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10여년 전 한겨레신문 김종철논설위원을 만나 한글 명패 쓰기와 조선일보의 한자복권운동에 관한 의논을 하기 위해 마포의 한 식당에 갔을 때 김종철선배가 [문익환 목사를 한번 만나라. 우리말과 한글을 걱정하시더라. 만나서 함께 활동할 길을 찾아보라.]라고 말했으나 만나지 못했다. 문익환 목사가 북한에 갔다 온 바로 뒤였고, 한자파 남광우가 어문회 행사 때 국어운동학생회 출신을 [빨갱이 같다]라고 말하는 걸 들은 게 걸려서 망서렸고, 백기완선생을 조선일보 한자복권 반대 강연에 모실 때 한글쪽 여러 어른들이 꺼리는 걸 본 것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그 얼마 뒤 문 목사님을 이 세상을 뜨셔서 만나뵙지 못했다. 그런데 경향신문에서 아래 글이 있어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옮긴다. 그 때 쯤 김종철선배 소개로 한글문화연구회 박용수 선생도 만난 일이 있다.
문익환 평전]유엔사 한국어학교 교장을 맡다
1951년 7월, 정전회담이 처음 시작될 때의 분위기는 10여 일 정도면 충분히 휴전이 성사될 것 같았다. 그러나 실제로 체결되기까지는 거의 2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 지난한 과정을 보면서 문익환은 미국이 천국으로 가는 대문 근처에 있는 나라라는 생각을 말끔히 털어버렸다. 전쟁은 끔찍한 유혈과 파괴를 가져왔지만 그것을 인내한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가져다주지 않았다. 남과 북에서 작전을 수행한 한반도의 장성들은 모두 이 전쟁에서 자신이 얻어야 할 바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 숱한 군사작전이 다 무엇을 위해 사용되었다는 말인가.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하여 3년 1개월 이틀 만인 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조인으로 막을 내린 전쟁은 2백만이 넘는 엄청난 사상자를 냈지만 38선을 휴전선으로 바꾸었을 뿐 전쟁 전이나 후나 상관없이 분단 상황을 고스란히 유지시켰다.
이미 중년의 입구에 들어선 문익환에게 그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만약 신이 문익환을 전쟁 속으로 끌고 들어간 뜻이 있다면 그것은 이 잔혹한 폭력의 세기를 목격시키기 위해서였을 것이며, 그를 판문점으로 데려간 뜻이 있다면 그것은 약소국의 초라함을 가르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문익환은 그 막다른 역사의 골목에서 그리스도의 길을 찾고자 했지만 구원의 길은 없었다. 나날이 확인되는 것은 오직 20세기의 검은 발자국뿐. 희망이라고는 없었다.
한 나라에 두 개의 정부가 있고, 각각의 정부는 조직적으로 수립되어 있으며, 그것은 각기 국민의 의지를 나타내고 있었다. 그리고 양측은 모두 상대가 먼저 전쟁을 걸어왔다고 주장했다. 문제는 거기에 자신들의 의지가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한다는 점인데, 그것은 전쟁 상황이 그대로 웅변하고 있었다.
이 전쟁에서 만일 미국의 개입이 없었다면 북측은 분명히 승리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이승만 정부가 축출되고 공산주의형 정부가 수립되며 미처 피하지 못한 반공주의자들은 살해-투옥-추방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생긴 체제는 무력에 의한 것일 뿐 인민의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닌 까닭에 국제 사회로부터 고립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역으로도 마찬가지였다. 미군이 북측을 이겼다면 의심의 여지없이 공산체제가 축출되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이승만은 한반도 전역에 자기 정부를 수립하고 반대자를 잔혹하게 억압했을 것이다. 그때도 피할 수 없는 사실은 별로 자주적이지도 못한 정부를 세우는 데 숱한 피를 흘렸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지배적 체제와 대안적 체제의 각축 속에서 펼쳐지는 목하 20세기의 곤혹과 딜레마는 아직 그 종착지를 예측할 수 없이 흘러만 가고 있었다. 그 속에서 한반도의 사람들이 얻을 것은 이데올로기요 잃을 것은 평화밖에 없는 전쟁을 대행했다고 생각하면 서글플 따름이었다. 20세기란 바로 그렇게 구축된 세계였다.
제2차대전 후 더욱 강해진 미국과 소련은 최고 권력의 자리를 놓고 경쟁하고 있었다. 미국은 소련보다 강했지만 카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이 언급하고 러시아혁명이 보급시킨 '사회주의라는 유령'은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그 둘의 긴장과 갈등을 일컬어 '냉전'이라고 부르는 것은 참으로 절묘한 은유에 속했다. 미국과 소련간에 직접적인 전쟁은 없었다. 하지만 다른 나라들 사이에서 충돌이 있을 때마다 그 두 나라는 서로 적대하는 세력에 가담해서 싸움을 거들었다. 한반도가 특히 불행한 것은 그 두 진영을 가르는 격렬한 전선이 온전한 국가와 국가의 경계에 그어진 게 아니라 36년간의 학대를 이제 겨우 빠져나온, 그래서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 나설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가 난한 나라의 허리에 그어졌다는 점이었다.
판문점은 그것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장소였다. 무슨 사고가 있으면 북측에서 항의를 해오게 마련이고, 그렇게 되면 예의 공동조사팀이 구성되는데, 그랬을 때 나서야 할 양측 연락장교는 정해져 있었다.
하루는 이런 일이 있었다. 북측에서 별안간 항의가 들어왔는데, 미국측의 담당자인 커널 테로우와 키니가 그날따라 모두 본국으로 휴가를 가버리고 없었다. 하는 수 없이 한국군 연락장교 이수영 대령이 남측 대표로 나갔다. 그날은 하필 문익환은 도쿄로 돌아가고 정경모도 서울로 외출을 나갔던 터였으므로 호레스 언더우드라는 연세대학교 이사가 통역을 했다. 공용어가 영어라는 사실은 그들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한국인 장교는 서툰 영어로 말하고 미국인 통역자는 서툰 한국어로 통역했다. 그런 상황에서 북측이 먼저 항의를 했다.
"귀측의 비행기가 우리 마을에 들어와 기관포를 쏴서 어린애가 죽었소. 이건 정전협정 위반이오."
주장인즉 38선 남부 2㎞에 속하는 비무장지대에서 비행금지조항을 어기고 미군 비행기가 넘어 들어가 기관포를 쐈다는 것이었다. 미군 헬기가 한적한 민가의 세 살 난 어린애를 사살했다는 항의인데 그 같은 작전이 미군측에는 보고 된 바가 없었다. 이에 남측 대표 이수영 대령이 응대했다.
"우리측 비행기가 귀측 촌락에 들어가서 기관총을 쏘아서 귀측 어린애가 죽었다는 사실이 우리측 기록에는 없습니다."
이수영 대령은 분명 한국인이건만 우리 미군 비행기가 휴전선 근처를 침범하여 당신네 한국의 촌락에 있는 한 어린애를 죽였다는 보고를 우리 미군은 접수한 바가 없다는 의사를, 그것도 서툰 영어로 밝혔고, 그것을 다시 한국의 미국인이 서툰 한국어로 통역했던 것이다. 그리고 회담이 끝나 해가 뉘엿뉘엿 서쪽으로 떨어지는 무렵이었다. 회담장을 빠져나와 서로 갈라지는 지점에서 북측 장춘삼 대좌가 마침내 역겨워 못 견디겠다는 듯이 시비를 걸었다.
"여, 이수영 대령! 우리말 다 잊어먹었나?"
그때 언더우드의 음성으로 통역된 이수영 대령의 답변이 이랬다.
"우리는 자유민주주의니까 영어로 말하고 싶을 때는 영어로 하고, 한국말로 하고 싶을 때는 한국말로 한다. 그건 우리 자유다!"
북측의 사고로는 납득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까닭에 장춘삼 대좌가 가래침을 탁 뱉으면서 기어이 욕설을 해버렸다.
"에이, 개새끼야!"
이 슬픈 에피소드야말로 당시 한국의 운명을 드러내는 희극적 상징의 하나였다. 북측의 엘리트들이 이데올로기에 경직되어 있다면 남측의 엘리트들은 한낱 '변방의 지식인'으로 전락해 있었다. 양측 어디에도 비극을 인식하는 능력이 결여돼 있었다. 정경모는 그것이 가져다주는 환멸을 피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문익환은 자신의 생각을 일체 드러내지 않고 주어진 업무에만 충실했다. 분명히 같은 장소에서 습득된, 전쟁의 내장을 들여다본 자의 비애는 어디로 가버렸단 말인가. 아마도 그 상황에서 두 사람은 서로에게 넘어설 수 없는 심연의 강이 흐르고 있음을 확인했을 것이다. 정경모는 그토록 다정한 '익환 형님'과 역사의 고민을 나눌 수 없다는 것을 느끼고 안타까워했으며, 문익환은 또 나름대로 정경모가 너무 예민하여 자칫 사회주의 사상에 경도될 가능성이 있음을 염려했다. 한국전쟁은 그렇게 아주 가까운 개인과 개인 사이에도 휴전선을 만들어갔다.
하지만 전쟁은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그 지겨운 회담이 종료되고 마침내 '종전' 아닌 '휴전'이 선포된 후에도 총성 없는 전투가 진행되었다. 양측에 잡힌 포로 가운데 본국으로 송환되는 것을 거부한 숫자가 2만3천여 명에 달했는데, 그들 송환 거부 포로들에 대한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 사이의 치열한 이데올로기 싸움이 그해 9월부터 시작되어 이듬해 2월 말까지 6개월 동안이나 계속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문익환에게 또다른 임무를 떨어뜨렸다.
당시 유엔사령부는 미군에게 한국말을 가르칠 랭귀지 스쿨을 운영하고 있었다. 아사카(朝霞)에 있는 그 한국어학교에서 문익환은 교장이 되고 정경모는 교무주임이 되었다. 그곳에서 문익환은 우리말을 전혀 모르는 미군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면서 우리말의 과학성과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그것이 훗날 한글 풀어쓰기 운동을 비롯한 극진한 모국어사랑으로 지속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아울러 그 시절은 문익환의 생애에서 가장 안정되고 경제적으로 윤택한 생활이 보장되기도 했으니, 문익환은 삶의 기쁨을 그곳에서 찾았다.
사실 일본은 그때까지도 가난한 나라에 속했다. 조선전쟁을 통해 별안간 급속한 성장을 하고는 있었지만 미국과 경제 수준의 차이가 커서 일반 직장인이 고급 승용차를 타고 출-퇴근하는 정도는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그러나 문익환-정경모 등은 비록 한국인 군속일지언정 엄연한 유엔사령부의 일원이었고, 그곳에서 달러로 받는 월급이 상당했다. 특히 문익환의 경우는 박용길의 형부가 당시 일본 대사관의 서기관이어서 두 가족이 함께 살았는데, 한 지붕 아래 미제 승용차를 두 대나 두고 있었다. 그리하여 월남과 피난과 전쟁 속에서 태어나 배고픈 유년기를 보내야 했던 자녀들에 대한 마음의 빚을 한 사람에게만은 지지 않을 수 있었다. 바로 막내 성근이 윤택한 환경에서 태어났던 것이다.
하지만 그 생활도 오래 갈 수는 없었다. 한글을 모르는 사람에게 우리말을 가르치는 기쁨은 컸지만 그마저도 전쟁의 악취를 벗어날 수 없었다. 순전히 포로로 잡아온 인민군을 심문할 때 사용되는, 나이는 몇이고, 고향은 어디며, 군대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를 캐묻는 일을 돕는 것이야말로 '전락'에 다름아니었다. 송환을 거부하는 포로를 한 사람이라도 더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양측의 귀환 설득 노력은 어떤 무력전쟁보다도 더 치열하고 음험했다. 왜놈의 앞잡이를 그렇게 미워했는데 알고 보니 미국놈의 앞잡이가 되다니!
결국 진정한 의미에서의 한국전쟁은 남과 북의 어느 쪽도 거부하고 끝까지 중립국을 택했던 86명의 포로가 인도 관리군 마지막 부대와 함께 인천항을 떠난 1954년 2월 23일에야 최후의 막을 내렸다. 전쟁의 폐허로부터 살아남은 것들은 모두 전란에 파괴되어버린 그들의 출생지로 돌아갔다. 문익환의 가슴에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체제 혹은 사회 제도에 대한 환멸이었다. 전쟁이 안겨다 준 숱한 죽음에 대해서, 적군도 죽으면 적군이 아니고 동포가 되는 그런 뼈저린 비극에 대해서 그는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다만 그 죽음이 삶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호소한다는 사실을 하나의 신앙으로 승화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마도 민족통일의 가장 큰 장애가 되는 남북 간의 '적개심'의 발원지이자 '불신의 벽'으로서 이 체험은 오래 갈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영문도 모른 채 떠맡게 된 분단의 종사자 역할을 그 지점에서 끝냈다
김형수[소설가-중앙대 예술대학원 객원교수]
장남 문호근과의 '고집대결'
인간의 서사는 때로 불합리한 길을 따라 걷는다. 산의 정상에 닿기 위해 봉우리를 등지는 내리막을 하산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을 오르막이라 부를 수도 없는 노릇이다. 문익환의 중년 세월이 그랬다. 깊고 깊은 생활의 계곡에서 허덕이고 있을 때 그가 과연 모세의 길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든 완전주의자들이 그렇듯이 결벽을 버리지 못해 작은 일로 바둥대는 처량하기 그지없는 소시민적 고투를 세상은 애써 기억하려 들지 않는다.
당연히 지상에는 문익환의 40대가 어떻게 저물었는지 기록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없었다.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고 한-일협정이 체결되며 〈사상계〉지를 앞세운 장준하의 정치운동과 함께 함석헌-김재준 목사의 주위에 광범한 재야 지식인 그룹이 출현하는 그 숱한 시간 속을 문익환은 어떤 모습으로 통과했던가? 훗날 수없이 많은 단체와 출판사가 작성한 문익환 연보에도 그 시기의 일들은 송두리째 빈칸이 되었다. 전체를 통틀어서 언급되는 것이라곤 1965년 48세가 되던 칸에 덩그마니 '미국 유니온신학교에서 1년간 수학'만 놓여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1960년대 초엽의 어느날, 한약을 먹고 쓰러져서 귀가 먹은 이후로 그 영혼은 하루에 한 알씩 사과를 축낸 것밖에는 한 일이 없었다는 말인가? 아버지가 매일같이 사과 하나씩 먹되 한 번도 나눠주지 않는 것을 막내아들은 납득하기 어려웠다.
땅 위의 인간들이 뿜어대는 모든 시선은 하늘의 별빛처럼 저마다의 자리에서 투사되는 법이다. 인간 하나하나가 오직 만물의 척도이어니. 문익환은 주변의 누구에게도 자신의 그 시절을 납득시킬 수 없었다. 언젠가 그를 도쿄 유엔사령부로 보낸 이가 장면 총리이고, 군사쿠데타로 밀려난 윤보선 대통령이 공덕귀 여사와 선볼 때 박용길의 남편 자격으로 불려나가기까지 한 내자측 최측근이라는 점만으로도 그가 정세의 흐름에서 깜깜하게 살아도 되는 처지는 아니었다. 한 술 더 떠 군사쿠데타의 주역을 맡은 만주군관학교 인맥들은 온통 광명중학의 동창이거나 선-후배였으니(아뿔싸! 목숨을 걸고 혁명공약을 발주한 업체 이름까지도 광명인쇄가 되다니!), 문익환에게 낯선 이라면 박정희와 김종필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만큼 배우고 리더십도 있었다면 무슨 일을 해도 했어야 옳았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복음동지회 친구들과 '조언하기 게임'을 할 때 전택부가 적어준 "야인이 되소서. 험하게 놀기도 하시고..."는 정곡을 정확히 찌른 촌철살인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그러나 관심을 막상 문익환의 내면 쪽으로 돌리고 보면 아무리 전택부라 할지라도 그렇게만 말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당시 문익환은 기웃거리지 않는 곳이 없을 만큼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이승만 정부가 간간이 저지르던 암살의 기억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시절의 재야였지만 그런 동네라 해서 문익환이 피해간 것은 아니었다. 김경재가 쓴 〈김재준 평전〉은 1960년대 후반기를 논하며 "박형규를 비롯하여 장준하-천관우-김관석-한승헌-이문영-서광선-현영학-이극찬-홍동근-안병무-이우정-서남동-문익환-문동환-김용준-신애균-강문규-김찬국-지명관-박상증 등이 김재준이라는 인물을 구심점으로 해서 반독재 지성인 그룹을 형성"했다고 서술한다.
현실 개혁에 앞장서지는 못했을망정 문익환이 세속의 구원에 무관심했을 턱은 없다. 추측컨대 그는 아마도 거장들의 뒷모습을 열렬히 응원하며 전위에 있는 자들을 부러워하고 추앙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타자와의 관계에서 자신에게 결여된 것을 끝없이 확인하고 객관화시키는 '아름다운 뺄셈의 사상'을 보유한 자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문익환이 공개적으로 '콤플렉스를 느끼는' 행위가 얼마나 적극적인 현실참여의 일환이었는지 이웃들이 깨닫는 데는 그후로도 무려 10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그렇다면 문익환의 40대 후반은 차라리 그의 개인사에서 가장 거족적인 약진이 이루어진 시기로 평가되어야 옳다. 그 고요한 소시민적 일상에 배어 있던 고투의 냄새들은 훗날 낱낱이 예언의 말씀으로 전환되었다.
혹자는 너무도 빨리 거물이 되며 보란 듯 스승이고 말지만 완전주의자 문익환은 너무도 오래오래 소년이길 고집했고 학생이길 희망했다. 조금도 서두르지 않고 끈기 있게 견디며 자신의 작업을 진행할 때 이따금 찾아오던 경제적 빈곤감과 장기간의 신경쇠약 그리고 참기 어려운 불면 속에서 그의 신학 세계는 한 걸음 한 걸음 익어갔다. 그의 동료들이 애독하던 〈기독교사상〉은 거의 한 호도 거르지 않고 문익환의 글을 실었다. 1962년 11월호부터 다섯 차례에 걸쳐 연재되는 '예언운동의 개척자들'은 대표적인 사례였다.
완전주의자! 스스로 납득되지 않는 일을 하지 못하는 사람!
세상은 그런 자에게 언제나 두 몫을 맡기고도 쉬이 결실을 안겨주지 않는다. 문익환의 까다로운 한글 사랑은 성서 번역에서 한없이 완성도를 높이되 마침표를 찍기도 어렵게 만들었다. 완전주의의 불완전성이 여기 있었다. 하지만 성서 연구와 한글 연구가 똑같은 비중으로 개진되는 와중에서 그는 중요한 '생의 숙제' 하나를 해치웠다. 함경도에서 북간도로, 북간도에서 남한으로, 이후 서울의 허공에 떠버린 저 어둡던 날의 '19세기로부터의 망명자들'의 공동체를 육신화하는 고구려적 현현체로서의 가족을 수유리 한신대 캠퍼스 안에 무사히 안착시키는 위업을 남기는 것이다. 그런데 위업이라?
한국인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가문에 대한 헌신은 한 가문이 다른 가문과 물질적 부를 다투는 고질병 중 하나였다. 문익환의 가족애 역시 다른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비도덕적 가족주의와 다르지 않게 자녀들의 향학열을 부추기고 각자의 소질을 계발토록 하는 보살핌으로 작용했다. 그것은 그 모습 자체로만 보면 일반적으로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언급했던 "햄릿을 읽고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는 (교육받은) 사람들이 이웃집에서 받고 있는 인간적인 절망에 대해 눈물짓는 능력을 마비당하고 또 상실당하는" 결과를 낳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문익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가계사의 존속이 그에게는 남에게 이해시키기 어려운 중요성을 가진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것이 문익환의 역사에서는 반드시 갚아야 마땅한 '지상에 산 대가로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되는 커다란 역사의 빚'이었던 것이다. 그같은 인식이 성립될 수 있는 근거를 우리는 다시 문익환의 가계가 하나의 결사체처럼 움직였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명동촌을 지키는 마지막 패밀리라는 의식의 가족주의는 대부분의 명문 가계가 파괴되어버린 후에도 파괴되지 않고 보존된 보기드문 사례에 속한다.
사실 문익환에게서 가족의 문제는 중년의 분발을 주저앉히는 세 가지 장애 중 하나였다. 만성 허약 체질과 체험적 반공주의의 체득 이외에도 북간도에서부터 전해오는 문씨 가계의 유지. 그 중 세번째는 전적으로 장남 몫이었는데, 어쨌든 문익환대에 떠맡겨진 명문의 '가족결사체'는 1960년대에 무사히 완성을 보았다. 문재린 목사와 김신묵 권사의 정착, 자녀들의 눈부신 성장, 아우 문동환의 귀국. 이로써 오랜 떠돌이 가족이 정상화되자 집안 곳곳에서 역동적인 힘들이 떠다니기 시작했다. 문선희가 미국과 캐나다 유학에서 돌아오면서 피아노를 가지고 왔고, 피아노는 다시 문익환의 자녀들에게 훌륭한 음악교사가 되었다. 그 아래 문영환은 연세대 영문과를 다녔는데 연극반을 하면서 개교기념회 때마다 촌극상을 제패했다. 대사도 없으면서 장장 2시간 15분 동안 무대 위에서 견뎌야 하는 장편 〈17포로수용소〉를 열연하고 다시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학사편입해 최불암 등과 함께 제1회 졸업생이 되었는데, 그는 오태석 등과 연극을 하면서 어린이 코러스로 문영금과 문성근 등을 데리고 다니면서 목사의 자녀들에게 저잣거리를 체험시켰다. 막내여동생 문은희는 경기여고를 졸업하고 세브란스 의과를 다녔는데 주로 교회에서 문익환의 설교를 모니터링하는 역을 맡았다.
텃밭이 좋으면 작물은 절로 익는 법이다. 아이들에게, 최고급 지성을 갖춘 할아버지와 할머니, 작은아버지 둘에 고모가 둘인 경우보다 더 좋은 환경은 없을 것이다. 이모도 둘인데, 한 이모부는 국회의원이요 한 이모부는 외교관이었다. 특히 수필가였던 큰이모(박용길의 큰언니) 박남길은 남편을 잃고 혼자 자녀들을 길러 조만간 한국을 대표하는 음악 명문가와 겹사돈을 맺어 세계적인 지휘자 정명훈의 장모요 정경화의 시어머니가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익환의 완전주의는 가정에서도 좌절을 겪었다.
문익환의 결벽어린 교육관을 뒤집은 것은 장남 문호근이었다. 문호근의 성장기는 숱한 무용담으로 이루어져 어려서부터 온 집안을 장남타령으로 들썩거리게 했다. 문호근의 권위는 이미 다섯 살 때 확보되었다. 1-4후퇴로 피난을 가면서 목사와 국회의원들이 인천의 어느 교회 앞에서 모이기로 했을 때 문재린 목사가 통솔을 맡느라 경황없는 상황에서 심부름을 간 문호근이 오기도 전에 대열이 모두 떠나와 버린 일이 있었다. 배에 타면서야 어린 문호근을 빠뜨린 사실을 알고 문씨네 가족은 다급해졌다. 부랴부랴 돌아가보니 거기 침착하게 서서 한다는 말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할아버지가 찾으러 올 수 있을 것 같았다는 것이었다. 두 번 들은 노래는 따로 배우지 않고도 그냥 부를 줄 아는 영특함도 있었고, 아버지가 미국에 가 있는 동안 동생들을 지켜내는 어른스러움도 있었다. 학교에 다닐 때도 한 번은 머리에 붕대를 감고 와서 한다는 말이, 놀다가 머리를 다쳐서 혼자 병원에 가서 꿰매고 오느라고 늦었다고 말하더란다.
아버지 문익환과 아들 문호근의 대결은 아무도 막을 수 없는 고집 대 고집의 충돌이었다. 아버지는 학교에서 '문이 쾅'이라고 부르는 제자보다 훨씬 더 난처한 피교육자와 맞닥뜨렸다. 경기고를 마치고 서울대로 진학할 때도 부모 몰래 음대를 선택해버렸고, 학교에 들어간 후에도 납부금을 타다가 가수 조영남과 함께 연극을 한다고 돈을 몽땅 무대 올리는 데 써버리기도 했다. 아들은 낙제시킬 수도 없는 머리 아픈 제자에 속했다. 끝까지 원칙을 강조하는 아버지와 자신의 생각을 조금도 양보하지 않는 아들의 갈등은 가족공동체에 대해 각별한 가치관을 가진 문동환이라는 교육적 완충지대에서 끝없이 이해의 폭이 넓어지고 여과되어서야 해결되었다.
장남 문호근과의 갈등으로 문익환은 가족집단 내의 질서에 눈뜨게 되었다. 실로 3대에 이르는 십수 명의 거물이 한 지붕 아래서 공존의 훈련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가정의 민주화를 획득한 것이다. 토의와 자율! 이것은 이후 문씨네 가족과 다른 가족을 가르는 가장 큰 차이점이 되었다. 가족은 매일같이 식탁에 앉아 심포지엄을 방불케 하는 토론을 벌였다.
김형수〈소설가-중앙대 예술대학원 객원교수〉
[문익환 평전]⑤북간도에 온 '그리스도' 정재면
문익환은 목사의 아들이었고, 그 자신 목사였으며 또 목사의 형이었다. 그는 어떤 종교적 칸막이에도 속박되지 않는 자유인이길 원했지만(더러는 스님들과 친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무당이 춤추는 자리에 뛰어들어 한데 어울리기도 했다) 그의 생애는 지극히 기독교적이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그리스도의 시계는 멈춘 적이 없다. 심지어는 무의식중에 한 일까지도 성경 속의 시간에 맞추어서 진행됐다. 조선에서 망명을 떠난 유학자 집안의 장손에게 그것은 확실히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점을 문익환은 훗날 평양에서 해명한다. 1989년 방북했을 때 김일성 주석에게 기독교를 인민의 아편이라고 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민족주의적 기독교에 대해 강변하는 것이다.
"이동휘 선생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는 기독교인도 될 수 있고 사회주의자도 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소련으로 갈 때 따라가려는 젊은이에게, '너는 국내에 들어가 목사가 돼'라고 합니다. (...) 저의 선조들이 기독교인이 된 것도 그것이 나라의 주권을 찾는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고려공산당을 창건한 이동휘는 북간도에서 목회활동을 했던 독립운동가였다. 그리고 그에게서 '목사가 돼'라고 권고받은 사람은 문익환의 아버지 문재린이었다. 기독교에 대해 한국인에게 각인된 끈질긴 선입관을 접할 때마다 문익환은 그래서 슬퍼하고는 했다. 이른바 제국주의 침략의 선발대 이미지와 '예수 아닌 것은 모두 우상'이라는 말로 비유되는 호전적 배타성은 적어도 명동촌에 온 그리스도의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신학문의 일부였고 정신적 동질성을 위한 시대정신의 표현이었을 뿐.
북간도에 처음으로 신식학교가 들어선 것은 1906년 10월이었다. 전 의정부 참판 이상설이 세운 서전서숙! 그러나 이상설은 불과 6개월 만에 고종의 밀사로 파견된다.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열사와 동행한 것이다.
문익환의 선조들이 학교를 세우겠다고 나선 것은 서전서숙이 폐교한 직후였다. 20세기는 분명히 공자나 맹자 같은 윤리적 태도 이상의 태도를 원하고 있었고, 세계를 과학적으로 이해하고 능동적으로 건설해갈 사람을 요청하고 있었다. 그러나 망명자들은 근대적 학문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래서 1908년 4월 27일, 서당 세곳을 해체하여 학교를 세우고 학생을 모았지만 가르칠 선생이 없었다. 김약연이 나서서 1년을 물색한 끝에야 후보자를 찾을 수 있었다.
평양 숭실학교를 졸업하고 민족교육에 관심이 깊으며 이상설과 친하다는 스물세 살의 청년이 용정에 왔다. 마을 어른들은 청년을 붙들기 위해 노심초사했다. 한 달에 1전이라는 형편없는 봉급에 소박한 숙식 제공을 받아줄까? 김약연이 제안했을 때 청년은 봉급이나 대우 따위에 아무 관심이 없었다. 처음에는 선생을 할 마음도 없는 것 같았다.
마지못해 응하면서 조건을 걸었는데, "정규 과목으로 성경을 가르치게 한다면 내일 당장 수업을 시작하겠다!"였다.
어른들은 난처했다. 명동촌에서 서양 종교를 모시면 북간도 사회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이었다. 거절하자니 선생이 너무 아깝고, 받아들이자니 서양 문화의 해악이 염려됐다. 어찌할 것인가? 마을 어른들은 학교에 모여 꼬박 사흘간 토론했다.
"좋다. 제사를 못 받아도 하는 수 없어. 교육이 우선이야."
그 첫 학급에서 문익환의 아버지 문재린, 김규동 시인의 부친 김하윤 등이 수학했는데, 교육에 대한 만족도는 참으로 컸다. 그러나 젊은 선생이 펼쳐보인 6개월 동안의 수업은 전초전에 지나지 않았다.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당차게 학교를 이끌어 어른들은 거듭 경탄했지만, 자신은 달랐다. 무슨 속셈은 있는데 털어놓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기대를 부풀려놓고 보따리를 싸면서 으름장을 놓았다.
"지금까지 아이들만 데리고 예배를 봤는데 안 되겠습니다."
어른들은 한 방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어른들이 모두 교회에 나온다면 몰라도."
마을에서는 또 회의를 열었다. 이번에는 쉽지 않았다. 명동에서는 무당을 섬기는 사람도, 도박을 하거나 주정을 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왜 교회에 나오지 않으면 아이들을 못 가르친다는 것인가? 유학에 일가를 이룬 거장들이 젊은 선생 앞에서 어떻게 무릎을 꿇고 예배를 보며 설교를 듣는다는 말인가? 하지만 젊은 선생은 "기독교와 신문명과 신교육을 수용하지 않으면 민족의 앞날을 기대할 수 없다!"고 버텼다. 그에 맞서 김하규 어른도 물러서지 않고 반론을 폈다. "기독교는 예수의 죽음을 기념하고 슬퍼하면서 왜 조상님께 절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인가? 인간 예수가 어떻게 하느님의 아들일 수 있는가?" 토론은 끝까지 답을 내지 못했으나 김하규(문익환의 외조부)를 빼놓고는 모두 교회에 나오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젊은 선생은 다시 신바람이 나 가르치기 시작했다. 뿐더러 쟁쟁한 독립운동가를 교사진으로 마구 끌어들였다. 역사학자 황의돈(최초의 여판사 황윤석의 부친), 한글학자 장지영, 주시경 〈우리 말본〉의 서문을 쓴 박태환, 와세다 대학 출신의 법학자 김철 등이 왔다. 젊은 선생이 흉금을 터놓은 것은 명동에 중학교가 들어서고 학교 운영 체계가 완전히 정상화되고 나서였다.
선생은 서울 청년학관 출신으로 이동휘-안창호-김구-전덕기-양기탁 등과 함께 지하조직 신민회에서 활동하다 북간도의 망명촌 기지 건설과 민족 교육을 위하여 비밀리에 파송된 인물이었다. 정재면이라 불렀지만 본명은 정병태(전 건국대 총장을 역임한 정대위 박사의 부친). 용정에 온 목적은 서전서숙의 재건이었는데 여의치 않았다. 명동학교에 접근한 것은 계획적인 것이었다. 신민회는 북간도 지역에서 민족 교육을 실시하기 위해 비밀리에 북간도 교육단을 조직했는데, 단장에 정재면, 고문에 이동휘-이동녕, 재무는 유흥원(유한양행 유일한씨의 부친)이었다.
민경배가 쓴 〈한국의 기독교회사〉는 "근대 한국의 비극과 시련, 그리고 좌절감이 엄습할 때 백성이 돌아서서 기댈 곳이라고는 교회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거물 유학자들이 아이들과 함께 예배를 보는 명동이 대표적인 곳이었다. 명동교회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융성한다. 주일 평균 예배자가 600~700명이었는데, 1911년 이동휘의 부흥회 때는 인근 수백 리에서 1,000여 명이 모였다고 기록되어 있다(서굉일, 〈규암 김약연 선생〉). 가히 전성기였다. 그리고 그 전성기에 또 한 차례 혁명적인 비약이 마을을 쓸고 간다.
눈이 몹시 내린 겨울날, 부흥 전도사로 이동휘가 와서 사흘을 내리 출애굽기로 설교한다. "하느님이 애굽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어주신 것처럼 우리 민족도 해방시켜주실 것"이라고 쩌렁쩌렁 포효하는 소리가 교회 밖 멀리까지 퍼져갔다.
"무너져가는 조국을 일으키려면 예수를 믿어라! 예배당을 세워라! 학교를 세워라! 자녀를 교육시켜라! 그래야만 우리도 서양 문명국처럼 잘 살 수 있다. 삼천리 강산 한 마을에 교회와 학교를 하나씩 세워, 삼천 개의 교회와 학교가 세워지는 날 우리는 독립될 것이다"(문영미, 〈나의 할머니, 김신묵의 살아온 이야기〉에서 재인용).
불과 30리 거리에 일본 경찰서와 헌병대가 있는데도 이동휘는 아랑곳없이 선동을 해놓고는 한껏 고양된 대목에서 마른 섶에 불을 놓는다. "새가 어떻게 날개를 하나만 가지고 날 수 있으며, 수레바퀴가 하나로 굴러갈 수 있는가?" 난생 처음 듣는 여성해방론이었다. 그나마 명동이기에 겨우겨우 교회나 다닐 수 있었던 아녀자들은 이날, 순식간에 가슴이 활활 타버린다. 절반의 인력, 여성을 집안에 가둬놓고 어떻게 일본을 이길 수 있겠느냐는 말은 남성의 가슴에도 통렬하게 박혔다. 이제는 변화의 급물살을 탄다. 명동여학교가 생기고, 얼마 안 있어 개똥녜-데진녜-곱단이-샛별이-농빼 같은 천한 이름이 하루아침에 존엄한 인간의 지위를 획득한다. 비단 처녀뿐 아니라 출석부나 학교 기록에도 적어놓을 이름이 없던 김씨네 셋째딸-남씨네 둘째며느리-와룡댁 등의 댁호도 작명의 감동에 잠 못 드는 것이다.
"여러분도 이제 이름을 가져야 합니다. 며칠 생각해봤는데 우리 함께 주님 안의 자녀라는 뜻으로 '믿을 신(信)'자 돌림으로 지으면 해요. 각자 부모님께 말씀 드리고 아버지나 오빠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을 따다가 '신뭐'라고 짓기로 합시다."
정재면의 말을 듣고 줄줄이 정신태-주신덕-김신정-김신훈-김신국-김신우-김신근-문신린-문신재-문신열-문신학-윤신영-윤신진-윤신현-한신환...들이 등장해 며칠 사이에 명동에 '신'자 돌림의 여성이 50명으로 늘었다. 고만녜였던 어머니가 '김신묵'이 된 것도 이때였다. 김신묵은 이 같은 배경을 발판으로 한 사람의 민족운동가로 성장하면서 곧바로 여성 사회의 김약연 같은 지도력을 확보한다. 그것이 바로 문익환이 두고두고 찬탄해 마지않는 어머니의 부활이었다. 문익환은 자신이 문익점의 후예라는 것도 잊지 않으려 했지만 '신'자 여성들의 아들이라는 점도 결코 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아, 자랑스럽게 혈연의 울타리를 부숴버린 사람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을 교리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한 공동체의식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신(信)자 항렬로 한 동기가 되었던 것 아닙니까? 신자 때문에 가문 족벌의 장벽을 훨훨 떨쳐버리고 한겨레 의식을 확인, 확산된 것 아니겠습니까?"(문익환)
한 인간이 다른 국민이나 자기 자신에 대해 품는 이미지는 어렸을 때 습득한 '역사'와 관련된다. 문익환은 꿈속에서도 오직 민족에 대한 사랑을 잊지 않도록 자식의 베개에 태극무늬를 수놓았던 어머니 밑에서 매우 일찍 목사의 길을 가기로 결정했다. 이동휘가 가르쳤고, 아버지 문재린이 앞장서 따랐으며, 지도자 김약연이 모범을 보였던 바, 그곳에서 목사가 된다는 것은 합법적으로 독립운동을 할 수 있는 신분을 얻는다는 것을 의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