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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41 - 명나라 최고 황금기를 이끈 영락제가 정화의 원정 대선단을 파견하다!
원나라를 멸망시키고 한족의 명나라를 건국한 태조 홍무제는 아들들은 번왕으로 임명해 약간의
병사를 주고 마치 지방제후처럼 역할을 주고 있었으니, 개중에는 몽골에 대한 국경
방어 임무를 맡긴 북부의 번왕들이 가장 권력이 강했으니..... 연왕 주체의 세력이 으뜸이었습니다.
홍무제가 죽자 2대 황제에 오른 손자 건문제는 제태, 황자징 등 신하들의 요청에 따라 삼촌인 번왕들을
숙청하려고 들었으니..... 그렇게 주왕, 대왕, 제왕, 상왕이 평민으로 폐위되거나 사형
당했으니 가장 강력한 군사를 지니고 있어 다음으로 숙청당할 것이 뻔했던 연왕 주체는 불안해졌습니다.
연왕 휘하 정예병들이 다른 곳으로 떨어져나가면서 숙청이 다가온 것을 직감하자 선수를 쳐 황제의 눈을 흐리는
간신들을 척결한다는 명분으로 정난의 변을 일으켰으니 주체의 군대가 황궁을 점령하자 건문제는 화재 속에
자취를 감추었고, 연왕 주체는 명나라의 3대 황제에 즉위했으니 명나라의 최고 전성기를 이끌었던 영락제 입니다.
영락제 주체는 1360년 홍무제의 네번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어린 시절에 그는 아버지 주원장 (朱元璋) 이
초적 (산적, 홍건적) 으로 활동하는 것을 보았으니.... 당시 주원장에게는 마씨 부인(훗날 마황후)
외에도 고려 출신 첩이 있었는데 이 때문에 그의 생모가 고려 여인 또는 몽골계 여인이라는 설도 전합니다.
8살 때인 1368년에 아버지 주원장이 명나라를 창건하고 황제가 되었고 훗날 원나라를 북방으로 몰아내고 중원을
회복하는데, 홍무 3년 (1370년) 10세인 그를 북평왕(후일 연왕(燕王) 으로 봉하지만 실제로
북평으로 간 것은 1380년 21세 때이며 청소년기에 학자를 초청하였고, 한번 읽은 책 내용을 잊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명나라 초기의 개국공신의 한사람인 장군 위국공(魏國公) 서달(徐達) 의 딸 서씨(서 황후) 와 혼인
하였으니, 부인 서씨는 영락제가 제위에 올라 황후에 책봉되었지만 그가 황제가 된지 얼마 안되어
1407년 사망했으며 장인 서달은 홍무제의 황권강화책에 의해 그가 보낸 거위(독약) 를 먹고 죽게 됩니다.
영락제는 대외 정벌과 해외 무역로 확장 등의 대외 확장 정책을 펼쳐 주변국을 굴복시켜 조공질서를
명확히 했으니.... 이에 베트남이 명나라에 정복당하여 한때 중국 영토로 편입되기도 하였습니다.
홍무제 시기 연왕(燕王) 에 봉(封) 해졌고 홍무제 사후 조카 건문제(建文帝) 의 제위계승 및 제후 숙청 정책에 반발
하여 '정난의 변' 을 일으켜 남경(南京) 을 함락하고 제위에 올랐으며 이후 북경(北京) 으로 천도를 추진하니
운하 회통하(會通河) 를 완공시켜 남북 물자교류의 교두보를 확보한후 1421년 수도를 남경에서 북경으로 옮깁니다.
건문제가 영락제의 정변에 의해 축출됐을 때 건문제의 스승 방효유는 끝까지 항거하여 가족, 친구, 제자에
이르기 까지 모두 847명이 몰살당했는데, 영락제는 방효유의 친족, 외족, 처족을 비롯한 십족과
문인, 동지, 그의 서적을 탐독하는 인사들을 모두 숙청하고, 집안의 여성들은 노비나 첩,
기녀로 보냈으니 이는 '십족을 멸한다' 또는 '영락연간의 오이넝쿨 당기기' 라는 유행어의 어원이 됩니다.
영락제는 중국 황제로는 역사상 최초로 다섯번에 걸친 막북 친정을 통해 몽골족과의
전투를 지휘했으니..... 이로인해 명은 헤이룽 강 하류까지 진출하여
요동도사를 설치하고, 여진족은 위소에 편입시켰으며 누르칸도사까지 설치하게 됩니다.
이외에도 일본과 동남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패권 확립, 베트남의 정벌, 티베트의 회유와 티무르 제국
과의 전쟁 준비, 정화의 남해 대원정과 문물 교류 등의 팽창정책을 추진했으며 내정에서는
홍무제 방침을 대부분 계승하면서 황권을 강화햇으니 그의 치세로 명나라는 전성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영락제는 즉위 직후 활발한 대외정책을 펼쳤으니.... 먼저 남진해서는 과거 몽골 원나라쿠빌라이
의 5만에서 30만에 이르는 3차례의 침략을 물리쳤던 베트남의 호 왕조를
공격해서 바로 정복하고는 명나라의 일개 지방으로 합병한 뒤 교지라는 국호를 세워 통치합니다.
또한 미래의 위협을 없애기 위해 15년간 5번이나 머나먼 북쪽의 몽골로 쳐들어갔고, 타타르 몽골을
견제하기 위해 오이라트에 3명의 왕을 책봉했으며.... 반대로 오이라트가 득세하자
타타르가 오이라트를 치게 놔두어 누구도 지배세력으로 발전하지 못하도록 만드니 이이제이 입니다!
영락제는 우량카이족과 복여위 (福餘衛), 태녕위 (泰寧衛), 타안위 (朵顏衛) 3위에 자치권을 부여
했으나 이 몽골 3위가 남하해 만리장성 이남에서 목축하는 것은 금지했으며, 북방의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1406년, 1422년에 우량카이족을 공격했고 동북쪽의 여진족을 방비하기
위해 해서 여진과 건주 여진 일대에 초소를 설치하고 환관 이시하를 파견해 변경을 안정시킵니다.
흑룡강 남쪽의 야인여진을 막기위해 1409년에 누르간도 지휘사사를 세워 명나라의 동쪽 국경을 확장
했으며 심지어 저멀리 사할린 섬까지 진출해 그곳 추장에게 명나라의 관직을 내리기까지 했습니다.
영락제는 환관 정화를 시켜 대원정을 벌였으니 중국 역사상 전례 없는 거대한 원정을 벌이며 아프리카의 뿔 까지
진출해 조공을 받았으니.... 대원정 덕분에 명나라의 국제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동시에 서쪽의 티무르
제국을 견제할수 있었으며 명-코테 전쟁 승전을 통해 스리랑카 지역에 친명 정권을 세우고 조공 관계를 확립합니다.
정화가 이끈 하서양 (下西洋) 은 185,000km 로, 원정을 나선 이유는 동남아시아의 조공 무역국을
늘리기 위한 것이라는 설과 티무르제국에 국력을 과시하고 서쪽에서 동맹국을 찾으려
했다는 설에 또한 정난의 변후 생사불명인 건문제를 찾아나섰다는 설과 파양호 대전에서
진우량을 쓰러트린 후에 수십년간 할 일이 없던 수군에게 일거리를 주기 위함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명사’ 는 원정단의 기함은 "보선 (寶船)" 이라고 불리며, 길이 44척 (137m) 폭 18쳑 (56m),
돛대 6개 라고 기록했지만..... 이것을 과장으로 보는 견해가 많으며,
실제로는 그보다 작았을 것이니 2006년 중국측이 복원한 보선의 길이는 63m 정도 였습니다.
1405년에 제1차 원정단은 무려 27,000여명으로 구성되었으니 수군과 승조원 뿐만 아니라 역관, 의원,
천문가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또한 함대의 규모는 총 60여척(240~300여척) 으로 기록되었는데
자바섬과 인도를 거쳐 아라비아와 아프리카 까지 항해했으며 1407년의 2차, 1409년의 3차,
1413년의 4차, 1416년의 5차, 1421년의 6차, 그리고 1430년 7차까지 16여년에 걸쳐 계속됩니다.
함선의 제원에 대해서는 현대 조선공학자들이 의문을 제기하고 있지만 원정단 인원 27,000여명은 참가자
의 다른 회고록에서 교차검증되는데..... 원 사료의 62척은 이 정원이 모두 타기에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현대 학자들은 명나라 선박의 정원 수를 봐서 240~300척 정도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80년후의 콜럼버스의 캐러벨선이 3개의 돛에 200톤 인데 비해 정화의 보물배는 10개의 돛에
1,500톤에 이르렀으니 당시 부딪쳤으면 명나라의 압승이라! 함대는 나침반과
견성판으로 방위를 재고 물시계를 가지고 배의 속력을 따지며 장거리 항해를 했다고 합니다.
정화는 중앙아시아인들이 자주 오던 장안에서 서역의 공용어였던 페르시아어 능통자를 찾아 고용하고,
난징에 외국어 교육기관을 설립해 통역원들을 훈련하는 등 철저히 준비했으며 함선의 크기 뿐만
아니라, 정원 27,000명, 60 ~ 300척의 함대도 보급을 고려하면 탐험단으로서는 터무니 없이 많습니다.
1405년 부터 3년간 제1차 원정시 함정 62척에 승무원 27,800명 으로 편성되었는데... 유럽의
배들이 온 것은 93년후로 바스코 다 가마 가 인도에 다다른건 1498년이었으니
중국 배의 길이는 150m 폭이 60m 3,100톤 으로 바스코가 인도로 올때 제일 큰게 700톤입니다.
그 무렵인 1492년에 콜럼버스 대서양 횡단시 사용된 산타마리아호는 230톤 에 불과했으며....
그리고 200년후인 1631년 일본 센다이 번주 다테 마사무네 의 가신 하세쿠라가
로마 교황청에 가기 위해 만든 서양식 배의 크기는 길이 32m 에 폭이 10m 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정화의 원정 을 계기로 특히 산악지방에 살아 농지가 부족했던 복건성 주민들이 대거 동남아로
이주하니 필리핀, 베트남과 태국 그리고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의 상권 을 장악 합니다.
정화는 훗날 포르투칼이나 스페인 처럼 미지의 해로가 아니라, 철저히 기존에 알려져 있던 해로로
갔기 때문에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닌데, 송나라때 이슬람 상인들은 동남아시아를
거쳐 중국에 왔을뿐만 아니라 고려의 벽란도까지 왔는데, 조선의 <혼일강리역대
국도지도> 에 아프리카 대륙 지리까지 상세하게 묘사된 것 역시 이슬람 지리학의 영향입니다.
정화의 원정단이 닿은 동남아시아, 인도양의 도시, 아라비아반도, 페르시아만, 홍해, 아덴만, 동아프리카 해안은
이슬람 상인들의 주 활동영역이었기 때문에 기항지는 쉽게 찾을수 있었고, 보급에는 별 문제가
없었을 것이며, 원정의 목적이 티무르 제국을 견제하기 위해 이슬람 상인들의 활동으로 알려진
인도양, 중동, 아프리카에 명나라의 위세를 떨치는 것이었으므로, 많은 병력을 데려가는게 필요했을 것입니다.
제1차 원정(1405년 6월 15일~1407년 9월 2일)
난징에서 출발해 장강을 따라 동중국해로 나간후, 남서쪽으로 연안을 따라 항해하여, 참파와
수마트라를 거쳐 인도네시아의 팔렘방에 닿았다. 여기는 화교
출신의 중국인 해적 진조의가 현지인 왕을 몰아내고 자신이 지배자 노릇을 하던 곳이었습니다.
정화 함대는 팔렘방에 기항해 중간기지로 삼았고 서진했으나 말라카 해협을 지날때, 진조의의 해적단과 교전을 벌여
남중국해를 주름잡던 진조의를 생포하자 압송하기 위해 서진을 중단하고, 뱃길을 돌려 난징으로 돌아왔습니다.
영락제는 정화의 원정 성과에 흡족했고, 명나라에 와서 무역과 향락을 즐기던 외국인들에게도 관대한
태도를 보였으나, 광둥성 출신 한족으로서 오래 전부터 해금령을 어기고,
노략질을 일삼았던 해적 진조의에 대해서는 명나라의 체면을 지키겠다는 취지로 처형을 결정합니다.
진조의 사건으로 인도양의 나라들이 명나라가 보낸 원정함대에 대해 신뢰를 보내게 되었고, 이후 정화는 여러 나라들
사이 분쟁에서 중재를 맡게 되었으며... 귀국길에 여러나라의 사절단을 데려가기도 했는데,
이들은 영락제에게 큰 환대를 받았으나 문화적인 차이로 인해 중국인들에겐 여러 논란의 불씨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제2차 원정(1407년 9월 13일~1409년 여름)
제1차 원정후 10일만에 다시 출발했으니 인도네시아의 팔렘방에서 서쪽인 타이, 자바 섬, 실론 섬을 거쳐 인도
서해안인 캘리컷에 도달했으니, 이때 실론(스리랑카)에 한문, 타밀어(현지어), 페르시아어(서역 공용어)
3개 국어로 된 비석을 남겼는데, 비석은 한동안 잊혀졌다가 1911년에 재발견되어 정화의 원정을 증명했습니다.
제3차 원정(1409년 10월~1411년 7월)
난징을 출발해 실론섬의 감폴라 왕국을 정벌했는데, 이들은 제2차 원정 때 실론 섬에 상륙한 명나라
의선발대를 몰살하고, 노략질을 벌이는등 명나라에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으나 병력이 미진하여
정화는 그냥 귀환했지만 이번 정벌은 알라케스와라 (Vira Alakesvara) 왕을 사로잡아 데려옵니다.
이때 감폴라 왕국은 일부러 정화의 상륙을 허용하며 콜롬보에 정박하던 정화의 본대로부터
정화를 떼어놓으려 했으나, 정화와 그 부하들이 왕궁을 급습하여 왕과 왕족
및 신하들을 모두 잡는 바람에 전열을 정비해보지도 못하고, 명나라군에게 제압당했습니다.
영락제는 알라케스와라왕을 관대하게도 사면해 평민으로 만들고, 난징에 온 실론의 대사로
부터 왕위를 추천받은 옛 왕족의 후예인 파라크라마바후 6세에게 넘겼으며, 이후
알라케스와라를 실론으로 돌려보내는 선에서 명 조정은 감폴라 원정을 마무리 지었습니다.
원정 다음해인 1412년, 실론에서는 파라크마라바후 6세가 코테(Kotte) 에서 새 왕국을 개창하여 코테 왕국
(1412년~1597년)이 들어서게 되었고 실론을 지난 정화의 원정대는 인도의 캘리컷에서 더 서진해
페르시아만을 거쳐 홍해 아덴에 갔다가 귀환중에 조공국인 수마트라 국왕의 요청을 받아 반란 세력을 토벌합니다.
제4차 원정(1413년 11월~1415년 8월)
아프리카의 케냐까지 도달했는데, 케냐의 말린디 특사가 "기린" 을 조공했는데, 이것은 giraffe 이니
중국 고대의 전설로 상상종인 기린과는 다른 동물이었지만, 특사가 이것을 '게린' (Gerin)
으로 발음하자, 중국인들은 발음과 모양의 유사성 때문에 이를 상상속의 동물인 기린으로 여겼습니다.
영락제는 매우 기뻐하여 특사에게 큰 상을 내린 뒤, 이를 그림으로 기록하라 했으니 현재 남아있는 판본은 청나라때
원본을 보고 그린 모사작인데, 중국인들은 이 동물이 신화속의 동물인 '기린' 이 아님을 알게 되었고, 현재는
'장경록' (长颈鹿, 목이 긴 사슴) 으로 부르는데, 제4차 항해 이후 중국인의 무역활동은 호르무즈까지 확장되었습니다.
제5차 원정(1417년 6월~1419년 8월)
아프리카 동부 소말리아의 모가디슈에 닿았는데 중간에 갈라진 분함대는 1420년 여름에
귀국하면서 얼룩말, 코뿔소 같은 아프리카 대륙의 귀한 동물들을 실어 왔습니다.
제6차 원정(1421년 1월~1422년 8월)
이 원정은 1~5차 원정때 명나라에 데려왔던 조공 사절들을 본국으로 돌려보내기 위한 원정인지라
항해 기간은 짧았으며, 본대에서 갈라진 분함대들이 아프리카,
인도와 아라비아의 여러 곳으로 퍼져나가 30여개국에 달하는 사절들을 고국에 돌려보냈다고 합니다.
항해 중단기(1422년~1430년)
제6차 원정후 항해가 중단되었는데... 1424년 명나라 함대의 보급기지 노릇을 하던 인도네시아의 팔렘방에서 왕위
계승 분쟁이 일어났고, 한 왕자측이 명나라의 개입을 요청하여 중재하기 위해 정화의 함대가 다시 떠났으며
정화는 팔렘방 왕을 책봉하고 난징에 귀환했으나, 돌아오자 영락제가 1개월 전에 붕어한(1424.7) 것을 알게 됩니다.
이후 인종 홍희제가 즉위했으나, 천도 및 재정상의 이유로 원정은 무기한 연기되었는데, 홍희제는
베이징을 싫어했기 때문에 다시 난징으로 재천도하려 했고, 이를 위해 정화를 수비태감에
임명해 천도의 사전 정지 작업을 맡겼으니 대를 이은 황제들의 정화에 대한 신임도를 알 수 있습니다.
정화는 1425년 난징 천도 작업을 준비해 불교 사찰인 대보은사의 재건을 떠맡게 되었는데 이슬람 신자긴 했지만,
다른 종교에 관용적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으며, 홍희제는 난징으로 오지 못한채 1425년에 붕어했고,
대보은사는 1431년 공사가 끝났는데 절은 난징의 랜드마크였으나 청나라 말기 태평천국의 난때 파괴되었습니다.
제7차 원정(1431년 1월~1433년 7월)
선덕제는 항해 사업을 재개하기로 결정하니 정화는 나이가 많다며 사양했으나 결국 정화를 대신할 인물이
없어 제7차 항해까지 책임지게 되어 정화는 성지 메카에 도달해 참배한
것으로 보이지만 오랫동안 고생한 것이 탈이 났는지 1433년 4월, 제7차 항해에서 돌아오던 중 사망합니다.
시신은 원정대 관례에 따라 예를 갖추어 인도양에 수장되었으나 본국에 가묘가 만들어졌는데, 원정대는 정화의 부관
이었던 환관 왕경홍이 지휘하여 명나라로 돌아왔으며 이후, 항해의 재개가 논의되었으나 정화를 대신할 인물이
없고, 이런 해외 진출에는 반대가 많아서 선덕제 역시 외정을 삼가고 내정에 치중하면서 항해 사업은 막을 내립니다.
원정의 첫번째 목적인 티무르 제국 견제는 티무르 사후 제국이 지지부진해짐에 따라 필요가 없어졌고, 폐주 건문제
추적 또한 영락제의 권력이 공고화됨에 따라 필요가 없어진 반면에 북원과의 전쟁은 엄청난 전비를 소모했고,
대선단을 보내는 데도 엄청난 비용이 들었기 때문에 선덕제가 내정에 치중하면서 대규모 원정대를 꾸리지 못합니다.
결국 정화의 원정에 비해서 훨씬 적은 지원을 받으며 소규모 선단을 꾸린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작은 배
몇척으로 신대륙을 발견하고 탐험한 것이 이후의 세계사를 크게 바꾸고, 여러차례 탐험에
대한 상세한 기록까지 남겨진 것에 비하면 정화의 원정이 남긴 영향과 기록은 지엽적인 수준에 그쳤습니다.
명나라 입장에서는 해양로를 확보하는 것보다는 북방 국경 방어가 훨씬 중요한 문제였으니 명나라를 포함한 대다수
의 중국 왕조들은 항상 서쪽과 북쪽의 유목민족들을 경계했으니, 송나라가 문치주의를 표방하다가 군사력이
약화되어 북방 유목민 국가인 요나라, 금나라, 몽골 제국에게 잇달아 시달리고 막대한 공물을 바치다가
원나라에 결국 정복당해 100여년 동안 몽골의 압제를 받은 것은 한족 왕조인 명나라에게 큰 귀감이 되었습니다.
명나라는 유목민이 세력을 확장할수 없도록 예방전쟁을 벌이거나 이이제이로 분열시켰는데, 임진왜란
이 일어났을때 일본군의 침공에서 제후국 조선을 지키느라 연인원 25만을 보내니
워낙 장거리라...... 군량과 무기 수송에 국력을 탕진하는 바람에 여진족을 통제하는데
소홀히 하는 바람에 건주여진의 추장 누르하치는 여진족(만주족)을 규합하여 통일하는데 성공합니다.
후금은 조선에 대군을 보내 재정적자에 빠진 명나라가 중세를 하면서 농민반란이 일어나 나라 전체가 혼란에 빠진
명나라를 지속적으로 공격해 멸망시키게 되는데.... 쇠퇴기에 접어든 명나라가 사태를 직시해 조선에
파병하지 않고 압록강에 군대를 주둔시키고는 여진족들을 통제했더라면 저리 허망하게 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명나라는 농촌 지주들인 향신들이 지배층이어서 농업을 국가 경제의 기본으로 삼았으니농업 노동력의 상실을
막기 위해 해금령을 내려 중국인들이 바다로 건너가는 걸 엄격하게 금지했으며, 위반자는
사형으로 다스렸을 정도인지라 이런 향신들은 해외를 돌아다닌 정화의 원정을 그리 곱게 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날 남사군도 분쟁에 관해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이 “우리는 (헤이그) 중재법정의 판결을 갖고
있다.” 라고 반박하자, 시진핑 주석은 “맞다. 하지만 우리는 역사적 권리를 갖고 있다. 당신들은 최근
판결만 가졌을 뿐”이라며 명(明)대 초기 정화(鄭和)의 남중국해 원정을 언급하며 중국 해역이라고 주장합니다.
정화함대가 약탈적인 포르투갈인들과 달랐던 사례로는 스리랑카에 남긴 비문은 중국어, 타밀어, 페르시아어
3가지로 되어 있었는데, 페르시아어 비문에는 "하나님(알라) 덕분에 무사한 항해가 가능했다."
타밀어 비문에는 타밀족 힌두교도들을 고려하여 힌두교에 관련된 내용이, 한문 비문에는 외교 성과와
관련된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으니 무슬림 출신이지만 불교와 도교, 유교에 대한 이해가 높았던 것입니다.
정화 원정대가 거쳐갔던 말레이시아의 말라카에는 정화의 석상이 세워져 있고, 인도네시아의 팔렘방에는
정화 모스크가 세워졌으며 중국에서는 정화가 첫 항해를 떠난 날인 7월 11일을
중국항해일 (中国航海日), 즉 '바다의 날' 로 기념하는데, 성조 영락제는 왜구의
행패를 뿌리봅기 위해 일본 원정을 논의했으나 원나라의 일본원정 실패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중단합니다.
영락제 명으로 3년만에 완성된 영락대전은 총 본문 22,877권, 목록 60권인 것을 1책 당 2권으로 묶어 10,095
책으로 엮어냈으니 7,000만 단어에 총 글자수는 무려 3억 7,000만 자에 달할 정도로 방대한 분량을
자랑했는데... 영락대전을 뛰어넘을만큼 거대한 장서는 훗날 청나라 건륭제가 만든 사고전서 밖에 없습니다.
영락대전은 1410년 완성됐지만 방대해 명 황제들 중에서도 오직 홍치제와 가정제 밖에 읽어본 사람이 없었다고
하며, 1405년부터 베이핑을 베이징으로 개명한 뒤 1421년 공식적으로 도읍을 옮겨 천도했으니 자금성이
세워진 것도 이때니 명나라가 국력이 절정에 달했기에 영락제의 통치기를 '영락성세 (永樂盛世)' 라고 부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