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군사적인 측면에 관한 걸 논외한다면 위화도 회군은 극히 국내 정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동정벌에 대해 이성계의 사대 불가론은 곧 명에 대한 적대정책 불가를 의미하는 겁니다. 그러나, 당시로서 명의 요구는 단순한 책봉국에 대한 요구를 지나쳤습니다. 철령위를 설치하겠다는 건 바로 고려가 애써 북벌로서 얻은 영토를 빼앗겠다는 것이거든요. 그동안 말로야 얼마든지 고려는 명을 대국으로 섬길수는 있으나, 이런 영토 할양요구는 명백한 고려에 대한 주권침해거든요. 또 고려는 공민왕대부터 수차례 북벌을 감행한 바 있습니다. 군사적으로도 절대적인 능력부족이라고만은 볼 수 없거든요.
그러나 요동정벌이 결정된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아무래도 이성계 세력의 악화에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게 만듭니다. 당시 이성계는 최영과 연합하여 이인임 정권을 막 파멸시킨 상태였습니다. 강권으로 명에 대한 사대를 결정한 이인임 정권의 몰락은 자동적으로 고려의 대외정책을 변경시킬 수 있는 동기가 됩니다. 그러나, 이성계장군은 최영장군과 정치적으로 성향이 많이 달랐죠. 고려 구귀족 세력쪽에 가까운 최영과는 달리 이성계장군에게는 당시 신진 계층인 지방 향촌의 사대부계층들이 따라붙고 있었습니다. 결국은 언젠가는 두 사람은 정치적으로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겁니다.
만약 요동정벌이 실패로 돌아간다 해도 최영장군에게는 크게 해로울 건 없습니다. 원정의 실패는 곧 이성계장군의 동북군단의 몰락을 의미하니까요. 이성계의 동북군단이야말로 고려 국내에서 가장 최강의 기병대였던 걸로 압니다. 이런 강대한 병력을 가진 장군 하나가 몰락한다는 것은 곧 최영장군의 집권을 방해할 무장이 하나도 없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원정의 실패는 곧 명의 반격을 초래할 위험성은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고려 조정에서는 북원과의 연계를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겁니다.
요동정벌이 성공리에 일정한 성과를 거둘시 최영장군은 고려 조정에서 그에 버금갈 수 있는 전공을 세운 대신으로 추앙받을 수 있을 겁니다. 비록 일선에서 이성계의 기병대가 피땀흘려가며 전투를 벌이겠지만, 총사령관은 엄연히 최영장군이니까요.
어쨌거나, 이성계장군은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려 칼 끝을 개경으로 들이댔습니다. 고려 정예병력을 모두 모은 병력이 바로 이성계 장군의 병력인데, 이런 병력을 누가 대적하겠습니까? 최영장군의 패배는 이로서 이미 예정된 겁니다.
이성계장군이 회군하여 고려의 실권을 장악하게 되자, 더 이상 명에 대한 적대정책은 포기되었습니다. 뭐 그렇다고 나라를 들어 명나라에 바친 것은 아니지만, 고려조 내내 추구되었떤 북벌정책은 포기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만주지방에 있는 여진족에 대해 조선은 더 이상 지배력을 확대할 수 없게 됩니다. 국호도 명나라에게 정해달라고 부탁했던 조선왕조는 왕의 등극조차도 명나라의 책봉을 통해서야 비로소 정통성을 부여받도록 하는 관례를 세우게 됩니다. 하긴 그렇지 않는다면 한낱 반역자에 불과한 이성계장군이 어디서 그 정권의 정통성을 획득할 수 있겠습니까?
이로서 조선왕조 500년 내내 중국으로부터 책봉받는 실질적인 번속국의 지위를 자처한 왕조 하나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체제로 말미암아 조선왕조가 실질적으로는 그 자주권을 상실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북벌 드라이브를 포기함으로서 국가의 성장은 정지되고 활력은 사라지게 되었죠. 지배계급 자체의 성향도 많이 달라져서 조선의 지배계급은 유학을 근간으로 하는 교양을 바탕으로 마치 중국 천자가 마치 조선의 임금인양 착각하고 중국을 섬기는 모화사상으로 찌들게 되었죠. 상공업세력과 무장세력은 철저하게 억압되고 오로지 농업 자급경제와 문관 우월주의 체제만이 고수되게 됩니다.
첫댓글위화도 회군은 지극히 정치적인 결정이었으며 이성계 일파의 권력욕에서 비롯되었다고 봅니다. 당시에 요동 정벌을 감행했더라면 일정한 성과를 거둘 가능성이 높았다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원과의 연합 공격이라면요. 위화도 회군의 결과는 아무튼 우리 역사에서 가장 폐쇄적이고 사대적인 국가의 탄생을 가져왔습니다.
위화도 회군은 고려의 국시였던 고구려 계승의식의 포기와 더불어 고려체제에 대한 반발의식에서 나온 것을 생각됩니다. 당연히 정치적인 결정이었음은 분명한 사실이고 이러한 것은 정도전의 역할이나 이성계의 행보, 그리고 이후 조선의 건국과 그 기본사상의 측면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이죠
첫댓글 위화도 회군은 지극히 정치적인 결정이었으며 이성계 일파의 권력욕에서 비롯되었다고 봅니다. 당시에 요동 정벌을 감행했더라면 일정한 성과를 거둘 가능성이 높았다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원과의 연합 공격이라면요. 위화도 회군의 결과는 아무튼 우리 역사에서 가장 폐쇄적이고 사대적인 국가의 탄생을 가져왔습니다.
글쎄요 저는 반대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요동정벌은 나중에 명의 반격을 불러올공산이 거의 확실시되며 우선 국내문제의 정리가 우선이라고 보아야 할것입니다.. 설령 요동정벌에 당장 성공을 했다고 한들 그 땅을 제대로 관리할만한 국력의 결집이 가능했을까요
위화도 회군은 고려의 국시였던 고구려 계승의식의 포기와 더불어 고려체제에 대한 반발의식에서 나온 것을 생각됩니다. 당연히 정치적인 결정이었음은 분명한 사실이고 이러한 것은 정도전의 역할이나 이성계의 행보, 그리고 이후 조선의 건국과 그 기본사상의 측면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이죠
물론 정도전같은 경우에는 그당시의 국내외여건을 감안하여 내치이후 확장을 생각했지만 아쉽게도 조선계 내부에서는 명과의 대립보다는 타협을 택하게 되었고 이런 역사를 감안할때 이당시의 회군결정은 역사적 측면에서 매우 안타까운 상황이 도래하게 된 거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