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 사도행전(7) 언더우드 선교사(6)
생애의 반려자 호튼과 결혼하다.
1889년에 미국북장로교회 의료선교사였으며 여의사였던 릴리어스 호튼 (Lillias Horton: 1851~1921)과 결혼하였다. 호튼은 1883년 조선의 제물포항에서 내렸으며 광혜원의 책임자요 명성 왕후의 담당의사로 내한하였다.
언더우드 부부는 신혼여행을 빙자하여 북부지방을 순회했다. 의주에 갔을 때 국경 너머에서 3인의 세례 지망자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호튼 여사는 『조선견문록』을 남겼는데 그가 조선견문록에 쓴 다음과 같은 조선 인상기의 한 구절은 당시 조선이라는 나라의 문명적 낙후성과 민생의 비참성을 잘 말 해주고 있다. “지긋지긋하게 좁은 길과 온갖 소음으로 가득한 나라, 포악한 산적 떼와 호랑이가 지나다니는 나라”
언더우드는 1889년에 4번째 북부지방 순회 전도(의주)를 하면서 조선 선교의 바람직한 모형을 구상하게 되었다. 그것은 ‘네비우스(J. L. Nevius) 선교 방식’을 따르는 것인데 그것은 선교 현지에 교회를 세워 교회가 자치 정신을 가지고 자립 운영을 하며 자력 전도의 사명을 갖게 한다는 것이다.
문서 선교의 초석을 놓다.
언더우드는 내한 초부터 계속 한국어 공부에 힘을 써 유창하게 구사할 정도가 되었다. 한글을 선교 공용어로 결정하여 성경 번역과 출판 사업에 서둘렀다.
1887년에는『마가의 젼한 복음셔 언해』를 일본에서 간행하였다.
또 같은 해 한글 성경 번역과 그 감독을 목적으로 하는 ‘상설 성경 번역위원회 (The Permanent Bible Committee in Korea)’ 를 구성하였다. 『웨스트민스터 소(小) 요리문답』도 간행하였다.
1889년에는 송덕조(宋德祖)의 도움을 받아 An Introduction to the Korean Spoken Language [조선어교본] 와 A Concise Dictionary of the Korean Language [조선어 사전] (한영부, 영한부)를 발간하였다.
1889년 또 정동의 언더우드 자택에서 ‘한국성교서회’를 조직하였다. 이는 1890년 그 헌장을 통과시킴으로써 정식으로 출범하였고 오늘날 ‘기독교서회’의 모체가 되었다.
이 한국성교서회의 1차적인 사명은 한글 성경을 만들어 성경을 조선의 신자들에게 배포하는 것이었다.
언더우드는 스스로 한국성교서회의 서기가 되어 동료 선교사들과 조선인 조력자들의 힘을 빌려 『신약성서』 (1900)와 『구약성서』 (1910)를 발간하였다.
1919년 “한국성교서회‘는 ‘예수교 서회’로 개칭되었다. 이 서회는 한글로 허다한 번역서를 펴내 한국의 기독교 발전과 민중 교화에 큰 공헌을 하였다.
조선에 있어 찬양가(찬송가)는 1892년 존스 (G.A.Jones)와 로드와일러 (Louisa C. Rothweiler) 가 감리회 선교부(The Korea Mission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에서 펴낸 『찬미가』가 최초였는데 이는 악보 없이 가사만 있는 찬송가집이었다.
언더우드는 그보다 2년 뒤 1894년 예수성교회당에서 조선 최초로 악보 찬송가집 『찬양가』 총 154장을 편찬하였다.
언더우드는 1897년 주간(週刊) 순한글신문 『그리스도신문』을 창간하였다. 이 신문은 기독교 선교를 그의 첫째 가는 사명으로 하고 있으나 그에 못지 않게 당시 낙후된 조선에 필요한 국민 의식의 계몽과 신지식의 보급에 힘을 기울이는 활동을 펼쳤다.
한국 YMCA 운동을 시발하다.
기독청년회 (YMCA)를 조직하여 청년 사회 운동에도 헌신하였다.
선교 사업이 크게 진전되었으나 기독교인의 대부분은 늙은이거나 부녀자들이었다. 젊은이들을 교회로 끌어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1900년 언더우드는 아펜젤러 목사와 의논하여 한국에도 기독교 청년회를 설립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내용의 청원서를 YMCA 국제 위원회에 제출하였다. 국제 위원회에서는 1901년 9월 질레트(Phillip L. Gillette) 선교사를 조선 황성 YMCA의 설립 총무로 파송했다.
질레트는 외국어 학교 학생들과 조선 군인들과 접촉 하였다. 당시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거의가 하류층에 속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이들 신분이 낮고 무식한 젊은이들을 데리고 Y.M.C.A. 운동을 제대로 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1903년 10월 28일 드디어 기독교 청년회가 정식으로 조직되고 헌장을 채택하게 되었다. 언더우드는 1916년 사망할 때까지 이사로 있으면서 한국 YMCA 운동에 크게 공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