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액 중의 호산구(가운데), 주변은 적혈구이다. 호산구가 정상보다 늘어나면 호산구증다증이라고 하며, 주요 원인은 기생충과 알레르기이다.<출처 : (cc) Bobjgalindo at Wikimedia.org >
사람의 혈액에는 적혈구, 백혈구, 혈소판이 있다. 적혈구는 산소를 운반하고 혈소판은 혈액을 응고시킨다. 그렇다면 백혈구는? 세균이나 바이러스와 싸우는, 소위 면역기능을 수행한다. 여기까지만 해도 충분히 머리가 복잡한데, 그 백혈구를 또 다섯 개로 분류한 사람이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이 글을 읽기 위해 그 다섯 개를 모두 알 필요는 없다. 딱 한 개만 알면 되는데, 그게 바로 호산구다. 에오신(eosin)이란 산성 색소에 잘 염색되어 호산구라고 부르며, 개수도 적어 정상인에선 전체 백혈구 중 2% 미만이다. 이 호산구의 기능은 크게 두 가지인데, 첫 번째로 기생충과의 싸움을 담당하고, 둘째로 다른 세포들과 함께 천식과 같은 알레르기 질환의 매개체로 증상을 일으키는 데 한 역할을 한다. 원래는 2% 미만이어야 할 호산구가 5% (또는 500/mm3) 이상으로 증가하는 현상을 호산구증다증(eosinophilia)이라고 부르는데, 다른 경우에도 호산구가 증가할 수 있지만, 임상 의사들은 호산구증다증이 발견되면 환자가 기생충에 걸렸거나 알레르기 질환이 아닌지를 먼저 의심한다.
호산구(eosinophil)증다증?
대부분의 경우 호산구증다증은 별 증상이 없어, 우연히 혈액검사를 했다가 발견되는 일이 많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이 호산구증다증 환자가 꽤 많은 편이다. 캐나다의 한 병원에서 혈액검사를 한 20만명의 환자들 중 호산구증다증이 얼마나 되는지 관찰한 적이 있는데, 혈액에 호산구가 많은 사람의 비율은 대략 전체의 0.1% 정도였다. 병원에 오는 천 명 중 한명이 호산구증다증이란 얘기, 하지만 우리나라는 얘기가 좀 다르다. 2011년 자료에선 4% 정도였지만, 그보다 더 대규모로 시행한 연구에선 혈액검사를 한 사람 중 무려 12.2%가 호산구증다증으로 밝혀졌다. 호산구가 많아도 대개는 증상이 없지만, 너무 높아지면 끈적끈적해진 혈액 때문에 뇌혈관이 순간적으로 막혀 의식소실이나 마비 등이 올 수가 있으니 결코 바람직한 건 아니다. 대체 무엇 때문에 우리나라는 호산구가 많은 사람이 이리도 흔한지 그 원인을 알아내야 하는 건 그런 이유다. 이미 박멸된 기생충 때문에 이럴 리는 없으니 알레르기의 만연이 이유인 듯했지만, 실상은 달랐다. 호산구증다증 환자의 상당수가 개회충에 감염되어 있었던 것.
개회충의 알 (400배 확대) <출처 : (cc) Joel Mills at Wikimedia.org >
개의 회충, 개회충 (Toxocara canis)
개회충은 말 그대로 개의 회충이다. 사람에게 사람회충이, 고양이에게 고양이회충이 있는 것처럼, 개회충은 개만을 종숙주로 하는 기생충이다. 생활사는 사람회충과 비슷해, 개의 창자에 있는 개회충이 알을 낳으면 그 알은 개가 대변을 볼 때 밖으로 배출되며, 흙속에서 3-4주 가량 숙성된 알을 다른 개가 먹으면 그 개에서 어른으로 자란다. 희한한 건 이런 과정이 생후 3개월 미만의 어린 개에서만 가능하다는 점. 나이든 개가 개회충의 알을 먹는 경우엔 개회충이 간이나 폐, 심장 등 여러 장기로 가서 사는데, 어른으로 자라지 못한 채 유충 상태에 머물러 있다. 문헌에는 "대부분 별 증상은 없다"고 기술되어 있지만, 어쩌면 그건 개들이 말을 안해서 그렇게 착각한 것일 수 있다. 개들은 대개 인내심이 뛰어나 웬만큼 아파도 말을 잘 안하지 않는가? 그러니 개가 산책 중 땅에 떨어진 것들을 주워먹을 때는 말리는 게 좋겠다.
개회충의 생활사. 개회충은 3개월 미만의 어린 강아지에게서만 성충으로 자란다. 나이든 개나 사람이 걸린 경우 유충 상태로 머무르게 된다.
신토불이라고 뭐든지 자기에게 주어진 걸 먹어야겠지만, 사람이 개회충의 알을 먹으면 어떻게 될까? 그 경우 나이든 개에서 그랬던 것처럼 장에서 알이 부화된 후 유충 상태로 여기저기를 침범한다.그렇다고 지레 겁먹지 말자. 대부분의 경우, 이건 사람의 경우니까 사실로 믿어도 되는데, 호산구가 높아지는 걸 제외하면 증상이 없으니까 말이다. 개회충 유충의 크기가 불과 몇 밀리미터이니, 간이나 폐 같은 곳에 한두 마리 가있다고 해서 큰일날 건 없다. 문제는 다음과 같은 일이 벌어질 때. 첫째, 마리수가 많은 경우.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개회충알을 만성적으로 먹는 환경이라면 증상이 생기기 마련이다. 어떤 장기가 침범됐느냐에 따라 다른데, 폐라면 기침이 나고 가슴이 답답해질 테고, 간이라면 쉽게 피곤해지고 입맛이 없어지며 열이 나는 등의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 두 번째, 치명적인 장기로 갔을 때다. 개회충이 우리나라에서 요주의 기생충이 된 건 눈을 침범해 망막박리를 일으키는 사례가 여럿 보고되고 난 후였는데, 유충 한 마리만 눈에 가더라도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다. 극히 드물긴 하지만 염증이 심해져 실명에 이른 사례도 외국에서 보고된 바 있으니, 개회충을 결코 만만히 볼 것만은 아니다. 이것 말고도 척수로 가서 신경을 마비시킨 사례도 있고, 뇌를 침범해 간질발작을 일으킨 일도 있다. 듣기만 해도 무시무시하지만, 기생충답게 약에는 잘 들어 회충약을 5일간 먹으면 금방 좋아진다.
개회충 유충이 눈을 침범한 외국 사례(8세 소년)
개회충의 성충. 강아지에서 잡아낸 것.
개회충의 감염경로
사람이 개회충에 걸리는 가장 흔한 경로는 잘 숙성된 개회충알을 먹는 거다. 개회충알이 3-4주 가량 숙성되어야 감염력을 가진다는 점을 고려하면, 개를 산책시킬 때 주인이 변만 잘 치워주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지만 개의 변을 치우지 않는 사람이 제법 있고, 매년 수천 마리씩 개들이 버려지고 있는 탓에 수많은 개회충알이 길거리에 뿌려진다. 조사된 바에 따르면 개회충 한 마리를 가진 개는 대변 1그램에 개회충알 십만 개 이상을 내보낸단다. 그 결과 놀이터나 운동장 등엔 개회충알이 생각보다 많다. 경기도 지역 놀이터는 17%, 서울시 놀이터는 7.3% 등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아이들이 흙장난을 하다가 개회충의 알을 먹는 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물론 요즘엔 아이들이 학원이다, 컴퓨터 게임이다 해서 너무 바쁜 관계로 우리나라 아이들은 개회충에 잘 걸리지 않는 듯하고, 오히려 어른들 중에 개회충에 걸린 사람이 더 많다. 위에서 말한 호산구가 높았던 분들도 대개 어른이었다.
그렇다면 어른은 왜 개회충에 걸리는 걸까? 설마 어른들도 흙장난을 하는 걸까? 물론 땅 파는 걸 좋아하는 어른이 우리나라에 많은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어른들은 뭘 먹기 전에 손을 씻으니 그럴 확률은 낮다. 정답은 '간 때문이야'다. 소간을 날로 먹을 때 개회충의 유충도 같이 섭취된다는 얘기다. 소가 풀을 뜯거나 사료를 먹을 때 거기 들어 있던 개회충알이 소한테 가고, 소 안에서 부화된 유충이 간으로 가 발육하지 않은 채 들어가 있으니 말이다. 개회충으로 진단된 사람들을 추적 조사해보니 90% 정도가 소간을 날로 먹은 적이 있었고, 우리나라나 베트남, 중국처럼 소간을 주로 먹는 나라들에서 개회충에 걸리는 어른들이 많았던 것도 다 그런 이유였다. 땅바닥에 있는 먹이를 주워먹는 닭이나 오리도 개회충 감염에 일조를 하는데, 일본에선 71세 아버지와 45세된 아들이 닭간을 먹고 같이 개회충에 걸린 경우가 보고된 바 있다.
혹시 개를 쓰다듬다 개회충에 걸릴 수도 있을까? 여기에 의문을 품은 학자가 개털을 조사한 적이 있는데, 털에 개회충알이 있는 경우도 그리 많지 않은데다 그 알들이 전혀 숙성이 안돼 감염력이 없었단다. 그러니 개회충 때문에 개 쓰다듬는 걸 피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놀이터의 흙에는 개회충 알이 있을 수 있다. 아이들이 흙 장난을 한 뒤에는 반드시 손을 씻도록 해야 한다.<출처 : Gettyimage>
개회충 알은 감염력을 가지려면 숙성이 필요해, 개를 쓰다듬는 정도로는 개회충에 걸리지는 않는다.<출처 : Gettyimage>
포기한 질환
한 병원에서 폐에 조그만 결절이 있는 환자들로부터 혈액을 뽑아 개회충에 대한 항체가 있는지 여부를 조사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66.7%가 개회충에 양성이었던 것. 그들 대부분이 소간을 날로 먹은 적이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니까 폐나 간에 원인 불명의 결절이 있고 호산구까지 높다면 한번쯤 개회충을 의심해 봐야 한다. 우리나라에선 예부터 눈이 침침할 때 소간을 먹었고, 빈혈에도 소간이 효과가 있다고 믿어왔으니, 개회충은 생각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게 퍼져 있을 것 같다. 뭐든지 알면 쉽다고, 혹시 개회충이 아닐까 의심을 하면 진단이 쉽지만, 그렇지 않다면 진단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수가 있다. 다행히 개회충의 대부분은 증상이 있더라도 저절로 낫기 마련이라, "어? 이 환자는 왜 간에 뭔가가 있지? 호산구는 또 왜 이렇게 높아?"라며 머리를 싸매다 보면 환자가 벌떡 일어나 집에 가겠다고 할 수도 있다.하지만 눈에 들어간 개회충은 오랜 기간에 걸쳐 염증을 일으킬 수 있으니, 제대로 된 진단과 치료가 중요하다. 회충약만 제대로 먹으면 나을 텐데 암으로 오인되어 항암치료를 하는 일도 있었다고 하니, 개회충에 대해 경각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삼성서울병원 영상의학과 임재훈 교수는 "원인은 잘 모르겠지만 호산구가 높다면 우리나라에서는 한번쯤 개회충을 의심해야 하"지만, 임상의들이 개회충에 대해 별반 관심이 없다고 개탄한 바 있다. 임교수가 올해 쓴 개회충 논문의 제목을 '포기한 질환(A disease abandoned)'이라 한 것도 그런 이유다.
알 속에서 깨어 나오는 개회충의 유충
생간을 꼭 먹어야 된다면 피검사를
이쯤되면 우리나라 소간이 얼마나 개회충에 감염되어 있는지 궁금할 만하다. 소간을 먹지 말자고 캠페인을 벌이려해도 자료가 있어야 하니까. 놀랍게도 그런 자료는 거의 없다시피하다. 1976년 딱 한번 조사가 이루어진 바 있는데, 소회충의 유충(Toxocara vitulorum)은 일부 찾았으나 개회충의 유충은 찾지 못했다. 소간이 5킬로가 넘는데 100g씩만 떼서 조사했으니 연구 방법에도 한계가 있었다. 그 뒤 50년이 다 되도록 소간 조사를 한 사람이 없어 2012년 여름 도축장을 뒤져 봤지만, 소간 37개에서 유충을 발견하지 못한 채 아쉽게 조사를 마무리했다. 이번 조사 역시 전체 소간을 대상으로 한 게 아니라 500g씩 떼서 본 거라 정확한 결과는 아닐 듯하다. 소간의 개회충 감염률은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지만, 한 가지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소간을 자주 날로 먹으면 개회충에 걸릴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 정 소간을 먹어야겠다면, 살짝이라도 데쳐 먹는 지혜가 필요할 듯하다. 그것도 싫고 꼭 생간을 먹어야겠다면, 건강검진할 때 피검사를 꼭 챙겨서 호산구증다증이 생겼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그나마 약이라도 잘 들어서 다행인 개회충이니까.
참고문헌
1) 이근태, 민홍기, 정평림, 장재경. 생간 섭취의 장기유충미입증 유발 가능성에 관한 연구. 기생충학잡지 1976; 14: 51-60.
2) Jae Hoon Lim. Foodborne Eosinophilia due to Visceral Larva Migrans: A Disease Abandoned. J Korean Med Sci 2012; 27: 1-2.
3) YOSHITAKA MORIMATSU,* NOBUAKI AKAO, HIROYA AKIYOSHI, TAKETOSHI KAWAZU, YOSHINOBU OKABE, AND HISAMICHI AIZAWA. Case reports: a familial case of visceral larva migrans after ingestion of raw chicken livers: appearance of specific antibody in bronchoalveolar lavage fluid of the patients. Am. J. Trop. Med. Hyg., 2006; 75: 303–-306.
4) Young-Soon Yoon, Chang-Hoon Lee, Young-Ae Kang, Sung-Youn Kwon, Ho Il Yoon, Jae-Ho Lee, Choon-Taek Lee. Impact of Toxocariasis in Patients with Unexplained Patchy Pulmonary Infiltrate in Korea. J Korean Med Sci 2009; 24: 40-5
5)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5480628
6) http://en.wikipedia.org/wiki/Toxocara_canis
- 글
- 서민 / 단국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 호칭·직책
-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동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단국대학교 의과대학 교수이다. 저서로 [헬리코박터를 위한 변명], [대통령과 기생충] 등이 있다.
출처:네이버캐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