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성보문화재 50選] ㊴ - 조계사 대웅전 상량 유물
총본산 건립당시 문화사 반영 중요 불교문화유산
대웅전 불사과정 기록 ‘상량문’
31본산 당시 북한 사찰도 동참
불교계 역량 총집결 열기 반영
조계사 ‘대한불교총본산’ 지정
조계사가 차지하는 위상 짐작
대한제국 황태자 가례식 메달
직급 명기한 관서질 등 봉안물
근대문화·생활사 연구에 귀중
2003년 조계사 대웅전 종도리 해체 복원과정에서 발견된 상량문을 비롯한 217점의 유물은 1937년 대웅전 건립당시 한국불교총본산 조계사의 위상 및 당시 문화사·생활사가 반영된 귀중한 연구 자료로 주목을 받고 있다. 주요 상량 유물.
조계사(曹溪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총본산으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사찰이다. 삼국시대 이래 1700여 년이라는 유려한 역사를 가진 불교는 한국의 사회와 문화를 주도해 왔다. 조선 시기 숭유억불정책의 거센 탄압을 겪으면서도 정법의 법등을 지켜왔다. 일제강점기에는 식민지 불교정책으로 한국불교의 정체성이 크게 훼손당하였다. 조계사는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고, 자주적인 한국불교를 세우기 위해 대한불교조계종 총본산의 중심으로 세워졌다.
통합종단 출범 60주년 뜻 깊은 해
조계사는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던 1910년 처음에는 각황사(覺皇寺)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다. 조선시대 억불정책으로 도성 내 사찰 건립이 폐지된 이래 사대문 안에 세워진 최초의 사찰이었다. 주로 산중에만 있던 사찰을 사부대중과 가까이 만날 수 있는 도심으로 나아가는 것이 절실했다. 궁궐 앞 서울의 중심에 사찰을 건립하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1938년 지금의 조계사 대웅전을 설립하였고, 한국불교의 전통을 살려 북한산 태고사(太古寺)로 명명하였다. 자정과 쇄신을 바탕으로 불교정화운동을 일으켜 마침내 종단의 화합이 이루어졌고, 1954년 조계사로 개칭되었다.
불기2506(1962)년 3월22일은 종헌을 제정하고 통합종단이 출범한 날이다. 그러니 2566(2022)년 올해는 조계종 통합종단이 출범한 지 60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이다. 이를 기념하며 조계사 대웅전 상량문에서 발견된 유물을 살펴본다.
2003년 7월28일 조계사 대웅전 해체복원 공사로 종도리를 해체하였다. 이때 종도리를 받치는 통장혀 중앙부분 장방형의 홈에서 상량문을 비롯한 총 217점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이 유물들은 1937년 10월12일 대웅전을 건립하던 당시 납입되었던 것이다. 두루마리 형태의 상량문과 문서류가 길게 놓여 있었고, 상량문 왼쪽 아래에 책과 경판본이 들어 있는 2개의 노란봉투와 그 사이에 방형의 상자가 놓여 있었다. 상량문 오른쪽 아래에는 다량의 유물을 싼 붉은색 보자기 꾸러미가 발견되었다. 조계사 대웅전에서 발견된 상량유물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대웅전 상량문
보천교 십일전 옮겨 건립한 대웅전
먼저 이 유물이 발견된 조계사 대웅전에 대해 살펴보자. 조계사 대웅전 건물은 원래 전라북도 정읍에 있었던 민족종교 보천교(普天敎)의 십일전(十一殿) 건물을 이곳으로 옮겨와 세운 것이다. 민족종교였던 보천교는 일제강점기의 본소(本所)가 전라북도 정읍 대흥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1936년 보천교가 일제의 탄압을 받아 해체되면서 십일전을 포함 10여 채의 부속건물이 매물로 나와 있었다. 이에 불교계에서 1만2000원에 매입하여 현재의 조계사 대웅전으로 이건(移建)하게 된 것이다. 일제는 보천교의 흔적을 지워버리고자 하였고, 불교계에서는 한국불교와 일본불교와의 차별성을 천명하고자 우리 전통건물인 십일전을 선택하여 한국불교의 자주성을 지키고자 하였다. 전통적인 목조건축, 특히 민족운동의 상징인 보천교 십일전의 이건을 통해 자주적인 불교의 입장을 표명하고자 한 것이다.
아울러 이 건물이 은연중에 민족운동의 거점, 혹은 상징으로 활용되기를 기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계사 대웅전은 당시 많은 불교인들이 십시일반 보시하여 설립하였던 것으로, 사부대중의 바람이 무엇이었는지를 보여주었다.
보천교 건물을 조계사 대웅전으로 이건 하는 장면 사진
대웅전 상량보에서 발견된 유물
대웅전 상량보 해체 과정에서 발견된 유물은 상량문 등 217점이다. 이 유물들은 2003년 발견 직후 조계사에서 연구조사를 하였고, 현재 불교중앙박물관 수장고에 보존되어 있다.
묵서 4장은 조선불교총본산대웅전상량문(1937년, 朝鮮佛敎總本山大雄殿上樑文)을 비롯해 대웅전 불사에 동참한 장인들의 명단을 적은 총본산건설소역원(總本山建設所役員), 대웅전 불사 비용 모연에 동참한 각 본·말사의 보시 액수를 기록한 총본산건축비각사부담액(總本山建築費各寺負擔額), 당시 해당 관할 관청의 책임자와 직급 등을 기록한 관서질(官署秩)을 적은 것이다. 이 상량문은 당시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수였던 권상노(勸相老)가 썼다.
상량문에는 조계사를 총본산으로 지정한 이유와 대웅전 불사의 과정 등이 기록돼 있어 당시의 정황을 알 수 있다. “임술년 초겨울에 60만원의 거금을 추렴하여 재단을 창립했다. 7000여 명의 승려들이 합심하는데 어찌 건축물의 규모가 협애하며, 31본산이 공동의 운작인데 어떻게 통제가 미약할까”라며 “원근에서 정성을 보내오고 승속이 함께 발원했다”하여 대웅전 건축에 불교계의 역량이 총집결됐음을 적고 있다.
총본산 건설 불사에는 각 본사와 말사들의 동참으로 총 10만402원72전의 불사금이 모연됐는데 이 금액을 현재의 물가로 환산할 경우 약 100억원이 넘어설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이 불사에는 성불사를 비롯해 보현사, 유점사, 귀주사, 석왕사 등 현재 북한에 있는 사찰들도 동참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유물 가운데 하나인 ‘대한제국 황태자 가례식’ 기념장. 유물은 불교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당시 시대상 반영 역사적 유물
조계사 대웅전 상량유물에는 이런 묵서 유물을 비롯해 상량식에 동참한 불자들이 보시한 금·은제 원판, 은괘 등과 아녀자들이 썼던 장식비녀, 반지, 화형 뒤꽂이 등 당시 생활상을 보여주는 물품이 많이 있다. 대웅전이 건립될 당시 많은 사부대중의 참여로 조계사 앞마당은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었다고 한다.
간절한 소망과 진실한 마음의 원을 세워 부처님의 자비와 원력을 받고자 개개인의 소중한 물건을 대웅전에 넣어둔 사람들도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은판·뒤꽂이·귀이개 등 유물의 표면 또는 작은 종이에 본인의 이름이나 법명을 적었으며, 건강과 자손의 번창, 복 등을 기원하며 부처님과 보살에게 소원을 비는 발원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상량보에서 발견된 유물 가운데는 당시 근대의 시대상과 역사적 가치가 있는 유물들도 다수 있다. ‘대한제국 황태자 가례식’이라는 글씨가 적힌 메달 2점, 해당 관청의 책임자와 직급 등을 기록한 ‘관서질’ 등 독특한 봉안물들이 바로 그러한 사례이다. 이러한 유물들은 조선시대에 일반적으로 상량보에 넣었던 유물들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이고 있어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가례식 메달은 당시 황태자였던 영친왕의 결혼식에 참석했던 불자가 희사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조계사 대웅전에서 발견된 상량유물은 조선에서 근대로 넘어오는 과도기의 문화상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는 유물들이 대부분이어서 근대문화사와 생활사 연구에 소중한 자료들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조계사가 한국불교에서 차지했던 위치와 위상을 보여주는 동시에 당시 불교계의 단면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근대 불교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다.
현재 조계사는 도심포교의 중심 역할을 하는 ‘한국불교의 1번지’로 불리며, 사찰 문을 활짝 열고 대중들의 마음의 쉼터가 되었다. 60년 전에 사부대중이 간절히 바랐던 불교의 통합과 화합, 그리고 나라의 발전을 기도해야겠다.
[불교신문3703호/2022년2월1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