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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씨알 함석헌 원문보기 글쓴이: 씨알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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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문가문( ?????????) 제 3편 "김동조가"
등록 : 쩜억개 조회 : 286 점수 : 235 날짜 : 2005년9월24일 14시29분 하루가 정말 후딱 지나간다. 이 허접한 글을 쓰는 것도 시간을 꽤 잡아먹긴 하지만, 틈날 때마다 우리의 정신적 지주이자 정치적 스승인 노무현대통령, 유시민의원의 하루에도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주옥같은 말씀들을 하나하나 정리하고, 그 진의를 곰곰이 따져보고, 가끔 날파리같은 알바들하고 댓글 투쟁도 하자면 바쁘다. 또 하루도 빼놓지 않고 하는 일과 가운데 미녀사진 열람이라는 독특한 취미가 있기 때문에 이거저거 하자면 꽤 바쁘다. 그러면서도 기쁜 것은 이런 글을 보고 서프앙들이 경악을 한다는 점이다. 사실 이것들은 다 상식에 속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서프앙들도 이런 사실을 정확히는 아닐지언정 누구나 대략은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한번 서프앙들에게 경각심을 주고, 수구떼들의 만수산 드렁칡 행각에 울화가 치미게 만드는 것이 매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노무현대통령이 초선의원 시절 말씀하시길 "분노 때문에 정치를 시작했고, 지금도 식지 않아서 한다"고 하셨다. 이 말을 수구 떼들이 이상하게 비틀어 가난과 학력컴플렉스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몰아붙였지만, 나는 "잘못된 현실에 대한 냉철한 문제의식"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잘못된 현실에 대한 냉철한 문제의식이 있어야 거기서 상응하는 변혁의 에너지가 솟구쳐 나오는 거 아닌가? 이것을 마치 성격파탄자라도 되는 것처럼 몰아붙였는데, 노무현대통령의 분노의 정치는 요즘 단순히 여야가 비생산적으로 정쟁하는 식의 증오의 정치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라고 본다. 이 분노는 오히려 "사회적 울분"이라고 표현해야 옳다. 당시 시대적 상황을 봐도 울분이 없다면 오히려 이상한 노릇이다. 그렇게 "공적인 울분"으로 정치를 시작하고, 자신을 우울하게 만드는 비정상적인 정치적 상황을 변화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왔다는 거 아닌가? 뭐가 잘못됐다는 건가? 따라서 분노는 참여의 동인이고 에너지라는데 누구도 이의가 없을 것이다. 이인제의 뻘짓으로 노풍은 더욱 거세졌다. 김민새의 뻘짓으로 노풍은 되살아났다. 정몽새의 뻘짓으로 노무현은 승리했다. 뻘짓에 분노한 대중의 참여가 아니고서는 그런 기적이 일어날 수가 없었다. 분노마저 표현하지 못할 때 사람들은 냉소적으로 변모한다. 냉소주의가 팽배하여 정치가 저급화되는 원인은 분노의 계기, 분노의 출구가 없기 때문이다. 왜 이런 얘기를 하느냐?? 내가 쓰는 이 글은 지극히 상식적이고 웬만한 사람들이 다 알만한 이야기지만 그래도 다시 한번 한국의 수구떼들이 고구마 줄기처럼 얽히고 설켜서 유착, 결탁된 모습을 확인하면서 서프앙들이 분노하고, 그 분노로 인해 다시 각성하고, 그 각성으로 인해 또 다시 전투화 끈을 조이게 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런 작업도 전혀 의미가 없는 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잡소리가 너무 길었다. 본론으로 들어가자. 오늘은 한국의 명문가문 제 3편 "김동조 가문"에 대해 캐들어가보자. 김동조라는 사람은 부산 출신이다. 우리가 흔히 외교계의 거목이라고 알고 있다. 왜 거목이라고 하는지는 모르겠다. 수구언론에서 그렇게 부르니 그런 거 보다 하는 거다. 그러나 고위 외교관료직을 수행했다고해서 무조건 거목이니 뭐니 하고 불러주는 것에 대해 나는 반대한다. 그 인물이 어떤 사람이며, 무슨 일을 했으며, 살면서 무슨 덕을 쌓았는지 그게 중요한 판단기준이어야지 무조건 고위 외교관료직을 수행했다고 해서 외교계의 거목이라고 불러주면 어쩌자는 거냐? 한국외교의 산증인이라고 하면 그나마 이해하겠다. 이 사람은 기본적으로 일본 큐슈대학을 졸업하고 일본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여 일본 후생성과 내무성에서 근무하면서 일제에 충성하는 것으로서 사회에 첫발을 내딛은 사람이다. 한국전쟁에 대해 일가견이 있는 브루스 커밍스라는 유명한 학자가 쓴 "한국현대사"에 이런 대목이 있다. <한국인이 일본에 협력한 훨씬 더 대표적인 예는 김동조(金東祚)의 경우로서, 그는 동족인 한국인을 감시하는 경관으로 인생의 첫발을 내디딘 후, 결코 주저하는 법이 없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일본과 한국 사이를 빈번히 오가며 일본에 징용된 수많은 한국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저항을 일본인들에게 밀고했다. 나중에 일본인들은 그를 승진시켜 한국인들에게 식량과 다른 지급품들을 배급하는 전시 책임자로 삼았다. 1945년 이후 그는 미군정을 위해 역시 한국인들에게 식량과 물품을 배급하는 일을 했다. 이승만이 대통령이 된 후 그는 신설 외무부에 들어가서 차관으로 승진을 했다가 퇴직했다. 그는 1961년 군사 쿠테타 이후 여당과 중앙정보부에 외교고문으로 복귀했다.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협상에 기여한 후 그는 첫 주일 한국대사가 되었다. 대사로 재직하는 동안 “그는 일본 정치가들에게 뇌물을 준 매수꾼으로서 재일한국인 사이에서 악명을 떨쳤다.” 곧(1967) 그는 주미대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몇년 후 그가 미국의회 방문을 준비하면서 1백달러짜리 지폐가 가득 든 봉투들로 서류가방을 채우는 것을 본 고용인이 그 사실을 폭로하는 바람에 큰 물의를 빚었다.> 사회가 어수선한 시점에서 체계도 안 잡힌 대한민국 정부 하에서 일제 고급관료 경력으로 들어와 이곳 저곳 부처를 넘나들며 일하다가 느닷없이 외무부 정무국장이 되고 이승만정권 하에서 불과 서른 여덟살의 나이에 외무부 차관이 되었다. 정통 외교관료도 아니고, 내가 보기엔 단순히 일본사람들과 가깝다는 이유로 승승장구한 거 같다. 충격적인 것은 굴욕적인 한일회담 당시 대한민국 정부의 수석대표였고, 주일대사였다는 점이다. 미국 중앙정보부 특별보고서에 따르면 박정희가 허겁지겁 굴욕적인 한일협정을 서둘러 체결한 것은 군사쿠데타 직후부터 일본기업으로부터 6600만달러의 정치자금을 받는 등 뒷거래를 해왔기 때문인 것으로 드러났다. 이것은 민족문제연구소가 밝혀낸 것이다. 노무현대통령이 몸담고 있었던 꼬마민주당에서 96년 총선 당시 이 문제를 정치쟁점화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단순한 정치적 의혹제기로 폄하됐다. 어쨌든 그 선봉에 김동조가 있었던 것이다. 김동조가 수석대표로 나가서 체결한 한일회담의 성과라는 것은 참혹한 것이었다. 대한민국의 확인된 일제치하 징병, 징용피해자가 총 103만명이었다. 그 가운데 약 8만명이 사망자이고, 3만명이 부상자였다. 그 가운데 겨우 8천명의 사망자 유가족에게 쌀 15가마 살 정도의 돈인 30만원씩 나눠주는 정도로 끝났다. 그렇게 형편없는 보상을 해주고도 개인청구권 문제는 흐지부지 처리했다. 일본제국주의 침략의 명확한 사죄도 문서로서 전혀 받지 못했고, 독도 영유권도 확실하게 해 놓지 못했고, 피해자의 생사확인도 안 했고, 피해자 통계도 제대로 안 냈고, 사망자 유해발굴 문제도 논의하지 못했고, 위안부 및 원폭 피해자 문제는 거론조차 안했고, 징용 사할린 동포 처리문제도 꺼내지 않았다. 당시 일본의 대표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우리측의 제공은 배상과 같이 의무적으로 주는 것이 아니라 경제협력이라는 기본적 사고를 갖고 있다" 이렇게 일본 제국주의 침략에 대해 면죄부를 주는 굴욕적인 협정을 돈 몇 푼 받고 체결하는데 김동조는 앞장섰던 것이다. 과연 외교계의 거목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장희교수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한일협정은 일본의 전범세력과 한국의 친일세력이라는 부도덕한 두 세력이 역사의 지배세력으로 등장, 야합하여 만든 합작품이다. 그래서 한일협정은 몇푼의 돈에 혈안이 되어 일제식민지 과거사 인식을 전면 외면함으로써, 그에 부응한 손해배상 청구권에 대해 매우 불명확하게 규정하였다. 어쨌든 눈을 씻고 찾아봐도 한마디의 사과도 없는 그런 비정상적인 한일협정을 맺는데 앞장선 공로로 김동조는 승승장구하기 시작한다. 미국이라면 껌뻑 죽던 시기에 주미대사를 무려 6년이나 하면서 유신정권을 합리화하는 첨병이 되었다. 그리고는 외무부장관에 발탁되어 2년여간 활동하다가 그 후 박정희의 외교담당 특별보좌관직을 2년여간 수행하며 반민주적 유신체제 수호의 간성이 된다. 유신 말기 난데없이 한국석유개발공사 사장을 역임하다가 박정희정권이 붕괴하고 나서는 관직에서 물러나서 느닷없이 변호사 개업을 한다. 김동조의 약력을 아무리 뒤져봐도 그가 어떤 근거로 왜 변호사가 되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하여튼 모든 게 어수룩한 시기였다. 어쨌든 이런 대단한 이력을 가지고 김동조는 거대한 혼맥을 구성하기 시작한다. 김동조의 부인은 약사이다. 약사출신인 부인 송두만과의 사이에 2남 4녀를 두었다. 장남 김대영은 그 다지 뚜렷한 움직임이 엿보이지 않는다. 차남 김민영은 현재 외국어대 무역학과 교수이다. 김민영의 부인은 명지대 경영학과 교수인 정다미다. 장녀 김영애는 스스로 거물급 인사다. 모건스탠리 부사장이다. 오히려 김영애의 남편 최융호의 이력이 부인에 비해 밀린다. 차녀 김영숙은 초대 해군참모총장과 국방부 장관을 지낸 손원일의 장남 손명원과 결혼을 했다. 손원일의 부친이 유명한 손정도 목사다. 손명원은 현대미포 사장과 쌍용자동차 사장을 역임했다. 세째 딸 김영자는 GS그룹 허씨 집안에 시집을 갔다. 남편이 허광수 삼양인터내셔널 사장이다. 막내 딸 김영명은 우리가 몽새라고 부르는 정몽준과 결혼을 했다. 이렇게 보면 별거 아닐 거 같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이 혼맥은 사실 대단한 것이다. 차녀 김영숙과 사위 손명원 사이에 낳은 손정희가 영화배우 남궁원의 천재 아들이라는 헤럴드경제신문 사장 홍정욱과 결혼을 하였다. 김동조가 세상을 떠났을 때 헤럴드경제신문이 특히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외손녀 사위가 운영하는 회사니까 당연히 그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알기로 이 헤럴드경제신문은 노태우의 사돈인 신명수가 창업한 회사이다. 이 점은 특히 눈여겨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정말 문제는 세째 딸 김영자다. 김동조의 세째 딸 김영자와 사위 허광수 사이에서 낳은 허유정이 현재 조선일보에서 후계자 수업을 하는 조선일보 사장 방상훈의 아들 방준오다. 방준오가 김동조의 외손녀 사위가 된다는 말이다. 김동조의 세째 사위 허광수가 누구냐?? 바로 이병철과 더불어 삼성을 공동설립한 허정구의 세째 아들이다. 그 유명한 영남의 만석꾼 허만정의 손자이다. 허광수의 큰 형은 삼양통상 회장 허남각이다. 허광수의 작은 형은 GS 칼텍스 회장 허동수다. GS 칼텍스의 부회장은 김동조의 세째 딸인 김영자가 맡고 있다. 허광수의 누나는 누구냐? 바로 벽산그룹 회장 김희철의 부인 허영자다. 이 김희철의 동생이 바로 동양물산기업 대표이사 김희용이다. 김희용의 부인은 박설자다. 박설자의 아버지는 박상희다. 박상희가 누구냐? 바로 그 악명높은 박정희의 세째 형이다. 그러니까 김희용은 박정희의 조카사위가 되는 거고, 박근혜의 사촌형부가 되는 거다. 김종필과는 동서지간이 된다. 김종필의 부인 박영옥과 김희용의 부인 박설자가 자매지간이다. 둘 다 박상희의 딸들이다. 박상희의 아들로는 박준홍이 있다. 불과 서른 살의 나이에 1급 관리관인 정무조정실장이 되었다. 그리고 32살의 나이에 대한축구협회장이 되었다. 다시 김동조의 세째 사위 허광수로 돌아가자. 이 허광수라는 인물이 운영하는 삼양인터내셔널이라는 회사도 결코 만만한 회사가 아니다. 놀라운 것은 우리들이 그토록 미워하는 조선일보 류근일 주필이 바로 삼양인터내셔널의 사외이사로 참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허광수의 작은 아버지 허준구는 LG건설 명예회장이다. 또 다른 작은 아버지 허신구는 LG그룹 부회장을 역임하였다. 막내삼촌인 허승조는 GS유통 대표이사로서 태광그룹 창업주 이임룡의 장녀 이경훈과 결혼을 하였다. 그러니까 이경훈은 허광수의 작은 어머니다. 이 이경훈의 동생 이재훈이 서울시장을 지낸 양택식의 아들 양원용과 결혼을 했다. 이 양택식의 동생 양기식의 딸 양경희가 중앙일보 홍석현의 동생 홍석조와 결혼을 했다. 조중동은 한 집안이라는 것은 바로 여기서 나온 얘기다. 허광수를 중심으로 본다면 허광수의 딸 허유정이 조선일보 사장 방상훈의 장남 방준오와 결혼을 하고, 허광수의 작은 어머니 이경훈의 동생 이재훈의 시아버지 양택식의 조카딸 양경희가 중앙일보 회장 홍석현의 동생 홍석조와 결혼을 하고, 허광수의 작은 어머니 이경훈의 동생 이재훈의 시아버지 양택식의 조카딸 양경희의 조카딸 이서현이 동아일보 회장 김병관의 아들 김재열과 결혼을 한 것이다. 이것은 물론 다른 방향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고, 삼양인터내셔널 허광수를 중심으로 볼 때 이렇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김동조의 후손들이 얼마나 막강한가? 지금 김동조의 막내 사위 정몽준과 부인인 막내딸 김영명의 인맥을 더한다면 이것은 거의 대한민국을 좌지우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대한민국의 모든 사람들이 사돈에 사돈에 사돈에 사돈을 연결하면 대통령까지 다 연결할 수 있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엔 다 헛소리다. 그것은 한국의 폐쇄적인 그랜드 서클을 무시하는 발상이다. 설령 가물에 콩 나듯이 어쩌다가 개천에 용나는 식으로 폐쇄적인 그랜드 서클에 누군가가 진입했다 하더라도 그 것은 단지 그 사람 하나가 들어간 것에 불과할 뿐이지 확고하게 입성했다고 말할 수도 없고, 그런 증거도 없다. 예를 들면 일반적으로 시골에서 농사 짓는 집안의 딸은 뒷집으로 시집간다. 그 뒷집 딸은 그 앞집으로 시집간다. 그 앞집 딸은 또 그 옆집으로 시집간다. 이래 가지고 어느 천년에 이건희회장 집안에 도달하느냔 말이다. 사돈은 농민, 그 건너사돈도 농민, 그 건너사돈도 농민... 도시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돈의, 그 사돈의, 그 건너사돈을 다 뒤져봐도 실상 다 똑같은 서민들이고, 먹고 살기 힘든 사람들이다. 주위에 눈을 씻고 찾아봐도 그런 사례를 찾을 수가 없다. 한국 그랜드 서클의 폐쇄성과 고립성과 배타성과 경직성을 민주개혁세력은 주목해야 한다. 한국 수구 겹사돈 모임을 무시하면 안된다. 한국의 기득권은 바로 이런 강고한 카르텔 속에서 나오는 것이다. 한국 사회의 개혁이 지지부진한 이유가 바로 이러한 개혁을 원하지 않는 강력한 기득권 세력들이 혼맥을 통해서 거대한 망을 형성하고 저항하기 때문이라는 것은 거의 상식이다. 정몽준이 2002년 12월 18일 밤 10시에 잘 나가다가 느닷없이 노무현후보를 왜 버렸겠나? 혹시 노무현후보에게 적대적인 조선일보의 후계자 조카사위 방준오의 얼굴이 아른거리지 않았을까? 이것은 인지상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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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복잡하다...누구 좀 가계도를 그려줘보세요..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