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리학의 역사
명리학의 역사는 중국의 상고대 하은주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시경 서경에서 천인상응(天人相應)의 개념으로 천도(天道)를 자연의 이치로 삼았다. 5천여년전에 복희씨가 은하수의 하도 용마의 오성을 보고, 하늘의 운행하는 천문을 건곰감리 손간진태의 팔괘의 선천수로 길흉화복의 점을 치며 역술의 효시를 열었다.
헌원 황제 때에 배달 환웅의 14대 환웅 치우 천황(BC 2706년)이 중원에 나와 전쟁을 도전하니, 황제가 치우 천황과 10차의 전투에서 9번이나 지고, 마지막 탁녹의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그러나 유혈이 백리에 뻗쳐 이것을 다스리기 어려움에 황제는 목욕재계하고 하늘에 비니 하늘이 십간, 십이지를 내리셨다. 황제는 십간을 원으로 포하여 천형을 상징하고, 십이지를 방으로 포하여 지형을 상징하고 그 빛을 합하여 직문에 명하여 이를 널리 퍼지게 하니 그 후는 잘 다스려지도다.
후일 대요씨가 나와 가로대 '아! 황제가 성인으로서도 오히려 악살들을 능히 다스리지 못하였거늘 후세에 재해를 장차 어찌하리오' 라고 탄식하여 마침내 십간, 십이지를 합하여 육십갑자를 배성하도다라고 연해자평에 기술되어 있다.
기원 전 1734년에 하늘에 목성, 화성, 토성, 금성과 수성의 오행성이 운집하여 오성취루를 이루며, 오행이 상극하는 스타(별) 모양이 생겼다.
태양계의 행성 가운데서 유일하게 서에서 동으로 역행하며 자전하는 금성의 숙살지기를 지닌 금이 지구상에 등장하며 오행상생에서 금이 목을 극하며 목극토 화극금 토극수 수극화의 상극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오행이 상극하는 낙서의 거북이 출현하며, 기원전 12세기에 주나라 문왕이 거북의 등의 구궁을 팔괘의 후천수로 64효의 역술을 체계화하여 주역으로 발전시켰다. 제자백가들이 성행하엿던 춘추전국시대(기원전 8-3세기)에 天의 개념은 점차 자연의 규칙이나 법칙으로 여기게 된다.
역학은 고대 천문 역법과 함께 성립된 점성술의 발전과 더불어 기원을 같이 한다. 하늘을 대표하여 별의 星道를 관찰하여 천문의 괘도를 연구하고 이에 상응하여 땅에 나타나 는 4계절 현상의 주체는 하늘로 여겼다.
하늘 상제는 신(神)의 개념으로 인격적 의지적인 주체로 보았다. 천인상응의 개념에 따라 음양오행의 사상도 함께 대두된다. 역학의 유래는 전국시대 음양가 귀곡자와 낙록자로부터 비롯한다는 것이 통설이다.
청대의 자평팔자수언집액(子平八字四言集腋)에는 命理學의 기원은 주나라의 낙록자(珞?子)와 귀곡자(鬼谷子)이다 라고 하는 문헌상으로 보아 귀곡자 또한 명리학의 태동에 상당한 업적을 남긴 인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漢代의 동중서(董仲舒)와 사마계주(司馬季主) 동방삭(東方朔)으로 이어지는데, 동중서의 춘추번로(春秋繁露)에 의한 陰陽五行論 체계의 완성과, 논형(論衡)을 지은 왕충(王充)의 定命사상의 정립이 명리학에 기여되었다.
隋나라 초기에 陰陽論과 五行論에 관한 기존의 학설을 집대성한 소길의 五行大義가 편찬되고 원천강(袁天網)이 사람의 生年月日時를 干支로 대체한 四柱를 통하여 사람의 명운을 논하는 이론체계를 원천강오성삼명지남(袁天網五星三命指南)에서 정립함으로써 四柱命理學이 탄생하게 되었다.
원천강의 星命學 내용체계를 보면 황도십이궁, 오성, 28수, 육요(六曜)등의 천문학 내용이 명리이론의 근저로 제시되고 있는 점은 명리학의 탄생 이전에 정확한 천문 역법 체계의 완비가 필수였음을 보여준다.
음양이란 천문현상인 계절현상으로 활동운화(活動運化)하는 기(氣)가 변화하는 삼라만상의 존재하는 우주의 근원적 리이다. 五行이란 말은 수나라 때에 소길이 처음으로 사용했는데 이는 요소 재료를 뜻하는 말로 五材 즉 五行을 이루는 木火土金水를 말한다. 사마천의 史記에 보면 추연(鄒衍)이 陰陽五行說을 처음 사용했다 기록돼 있으며, 管子의 설명을 보면 氣의 이행이나 전환을 뜻하는 계절의 순환을 말하고 있다. 五行說은 좌전(左傳)에 五行相剋이 처음으로 나오는데 이는 氣의 이행 순환을 뜻하는 상승설(相勝說)로 이긴다는 의미이다. 이긴다는 의미는 추연의 이론이기도 한데 이를 歷史의 법칙으로 삼았다. 管子에는 相生의 개념이 처음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陰陽五行의 최초로서 설명되지만 相剋說은 나타나지 않는다.
명리학의 이론적 근거는 천인상응사상, 음양오행설, 천문역법인데 천지인의 구체적인 설명을 위해서 음양오행설과 천문역법이 발전하게 되며 간지체계의 명리학이 함께 발전한다. 당나라 시대에는 干支論과 陰陽五行論이 명리학으로 결실을 보게 된 시기이다.
당대 이허중은 이허중명서 3권을 지어 명리학의 중흥을 이루는데 그는 사주상 오행의 왕상휴수와 납음오행 그리고 연간 위주의 논명 방식으로 운명을 논하였다. 당사주에서 신살을 가미한 오성술에 관한 서적 중 가장 완비된 (과노성종)이 현재까지도 전해진다. 張楠의 명리정종에 의하면 선학들은 모두 사람의 태어난 해의 납음오행과 왕상휴수를 主를 삼고 일월오성의 칠요와 四餘(신살)는 用을 삼아서 감명하였다고 주장한다.
예로부터 명리를 오성(五星), 육임(六壬), 기문(奇門), 태을(太乙), 하락(河洛), 자미두수(紫微斗數) 등에서 운명을 논하면서 납음(納音), 성신(星辰), 궁도(宮度), 괘리(卦理) 등을 거론했는데, 자평술(子平術:四柱學)은 이런 것들과는 달리 오행으로 운명을 논했다. 명리학을 역경에서 하나의 체계를 세워 세상에 공표한 것은 송나라의 서공승이다. 서공승은 서균 또는 자평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알려져 있다. 徐大升이 서자평의 학문을 계승하여 子平三命通辯淵源과 淵海子平을 지어 격국론등을 상세히 정리하였다. 서대승의 명리학은 이허중이 태어난 연월일시 전반에 걸쳐 오행의 생극제화와 왕상휴수로 인생의 화복을 결정한 방식에서 진보하여 일주를 근거로 六事(六親,十神을 말함)를 나누어 운명을 논하였으니 그 논의가 정밀하였다고 명대에 간행된 평주연해자평(唐琴池지음)에서 밝히고 있다.
明代에는 그 유명한 적천수(滴天髓)가 발간되었는데 한동안 개국공신 유기(劉基=劉伯溫)가 적천수를 저술하고 주석하였다는 것이 통설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경도(京圖,宋末~明初)가 저술하고 유기가 주석을 하였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적천수는 명리학의 철학적 입지를 심화시켰고, 徐大升이 서자평의 학문을 계승하는 명분으로 자평삼명통변연원(子平三命通辯淵源)과 연해자평을 지어 격국론 등을 상세히 정리하였다. 장남은 신봉통고명리정종(神峰通考命理正宗)을 지어 동정설(動靜說) 개두설(蓋頭說) 병약설 등의 독창적인 학설을 제시하였고, 만육오(萬育吾)는 12권의 삼명통회(三命通會)를 저술하였는데 명리이론을 다루기 전에 陰陽五行論과 干支의 원류를 논한 점은 命理學의 역사적이면서 철학적인 존재근거를 다룬 점에서 학계의 상당한 가치가 있다.
명대 말기 마테오리치(1552~1610)가 중국에 와서 서양 역법이 본격적으로 사주학에 사용되면서 중국의 역법과 명리학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였다. 청대에는 심효첨(沈孝瞻)이 陰陽五行論과 干支法則을 중심체제로 삼아 자평진전(子平眞詮)을 편찬하여 격국론을 체계화하였다.
궁통보감(窮通寶鑑)의 원명은 난강망(欄江網)인데 명대의 신원미상의 인물이 지은 책이라고 한다. 그러나 청대의 서춘대(徐春台)에 의해 지나치거나 번잡한 내용이 제거되고 책으로 간행된 바 궁통보감이라 하였다. 진소암(陳素庵)은 명리약언(命理約言)과 적천수집요(滴天髓輯要)를 간행되었고 임철초(任鐵樵)는 유기(劉基)가 주역한 적천수(滴天髓)에 대한 새로운 주석을 내어 적천수천미(滴天髓闡微)를 간행하게 되었다. 20세기에 들어와서는 궁통보감 자평진전 적천수와 같은 고전을 주석하는 작업이 활발했으니 서락오(徐樂吾)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조화원약평주(造化元?評註) 평주궁통보감 자평수언(子平粹言) 적천수징의 자평진전평주 등을 지어 명리학의 이론체계를 정리하고 심화시켰다.
원수산은 유기와 임철초의 주석을 모아 적천수천미와 명보(命譜), 명리탐원을 저술하였으며 위천리는 명학강의 팔자제요 정선명리약언 고고집(呱呱集) 등을 지었는데 특히 팔자제요는 甲日 寅月부터 癸日 丑月까지 120개의 경우의 수로 나누어 각 경우마다 日干과 月支와 시주의 배합이 어떠한가에 따라서 사주의 형국이 달라짐을 핵심적으로 설명한 사전식의 실용 명리서이다. 우리나라는 고려 시대에 당 사주가 일부 양반들과 역술가들이 점술과 같이 이용하여 왔다.
조선시대에 들어 서며 녹명서가 궁걸에서 이용되엇고,서거정이 이에 통달하였다. 조선시대에 命理學을 연구한 집단은 중인 신분의 사람들이었다. 잡과에서 합격한 중인들이 관상감에 근무하면서 국가의 대소사와 궁궐의 중요한 일에 관여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일반인을 상대로 한 운명예측은 무속적인 점술이 대부분이며, 당사주가 유행하고, 명리학은 일부 선비들과 궁궐에서만 사용되어 왔다.
성리학의 태두 퇴계 이황과 연암 박지원과 다산 정약용은 주역을 통달하였으나, 양반 체면에 사주쟁이란 소리를 듣기 싫어 점술과 명리학은 하지 않았다. 유학자 화담 서경덕, 북창, 토정 이지함과 남명 조식이 은둔하며, 명리에 통달하였다.
토정의 제자 미상이 지은 토정비결이 일반에 널리 애용되고, 남사고의 격암유록이 전해진다. 일제 강점기 후에 우리 문화를 말살하기 위한 우민화정책의 하나로 명리학이 이용되었다. 일제는 무라야마지준의 보고서 '조선의 귀신', '조선의 占과 豫言'을 통하여 각 지방마다 다양한 무속 신앙과 점술이 성행하고 있는 점을 이용하여, 과거제도가 없어져 방황하는 일부 명리학의 식자층에 무속적 점술을 부추겨 '철학관', '역술원'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했다.
해방 후에는 일반 술사들이 철학관이란 간판을 내걸고, 이미 천여년전 중국에서 그 확중률의 평가가 끝난 오성술, 당사주와 관상으로 민중을 현혹시켜 왔다. 역학을 공부하는 단계는 명리학을 수렴한 연후에 卜의 단계로 넘어가 점을 쳐야 한다는 수많은 선학들의 경험과 조언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命의 형상(形象)과 양생음사(陽生陰死)의 원리, 오행(五行)의 생극제화(生剋制和) 원리도 모르는 체 육효를 공부하고 하락이수를 접하고 주역을 공부한다는 난센스를 저지르는 우를 범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성공한 명리학 서적들을 살펴본다면 가장 먼저 도계(陶溪) 박재완(朴在琓) 선생의 명리요강(命理要綱)을 들 수 있는데 이는 중국의 위천리(韋千里)선생이 저술한 명학강의(命學講義)의 내용을 위주로하여 실전사례와 함께 편찬한 내용으로 지금으로부터 20년전 까지는 후학들이 탐독하기에 획기적인 명리학 서적으로 평가받기도 했다. 역학 서적에서 가장 많이 활용한 역학서로는 이석영(李錫暎) 선생의 사주첩경(四柱捷徑)인데 이는 일종의 임상서로서 훌륭한 업적은 쌓았다. 그러나 학문적 원리를 규명한 책은 되지 못하는 실정이다. 한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명리학 서적은 백영관(白靈觀)이라는 필명으로 사주정설(四柱精說)을 편찬한 최영철(崔英哲) 변호사인데 이 책은 일본의 아부태산(阿部泰山)이 저술한 아부태산전집의 발췌서라 말할 수 있다.
신육천(申六泉) 선생의 천고비전(千古秘典) 역시 아부태산전집의 발췌서이다. 명리학의 3대 서적은 누가 뭐라고 해도 적천수(滴天髓) 자평진전(子平眞詮) 난강망(난강망)이라 불리우는 궁통보감(窮通寶鑑)이다. 적천수의 특성은 원류(源流)와 형상(形象)은 물론 체용(體用)의 원리와 부귀빈천 등을 총 망라하였으며 성정(性情)과 질병(疾病) 출신(出身) 지위(地位)와 여명(女命) 소아(小兒) 편까지 정리하고 해설하였다. 자평진전의 특성은 격국용신(格局用神) 이론인데, 사주의 성패를 가늠하는 모든 원리를 각 십신별 육친과 음양오행의 원리를 알기 쉽도록 정리하고 예를 들어가며 설명하였다.
궁통보감의 특성은 조후와 관련한 사항이 가장 중요한데 십간론(十干論)이란 장을 별도로 마련하여 설명하여 체계적인 학습을 할 수 있도록 유도하였다.
생기론의 철학인 명리학이 역술과 점처럼 미신(迷信)으로 취급받는 것은 서구 문명과 기독교 영향도 많지만, 선 무당이 사람 잡는 식으로 돌파리 중이나 얄팍한 지식을 가진 철학관 도사들이 관상과 당 사주로 신살타령을 하며 부적이나 개명으로 닌중을 현혹하고, 푸닥거리 굿과 점술로 혹세무민한데 원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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