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사랑을 찾고, 사랑을 하고, 사랑을 잊는 과정을 겪으며 살아간다. 사랑은 처음 마주본 순간의 황홀한 떨림에서 시작될 수도 있고 그 사람의 결핍된 부분을 발견한 순간에 배태될 수도 있다.
혹은 이별의 인사를 나눈 후 각자의 길로 돌아선 시점부터 비로소 진짜 사랑이 전개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을 만나고 느끼고 마음으로 떠나보내게 되는 그 모든 순간에 우리는 과연 사랑을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내가 '아는' 사랑과 '하는' 사랑은 오차나 편차 없이 완벽하게 조응되고 있는가.
사랑에 관한 한 내가 아는 가장 섬세한 사유는 이 책,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에 들어 있다. 한 사람을 만나 알게 되고 그 사람의 전화를 기다리고 그 사람이 다른 이와 웃고 있는 것을 목격하며 질투를 느끼는 세부적인 사건들은 대부분의 연애에서 발견되는 보편적인 일들이지만, 그 과정은 타인의 관여 없이 오로지 나 혼자서만 감당해야 하는 아주 긴 시간이므로 늘 개별적이다.
이 책에서 언급되는 '사랑의 주체'는 연인의 한 마디에 스스로를 부정하는 고통을 겪는 한편 매혹된 순간부터 이별의 고통을 예감하는, 자신의 감정에 미친 듯이 빠져 있으면서도 그 감정을 신뢰하지 않는 방식으로 사랑의 과정을 견디는 자이다.
그에게 사랑의 욕망은 상투적인 상처로 귀결되기 일쑤이고, 그 상처는 진짜냐는 혹은 충분하냐는 질문 앞에서 자주 의심 받곤 한다. 자신의 행동과 감정을 냉철하게 분석할 줄은 알지만, 현실에서의 그는 반복되는 시행착오를 겪을 뿐만 아니라 그때마다 똑같은 분량으로 아파한다.
의심과 반성, 집착과 초탈 사이를 오가며 그 누구도 위로해줄 수 없는 깊은 고통에서 빠져나오면 그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말없이 연인의 전화를 기다린다. 끝은 없다. 그저, 기다릴 뿐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숙명적인 정체는 기다리는 사람, 바로 그것이므로.
롤랑 바르트가 들려주는 사랑에 관한 사유는 어쩌면 자신의 욕망을 발견하고 인정하는 과정에 대한 내밀한 헌사일지도 모르겠다. 그 욕망은 의외로 단순한 것이 아닐까.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만큼 당신도 나를 사랑해주면 좋겠다는, 단순하긴 하지만 한없이 아픈 욕망.
사랑에 대해 많이 알고 깊이 성찰한다고 하여 사랑을 잘 한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자신의 감정을 의심 없이 믿고 모든 표현에 솔직하며 내일이 되면 어제의 환멸과 치욕 따위 깨끗이 잊을 수 있는 사람이 능력 있는 연인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진실이란 의심 받고 허물어지고 다시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견고해진다. 투명해진다.
누구나 사랑을 잃어본 경험이 있다. 사랑하는 매 순간 자신의 감정 속에 깊이 투신해 본 자들은 사랑이 끝나고 난 후에도 '소비'되는 추억이 아니라 '성장'하는 이야기로 지나간 시간을 향유한다. 물론 이야기가 추억보다 더 행복한 거냐고 묻는다면 할 말은 없다. 빨간약과 파란약 중에서 무엇을 선택할지는 언제나 그렇듯 우리 각자의 몫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