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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 그립습니다. (壽의福=百世100-1白壽100) 어머니! 사랑합니다. 들으시기에 좀 어색하시지요? 저도 좀 쑥스럽네요. 앞으로 사랑합니다. 라고 자주 불러 보렵니다. 어머님도 사랑하는 아들아 하고 자주 불러주세요. 2009년11월 24일은 하나님께서 어머님을 부르셔서 제 곁을 떠나가신지 100일이 되었네요. 그동안 우리의 주님과 함께 참 좋은 낙원 하늘의 삶을 누리심을 믿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아들은 60이 다되어 고아가 되었지만 언제 어디서나 그리운 어머님을 생각만 해도 선히 보이시고, 공간을 초월해 만날 수 있어서 위로를 받습니다. 어머님은 부족함이 많은 아들에게도 기회를 주셔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시기 한주 전 어머님을 대면 할 수 있는 기회 만들어 주심을 감사합니다. 평화를만드는교회 여름수련회 장소가 인천에서 가평으로 바뀌게 되면서... 어머님께서 수련회 장소를 정해 주신 것 같아 고마웠습니다. 수련회 참가하는 길에 찾아뵙고, 첫 날 수련회 일정을 다 마치고, 한 밤중 이희선권사(조카)와 함께 찾아뵈면서 취침시간이라서 어머님의 신음소리 들어가며, 손을 붙잡고 하루 밤을 보내면서 위로를 드리기보다는 위로를 받았습니다. 이른 아침 다시 수련회에 참여 하여 모든 일정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오후 2시경) 들려서 어머님 용안(容顔)과 손발을 깨끗이 씻어드리고 어머님의 손을 꼭 붙잡고 어머님 사랑해요. 사랑합니다. 그동안 못해본 소리를 의도적으로 하면서...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인도하시니 내주 안에 있는 긍휼 어찌 의심하리요.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 어머님이 평소에 좋아하시던 찬송가를 중심으로 한 시간여 동안 찬송을 부르면서 어머님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 임종을 준비나 하듯이 숙연한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모처럼 모자간 긴 시간을 보냈습니다. 밤 11시가 되었다. 이제 헤어져야 할 아쉬운 시간, 어머님 8월15일 토요일에 다시 오겠습니다. 인사를 드리고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한주간도 잠깐 금새 광복절 날 아침이 되어 고향으로 출발 준비하는데 아내(강정숙권사)가 내일 주일예배 드린 후에 함께 가자고해서 동의하고 16일 주일 오후예배까지 드리게 되었는데, 설교가 끝나고 광고 시간에 어머님이 소천(8월16일 오후2시50분)하셨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예배가 끝나자마자 달려가려고 하였는데 순간 허전함과 후회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 되어버렸습니다. 아버님이 소천하실때도 7월21밤을 아버님 곁에서 함께 지내고, 아침 출근하면서 저녁에 다시 오겠습니다. 인사를 드리고 서울에 와서 22일 오전 여름성경학교 예배시간 설교를 마치고나서 아버님이 소천 하셨다는 연락을 받았었다. 결국 나는 부모님의 임종을 지켜드리지 못한 아들 불효자가 되었습니다. 부모님께 용서를 구하면서 변명을 해본다면 개인적인 일, 또는 여가를 즐기다가 임종을 못 지켜드린 것이 아니라. 주일을 성수하다가, 여름성경학교 교사의 사명을 감당하는 시간에 하나님께서 부르셨으니 하늘의 길을 잘 인도해 주셨으리라 믿고, 위안을 삼아 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서 위안을 삼아도 되는지요......? 부모님께서는 신앙생활 하시기 전에도 나눔의 생활에 힘쓰시고 동기간에 어려운 살림을 보살피시면서도 살림을 늘려 가시는 중, 1965년경에 아버님께서 새로운 집을 건축할 계획을 세우시고, 기둥/석가래/대들보감 등 직접 좋은 나무를 베어 준비하시면서, 대가족(16명)이 안식할 주택을 건축하셨습니다. 지붕에는 초가를 대신 기와를 올려 기와집 할아버지/할머니로 불리 우기도 하셨습니다. 어머님은 예수님을 영접하신 이후 많은 핍박을 받으셨는데, 특별히 기도하는 은사(방언)를 받으셔서 기도하시는 일을 열심히 하셨습니다. 1972년(당시62세) 어린 자손들을 돌보시려고 상경하셔서, 아들이 섬기고 있는 형제교회를 함께 섬기시게 되시면서 김홍기목사님과 함귀남/문영운/이수자권사님등. 그리고 청년들과 함께 기도하는 일, 전도하는 일에 함께 하셨습니다. 교회생활을 즐거워하시고, 예배당 건축 후 교회 부채를 감당하는 방법으로 주택을 전세로 놓고 교회건물 2층에서 생활도하셨습니다. 99년의 세월 중 25년은 서울에서 막내 아들과 10여명의 손자손녀들을 돌보시면서 71명의 후손들과 일가친척 그리고 섬기시는 교회를 위해 눈물로, 때로는 통곡에 가까운 소리를 내시며 가슴을 치시며 기도하시던 어머님의 모습이 떠 오르네요. 1970년대 중반부터 형제교회에서 어머님과 신앙생활을 함께 하셨던 김춘섭목사님께서 본 교회 담임목회자가 되시고, 또한 공동목회를 하시게 되신 괌 아름다운연합교회(노진의목사님) 최동묵목사님이 강하님 학생과 함께 가평으로 여름수련회장소 답사를 가신다시기에 바쁘시겠지만 어머님을 심방하셔서 기도해주세요. 다음에는 기회가 없으실 것 같아서 부탁을 드렸습니다. 수련회 기간에 들렸을 때 심방해 주신 상황을 들었습니다. 어머님은 물론 형님 내외분께서 많은 위로를 받으시고 참으로 고마워하셨답니다. 낮선 사람이 오면 동네가 떠나가란 듯이 짖어대던 개들도 이상하리만큼 조용히 있었답니다. 괌으로부터 출현하신 성자들께서 심방하시는 길에 특별하신 은혜를 베푸셨나봅니다. 소천하시기 2시간 전에 둘째며느님과 이웃 어르신의 따뜻한 대접도 잘 받으시고, 장남이신 이순경장로님 내외분이 기도하시고 찬송을 부르시는 도중에 곧 임종하실 것 같아 조인연목사님(상천교회담임)를 초청 하셔서 임종예배까지 엄숙하게 잘 드리셨답니다. 이 세상을 떠나가시는 길 주무시듯이 평안하신 모습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으니 참 복이 많으신 분이시죠.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하신 말씀이 사랑하는 어머님께 이루어짐을 보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죽음 이후에는 정든 육신의 장막을 떠나 청평 연새장레식장으로 옮기셔서 손수 준비해 두신 수의로 곱게 단장하시고 입관되신 후 자손들과 함께 수많은 조문객들의 문상을 받으시고, 발인 예배를 마친 후 섬기시던 상천감리교회를 들리셔서 잠시 기도회를 가지고 장지에 도착 아버님 곁에 나란히 누우셨습니다. 요즘 장례문화는 포크레인으로 묘지도 파고 회도 다지고, 다 할 수도 있었는데도...(일부눈 포크레인으로 함) 이웃 어르신들이 자원하셔서 직접 회를 다져주시니 참으로 감사했습니다. 특별히 감사 한 것은 하관예배를 집례하신 조인연목사님께서 동민들과 함께 어울려서 회 다지는 선소리 장단에 맞추어 회를 함께 다져 주시니 감동 더불어 이웃 어르신들도 즐거워 하면서 협력하시는 모습이 아름다웠습니다. 가끔씩 어르신들이 장난도 치시면서 즐겁게 일하시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고향에 대한 고마움과 그리움 가운데 어머님을 모시면서 어린 시절 추억들을 되돌아보는 소중한 시간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장례식 날에는 삼복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는 때 이지만, 모든 일정과 일기까지도 하나님께서 주관해 주셨음을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관 예배 전부터 시작해서 5회 회를 다지며 힘든 일을 하시는 동안 구름기둥으로 인도해 주시고, 잔디로 곱게 단장이되자 단비를 살짝 내려 주셨으니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어르신들도 복이 많은분 이시라며 덕담을 나누면서 마무리까지 잘해 주셨습니다. 임종예배/입관예배/위로예배/발인예배/하관예배를 비롯해서 장례식 모든 절차를 마치는 시간까지 함께해 주신 목사님들과 성도들, 이웃어르신들 그리고 일가친척 함께 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아버님! 어머님! 자녀들 부활신앙으로 당당하게 살아가도록 기도해 주세요.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일터에서 막내아들 순훈
너희 부모를 공경하여라. 그래야 너희는 주 너희 하나님이 너희에게 준 땅에서 오래도록 살 것이다 (출20:12) 자녀 된 여러분, 주 안에서 여러분의 부모에게 순종 하십시오, 이것이 옳은 일입니다. (엡 6: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