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페미니스트, 내 머리맡의 책] 나는 과학이 말하는 성차별이 불편합니다
3.8여성의 날 행사에서 피켓을 들고 서 있다. (사진-이연수)
[필자 소개] 이연수.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활동가. 트랜스여성 페미니스트로서 여성운동과 트랜스운동을 하고 있으며, 브런치에서 〈나의 트랜지션 일기〉라는 에세이를 연재하고 있다.
남성과 여성은 다르다는 믿음
나는 20년이 넘는 시간을 한국 사회에서 남성으로 사회화되었다. 여느 남자들이 그렇듯이 가부장적이고 성차별적인 사고에서 나 역시도 자유롭지 못했다. 남자는 남자다워야 하고 여자는 여자다워야 한다는, 지금의 나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을만한 입장을 견고하게 갖고 있었다.
그런데 그 입장에서 봤을 때, 나는 남자치고는 ‘남성성’이라고 불리는 어떤 것이 많이 결핍되어 있었다. 평균보다 작은 체구와 약한 힘, 유순한 성격은 나에게 커다란 콤플렉스였고, 남자들 무리에서 도태될까 봐 두렵기까지 했다. ‘여자’같은 나 자신이 싫었다.
“이 학문은 전반적으로 뻔한 성 고정관념들에 기대고 있는 분야였다. 남성은 공격적이고 여성은 보살핀다. 남성은 독립적이고 여성은 관계중심적이다. 남성은 공간을 갈구하고 여성은 친밀함을 갈구한다. 남성은 생산하고 여성은 생식한다. 남성은 재미를 보려 하고 여성은 애정 표현을 좋아한다. 남성은 여성의 젊음, 아름다움, 연약함에 끌리지만, 여성은 남성의 권력, 지위, 돈에 끌린다. (중략) 문제는, 이것이 덜 계몽한 시대의 남녀 관계를 비판하기 위해 설정된 상상의 세계가 아니라 객관적인 과학임을 자처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리 루티, 『나는 과학이 말하는 성차별이 불편합니다』 16p
책 『나는 과학이 말하는 성차별이 불편합니다』에서 저자가 비판하고 있는 진화심리학자들의 통념을 나 또한 신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내가 강남역 살인 사건(2016)을 계기로 페미니즘을 접하게 되었다. 남성으로 사회화되는 사람은 알 수 없었던 또 다른 세계. 퀴어 퍼레이드에서 많이 부르는 〈다시 만난 세계〉(소녀시대 데뷔곡, 2007)처럼, 이 세계와 새롭게 다시 관계를 맺게 되는 기분이었다.
남자가 꼭 남자답지 않아도 된다는 관념- 작아도 되고, 약해도 되고, 부드러워도 된다는 것–은 나에게 해방감을 안겨주었다. 남성과 여성의 차이보단 공통점에 더 주목하게 되었고, 여성을 더이상 이질적이고 신비한 존재가 아니라 인간 그 자체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에서 줄기차게 비판하고 있는 진화심리학처럼, 이 세상의 많은 지식들이 남성들에 의해 성차별적으로 구성되어 온 것임을 페미니즘을 통해 배웠다.
마리 루티 지음, 『나는 과학이 말하는 성차별이 불편합니다』(원제: The Age of Scientific Sexism, 김명주 역, 동녘사이언스) 표지 ©이연수
성별 이분법을 가로지르다
페미니즘을 공부하면서 자연스럽게 나 자신에 대한 고민도 시작되었다. 더는 남성성 규범을 따르지 않아도 된다면 나의 가치관을 새롭게 정의해야 될 것 같았다. 그동안 추구해왔던 딱딱함과 투박함의 정반대인 부드러움과 섬세함을 추구하게 되었다. 일부러 강해 보이게 행동하지 않게 되었고, 논리와 합리성보단 감정과 관계를 중시하게 되었다. 맨박스(Man Box,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에게 강요되는 남성성, 남자다움의 굴레를 뜻함)에 밀봉되어 있던 내가 자유로워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남성성’이 불편한 걸 넘어서 ‘남성’이라는 거 자체가 불편해졌다. 내가 남성으로 보인다는 사실, 내가 남성의 몸을 가졌다는 사실이 싫었다.
그러던 어느 날, sns에서 어떤 남자 모델이 크로스드레싱(cross-dressing)을 한 사진을 보았다. 보통 남성이 ‘여장’을 하는 건 우스꽝스럽게 희화화된 모습이 많은데, 그 모델분은 굉장히 진지하게 멋있게 보였다. 나도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사진작가님을 섭외한 뒤, 화장을 하고 치마를 빌려 입고 촬영을 했다. 난생처음 해보는 시도. 어색할 만도 한데 나는 그 시간이 좋았다. 내가 원하는 모습을 찾은 기분이었다. 나는 그 순간을 스스로 ‘트랜스 모먼트’라고 부른다.
나의 정체화 과정을 여기서 다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그 날이 중요한 계기가 되어 나의 성별 정체성을 새로이 찾게 되었다. 정신과 진단을 받고, 호르몬 치료를 시작하고, 여러 수술들을 통해 몸을 바꿔갔다. 내가 남성으로 보일 때는 화장을 하고 치마를 입으면 사람들이 수군대고 손가락질을 했는데, 트랜지션(transition)을 하고 여성으로 패싱(passing)되기 시작하자 그 모든 게 문제가 없어졌다. 나는 똑같이 나인데, 견고한 성별 이분법에서 어느 범주에 속한 것으로 보이냐에 따라 전혀 다른 세상을 살게 된다는 게 참 이상했다.
물론 트랜지션을 끝냈다고 해서 내가 온전히 여성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건 아니었다. 남들과 조금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일상에서 내 성별을 의심하는 시선들과 수군거리는 목소리를 매일매일 견디며 살아가고 있다. 성별 이분법에 일단은 들어가야 그 이후에 비판을 할 텐데, 애초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미끄러지는 기분이다. 정체화라는 신호를 받고서 남성에서 여성으로 건너가고자 하는데, 차마 도달하지 못하고 횡단보도 한복판에 서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내가 건너가지 못하게 만드는 가장 큰 장애물은 성별 이분법 중에서도 특히 생물학적 신체에 관한 영역이다. 사회문화적인 성별 고정관념은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도, 생물학적 성별 이분법에 대한 관념은 견고한 경우가 많다. 그러니까 남자의 몸과 여자의 몸은 철저히 다르며, 그렇기에 ‘트랜스여성을 여성이라고 인정하더라도 신체적으로는 남자인 거 아니냐’는 말을 지겹게도 들었다.
하지만 꼭 그렇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여남 간의 신체가 갖는 무수한 공통점은 무시하고 사소한 차이점에 더 주목해왔던 건 아닐까?
나의 트랜스 모먼트. 화장을 한 남성이 거울을 보며 꽃을 물고 있다. (사진-이연수)
“성인의 생물학적 조건, 즉 체질을 형성하는 신경 배선의 많은 부분이 출생 시점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생후 몇 년 내에 그 신생아가 생존하는 데 필요한 사회적, 언어적, 가족, 대인관계, 양육의 맥락 안에서 자리를 잡는다.” 예를 들어 신생아의 뇌는 부분적으로 발달한 상태인데, 이는 아기의 신경 세포와 신경 경로가 다른 사람들을 포함한 주변 환경과의 상호 작용을 통해 형성된다는 뜻이다. 이는 문화가 처음부터 생물학적 구조 안으로 접혀 들어간다는 것을 뜻하고, 따라서 인간을 순수한 생물학적 존재로서 이야기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나는 과학이 말하는 성차별이 불편합니다』 148-149p
나는 과학을 잘 모른다. 내 몸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건, 우리가 과학적 진리라고 여겨왔던 많은 것들이 다 어떤 관점에 의해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되어왔다는 것이다. 그 관점이란 바로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관점이다. 남성과 여성의 근본적 차이를 강조함으로써 이득을 얻는 집단이 바로 성별 권력을 가진 (시스젠더)남성들이기 때문이다.
남성은 원래 여성보다 둔감하다고 해야 여성에게 섬세함을 강요할 수 있고, 남성은 원래 여성보다 이성적이라고 해야 여성을 사적 영역에 가둬놓을 수 있으며, 남성은 원래 여성보다 성욕이 강하다고 해야 남성의 성폭력을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순수한 생물학적 존재가 아니라, 우리가 놓여진 사회문화적 맥락에 의해 계속하여 구성되는 존재이다. 남성들은 성별 관계에서 우월적 지위에 있고 싶기 때문에 이러한 성별 이분법에 균열이 생기는 걸 원하지 않는다.
남성 출신으로서 남성에게
많은 남성들은 말한다. 페미니즘을 주장하는 여자들은 남자의 삶을, 남자의 고충을 모른다고. 페미니스트들 때문에 남자들이 더 살기가 어려워진다고.
하지만 20년을 넘게 남자로서 살아본 나로서 말하자면, 남자의 삶의 고충은 결코 여자 때문이 아니고 결코 페미니즘 때문이 아니다. 가부장제와 성별 이분법이 견고한 사회일수록 약자성이 있는 남자도 같이 힘들어질 수밖에 없다. 마치 남성성이 부족했던 내가 남자들 무리에서 힘들어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런 내가 페미니즘을 접하고 새롭게 나를 발견하여 해방감을 느끼게 되었으니, 페미니즘은 남자한테도 좋은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하는 말이 남성들에게 얼마나 가닿을지는 모르겠으나, 트랜스여성인 나를 남자 취급하고 싶다면 남자 대 남자로서 하는 말이라 여기고 한 번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우리 남성들이 기꺼이 남성성이라는 갑옷을 벗어던지고 마음껏 약해지고 마음껏 부드러워질 수 있기를, 여성과의 공통점을 많이 찾아내고 인간 대 인간으로서 기꺼이 연대하게 될 수 있기를, ‘남성 출신’인 나는 바란다.
이연수 ilda@ildar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