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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전후 서울 광화문 뒷골목 술집의 외상장부가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공개됐다. 다름 아닌 너덜해진 하드커버에 깨알같이 외상값이 적힌 ‘사직골 대머리집’ 외상장부 세 권이다.
대머리집은 가난한 인텔리와 기자, 문인, 예술인이 즐겨 찾던, 그야말로 외상술이 가능했던 대폿집. 정식 옥호는 明月屋(명월옥). 하지만 別號(별호)인 대머리집으로 널리 불렸다. 일제시대 처음 영업을 시작한 주인 金永德(김영덕·1954년 작고)씨의 머리가 벗겨져서 대머리집이라 불리기 시작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러나 아들이 없던 김씨가 사위(李宗根)에게 가게를 대물림했다는 데서 ‘대물림집’으로 불리다
자연스레 대머리집이 됐다는 설도 있다.
사람들은 이마저도 줄여 ‘대멀집’ ‘대멀네’로 불렀다.
1978년 10월 15일 자진 폐업한 대머리집의 위치는 서울 종로구 사직동 89번지. 사직공원 정문 앞으로 뚫린 길을 내려오자면 오른쪽 골목에 자리 잡았었다.
물론 지금은 흔적도 없다.
필자가 번지를 찾아가 봤더니 그곳에는 거대한 주상복합 아파트(풍림 Space本)가 똬리를 틀고 있었다. 서울경찰청 정문에서 우측 대각선 방향. 3호선 경복궁역에서 나와 5분쯤 걸으면 나온다. 근처 부동산 점포에 물으니 “지난 2007년 12월 아파트 입주가 시작됐다”고 귀띔했다.
대머리집은 허름한 대폿집이었다. 막걸리와 소주, 양은냄비, 심심하고 새콤달콤한 김치가 안주로 나왔다.
처음엔 단층의 쓰러질 듯한 초가집이었지만 양옥으로 바뀌었고 나중 장사가 잘됐던지
콘크리트 2층집으로 증축했다고 한다.
하지만 2층집도 볼품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본래 대머리집의 전신은 옛 내자시장(지금의 서울경찰청 뒤편에 있었다) 안에 있었고 이름은 萬華屋(만화옥)이었다.
일제 말 근처 사직동 골목으로 옮겨 6·25 이후 휴전하던 무렵까지 창업주 김영덕씨가 운영하다
사위 李宗根(이종근·1983년 작고)씨에게 넘기면서 명월옥(대머리집)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대머리집에는 당대의 기자와 문인, 예술인이 자주 드나들었다. 그 무렵만 해도 모두가 생활이 옹색하고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못한 탓에 현찰이 떨어진 酒客(주객)들은 어쩔 수 없이 대머리집 신세를 질 수밖에 없었다.
1960년대 조선일보와 서울신문, 한국일보 기자로 재직했던 문학평론가 申東漢(신동한·81) 씨의
회상이다.
“한 가지 특색은 대부분이 외상 술꾼이라는 점입니다. 지금은 세상을 떠났거나 원로의 자리에 있는 언론인이나 문인치고 이 집 외상장부에
이름이 안 오른 주객은 아마 없었을 깹니다.”
막걸리가 밥
대머리집 현관이 미닫이였는지 여닫이였는지 증언이 엇갈린다.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의 풍광은 이러했다.
방송작가인 朴西林(박서림·80) 씨의 얘기다.
“길에서 한 계단 정도 내려가는 어둑한 홀에 널빤지로 상처럼 높직하게 만든 술청이 몇 줄 놓여 있고 의자는 드문드문, 서서 마시는 경우가 많았지요. 처음에는 안주 값을 받지 않고 술값만 받았어요.”
필자는 지난 8월 5일 서울역사박물관을 찾았다. 광화문광장 준공을 기념해 ‘광화문 年歌(연가): 시계를 되돌리다’ 전시회에 대머리집 술청을 재연한 세트장이 꾸며졌다.
주안상에는 찌그러진 주전자와 양은냄비, 투박한 막사발이 놓여 있었다.
그곳에서 주인 이종근씨로부터 외상장부를 ‘분양’받은 극작가 趙成賢(조성현·67) 씨를 만났다.
당시 대머리집 단골이었던 그는 주인 이씨에게 넘겨받은 장부를 애지중지 보관하다 이번에 공개한 것이다. 조씨는 “민간 상업史(사)로서 의미가 있을 것 같아 가끔 ‘이형, 외상장부를 끔찍하게 보관해 주시오’라고 무례하게 주문하곤 했는데 고맙게도 내게 줬다”고 말했다. 그의 말이다.
“개인으로 봐선 영업장부에 불과하지만 민간 상거래 차원에서 사료적인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가게 문을 닫으면서 ‘(장부의) 가치를 인정해 주는 당신에게 분양하겠소’라고 했지요.”
대머리집은 낮에는 장사를 안 했다. 날이 기울면, 그러니까 저녁 대여섯 시쯤 되면 문을 열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주객들이 찾아가면 반드시 아는 얼굴이
술청에 앉아 있었다고 한다.
밥을 따로 시키지 않아도 좋았다. 막걸리가 밥이었다.
안주는 시원한 조개탕, 시금치를 계란에 버무려 올려놓고
담백하게 끓여 낸 명란찌개와 동태찌개, 팔뚝만한 조기구이,
두부로 만든 동그랑땡, 북어를 불려 양념을 한 뒤 전을 부쳐 만든 북어전, 고추전, 병어회, 제육 등등이 나왔다(朴西林 씨의 회고).
그러나 준비된 안주는 그날그날 달랐다고 한다. ‘오늘의 메뉴’라고 적힌 조그마한 칠판에 여남은 안주 종목을 백묵으로 적어 놓은 것을 주인 이씨가 들고 와서 손님에게 주문을 받았다.
겨울철에는 去冷(거랭)이라 해서, 막걸리를 약간 데워 찬 기운을 없애고 마셨다.
술판 한가운데 있는 난로 위에 쩔쩔 끓는 양동이 물에 술 주전자를 담가 찬기운을 가시게 해서
손님 앞에 갖다놓는 것이었다(申東漢 씨의 회고).
부인 김인옥씨의 맛깔스런 음식솜씨
또 여자 없는 술집으로 유명했다. 인근에 방석집이 즐비했지만 대머리집에는 주인 이씨와 그의 처외삼촌인 노영환씨가 서빙을 할 뿐이었다.
이 집을 드나드는 술꾼들은 대개가 단골손님이기 때문에 다른 술집처럼 어수선한 분위기가 없고 모두가 오순도순 술을 즐기는 장소였다. 한국일보 기자 출신인 시인 蔡熙汶(채희문·72)씨의 회고다.
“펜만 있으면 됐어요. 주머니가 빈털터리라도 (외상을) 긋기만 하면 되니까요. 그래서 가난한 文士(문사)들이 부담없이 찾을 수 있었던 게지요.”
양도 푸짐했다. 양은 주전자에 한 되 술이라고 퍼주는 것은 술꾼들의 마음을 넉넉하게 해 주고도 남았다.
음식 솜씨는 이씨의 부인 金仁玉(김인옥·85)씨의 손맛에서 우러나왔다.
찬거리를 사러 장을 보는 일은 남편의 몫이었다.
아침마다 남대문까지 걸어가서 찬거리를 산 뒤 한가득 등짐을 진 지게꾼과 함께 귀가했다.
그 찬거리로 김씨가 혼자 안주를 만들었다.
손님 중에 김씨 얼굴을 봤다는 이를 찾을 수 없다.
사람을 쓰지 않고 혼자 주방에서 요리만 했기 때문이다.
음식이나 술이 떨어지면 가게 문을 닫아야 했기에 술판을 크게 벌일 수도 없었다. 또 주객 중에 술 먹고 ‘개차반’을 벌이거나 멱살다짐을 하는 경우도 없었다.
고성방가하는 ‘니나노’도 드물었다.
소설가 吳仁文(오인문·67)씨는 이렇게 말했다.
“장소가 협소했어요. 골방을 떼어내 술청을 만들어 여러 명이 앉을 수 있었죠. 서서 먹는 사람도 적지 않았어요. 제가 1962년 소설로 등단한 뒤 1964년쯤 한국일보에 취직했어요.
그 무렵부터 동료를 따라다니기 시작했어요. 안주 중에는 ‘갈비 한 짝’이 맛있었는데, 소갈비가 아니라 북어 여러 마리를 한 쾌로 엮어 양념을 발라 조린 것으로 맛이 그만이었지요.”
외상장부에는 수많은 이름이 등장한다. 외상장부 작성 시기는 1950년대 말부터 1962년까지로 소속 기관·이름·외상값이 빽빽했다. 장부에 적힌 기관은 71개로 서울시청·경제기획원·문교부 등 공공기관 25개, 조선일보·동아일보·서울신문·대한일보·동양방송·문화방송 등 언론기관 22개, 서울대·연세대·고려대·이화여대 등 학교 16개와 조흥은행 같은 금융기관 등이다. 장부에 기재된 외상 손님만 수백 명, 외상값은 대개 200환대부터 시작해 대개가 750~800환 내지 1000환 안팎이었다(당시 자장면 한 그릇이 150환이었다). 1500환이 넘는 경우도 가끔 있는데 부서 회식으로 여겨진다.
조선일보 외상장부 들여다보니
외상장부는 술에 대한 일종의 備忘錄(비망록)이다. 하지만 취기와 열정, 인간미로 밴 신용까지 떠올리게 한다.
수중에 돈이 없어도 그을 수만 있다면 그저 행복했다.
이름을 몰라도 외상술을 먹을 수 있었다
. 장부에는 ‘필운동 건달’ ‘대합 좋아하는 人(인)’ 같은 알쏭달쏭한 이름도 기재돼 있었다.
필자는 조선일보 기자들이 적힌 외상장부를 펼쳐보았다. 낯익은 이름들이 깨알같이 적혀 있었다. 1983년 3월부터 2006년 2월 23일까지 <이규태 코너>를 23년 동안 6702회 연재한 故(고) 李奎泰(이규태) 논설고문의 이름이 외상장부에 세 차례나 등장한다.
횟수는 다섯 차례로 1070환, 800환, 720환, 880환, 960환을 그었는데, 모두 외상값을 갚은 것으로 기록돼 있다.
1971~72년, 1973~78년 두 차례 외신부장을 지낸 鄭元洌(정원렬), 워낙 점잖기로 유명해서 ‘조 대감’ ‘덕송 대감’으로 통했던 趙德松(조덕송), 당대 편집기자로 이름을 날렸던 金庚煥(김경환) 편집국장을 비롯해 曺永瑞(조영서) 曺秉喆(조병철) 金鐘憲(김종헌) 南鐵基(남철기) 裵宇城(배우성) 安喆煥(안철환) 등의 이름도 있다. 또 사진부, 외신부, 조사부, 교열부, 제판부 등 부서 이름도 등장한다.
이 가운데 조덕송은 ‘軟派(연파) 기자’로 필명을 날릴 정도로 글이 빼어났지만 술 실력도 대단했다고 전해진다. 안주는 무나 김치 몇 조각이 있으면 됐고 술을 가려 마시진 않았지만 막걸리, 소주를 좋아했다. 신문사 간부가 된 뒤, 청운각 같은 지금은 없는 고급 요정에 초청을 받은 일이 많았는데 술을 마셔도 꼭 2차는 대머리집과 돈암동의 밀주집 등 허름한 대폿집을 찾아야만 직성이 풀렸다고 한다.
그리고 하는 말이 “아이고~ 이제야 술을 마시는 것 같군”이라고 말했다(南載熙 증언).
사직동 주변에 조선일보, 동아일보, 한국일보, 경향신문, 서울신문사가 있어 항상 가난한 기자들이 들끓었다. 대머리집은 기자들의 신문인 기자협회보가 발간되기 이전에 유일한 소식통 구실을 했다. 각 신문사의 인사이동이며 월급의 오름, 보너스 지급 날짜, 어느 회사 누가 특종을 했으며 누가 결혼했고 하는 등 온갖 뉴스가 회자됐다. 기자들은 수습(견습) 시절부터 드나들던 곳이었고 1주일에 4~5일은 마치 제집 안방마냥 대머리집 술청에 걸터앉았다. 한국일보 장기영 社主(사주)가 수습기자들을 불러 놓고는 “신문쟁이가 됐으면 ‘대멀네’부터 신고하라”고 말한 일화도 전해진다. 마이니치특파원 요시오카 다다오도 단골손님
‘빈털터리’ 기자들이 그곳을 찾아 허구한 날 펜(외상)을 그어댔지만 흔한 트러블 하나 없었다고 한다. 직선적인 성격으로 강직했지만 <언론·정치 풍속사: 나의 文酒(문주) 40년>을 책으로 펴낸 호탕한 성격의 南載熙(남재희·75) 前(전) 장관도 대머리집 단골이었다. 물론 외상장부에 그의 이름도 올랐다.
남 장관은 한국일보·조선일보를 거쳐 서울신문 편집국장을 역임한 후 정계에 입문, 4選(선)의원을 거쳐 노동부 장관을 역임했다. 그는 “싸고 맛있었지만 대개 기자들이 많았고 중앙청 공무원은 별로 없었다. 그 많은 사람이 외상을 했지만 불미스런 일이 내 기억으론 없었다”고 회고했다.
남 장관은 대머리집에 얽힌 에피소드로, 일본 마이니치(每日) 신문의 요시오카 다다오(吉岡忠雄) 서울특파원을 떠올렸다. 요시오카 특파원은 한국 음식만 찾아 먹을 정도로 식탐이 남달랐다. 대머리집에 자주 드나들면서 고추장, 마늘, 된장 맛을 음미하게 됐고 심지어 서린동 그 매운 낙지볶음까지 좋아라 먹어댔다.
그는 서울특파원을 지낸 뒤 뉴델리, 모스크바 특파원도 지냈는데, 모스크바에 있을 때는 한국 라면을 영국에서 구입해 타슈켄트의 고려인 ‘콜호즈’를 찾아가기도 했다. 잠깐 한국에 들렀을 때 한국일보와 동양통신을 거친 金聖鎭(김성진) 당시 문공부장관이 그를 으리으리한 요정에 초대했다. 하지만 요시오카는 대머리집을 고집하며 끝내 가지 않았다고 한다.
1950년대와 60년대만 해도 기자들의 자리이동이 잦았다. 여러 신문이 명멸하듯 세워졌다 사라지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순례하듯 한두 해 만에 신문사를 옮겼고, 경우에 따라 지방과 중앙지, 중앙과 지방지를 오간 경우도 많았다. 이들은 신문사의 몸집이나 社勢(사세)가 아닌 정분과 의리, 인연 등으로 자리를 옮겼다.
특히 취재기자와 달리 신문 판을 짜고 제작을 맡은 편집기자들은 신문사의 ‘귀하신 몸’이었다.
사직동 대머리집과 명동 동그랑땡집은 이른바 기자들을 스카우트하는 공개장소로 이용됐다고 한다 대머리집은 記者 스카우트장
이런 일화도 전해진다. 조선일보 方又榮(방우영) 발행인(現 명예회장)이 1967년 편집기자 출신인 37세의 김경환 기자를 전격 편집국장으로 앉힌 뒤 내로라하는 타사의 ‘名(명) 편집자’를 하나 둘 불러 모았다.
방 발행인은 최고의 편집자를 데려오라고 할 뿐 인사에 직접 관여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 김 국장이 요청하면 만사 오케이, 당시 부산 국제신문에서 이름을 날리다 동아일보에 스카우트돼 상경한 조영서 기자를 데려온 것도 그였다. 김 국장 역시 국제신문에서 출발, 연합통신과 동화통신을 거쳐 1959년 1월 조선일보에 입사했는데, 1960년 퇴사했다가 이듬해 재입사했다.
어느 날 조 기자와 만난 김 국장이 “조형, 나 일주일째 야근이야. 좀 도와도~”라고 부탁했고, 조 기자는 술 취한 김에 “김형이 그렇게 고단하면 내가 가지” 했는데 다음날 조선일보에 방이 붙었다고 한다. 나중에 편집부장까지 오른 조영서는 1970년대 말까지 세 번 편집부장을 역임했다. 물론 김경환, 조영서 모두 대머리집 외상장부에 이름이 올라 있다. 가난한 문사들과 예술인들도 그 집에 출근도장 찍듯 찾았다. 문인 중에는 박경수 하근찬 이문희 오상원 박성용 장인영 강용준 박봉우 김기팔 박재삼 정현종 최일남 제씨가 드나들었다. 문화부 기자들도 많았던 만큼 그 자리에서 원고청탁이 이뤄졌고 고료를 받으면 회포를 풀었다. 고료는 금방 털렸다.
지금은 세상을 떠났거나 원로의 자리에 있는 문인치고 이 집 문지방을 밟지 않은 이는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근처에 문화방송 한국방송 동양방송 동아방송사와 연극 극단이 많아 배우, 성우, 연극인, 연출가 등이 들끓었다. 최불암 이대근 오지명 박근형 김성겸 백일섭 배한성 고은정 김벌래 안평선 남일우 연규진 김종결 조명남 등이 대머리집을 드나들었다. 물론 외상장부에 이름을 올렸다.
해가 지면 대머리집에 들르는 게 당시 문화 예술인들의 낭만이었다.
그곳에서 연극과 연기에 대한 품평 등이 나오곤 했다.
탤런트 崔佛岩(최불암·69)씨는 “가난한 무명 연극인들이 값이 싸니까 갈 수밖에 없었다”며 “이낙훈, 김순철, 나영태, 독고중근, 김동훈 이런 분들도 드나들었다”고 했다. 소극장 연극의 뿌리인 극단 실험극장·행동무대 단원들도 자주 갔다고 한다.
그는 “밤 11시가 넘으면 통금을 무릅써야 했기에 대부분 자리를 떴다. 문을 닫을 시간이 되면 간혹 흥에 취한 이들이 흘러간 노래를 부르곤 했지만 아주 드문 일이었다”고 회상했다.
당대의 酒黨 횡보와 수주의 공간
1964년 동아방송 성우 2기로 데뷔한 연극인 趙明男(조명남·66)씨는 “1주일에 닷새는 대머리집에 들렀다”고 말할 정도로 한때는 주당이었다. “퇴근하다 문을 열고 빠끔히 쳐다보면 반드시 아는 선배들이 있었어요. 일그러진 주전자로 막걸리 한 사발을 마시면 저녁식사를 따로 안 해도 됐어요.
고추전, 호박전, 노가리 구운 것, 계란찜, 두부부침도 맛있었어요.
너덧 명이 가서 막걸리 10되는 족히 마셨을 깹니다. 가난한 연극쟁이들의 열정을 발산하는 곳이었다고 할까요?
술 다 먹고 갈 때마다 완전히 취하곤 했는데 외상장부를 굳이 확인 안 해도 믿었어요.
또 통금시간이 임박하면 택시비까지 받아 외상장부에 올리기도 했어요.”
대머리집을 거쳐간 이들 중에 橫步(횡보) 廉想涉(염상섭) 선생과 樹州(수주) 卞榮魯(변영로) 선생을 빼놓을 수 없다. 횡보와 수주 모두 당대 酒豪(주호)들이었다. 또 두 사람은 즐겨 단짝이 돼 부어라 마셔라, 자주 대머리집에 드나들었다.
횡보라는 호는 술에 취해 걸음걸이가 비뚤고 바르지 않다고 친구들이 붙여준 이름. 수주 선생은 5세 때부터 술을 먹기 시작했는데, 한번은 술독에 오르다 실족했다고 한다.
이를 본 어머니가 표주박에 술을 따라 주기 시작한 것이 수주의 ‘酒仙入門(주선입문)’이었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일제 시절에는 술이 배급제여서 1인당 한 잔씩만 마시게 했다. 대머리집도 예외는 아니어서 술이 일찍 동나게 마련이었다.
그 시절, 모두 줄을 지어 차례가 되면 한 잔씩 마시곤 했는데 맨 앞에는 수주 선생이 늘 서 있었다는
일화가 회자된다. 수주는 한 잔 마시고 뒤돌아가 줄의 꽁무니에서 차례를 기다려 또 마시고…
그러기를 여러 번 되풀이하다 취해야만 귀가했다.
대머리집 주인 김영덕씨도 수주만큼은 예외로 마음껏 마실 수 있도록 눈을 감아 줬다고 한다.
횡보 선생도 예외는 아니었다. 서울 중산층의 감각과 언어, 풍속을 작품 속에 녹인 소설의 위상과 상관없이 그의 집은 가난했다.
술을 입에 달고 살았던지 집 한 칸 마련하지 못한 채 사흘 밤낮 이사를 다녔다
. 또 외상이 가능한 술집이라면 어디라도 찾아갔다.
대머리집은 그에게 집이나 다름없었다.
성실하게 수금하러 다닌 주인 이씨
그런데, 부전자전이라고 했던가. 수주의 차남 卞文壽(변문수)씨도 대머리집 단골로 문턱이 닳게 부지런히 드나들었다.
마찬가지로 횡보의 장남 廉在土容(염재용)씨도 부친의 뒤를 이어 대머리집 막사발을 들이켰다.
재용씨는 1960년대에 경향신문에서 정치부 기자를 역임했다. 그는 “선친이 직장암으로 별세하기 직전에도 정종을 숟가락에 떠서 입안에 넣어 줄 정도로 생을 술과 함께 지냈다”고 했다.
대머리집 주인 이종근씨는 자그마한 키에 예쁘장했고 꼼꼼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경기 고양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뒤 일제시대 고향 面(면)사무소의 사환으로 일머리를 익혔다.
싹싹하고 셈이 빨라 일본인들의 귀염을 받았다고 한다. 세무서에 취직하기 위해 준비하다가 광복되던 1945년 아내 김인옥씨를 만나 장인의 대폿집 일을 도왔다. 장인이 타계하자 자연스럽게 가게를 이어받았다.
이씨는 주객들에게 언제나 외상을 허했지만 수금에서도 아주 성실했다. 꼼꼼하게 장부를 정리했으며 그의 처외삼촌인 盧榮煥(노영환·이씨는 그를 영감님이라고 불렀다.
노씨는 1970년대 초 가게 돕는 일을 접었다)씨와 함께 월급날은 물론 방송국과 신문사를 열심히 드나들었다.
그렇다고 외상값을 달라고 보채거나 궐석재판을 하듯 흉을 보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그저 친숙하게 얘기하고 싱긋 웃을 뿐이었다.
탤런트 최불암씨 말이다.
“월급날이 되면 예쁘장한 사람이 말쑥하게 차려 입고 찾아왔어요. 멀리 사무실 입구에 서 있다가 눈이 마주치면 말없이 웃을 뿐이었어요
. ‘이리 오시라’고 부르면 사인한 외상장부를 보여줘요.”
대머리집 주객 중 월급을 탔거나 원고료를 받은 사람은 형편에 따라 외상값을 갚게 마련이었다. 외상액이 많아도 신용을 지키는 사람에게 독촉하는 법이 없었다
. 또 더러 실직한 사람에게는 이유를 막론하고 외상술을 주었다.
하지만 신용이 없는 사람은 악착같이 독촉해 아주 작은 액수까지 받아냈다고 한다.
수금을 다니다 보니 외상술꾼들의 직장 인사이동에 관해서도 그만한 소식통이 없었다. 행여 소식이 끊기면 이씨에게 물어보면 답이 나왔다.
수금을 다니면서도 항상 도보로 움직였다. 근처에 언론사 방송사 극단이 많기는 했지만 조선일보 뒤편에 있던 KBS가 가파른 남산으로 옮긴 뒤에도 걸어서 수금을 다녔다.
방송작가인 박서림씨는 “간혹 내가 타는 택시를 편승하는 경우도 있었다”며 “가난한 작가가 술 팔아 주고 택시를 태워 주며 그의 富(부)를 늘려 주었던 셈”이라고 했다.
대머리집 폐업하다
이씨는 외상값 시효가 1년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팔기도 정성껏 팔았지만 수금도 열심히 했다. 수금을 다니던 이씨는 가끔 뜻 모를 회심의 미소를 지을 때도 있었다.
이유인즉, 회사에 들어서면 옛날 말단 직원이나 견습기자였던 단골이 이젠 회사의 부장, 중역, 국장이 되어 얼굴을 마주쳤던 것이다.
속으로 “저 양반 젊은 시절 술 버릇은 어떠했고 외상값은 잘 갚았고…”를 되뇌이며 웃었다는 것이다.
필자는 1978년 10월 1일자 <선데이 서울(지령 515호)>을 들춰보았다. 이 잡지 102쪽과 103쪽에 걸쳐 대머리집의 폐업 소식을 크게 전하고 있다.
제목은 ‘사직동 명물 대머리집 문 닫는다― 70년대를 물려 수많은 문필가들의 사랑방 노릇’이었다.
기사의 첫 문장은 이러했다.
<요즘의 대머리집을 찾는 애주가들은 주인 이종근의 서비스를 받고 어리둥절할 것이다. 누구나 안주 한 가지와 막걸리 한 주전자(소주는 반 병)를 선사받는다. “이건 계산에 넣지 않아요. 그냥 제가 드리는 겁니다.”
이씨의 설명에 당연히 “웬일로?” 하고 반문한다 이씨는 귀엣말로 “10월 중순에 그만두게 됐어”하고 속삭이며 빨리 자리를 뜬다.
그러면서 이씨는 그저 고개 끄덕이며 웃기만 한다.
알아서 새기란 뜻일까?>
1970년대 중반 무렵 대머리집이 헐리고 2층으로 증축되면서 손님의 발길도 차츰 끊어졌다고 한다. 남재희 장관은 허름한 집이어서 편했는데 새로 2층집을 올린 뒤 자주 찾지 않게 됐다고 기억했다.
“기자들끼리 모여 그 집 얘기를 하곤 했어요. 그러니까, 장사가 아무리 잘돼도 옛 터를 헐고 새로 지으면 징크스 때문에 장사가 안된다는 것이었지요. 대머리집을 두고 그런 얘기를 나눴어요.
허름한 공간이 ‘번듯함’으로 바뀌었지만 그 뒤 쇠퇴기로 접어들었다고 봐야지요.”
이씨는 폐업을 앞두고 <선데이 서울> 기자와 만나 장부에 적힌 외상이 150만원 정도라고 했다. 그는 “외상보다 모두 오셔서 이별주나 한 잔씩 나누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외상값을 다 받았을까.
당시 주객 중에 양심고백을 할 사람이 더러 있을지도 모른다.
이씨의 가족과 만나
필자는 극작가 조성현씨의 도움으로 주인 이씨의 장남인 李光洙(이광수·63)씨를 만났다. 그는 부친의 얘기를 들려주면서도 한사코 사진 찍기를 거부했다. 또 집안에 대머리집과 관련된 자료도 남아 있지 않다고 했다.
“대머리집은 부모님의 추억이 담긴 공간입니다. 그 공간은 부모님의 몫으로 돌려드리고 싶어요. 자식이 나서서 왈가왈부하는 모습을 원치 않아요.” 그의 기억에 따르면 외상장부로 쓴 종이는 신문사 기자들이 쓰던 記事(기사)용지를 얻어와 쓴 것이라고 한다. 아버지 손을 붙잡고 신문사, 방송사 견학도 자주 갔었다고 기억했다. “초등학교 시절이었는데 아버지랑 같이 윤전기도 둘러보고 방송사 음향제작소도 들러 재미난 경험을 했었다”는 것이다.
왜 문을 닫았을까. 2층으로 건물을 올린 ‘징크스’ 때문일까.
그러나 이씨는 “2층을 올린 뒤에도 손님이 크게 줄어들지 않았다”고 했다.
대신 4남매 자식들이 이젠 쉬시라고 성화를 부렸다.
아내 김씨도 주방 일이 고됐던지 자식 손을 들어 주었다.
1978년 10월 15일 폐업한 뒤 대머리집은 貰(세)를 줘 인쇄소로 바뀌었다고 한다. 나중에 그 일대가 재개발된 뒤 지금의 주상복합 아파트가 들어서자 장남 이씨가 분양권을 받았다.
대머리집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는 셈이다.
외상값은 다 받아냈을까. 이씨는 “문을 닫은 뒤 선친께서는 외상값을 받으러 다니지 않았어요.
가게를 접었으니 그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가끔 외상값을 갚으러 찾아오는 이도 계셨지요”라고 했다.
대머리집이 사라지고 5년 뒤인 1983년 이종근씨는 62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가게 문을 닫고 아버지가 그렇게 일찍 돌아가실 줄 몰랐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더 하셨어야 했던 것 같아요.
일을 놓으신 뒤 쓸쓸해하셨습니다.”⊙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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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런 술집..우리 시대에도 꼭 필요합니다 인간의 情이 흐르는 곳...아..술 생각 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