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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아이티엠산악회 원문보기 글쓴이: 상선약수(지운흥)
두바이+유럽(5개국)+발칸(3개국) 여행기 5 ☆
8일 2019. 08. 21 (수) 자그레브-헝가리 부다페스트
◆ 헝가리 Hungary
수도 : 부다페스트 / 언어 : 헝가리어 / 시차 : 한국과 -7시간 차
면적 : 약 9만 3천㎢, 한반도의 0.421배
인구 : 약 968만 명, 세계 92위
GDP : 약 1,687억 7천만 달러, 세계 55위
통화 : 헝가리 포린트 1 HUF=4.18원 (2019.08.09 20:07)
중부 유럽의 내륙 국가. 수도는 부다페스트이며 국민의 대다수가 마자르족이다.
1인당 국민총생산(GNP)이 서유럽의 국가들보다 현저히 낮지만 동유럽의 국가들 가운데서는 상당히 앞선 편에 속하며, 16세까지의 무상 의무교육을 실시한다.
의학 수준이 높다.
헝가리는 기원전 1세기 이후 로마 제국의 속주 판노니아가 자리 잡고 있던 이 땅에 훈족이 침입한 것은 4세기의 일이다.
헝가리의 어원이 되기도 한 훈족(흉노족, 몽골 반점이 특징인 아시아계 유목민으로 기마 민족을 통칭)은 활과 말을 이용한 강력한 전투력을 바탕으로 유럽에 진격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유럽에 정착해 있던 슬라브족, 동고트족 등을 정복하고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촉발했다.
훈족이 다양한 민족과 접촉하면서 유럽에 흡수된 후에는 마자르인이 895년 헝가리 평원에 정착하였으며 강력한 전투력을 바탕으로 유럽 전역에서 약탈을 자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독일 왕 오토 1세에게 크게 패한 뒤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이고 헝가리 왕국을 건국했다.
1241년 몽골의 우구데이 칸이 헝가리를 점령하여 수많은 주민들이 학살당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지만 헝가리 왕국은 계속 이어져 르네상스 시대에 번영을 누리게 된다.
16세기에는 오스만 제국의 침입과 함께 합스부르크 왕가가 지배하였으며
17세기 말에는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가 헝가리 전체를 통치하게 되었다.
헝가리는 1867년 오스트리아와의 협정을 통해 오스트리아 - 헝가리 제국의 자치 왕국으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오스트리아 - 헝가리 제국이 해체되면서 영토의 72%, 인구의 64%를 상실했다.
1980년대 후반 동유럽의 민주화와 함께 헝가리도 사회주의 정부가 해체되고,
1989년 10월 23일 다당제와 대통령제를 기반으로 하는 민주주의 공화국을 수립했다.
이후 헝가리는 서유럽 국가와의 관계를 긴밀히 하고 OECD 및 북대서양 조약 기구, 유럽 연합 등에 순차적으로 가입하였다.
부다페스트 어부의 요새에서....
■ 어부의 요새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있는 요새.
1899년에서 1905년 사이에 지어졌으며, 시민군이 왕궁을 지키고 있을 때 강을 건너 기습하는 적을 막기 위하여 다뉴브 강의 어부들이 이 요새를 방어한 데서 그 이름이 유래하였다.
일곱 개의 고깔모자 모양의 탑은 건국 당시의 7 부족을 상징한다.
■ 마차시 성당
13세기 밸러 4세 때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건축된 후 14세기에 접어들면서 현재의 고딕 양식으로 재건축되었다.
이후 마차시왕의 시대에 88미터(현재는 80미터)의 마차시 탑이 세워지면서 마차시 교회로 불리게 되었다.
16세기 오스만 투르크군의 침략 때는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되기도 했으나 투르크의 지배가 끝난 후 18세기 바로크 양식의 교회로 복원되었다.
1867년 헝가리 왕으로 즉위한 합스부르크가의 프란츠 요세프 황제와 엘리자베트 황후의 대관식이 이곳에서 열렸고 작곡가 리스트는 헝가리 대관 미사곡을 직접 작곡, 지휘하기도 했다.
부다페스트 야경. 밝게 빛나는 곳은 헝가리 국회의사당
부다페스트 야경
9일 2019. 08. 22. (목) 부다페스트-브라티슬라바-비엔나
* 다뉴브 강을 중심으로 서쪽의 부다 지구 관광
● 18세기의 어부들이 성벽에서 적군을 방어했다는 전설이 있는 어부의 요새
● 아름다운 다뉴브 강의 전망이 잘 보이는 겔레르트 언덕 관광
● 역대 헝가리 왕들의 대관식이 거행되었던 마챠시 사원
● 부다페스트를 상징하는 부다 왕궁
* 다뉴브 강 동편으로 이동하여 페스트 지구 관광
● 건국의 아버지라 불리는 성 이스트반 대왕을 기리기 위한 성 이슈트반 사원
● 헝가리 정착 천년을 기념해 세워진 기념비가 있는 영웅광장
어부의 요새와 마차시 사원
■ 부다페스트 Budapest
부다페스트는 도나우 강을 중심으로 서쪽의 부다(Buda)와 북쪽의 오부다(Obuda), 동쪽의 페스트(Pest)로 이루어져 있다.
이 세 지역은 1873년 통합된 이후 지금까지 함께 공존하며 발전해 왔다.
오늘날의 부다페스트는 헝가리의 수도이다.
도시 전체가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 만큼 고풍스러운 건축물과 문화 유적이 즐비하고, 도나우 강과 온천수가 있어 물의 도시로도 유명하며,
‘동유럽의 파리’, ‘도나우의 진주’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 도나우강과 다뉴브강 / 빈과 비엔나
▶ 도나우강은 독일어식 표현이고 다뉴브강은 영어식 표현으로 같은 강이다. 빈은 독일어식 표현, 비엔나는 영어식 표현
겔레르트 언덕에서 바라본 다뉴브강이 흐르는 부다페스트 전경
겔레르트 언덕에서...
■ 부다 왕궁
13세기 중엽, 몽골 침입 후에 헝가리는 수도를 부다페스트로 옮겼다.
이때 부다 언덕 위에 왕궁과 마차시 교회를 지었으나 전쟁으로 파괴와 재건이 반복되다가 18세기의 바로크 양식대로 복원을 하였고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다.
현재 이 왕궁은 국립 갤러리와 부다페스트 역사박물관, 세체니 국립 도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부다페스트를 상징하는 부다 왕궁 전경
부다페스트를 상징하는 부다 왕궁에서...
부다페스트를 상징하는 부다 왕궁
부다페스트를 상징하는 부다 왕궁
■ 세체니 다리
헝가리 국회의사당과 함께 부다페스트의 야경을 대표하는 양대 건축물 중 하나이다.
도나우강을 가로질러 유적도시 부다 지역과 상업지구 페스트를 연결하는 최초의 다리로, 1849년 개통되었다.
다리 건설을 위한 아이디어를 내고 주도적 역할을 한 사람이 헝가리의 귀족 세체니 이슈트반 백작이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따 세체니 다리로 부른다.
부다 왕궁에서 바라본 세체니 다리
■ 헝가리 국회의사당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국회의사당으로 헝가리 건국 1천 년을 기념해 1896년에 1차 완공되었고, 1902년에 최종 완성되었다.
도나우 강변에 자리하고 있으며 건물의 길이만도 268미터에 이르는 웅장한 규모이다.
밤에는 황금빛 조명이 들어와 부다페스트 야경의 절정을 이룬다.
지붕에는 1년을 상징하는 365개의 첨탑이 있고, 외벽으로는 헝가리의 역대 통치자 88명의 동상을 세워놓았다.
현관 양쪽의 사자상과 엄청난 중앙계단, 수천 개의 보석과 황금으로 장식된 건물 내부는 헝가리 건축 역사의 기적으로 불린다.
부다 왕궁에서 바라본 성 이슈트반 대성당
■ 성 이슈트반 대성당
헝가리에 기독교를 전파한 이슈트반 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웠으며, 부다페스트 최대의 성당으로 50년에 걸쳐 완성하였다.
성당의 높이: 96m (헝가리가 건국된 해인 896년의 96 의미)
성 이슈트반 대성당 조각상
성 이슈트반 대성당 부근의 시티투어 버스. 버스에 태극기도 그려져 있다.
헝가리 정착 천년을 기념해 세워진 기념비가 있는 영웅광장
■ 영웅광장
1896년 헝가리 건국 1,000주년을 맞아 만들기 시작 1929년에 완성되었다.
민족의 수호신 가브리엘 천사 동상과 그 주위를 둘러싼 말 탄 기사들의 상을 중심으로 반원형인 이 광장에는 헝가리 역사에 등장하는 역대 왕과 여왕, 영웅의 상들이 있다.
기념탑 중앙의 높이는 36m이며 가브리엘 대 천사의 조각상이 있다.
[ 부다페스트 - 브라티슬라바 약 3시간 소요 ]
끝없이 이어지는 옥수수 밭과 해바라기 밭
보헤미안의 풍류가 서린 슬로바키아의 수도 브라티슬라바 이동
● 테이블을 뒤집어 놓은 것 같은 형상의 브라티슬라바 성 (외관)
●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진 성마틴 대성당, 마카엘스 탑
● 여러 가지 독특한 조형물이 즐비한 구시가지 관광
◆ 슬로바키아 Slovakia
수도 : 브라티슬라바 / 언어 : 슬로바키아어 / 시차 : 한국과 -7시간 차
면적 : 약 4만 9천㎢, 한반도의 0.222배
인구 : 약 545만 명. 세계 116위
GDP : 약 1,098억6천 만 달러, 세계 60위
통화 : 유로 1 EUR=1357.68원 (2019.08.09 20:07)
■ 브라티슬라바
현재 슬로바키아의 수도이다. 1784년까지는 헝가리의 수도이기도 했다.
체코와 합병되었던 체코슬로바키아 시절에는 잠시 변방의 한 도시였던 수모를 겪기도 했지만, 1992년 분리 독립 이후 다시 정치, 경제, 문화, 교통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되찾았다.
다뉴브강을 끼고 있는 중세도시로 고풍스럽고 정감이 넘치는 동유럽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미카엘 문 전경
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의 상징. 구도심(Stare Mesto)으로 통하는 한국의 남대문 같은 곳.
바닥을 주의해서 보면 나침반처럼 세계 주요 도시들의 방향과 거리를 표기해 두었는데 서울도 찾을 수 있다.
[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 - 오스트리아 비엔나 약 1시간 소요]
10일 2019. 08. 23 (금) 비엔나-체스키 크롬로프
● 아름답고 고풍스러운 게른트너 거리
●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고딕 양식 건축물로 모차르트의 결혼식과 장례식이 거행된 성 슈테판 대성당
● 그리스 신전 양식을 모델로 하여 1883년 세워진 국회의사당 (링거리)
◆ 오스트리아 Austria
수도 : 빈 / 언어 : 독일어 / 시차 : 한국과 -7시간 차
면적 : 약 8만 3천㎢ , 한반도의 0.38배
인구 : 약 875만 명, 세계 98위
GDP : 약 4,595억 8천만 달러, 세계 28위
통화 : 유로 1 EUR=1357.68원 (2019.08.09 20:07)
■ 빈 = 비엔나 (Wien / Vienna)
오스트리아의 수도
인구 : 약 190만 명(2018년)
독일어식 명칭인 빈 대신 흔히 영어식 명칭인 비엔나로도 불린다.
과거 오스트리아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헝가리 왕국의 주요 도시였으며,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 아래 오스트리아가 주요 국가였을 때는 많은 인구를 가진 유럽의 대도시였다.
1440년 합스부르크 왕가가 이곳을 도읍으로 정하면서 정치와 예술,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동유럽의 중심도시로써 수많은
음악적 예술적 유물과 합스부르크 왕가의 화려하고 웅장한 건축물들이 여행자들의 눈길과 마음을 잡아 끄는 곳이다.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중 하나다.
유럽의 다른 이웃 도시들보다 거리가 매우 깨끗하고 치안이 잘 되어 있다.
지하철이나 대중 교통도 유럽 치고 굉장히 깨끗하고 노선망도 우수하다.
■ 벨베데레 궁전
바로크 양식의 아름다웠던 17세기 후반 오스만 투르크와의 전쟁에서 빈을 구한 오이겐 공의 여름 별궁으로 쓰이던 이곳은 벨베데레 궁전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탈리아 어로 전망이 좋다는 뜻의 벨베데레 궁전은 궁전 테라스에서 보이는 경치가 아름다우며 상궁과 하궁 사이에는 프랑스식 정원이 있어 산책하기 좋은 곳이다.
벨베데레 궁전에서 가장 유명한건 구스타프 클림트의 회화 인데, 그중 키스의 작품을 보기 위해 많이 온다고 한다.
그리고 클림트 작품뿐만 아니라 르느와르, 모네, 마네, 고흐, 에곤 쉴레의 그림도 볼 수 있다.
벨베르데 궁전 전경
키스 - 구스타프 크림트 작
■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
그림 키스는 역사상 가장 많이 복제된 그림이다.
다 빈치의 모나리자나, 밀레의 만종보다 훨씬 많이 복제되어 엽서나 카드 그리고 심지어 불을 켜고 끄는 버튼의 장식으로도 쓰인다.
남성의 손은 한 손은 여성의 머리를 잡고 있고, 다른 한 손은 뺨을 어루만지고 있다.
단지 손을 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부드럽게 뺨을 어루만지고 있는 모습이다.
그렇게 뺨을 만지고 있는 손 위에 여성이 왼손을 덧대고 있다.
살며시 얹은 손가락이 남성의 손을 쓸고 있을 것이라는 느낌을 그대로 전해 준다. 여성의 나머지 한 손은 남성의 목을 두르고 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그냥 두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손목과 손가락 마디마디가 기대감으로 비틀려 있다.
어깨는 잔뜩 움츠려 남성에게 밀착시키고 있다. 두 남녀의 팔과 손이 절묘하게 어우러지면서 관능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다.
작품은 남성이 여인의 머리를 잡아 자신을 향하게 하여 볼에 입을 맞추고 있어 지배적인 남성성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남성의 등에서부터 흘러나와 여인을 감싼 나선형의 금빛 후광과 무릎을 꿇고 있는 여인의 모습도 여성성을 강조하고 있다.
클림트는 두 연인의 옷 속에 그려 넣은 도형과 색채를 통해 남성성과 여성성을 구별시키고 있다.
남성의 옷엔 무게감 있는 검은색 직사각형을 사용하여 남성스러움을 표현하였으며,
여성의 옷엔 화려하고 여성스러운 색채로 이루어진 원과 곡선을 사용함으로 여성스러움을 표현하였다.
남성과 여성이 서로 너무나도 다르지만 그 어떤 그림보다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것처럼
옷에 그려진 무늬들도 서로 상반되는 패턴이지만 오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꽃이 흩뿌려진 작은 초원 위에 서 있는 두 연인은 주변과 분리되어 그들을 마치 후광처럼 둘러싸고 있는 금빛 아우라 안에서 서로에게 황홀하게 취해 있다.
또한 절벽 위의 여인은 까치발을 하고 있다.
까치발을 들어 보이며 작품을 설명하던 오스트리아 빈의 변사 같이 청산유수로 말을 하던 가이드가 생생하게 기억이 떠 오른다.
"키스를 보지 못했다면 비엔나를 떠나지 말라"
'키스(The Kiss)'라는 그림은 적어도 1,700억 원보다
훨씬 더 높은 가격에 팔릴 수 있는 인기 있는 그림이라고 한다.
■ 구스타프 클림트 Gustav Klimt
출생 : 1862년 / 사망 : 1918년 / 국적 : 오스트리아
대표작 :〈유디트 1〉, 〈사랑〉, 〈키스〉, 〈처녀〉, 〈죽음과 삶〉 등
구스타프 클림트는 1862년에 태어나 1918년에 죽은 빈에서 활동한 화가로 수수께끼 같은 화가이다.
그는 생전에 자신의 그림에 대해 한 번도 설명한 적이 없고, 인터뷰도 하지 않았으며, 사생활은 철저히 숨겼다.
사후 50년 후부터 재평가되기 시작하더니 언제부턴가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화가로 손꼽히게 되었다.
포옹 - 에곤 쉴레 작, 1917년
벨베데레에서 내가 본 '가족'이라는 작품에는 가슴 한쪽이 아려오는 애잔함이 있었다.
어쩌면 이 그림을 그린 이후에 벌어진 일을 알고 있기 때문일지도..
연애 끝에 결국 한 여인과 결혼까지 하게 된 에곤 쉴레.
자신의 아기를 임신한 그녀를 보며 자기를 꼭 닮은 아들과 함께 있는 '가족'을 기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임신 6개월이었던 그의 아내 에디스(Edith)는 당시 2천만 명 가까운 목숨들을 앗아갔던 스페인 독감에 걸려 끝내 사망하고 만다.
그리고 그로부터 딱 사흘 후, 에곤 쉴레도 스물여덟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게 된다.
죽어가던 그 사흘이라는 짧은 시간동은 그는 그의 아내 에디스의 초상화를 스케치했다.
엄마가 죽어 태어나지 못했지만 아들을 그리워하며 그려 넣은 엄마 손을 꼭 잡고 있는 아기를 보니 더 애잔하게 느껴진다.
결국 그가 그렸던 '가족'이란 꿈은 결국 영원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가족 - 에곤 쉴레, 1918년
■ 에곤 실레 Egon Schiele
출생 : 1890년 6월 12일, 오스트리아 툴른
사망 : 1918년 10월 31일, 오스트리아 빈 (28세).
구스타프 클림트와 함께 20세기 오스트리아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
인체의 왜곡, 독특한 구도와 색채가 특징인 심리적이고 에로틱한 주제의 초상화와 자화상을 많이 그렸다.
수직적 시점과 뚜렷한 윤곽선, 강렬한 색감이 돋보이는 표현주의적 풍경화 역시 유명하다.
그의 작품들은 예술적으로 새로울 게 없다고 느껴지던 초상화와 자화상, 풍경화 장르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었다.
■ 합스부르크
합스부르크 왕조는
유럽 최대의 왕실 가문을 말하며, 특히 오스트리아의 왕실을 거의 600년 동안 지배한 것으로 유명하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프랑스 왕을 제외한 거의 모든 유럽의 왕실과 연결되어 있었다.
합스부르크라는 이름은 슈바벤 지방 (현재의 스위스)에 세워진 합스부르크 성 또는 하비히츠부르크 성(매의 성)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합스부르크 군주국(Habsburgermonarchie) 또는 합스부르크 제국(Habsburgerreich)은 오스트리아계 합스부르크家가 지배하는 영지를 모두 이르는 말로서,
지금의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체코와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수장은 대부분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겸했으나, 합스부르크 군주국의 영토는 신성 로마 제국 바깥에도 걸쳐 있었다.
1806년 프랑스의 나폴레옹 1세에 의해,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되면서, 오스트리아 제국에 속하게 되었다.
■ 마리아 테레지아 (Maria Theresia)
출생 : 1717. 5. 13, 오스트리아 빈 (현재 국가명)
사망 : 1780. 11. 29, 오스트리아 빈
국적 : 합스부르크 군주국 (신성 로마)
마리아 테레지아는 18세기 유럽의 세력 각축전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매력적인 자연스러움을 가진 왕녀로서 합스부르크 왕가의 통치자들 가운데 가장 유능한 인물 중 하나였고 어떤 역사가에 따르면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가장 인간적인" 인물이었다.
18세기 자타공인 유럽 최대의 왕조인 합스부르크가의 유일한 상속자였지만 여성은 왕위를 계승하지 못한다고 정한 살리카 법(프랑크왕국 때 만들어진 법)으로 인해
황후라는 이름에 만족해야 했던 마리아 테레지아. 그러나 그녀는 명칭이나 직함에 연연하지 않고 자기 것은 확실히 지켜내는 강인한 여인이었다.
비록 황후의 자리에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자신의 영토를 훌륭하게 다스린 여제로서 가장 18세기 다운 통치자였다.
18세기 유럽 왕실은 프랑스의 부르봉 가문과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이 양분하고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었다.
16세기 카를 5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 올라 에스파니아 지역까지 차지하면서 유럽 최대의 왕실 가문으로 부상하였던 합스부르크가는 18세기까지 직계와 방계가
모두 유럽 왕실의 주축으로 건재하였다.
합스부르크가는 10세기경 스위스 북부의 작은 지역 소 영주에서 시작하여 11세기 합스부르크(매의 성이라는 뜻) 성을 쌓은 뒤부터 가문의 이름을 합스부르크라고 하였다.
뛰어난 미모를 가진 마리아 테레지아는 빈에 유학 온, 트링겐 지방 공작의 아들 프란츠 스테판 폰 로트링겐과 사랑에 빠졌다.
마리아 테레지아 공주는 한때 프로이센의 왕자와도 혼담이 오갔지만, 아버지 카를 6세 역시 프란츠가 마음에 들어 1736년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렸다.
그 결혼은 연애결혼이기도 했지만 당시 로트링겐을 둘러싸고 일어난 프랑스와의 이해관계를 해결하기 위한 정치적 결합이기도 했다.
마리아 테레지아 부부는 16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은 자녀는 10명이었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는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한 뒤 오스트리아의 사회제도를 개혁했다.
여제는 농노제를 폐지했고, 공무원 제도와 관료 선발 제도를 개선하여 많은 인재를 등용했으며,
의무교육 제도를 도입하고 학교를 신설했다.
민법을 시행하고 기존 법률의 부당한 조항 및 잔혹한 형벌을 폐지했고, 덕분에 범죄율이 크게 줄어들었다.
군대 내의 연락 및 명령 체계를 개선하여 군의 기동성을 높였고 7년 전쟁에서 수차례 프로이센 군대를 격파할 수 있었다.
납세 제도를 개선하고 공공설비와 사회복지도 대폭 개선했다.
일련의 개혁조치는 오스트리아가 현대 국가로 들어설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기 때문에
고등교육을 받은 귀족과 우수한 음악가, 건축가, 화가 등이 앞 다투어 빈으로 몰려왔고, 빈은 유럽 최고의 도시로 발돋움했다.
■ 합스부르크 군주국 (Habsburgermonarchie, 1526년 – 1804년)
합스부르크 왕조는
유럽 최대의 왕실 가문을 말하며, 특히 오스트리아의 왕실을 거의 600년 동안 지배한 것으로 유명하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프랑스 왕을 제외한 거의 모든 유럽의 왕실과 연결되어 있었다.
합스부르크라는 이름은 슈바벤 지방 (현재의 스위스)에 세워진 합스부르크 성 또는 하비히츠부르크 성(매의 성)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합스부르크 군주국(Habsburgermonarchie) 또는 합스부르크 제국(Habsburgerreich)은 오스트리아계 합스부르크家가 지배하는 영지를 모두 이르는 말로서,
지금의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체코와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수장은 대부분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겸했으나, 합스부르크 군주국의 영토는 신성 로마 제국 바깥에도 걸쳐 있었다.
1806년 프랑스의 나폴레옹 1세에 의해,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되면서, 오스트리아 제국에 속하게 되었다.
■ 합스부르크 가계도
* 요세프 1세 (Joseph 1, 1678-1711)
- 동생 카를을 스페인 왕으로 지지하였으나 급사
* 까를 6세 (Karl 6, 1685-1740)
- 요세프 1세의 동생. 마리아 테레지아의 아버지
* 프란츠 1세 (Franz 1, 1708-1765), 프란츠 스테판
* 마리아 테레시아 (Maria Theresia, 1717-1780)
- 카를 6세의 아들이 없었던 관계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을 치르고 왕위에 오름.
- 오스트리아의 중흥기를 이룸
- 합스부르크 왕가 여름궁전 쉔브룬 궁전을 건축.
- 쉔부룬 궁전에는 마리아 테레지아가 사용했던 사무공간과 침실 등이 남아 있음.
- 프랑스 루이 16세의 아내 마리 앙투아네트의 부모
- 어린 모차르트가 쉔브룬 궁전를 방문하여 마리아 테레지아 앞에서 연주. 이때, 마리 앙투아네트와도 만남.
* 요세프 2세 (Joseph 2, 1741-1790)
-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모차르트가 만나는 황제가 요세프 2세.
* 레오폴드 2세 (Leopold 2, 1747-1792)
- 요세프 2세의 동생
- 프랑스 혁명 시 막내 동생인 마리 앙투아네트를 구하려 시도중 급사
* 프란츠 2세 (Franz 2, 1768-1835)
- 프랑스 혁명 시, 마리 앙투아네트를 구하기 위한 협상을 중단해 프랑스 왕가가 죽음을 당함.
- 황제로 취임한 나폴레옹에 맞서 오스트리아 제국 황제 취임.
- 장녀인 Maria Luise 를 나폴레옹과 결혼시켜 평화를 도모함.
둘 사이에서 나폴레옹 2세(Joseph Karl Franz(Napoleon 2) 1811-1832)가 탄생하였으나, 나폴레옹의 몰락으로, 비엔나에서 성장함.
나폴레옹 2세는 21세에 폐결핵으로 쉔브룬 궁전에서 사망.
★ 마리아 테레지아 (Maria Theresia) 가족 초상화
좌측 요세프 1세 (Joseph 1, 1678-1711), 하나 건너 프란츠 1세, 마리아 테레지아, 마리 앙투아네트(?)
키스를 주제로한 각종 기념품
■ 쇤브룬 궁전
프랑스에 베르사유 궁전이 있다면 오스트리아에는 쇤브룬 궁전이 있다.
세계에서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궁전 중 하나로 손꼽히는 곳이다.
중세 최대의 왕가 합스부르크 가문의 여름 휴양지로 만들어졌으며 자그마치 1천400개가 넘는 방을 갖추고 있다.
음악신동 모차르트가 6살 때 궁전에 초대받아 피아노를 연주한 곳이 바로 이 쇤브룬 궁전이다.
쇤브룬 궁전은 함께 딸린 넓은 정원으로도 유명하다.
쇤브룬이란 이름은 1619년 마티아스 황제가 사냥 중 '아름다운 샘'을 발견한 데서 유래한다.
쇤브룬 궁전의 정원
아름다운 샘'이란 의미의 화려한 쇤브룬 궁전
합스부르크 왕가의 여름 궁전으로 베르사이유 궁전에 필적할만한 장대하고 화려한 규모를 자랑한다
외부 건물은 크림색이며 내부는 18C 후반에 마리아 테레지아가 수집한 동양의 자기나 칠기, 페르시아의 세밀화 등으로 우아하고 호화롭게 로코코식으로 꾸며져 있다.
전철이 다니는 오스트리아 빈의 시가지 전경
■ 성 슈테판 대성당 외관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고딕 양식 건축물로 모차르트의 결혼식과 장례식이 거행된 성 슈테판 대성당.
성 슈테판 대성당 내부
[ 비엔나 - 체스키 크롬로프 약 3시간 소요 ]
◆ 체코 Czech Republic
수도 : 프라하 / 언어 : 체코어 / 시차 : 한국과 –7시간 차
면적 : 약 7만 8천㎢, 한반도의 0.357배
인구 : 약 1,062만 명 세계 87위
GDP : 약 2,461억 6천만 달러, 세계 46위
통화 : 체코 코루나 1 CZK= 52.59원 (2019.08.09 20:07)
유럽 중부에 있는 내륙국. 수도는 프라하이며 화폐는 체코 코루나이다.
국민의 대다수가 체코인이며 국어는 체코어이다.
1918∼92년 보헤미아·모라비아·슬로바키아와 더불어 체코슬로바키아 연방 공화국을 이루었다가 1993년 1월 1일 분리 독립했다.
보건위생 상태가 양호하며 모든 교육은 국가의 책임하에 무상으로 실시된다.
11일 2019. 08. 24 (토) 체스키 크롬로프-프라하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체스키 크롬로프 관광
● S자로 완만하게 흐르는 블타바 강변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에 있는 작은 도시로 붉은 지붕과 둥근 탑이 어우러져 동화같은 분위기를 연출한다.
미로처럼 얽혀있는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은 아기자기한 수공예품을 파는 상점과 카페가 가득해 관광객들의 눈을 즐겁게 한다.
● 보헤미아 성으로는 프라하 성 다음으로 큰 체스키 크롬로프 성(외관)
● 체스키 크롬로프의 상징 시청사 및 스보르노스티 광장
체스키 크롬로프 조감도
■ 체스키 크롬로프
체스키 크롬로프는 18세기 이후에 지어진 건물이 없는 마을, 인구 1만 5천명의 작은 규모지만 300개 이상의 건축물이 문화유적으로 등록된 살아있는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이며,
프라하 남서쪽 200킬로미터 지점, 오스트리아 국경 근처에 있는 체스키 크롬로프는 완벽히 동화 속 그림같은 마을이다.
마을의 절반은 문화유적이고 나머지 절반은 관광객을 위한 숙박시설과 가게들이다.
체스키 크롬로프는 도시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이다. 체스키(체코)+크롬로프(말발굽) 란 뜻이다. 슈마바산 아래 볼타바강이 S자형으로 흐르는 강 만곡부에 자리 잡고 있다.
붉은 기와지붕, 성곽, 성당의 첨탑이 어우러진 중세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마을 한가운데 있는 체스키 크롬로프 성은 프라하 성에 이어 체코에서 두 번째로 큰 성이다.
성 안에는 궁궐과 극장, 예배당과 정원 등이 그대로 남아 중세 귀족의 모습을 눈앞에서 체험할 수 있다.
체스키 크룸로프 성 제 2광장
체스키 크롬로프 망토다리를 배경으로....
같이 여행한 일행분 들.
체스키 크로로프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 헝가리 부다페스트, 슬로바키아, 오스트리아 비엔나, 체코 체스키 크롬로프 여행기.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