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구원받을까요? 오늘날은 예수님의 오른 팔로 구원받는다고 하면 대충 맞습니다. 그런데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오른팔이라고 하지 않고, 예수님의 성령으로 구원받습니다. 오늘날 예수님의 오른 팔이란 성?님입니?? 예수님의 영께서 또는 예수님이 보내신 성령께서 우리를 건져서 구원받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잘 몰라서,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라고 물으면, 내가 막 올라가서, 열심을 내어서 기어 올라가서 구원받았습니다. 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잘못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에 열심내고 전도에 열심 내었더니 남들보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 쉽게 구원 되었습니다. 하는데 이것도 잘 못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구원 받는 것은 예수님의 오른 팔,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의 오른 팔 같은 일을 해야 하는 성령님이 예수님의 오른 팔 역할을 해서 구원받는 것입니다.
자 지금까지 한 것을 다시 요약합니다. 구약 때는 누구의 오른 팔입니까? 여호와의 오른팔, 그러면 신약 때는 어떻게 구원 받습니까? 성령님에 의하여 구원받는데 그 성령님이 구약 때에 여호와의 오른팔과 똑 같은 역할을 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입니다.
자 그러면 불러내 주실 때는 하나님의 오른팔로 불러 내주시는데, 그런데 하나님의 오른팔로 불러내 주실 때에 어떤 식으로 불러내 주시는가? 이것이 또한 궁금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오른팔로 내가 구원 받았다. 예수님의 성령님으로 구원받았다. 같은 말인데 하나님의 오른 팔이 어떻게 나를 낚아챘는가? 그것이 굉장히 궁금한 것입니다.
오른팔로 구원받았다고 하니, 주먹이 운다는 것처럼 오른팔로 한대 콱 쳐서 얻어맞아 구원받았을까? 아니면 오른팔에 낚시 바늘이 있어서 그것으로 이 지옥 우물에서 나왔을까? 그 오른팔을 가지신 분이 어떤 일을 하였기에 그 오른팔이 우리를 완전히 구원을 하였을까? 이것이 굉장히 궁금하실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강의에서 여러분에게 다 알려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오른팔은 앞에 감지기가 있습니다. 삐삐삐 하는 감지기처럼 사람을 하나님의 백성인지 지옥백성인지를 구별하는 감지기가 있는 것입니다. 삐삐삐 너는 아니냐! 삐삐삐 오! 네가 여기 있구나! 하나님의 오른팔은 닿는 아무나 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찾아나서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오른팔은 찾아가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에게 건물이 무너졌다고 합시다. 지진이 일어나서 건물이 폭삭 무너져 여러분이 건물 깊숙이 갇혔을 때에 경찰이 와서 아무리 찾아도 못 찾았습니다. 개가 와서 멍멍 짖어대도 못 찾았습니다. 그런데 그기에 갇혀진 사람이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자! 그 사람이 천국 갈까요? 지옥 갈까요?
그것은 누가 결정합니까? 아무도 못 들어가지만 예수님의 오른팔은 그 지하층보다 더 깊숙한 곳에 있더라도, 혼자 갇혀서 위에는 50미터나 되는 콘크리트가 덮치고 있습니다. 그럴 때 그 속에서 말하기를 하나님 아버지 저를 지금 죽이시려고 하시는 군요! 저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제가 죽더라도 예수님의 나라에 가게 하옵소서! 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 사람이 죽어도 천국에 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구약 때에 보면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요나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요나 이 사람은 목사님이신데 하나님의 뜻을 차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귀찮아서 내 마음대로 살 거라고 하면서 도망쳤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도망가면 하나님은 모르실 거야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성전에서 멀리 도망쳤습니다.
요나 목사님이 도망을 치니까 누가 따라 옵니까? 삐삐삐 하는 감지기, 하나님의 오른팔이 뒤 따라 오는 것입니다. 뒤따라오는데 요나는 그것도 모르고, 하나님 빠이빠이 하면서 하나님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지시를 그만 받고 내 마음대로 살겠습니다. 하면서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기분이 좋아지면 어떻게 될까요? 기분이 좋아지면 잠이 와요!
그래서 요나 선지자는 아무도 안 보겠지 하면서 이제는 잠이나 좀 자야겠다고 하면서, 저 선장님! 잠 좀 자야겠는데 여기서 제일 조용한 선실이 어디지요? 저 배 밑이 제일 조용하지요! 그러면 그곳에서 잘 테니 아무도 깨우지 마세요! 하면서 푹 잠을 잤습니다.
그런데 이 요나 선지자가 무엇을 몰랐는가 하면, 삐삐삐 하는 감지기, 하나님의 오른팔이 그 먼 곳까지 죽죽 늘어나서 따라 올 줄이야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오른팔이 배를 흔들었습니다. 그때 요나 선지자는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잠을 자고 있어서 몰랐지만 다른 사람들은 배가 이렇게 흔들리는 것은 신이 나쁜 사람을 찾아내기 위하여 이렇게 배를 흔든다고 생각하여, 오늘 동화시간 다 되었습니다.
당신이 신에게 잘못 하였어요? 아니요! 그러면 당신이 잘못하였어요? 아니요! 저는 부처님을 섬기지만 잘못한 것이 없어요! 그러면 당신도 아니고, 그러면 도대체 누구야? 도대체 누가 자기 신을 배반하였기에 이런 노여움을 받고 있는가? 과연 누구인가? (주일 학생이 요나! 하고 답변함) 알고 있네! 그런데 배 밑에 있는 요나는 그것도 모르고 기분이 좋아서 자고 있는데 갑자기 깨우는 것입니다.
잠시 검문 있겠습니다. 주민佇舊?좀 봅시다. 당신 누구십니까? 나는 사실 선지자입니다. 그러면 당신 신이 누구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그럴 때 선장님이 당신이 책임이 있으니 그 책임을 지고 이 배에서 나가시오! 바다 한가운데서 배에서 나가면 어디로 갑니까? 바다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바다에 떠밀어라! 그러자 요나가 내가 뛰어내리겠다고 합니다.
요나가 말하기를 하나님이 끝까지 나를 따라와서 죽이시는 군요! 그래 죽자! 하면서 깊은 바다에 풍덩 뛰어들었어요! 요나 죽었겠어요? 살았겠어요? (답변: 살았어요) 요나 죽었어요! 사라져 없어졌어요!
바로 이 우물 밑에 들어가 버린 것입니다. 위에서 잠시 보이다가 들어 가버린 것입니다. 이곳은 죽음의 세계입니다. 지옥입니다. 요나가 죽음의 세계로 들어가 버린 것입니다. 완전히 죽은 사람입니다. 죽은 사람인줄 알았는데 요나가 나중에 깨어서 보니 자기가 큰 고기, 아마 고래였을 것입니다. 큰 고래 속에 자기가 있었습니다. 고래 배속에 보니 고등어도 두 마리 있고, 갈치도 서너 마리 있고, 새우도 있고 노량진 수산물시장처럼 얼마나 냄새가 나는지, 이곳이 어디인지 나중에 보니 자기가 고기 배속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고기 배속에 들어가 있으면 삽니까? 죽습니까? 죽지요! 점점 조여 오니까! 죽겠지요! 그 때 요나가 하나님계신 쪽을 향하여 기도합니다. 하나님아버지 끝까지 따라올 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살려주신다면 하나님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하고 기도하였더니 갑자기 고래가 토하고 싶어서 토하였는데 이 고래가 신사양반이 되어서 육지 가까이 와서 울컥 토하여 내니 요나가 마침 자기가 가야할 니느웨 성 가는 항구에 온 것입니다. 배 타고 온 것이 아니라 고래타고 온 것입니다. 도착하여 보니 자기가 복음을 전하여야 할 그 도성에 온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소명’이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불러내심’입니다. 하나님께서 불러주실 때에 이렇게 불러내시는 것입니다. 방금 제가 이야기 한 것, 재미나게 이야기 한 것을 한번 정리 해보겠습니다. 정리하면 이렇게 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잘 알아들었는지 보겠어요!
처음에 지옥에서 불러내심, 둘째로 방법은 하나님의 무슨 팔? 오른 팔! 세 번째 끝까지 찾아내심! 요나가 도망가지 힘들어서 못 따라 가겠다고 그래 잘 가라면서 포기하십니까? 아니면 끝까지 따라오십니까? 끝까지 따라 옵니다. 지하실에 가도, 바다 속에 가도, 어디를 가도 하나님의 오른팔은 거기도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숨어도 하나님의 팔이 어디에도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끝까지 찾아내심입니다. 네 번째 제가 이야기 한 것은 사람이 도망침. 다섯 번째 이야기 한 것이 죽음, 여섯 번째가 다시 살림, 일곱 번째 사명을 주심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서 소명이라는 것을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다른 것은 다 알겠는데 무엇을 제일 모르겠는가 하면, 사람이 도망친다는 것이 이해가 잘 안 될 것입니다. 아이만 아니라 어른도 잘 이해가 안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교회로 왔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을 찾고 싶어서 교회 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니라 교회 오는 것도 하나님께로부터 도망치는 행위로 보는 것입니다.
교회 와서 예배드리는 것을 남들이 보면 하나님을 찾아오는 것으로 알지만, 생각해보세요! 진짜 하나님을 찾아 온 사람이라면 일요일 오전 11시에 교회 온 것이나 집에 있는 것이나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은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11시에 예배드리는데 갑자기 설사가 나서 11시 10분에 화장실에 갔습니다. 그곳에는 하나님이 안계십니까? 교회 화장실이 더러워서 밑에 있는 상가의 중국집 화장실에 들어갔다. 그러면 교회 화장실에는 하나님이 함께 계시고 중국집 화장실에는 함께 하지 않습니까?
거리를 좀더 멀리 해볼까요? 중국집 화장실에 사람이 가득 차서 멀리 떨어진 공원화장실에 갔습니다. 교회와 멀리 떨어졌으니 그곳에는 하나님이 안계십니까?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교회와 가까워지면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교회라는 이 지점과 멀어지면 하나님과 멀어지는가 하는 이 말입니다. 그렇지 않지요! 집에 있어나 거실에 있으나 간에 하나님의 팔이 함께 하지요!
이 말이 맞지요! 가만히 따져 보면 맞는 말인데, 그런데 느낌상 그 시간에 교회오지 않고 집에 앉아서 축구중계 보면 하나님과 함께 있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그 작자는 누구입니까? 누가 그런 느낌을 제공하는 것입니까? 그게 마귀입니다.
그 시간에 교회 오면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고, 그 시간에 독서실에 가면, 독서실에 가는 사람은 고상한 사람이지요! 노래방가면, 아침부?노래방 가는 사람은 없으니 미장원에 가면 그것은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도록 기분을 조장하는 것을 누가 합니까? 마귀가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 요나를 통하여 소명이야기를 하니, 여러분들이 쉽네요! 간단하네요! 하겠지만, 실제로 소명 속에 들어가 버리면 간단치가 않습니다. 왜? 요나는 도망쳤지만 나 이근호는 도망치지 않고 주일날 교회 나왔습니다. 라는 착각을 하기 쉽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 착각을 가지고 옵니다.
그 한 예를 들겠습니다. 교회에서, 애들은 그런 것 배우면 안 되지만, 싸움이 났습니다. 이층에는 전에 있던 목사와 예배드리고, 아래층에는 새로 자기들이 뽑아 놓은 목사와 주일날 예배를 드립니다. 서로서로 마귀라고 하면서 예배를 드립니다. 그럴 때 어떤 순수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 그런 모습을 보고 너무나 가슴에 상처를 받았습니다. 참 더럽다. 교회가 돈 때문에 이렇게 치졸하게 교회 재산 누구 앞으로 하는가에 대하여 이렇게 싸워야 하는가? 사랑하는 형제자매 할 때는 언제고 막상 돈 문제가 나오니 이렇게 갈라설 줄 몰랐다고 하면서 낙담을 하고, 교회 안 나오겠다고 하면서 일층도 이층도 안 가고 자기 집에서 성경보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첫 주는 명분이 있어서 괜찮았습니다. 그들이 싸우고 있었으니 혼자 그렇게 예배를 드려도 기분이 좋았는데 이것이 첫 주 지나고, 두주 지나고, 세주 지나니, 싸우고 있는 교회도 문제이지만 교회 나가지 않는 나도 무언가 문제가 있지 않는가 하는 의심이 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교회는 다녀야지! 하면서 네 번째 주는 어떻게 하는가 하면, 교회 뭐 별난 교회 있나! 하나님 보고 가지 사람보고 가나! 많이 듣던 용어이지요!
하나님보고 가지 사람보고 가나! 나 혼자 열심히 기도하면 되지 뭐! 사람들 싸우는 것 못 본척하지 하면서 교회로 가는데 문제는 일층이냐 이층이냐 인데 에어컨은 역시 이층본당이 잘 나오니 에라 둘 다 똑같은데 시원한데 가자고 해서 후다닥 예배만 드리고 싸우든 말든 나왔다. 아이고, 하나님 오늘도 내 할일 다 했네요! 하면서 돌아서면 그 행동이 하나님을 찾는 행동이라고 누가 가르치던가요? 그런 행동을 하나님을 가까이 찾는 행동이라고 누가 이야기합니까? 그것은 마귀가 하는 것입니다.
요나처럼 하나님 모른다고 노골적으로 도망쳐도 그것도 도망치는 것이고, 사람이 자기의 본성을 감춘 채, 요나와 같은 본성이 있는 것을 감춘 채, 교회 열심히 나와서 봉사한다고 해서, 나는 장하구나! 나는 좋은 일을 했구나! 하는 그것도 착각인줄 아시기 바랍니다.
이점에 대하여, 소명을 하면서 깊이 있게 다루고자 합니다. 그 근거를 아이들이 또 심심하니 이야기를 하나 해야겠지요! 제가 방금 교회 열심히 다니는 것도 하나님에게서 도망치고자하는 것임을 성경에서 보고자 합니다. 그것은 목자와 잃어버린 양의 이야기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나옵니다. 그리고 처녀와 동전이야기도 같이 나옵니다. 처녀와 동전이야기부터 먼저 해 드리겠습니다. 이 처녀는 동전을 모았는데, 여러분은 어디에 모으나요? 저금통에 모으지요! 그러면 집에 올 때마다 그 저금통을 흔들어 보지요! 가끔 뚜껑 열어서 얼마 있는지 확인해보고 또 집어넣고 그러지요!
이 아가씨가 어설퍼서 동전을 꺼내어 집어넣다가 아홉 개는 집어넣었는데 한개는 떼구르 굴러서 어디로 갔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아가씨가 갑자기 식은땀이 나면서 이 동전이 어디에 있는가 하면서 후레쉬 들고 구석구석 동전아! 하면서 찾는 것입니다. 아무리 찾아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집안 모든 식구 다 도와서 다 찾았습니다. 새벽 두시 반까지 찾아도 없는 것입니다. 엄마가 있다가 얘야! 그까짓 동전하나 가지고 그러느냐 이제 그만 자자고 합니다. 그러나 그 아가씨가 그까짓 동전이라니요! 그 동전은 제 생명과 같습니다. 저는 밤새도록이라도 찾겠습니다. 그래서 저녁 10시부터 찾아서 새벽 4시 46분까지 찾았습니다. 6시간 46분을 찾았습니다. 드디어 찾았습니다. 세상에! 자기스타킹 안에 있는 줄 모르고(하하하), 찾다가 포기하려고 했는데 나중에 보니 자기 발밑에 있었던 것입니다. 동전 10원을 찾아놓고 기분이 너무 좋아서 친구들 불러 모아서는 전화해서 자장면 시키고 탕수육 지키고 그때 계산서가 14만 6천원이 나왔어요! 동전하나 잃었다가 찾았는데 너무 좋아서 잔치를 벌인 것입니다.
그러니 그 동전을 누가 잃어버렸습니까? 동전 자체가 잃어버렸습니까? 아가씨 본인이 잘못해서 잃어버린 것입니까? 아가씨가 잘못해서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동전과 아가씨’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원래 자기 동전인데 잠시 저녁 10시부터 새벽 4시 46분까지 떠났다가 자기 주인 품으로 되돌아 온 것입니다. 원래 누구 것입니까? 원래 아가씨 것인데, 원래 아가씨 것을 되찾는 것이 동전과 아가씨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입니다.
자기 동전 자기가 되찾는 것입니다. 남의 동전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이 도끼가 누구 도끼냐? 이 금도끼가 네 것이냐? 아닙니다. 이 은도끼가 네 것이냐? 아닙니다. 이 녹슨 쇠도끼가 네 것이냐? 네 그렇습니다. 너 착하구나! 이것 다 가지라는 그런 동화가 있지요!
예수님께서 하늘에 사시다가 이 땅에 오신 것은 자기가 잃어버린 자기 동전 찾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동전 잘못이 아닙니다. 동전은 떽데구르 구른 것뿐이지요! 무엇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되찾아오는 그 사랑이 이정도로 끈질기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그 자비하심과 찾으심과 기쁨과 행복을 보여주기 위하여 그 동전은 잃어버린 채로 이 땅에서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자기 동전 되찾는 것이 누가복음의 동전과 아가씨의 비유입니다. 그 앞에 나오는 것인 잃어버린 양의 비유입니다. 그것을 이제부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어떤 목자가 양 백 마리를 데리고 소풍을 나갔습니다. 나갈 때에 딱 백 마리를 데리고 나갔습니다. 가서 도시락도 먹고, 수건돌리기도 하고, 장기 자랑도 하다가 오후두시 되어서 이제 집으로 가자하고 헤아려 보니 양 한 마리가 없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99아홉 마리 양이 하는 말이 선생님 그냥 갑시다. 따라 오겠지요.
그런데 그 양 한 마리는 어디에 가 있는가 하면, 목자를 잃어서 울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양 한 마리는 노래방에 가서 혼자 마이크 들고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자는 생각도 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양이 오! 내 목자 어디 갔어! 이렇게 착한 양이 아니라, 요나처럼 드디어 예수님 없는 곳에 있다. 드디어 하나님 안 믿는 곳에 와있다. 신 난다. 드디어 내 마음대로 살 거야!
조만간에 나올 저의 지옥의 하나님이라는 책에 이것이 있습니다. 소제목 중에 ‘예수를 모르는 즐거움’ 이런 제목의 글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모르는 즐거움이 굉장히 큰 즐거움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모르게 되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잖아요! 세상에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얼마나 기분이 좋은 것입니까? 커피를 내 마음대로 하는 광고가 있는데 자기 마음대로 하면 상케 유케 통케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을 알게 되면 간섭받잖아요! 잔소리 듣잖아요! 그런 간섭과 잔소리 없이 자기 마음대로 한다면 그것이 이 선풍기나 에어컨 보다 더 시원한 산들바람처럼 시원한 것입니다. 예수를 모르는 즐거움으로 오늘날 교인들이 교회에 다닌다고 이야기 하고 싶어서 이 제목을 부친 것입니다.
이 말을 반대로 하면 예수님을 알고 싶어서 교회에 오십니까? 하면서 제가 묻고 싶은 것입니다. 의존교회 이 쇠문을 열고 오면서 목사님! 예수님에 대하여 좀더 알고 싶어 왔습니다. 하는 분이 지금 여기는 다입니다. 제가 좋게 해석하는데 전부 다 그럴 것입니다. 목사님! 제가 한 주간동안 예수님에 대하여 더 알고 싶어서 미치겠습니다. 좀 더 알려주세요! 하면서 허겁지겁 오는 사람이 있다면 그 교회 대단한 의존교회이지요!
대부분, 특히 우리교회 같은 경우는 그렇지 않는데, 오늘 바쁜데 교회 왔다. 주여! 축복 주옵소서! 아주 바쁜 몸이거든요! 끝나고 빨리 예식장 가야 되고, 다른 볼일이 있는 대단히 바쁜 몸이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자녀라고 교회 왔으니 이런 성의를 생각해서 한 일주일치 복을 오늘 예배 시간에 몽땅 내려주옵소서! 만약 주지 않으면 데모할 거야! 라는 식의 무엇을 더 얻고자 소유하고자 오는 사람이 대부분이지, 예수님 소식 궁금해서 미치겠습니다. 한주일 세상에 살다보니 예수님의 소식을 듣지 못했는데 어서 가르쳐 주옵소서! 하면서 엎어지고 자빠지면서 서로 앞자리에 와서 앉는 그런 식으로 교회 다니는 사람이 있다면 정말 귀한교회입니다. 의존교회 이름 바꾸어야겠습니다. 귀한 교회, 그 앞에 하나 더 붙여야 합니다. 특이한 교회 아주 특별한 교회입니다.
그 정도로 사람들은 매 맞지 싶어서, 얻어맞지 싶어서 교회를 나오는 것이 밑바닥에 깔려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언가 하면, 결국 예수님이 찾아내어서 구원 얻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마음씨가 좋아서, 내가 알아서 예수님 계신 교회로 찾아갔기 때문에 그래서 그 덕분으로 그 행위로 구원받겠다는 잘못된 생각, 거짓된 소명감, 거짓된 구원관이 그 밑에 쫙 깔려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누가 가르칩니까? 마귀가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제 제가 한 가지만 이야기하고 첫째 시간을 끝내고자 합니다. 이것은 성경에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상식적으로 알아놓으세요! 콜버거 라는 독일의 심리학자요 교육학자요 철학자가 있는데, 그 사람이 무엇을 이야기 하였는가 하면 1950년도에 ‘도덕발달 이론’이라는 것을 발표하였습니다.
콜버그 Kohlberg. Lawrence (1927∼1987) : 네이버 검색 인지 심리학의 기수. 그의 도덕교육이론은 인지 심리학의 기본명제들에 기초하고 있다. 콜버그는, 교육의 과업을 개인의 심리적 인지적 구조와 사회적 환경의 상호작용에 의해 촉진되는 도덕 발달의 자연적 과정을 자극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콜버그에 의하면 그 상호작용의 결과로 도덕성은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발전하며, 도덕적 성숙은 최종적인 여섯번째 단계에 도달한다. 성숙된 도덕성은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동일시하고, 다른 사람들에 대해 배려를 하며, 무엇보다도 '정의와 휴머니즘' 원리에 입각해 자신의 행동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는 것이다. 도덕성의 이러한 단계들은 도덕성 진화의 일반적 방향을 반영한다. 콜버그는 도덕적 의식의 보편적 형식들(원리, 표준, 가치)은 모든 시대에 존재하는 것이지만 그것의 성숙성 정도는 차이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교육의 지상 목적은 정의로운 사회 구축에 공헌하는 인성의 형성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개인은 자기완성의 잠재력을 지녔기에 자신의 행동을 형성하고 계획한다. 도덕발달은 일차적으로 도덕적 행위를 수행할 수 있는 인간의 심리적인 능력의 산물이다. 이에 반해 사회적 환경은 개인으로 하여금 어떠한 새로운 상황에서나 새로운 행동 계획을 모색하도록 유인하는 자극제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콜버그는 개인과 사회 간의 조화의 획득이 사회 환경의 본질에 의존하는가의 여부, 또한 그 정도는 얼마만큼인가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주지 못했다. 그의 이론에서 최대목표로의 도덕성의 이동은 추상적 가능성으로 남는다. 콜버그의 교육 개념을 밝히는 기본저서는 다음과 같다. {정의를 위한 교육 : 플라톤 견해에 따른 현대적 진술}(Educating for Justice : A Modern Statesment of the Platonic View, 1970), {인성의 도덕 발달 단계 : 도덕 학습의 기초}(Stages in the Moral Development of the Personality : The Basis of Moral Learning 1971), {도덕 발달의 의미와 측정}(Meaning and Measurement in Moral Development, 1979), {정의 사회를 위한 교육 : 최신의 수정된 진술}(Educating for Just Society : An Updated and Revised Statement, 1980), {도덕발달의 철학. 도덕성의 단계와 정의의 이념}(The Philosophy of Moral Development : Stages of Morality and the Idea of Justice, 1981).
도덕발달 이론이 무언가 하면, 어린 아이의 도덕은 일 단계, 그 다음에는 이 단계, 그 다음에는 삼 단계 해서 도덕중의 최고의 단계는 육 단계로 나누었습니다. 일단계가 무언가 하면, 이것은 애들보다 어른들이 들어야 하는데 때려야 말을 듣는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소리해도 안 되는 것입니다. 얘야! 너 이렇게 행동하면 안 되거든, 예를 들어서 고추장을 먹으면 예야, 고추장을 먹으면 혀의 미각세포가 발달해서 뇌에 어떤 자극을 주고 하는 이런 설명은 안 되는 것입니다. 때리면 아프지요! 동물적 감각을 통하여 아프니까 이런 행동은 하지 말라는 것이구나! 하면서 중지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잘한 일에는 빵을 하나 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일은 잘한 일이구나! 그러니 원숭이 수준입니다. 당근과 채찍입니다. 그러니 아픈 것을 원할 것이냐 단 것을 원할 것이냐는 순전히 자기의 느낌만 의존하는 것을 가지고 일 단계 도덕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체벌과 보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교회 다니는 것이 일 단계 교회 다니는 것입니다. 사업하다가 폭삭 망했다. 하나님이 나쁜 짓 했다고 벌주는 것이구나! 그러니 이 사업을 빨리 회생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빨리 빌어야지 하면서 황급히 나온 사람이 바로 일단계입니다. 그렇게 해서 일이 잘 풀리면 그 사람은 두 번 다시 교회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한 석 달 후에 또 잘 안되면 새벽기도 나와서 웁니다. 그러다?잘 되면, 또 한 6개월 나오다가 또 아 나옵니다. 순전히 매 맞기 싫어서, 지옥 안 가려고 나오는 일 단계, 하나님을 그런 체벌과 보상의 하나님으로 보는 것이 일 단계입니다.
이 단계가 궁금하지요? 제가 일 단계를 이야기 하니 목사님 저는 그 정도의 일 단계는 벗어났습니다. 하면서 자신만만해 하는데 과연 그런지 두고 봅시다. 이 단계가 무엇인가 하면, 엄마가 애를 때릴 때, 아이가 아픈 것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엄마가 무엇 때문에 나를 때리는가 하면서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애를 씁니다.
어머니 저 때문에 마음이 상했지요! 이런 아이가 되어도 대단합니다만 어머니! 제가 일등 하다가 이번에 50등 하니 마음 아프지요! 알기는 아는 구나. 그렇지만 참으세요! 세상 살다보면 그런 일도 있습니다. 이게 아인지 어른인지 구별이 되지 않습니다만 때리는 어머니의 마음을 알고자 하는, 즉 권위자에 대한 종속단계입니다.
첫 번째 단계는 때리고 달래야 하는 단계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나를 때리는 분이 무엇 때문에 때리는 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런 단계에서 교회 오는 사람은 목사님에게 잘하면 복 받고 잘못하면 저주받는 다는 철저하게 목사에게 종속되어 있는 단계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 단계 교회 다니기입니다. 두 번째 단계란 목사라는 권위에 전적으로 종속됨으로, 그것으로 신에 대한 책임을 다한 것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큰 교회 같으면 주의 종에게 욕하면 안 되지! 하면서 무조건 적으로 복종하는 귀속감, 안도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일 단계? 이 단계? 그러면 삼단계가 또 궁금하겠지요? 삼 단계는 목사님이 나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직접 성경 보겠다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목사님이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알아서 스스로 서야 한다는 자립심, 세 번째 단계가 자립심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착한소년 착한소녀 되기입니다. 이것을 어렵게 이야기 하면 자의식입니다. 삐아제의 이론에 의하면 이 자의식이 있어야 하나의 시민으로서 독립할 수 있습니다. 자의식이 없으면 자폐증이 되어버립니다. 날마다 엄마만 찾고 엄마만 기대는 권위자에 기대는 것입니다.
교회 나와도 마찬가지입니다. 일 단계에서 하나님께 매 맞기 싫어서 교회 나왔다가, 이 단계에서는 목사님이 내보다 더 많이 아는구나! 그러면 목사님께 복종해야지! 목사님 잘 만나서 구원받는다고 여기고 있다가 세 번째 단계에 들어가면 목사님은 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의 종이고 실제로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라는 자의식, 스스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는 자립의식이 생기는 것입니다. 착한소년, 소녀 되기입니다.
이 단계가 일반인 같으면 보통 몇 살인가 하면, 요즈음 조숙하니 아홉 살 때부터, 늦은 나이는 열두 살 정도부터 아빠말도 안 듣고 엄마말도 안 듣고 듣는 것은 자기 친구들 말만 들으며 말썽꾸러기가 됩니다. 그런데 이 자의식이 강하면 신앙적으로 문제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자기 의, 자기 의로움을 너무 챙기다 보면 이기주의가 됩니다. 그래서 요즈음 젊은 애들이 자기 밖에 모른다고 하지 않습니까? 부모말도 안 듣고, 목사님 말도 안 듣고, 나는 내 스스로 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 번째 단계입니다.
자! 여러분은 이 세 단계 중에서 어느 단계입니까? 사람은 자의식이 있더라도 그때그때 마다 일 단계 이 단계로 되돌아갑니다. 살만하면 자의식이 생기다가 어려우면 하나님 도와주소서! 하면서 일 단계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네 번째 단계는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에서 벗어나서 나라는 존재가 나만을 위해서 살라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남을 위해서 봉사하기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이웃에 대한 배려와 관심이 나오면서 내가 남을 위하여 평생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남을 위해서 존재해야 올바른 인간이 아니겠는가! 하는 남에 대한 배려가 나오는 것이 사 단계 도덕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다음에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을 실천하기 위하여 사 단계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삼 단계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모르고 내밖에 모르지만 사 단계에 들어간 애들은 아버지 술 좀 끊으세요! 어머니 무언가 좀 배우세요! 집에서 친구들과 전화만 하고, 연속극만 보아 연속극 다 외우지 마시고, 좀 어머니도 무엇을 하세요! 무언가 가정을 생각하면서 어머니 아버지 제가 돈벌어서 효도 할 테니 걱정 마시고 나중에 사실 때 없으면 저희 집에 오세요! 저는 이제 저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가정을 생각합니다. 남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단계에 들어가면 교회도 어떤 교회가 되는가 하면, 그동안은 교회에 헌금이 오든 말든, 목사 월급이 얼마나 나가든, 전기세가 얼마이든 나는 몰라 교회 나와서 구원이나 받으면 되었지 나는 돈 한 푼도 안 낼 거야 이러다가. 사 단계에 들어오면, 가만히 보니 교회가 이래가지고는 재정이 어려울 텐데 내가 얼마라도 보태어야 하지 않겠나! 이런 식으로 교회까지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여유, 이게 사 단계인데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갑자기 이런 말하면, 저는 그냥 이 단계로 돌아가겠습니다. 목사에게 얻어먹기만 하겠습니다. 또는 삼 단계로 돌아가 목사에게서 복음만 챙겨서 천당이나 가겠다는 삼 단계 이기주의입니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어려울 때만 교회 오겠다는 일 단계, 그러니 한국교회 전부다 일 단계에서 삼 단계사이에서 제자리 뛰기 構?있는 것입니다.
사 단계까지 되는 것도 드물어요! 그것이 안 되니 교회에서 억지로 장로라는 직분을 만들어 줘버리는 것입니다. 이래도 안 할 거야? 장로회인데! 그래서 장로인데 돈 내라. 집사인데 돈 내라는 것입니다. 이번에 당신 장립집사 안수 하는데 피아노 하나 기증해! 하도 안 내니 억지로 감투 씌워서 억지로 끄집어내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무슨 일이 있으면, 목사 천만 원, 그러면 장로는 알아서 이 천만 원 해야지 목사가 천만 원 하는데 장로가 오 만원 이러면 안 되지! 직분 세워놓고 돈 받아서 굴러가고 있는 형편입니다. 왜? 알아서 이기주의에서 벗어나기가 어렵습니다. 얼마나 인간이 자기 머리를 굴립니까?
일 단계에서 사 단계까지 하였는데, 날이 더워서 하면서 벌써 다 잊어버렸지요! 다시 정리합니다. 일 단계는 어린 애, 때려야 말을 듣는 것, 이 단계는 엄마를 사랑하는 것, 삼 단계는 엄마 아빠도 몰라 아제 나 혼자 살 거야 자립심, 사 단계는 나라는 존재가 안 중근이나 이 순신장군처럼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써야 하지 않겠는가 하면서 드디어 자기 바깥의 사회와 가정을 생각하는 사 단계. 자 어떻습니까? 여러분 같으면 이 사 단계로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콜버거는 여기에 두 단계를 더 말하고 있습니다. 그 오 단계가 무어냐 하면? 기존의 질서를 수용하는 보수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 가정이 이래서야 되겠는가 하면서 기존의 질서를 변화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 단계는 개혁입니다. 사 단계와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사 단계는 있는 질서에 순종하자는 것입니다. 질서가 안정되어야 내가 편하다. 그러니 있는 질서를 존중하는 것이 사 단계입니다.
삼 단계는 자기 밖에 모르는 것, 사 단계는 자기가 속하여 있는 사회를 생각하지만 기존의 질서에 복종하는 것, 오 단계는 이래서는 안 된다. 바꿔야 한다. 나라도 바꾸고 교회도 바꾸고 바꾸자는 것이 오 단계입니다. 이 오 단계에 들어가면 남에게 욕도 얻어먹고 희생도 해야 하는 것이 오 단계입니다.
자 첫째 시간 끝내면서 궁금한 게 있습니다. 육 단계입니다. 육 단계가 양궁에서 만점입니다. 육 단계가 무언가 하면, 교회고 법이고 질서고 가정이고 무어고 간에, 내 몸 자체가 내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는 것, 현재 내가 어떤 형편에 처하더라고 그것이 신의 것이고 하나님의 것이기에 하나님이 나를 어디에 어떻게 굴려도 그 모든 것에 ‘감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아내가 여보! 이혼합시다. 여보! 감사 합니다. 주여! 감사합니다. 당신 자녀가 교통사고로 죽었습니다. 주여! 감사합니다. 그것도 주님께서 하신 일인 줄 믿습니다. 왜? 나도 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범사에 감사하라고 한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늘 주님 것이라고 바치는 기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받고 안 받고 가 필요 없이 있는 그대로가 하나님께 감사한일, 내가 여기 있다는 그것도 기적입니다. 하늘에서 물을 주시고 햇빛을 주시는 것도 감사, 달을 주시는 것도 감사, 시편 136편에 보면, 달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별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라고 합니다.
세상에 남들 다 보는 별을 보고 감사의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사람, 세상에 남들 다 보는 달을 보면서 그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좋아서 흑흑 흐느끼면서 우는 사람, 그 사람이 육 단계입니다. 좀 미친 사람 같지 않습니까? 정말 언어로서 표현이 안 되는 단계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삼층 천에 올라갔을 때에, 자기 본인을 ‘그’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을 알거든, 그가 삼층 천에 올라갔거든, ‘나’가 아니고 ‘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천국의 빛 앞에서는, 빛이란 모든 것을 사라지게 해 버리니까, 광채가 오면 모든 것을 사라지게 만들어 버립니다.
모든 것을 사라지게 하는 빛 앞에 서게 되면 걱정해야 할 나마저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걱정 하는 나, 두려워하는 나, 염려하는 나마저 날아가 버린 그런 상태! 오직 주여! 누구십니까? 나는 누구입니까? 라고 묻는 것이 아니라 저에게 찾아오신 주님은 누구십니까? 라고 묻는 그 단계가 사도 바울이 주님을 만난 그 단계입니다.
그것이 바로 ‘불러내심’입니다. 따라 합니다. ‘불러내심’ 드디어 불러내신 주인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전 까지는 내가 열심히 불러내도록 아부를 한 것입니다. 교회 열심히 와서 기도하면서 연기하고 아부한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안 불러줄 거야? 자기가 불러내어질 만한 폼만 잡는 그런 행동을 해 왔는데 그것이 교회 다니기이고 헌금하고 전도하기인데,
진짜 불러내심을 받았다면, 주여 누구십니까? 이 빛은 누구십니까? 라고 묻는 단계, 그 앞에는 적도 없고 원수도 없고 나도 없고, 찬송가 204장에 나오지요! ‘세상과 나는 간곳없고 구속한 주 만 보이도다’ 천지가 간 곳없고 오직 주님만 보이는 것입니다. 천지가 간 곳없고 오직 주님 앞에 내만 서 있는, 창조주 앞에 피조물로만 등장 되 있는, 이것이 바로 육 단계인데,
여러분들이, 성도는 육 단계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일 단계 갔다가 육 단계 갔다가 불쑥불쑥 두더지 튀어나오듯이 마구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가는 한 십분 쉬고 계속 하겠습니다. 녹취 050908 이장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