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화가 오지호|작성자 샘물
~~~~~~~~~~~~~~~~~~~~~~~~~~~~~~~~~~~~~~~~~~~~~~~~~~~~~~~~~~~~~~~~~~

정겨운〈남향집〉의 화가, 오지호(1905~1982)
햇살 넉넉한 봄날,
보랏빛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커다란 대추나무.
빨간색 원피스를 입고 문을 나서는 소녀.
담장 아래에서 졸고 있는 삽살개…….
남향집〉그림 속의 정겨운 풍경이 우리의 마음을 평화롭게 합니다.
인상주의 화가 오지호 -남향집-
이 풍경화에도 빛에 대한 그의 절대적인 사랑이 담겨 있어요
이른봄 눈부신 햇살이 폭포처럼 쏟아지는 한낮입니다
집 뜰에는 아름드리 커다란 고목 한 그루가 하늘을 가르며 서 있고
나무 뒤편으로 햇살의 세례를 받은 초가집 한채가 보입니다
빨간 옷차림의 소녀가 투명한 햇살에 이끌려 문지방을 막 넘어서는 중이며
담 옆에는 봄남의 나른함에 취한 개가 햇살을 이불 삼아 단잠을 즐기고 있습니다
소녀는 화가의 둘째딸인 금진이며 낮잠에 취한 강아지는 오지호의 애견 삽살이 입니다
화면을 쳐다보면 저절로 눈이 시려질 정도로 그림 속은 온통 햇볕의 축제입니다
환한 햇살을 반사하는 저 돌담 벽을 보세요
눈부신 햇볕이 담의 본래 색깔을 변화시켜 가볍고 경쾌한 느낌을 줍니다
또 돌담에 아름다운 무늬를 새기느 고목의 그림자는 어떤가요
티 없이 해 맑은 한국의 하늘처럼 선명한 푸른색릉 띄고 있습니다
"회화란 빛의 예술이며 태양에서 태어났다"고 입버릇처럼 한 말을 풍경화를 통해
증명했습니다. 오지호는 한국의 자연을 태양의 눈으로 바라보았어요
대상을 세밀하게 묘사하지 않고 전체 인상을 파악했어요.
그는 한국의 풍경화에 빛을 주인공으로 받아들인 선구자 입니다
1939년, 개성 송도고등보통학교의 미술 교사로 있던 화가 오지호는 햇볕을 담뿍 받고 있는 자신의 집을 화폭에 옮겼습니다.
오지호는 서양의 인상파 기법을 따르지 않고 우리나라 자연을 관찰하여 밝고 선명한 색으로 표현하여 우리나라 인상주의 회화의 문을 연 화가입니다. ‘그늘에도 빛이 있다.’고 생각한 그는 ‘그늘은 빛에 가려진 것이 아니라 빛이 변화된 것’이라며 그림자까지 섬세하게 표현했습니다.
오지호의 삶과 예술
오지호는 1905년 12월 24일(음력) 전남 화순에서, 보성군수였던 아버지 오재영과 어머니 김선군 사이에서 여덟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유복하게 자랐습니다. 1921년, 전주고보에서 서울 휘문고보로 편입하여 미술 교사인 서양화가 고희동에게서 지도를 받았고, 이듬해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나혜석의〈농가〉그림을 보고 유화에 입문했습니다. 1925년, 일본으로 간 오지호는 대학 입시에 낙방했으나 가와바타 미술학교에 다니면서 재도전해 도쿄 미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스승인 후지시마 다케시 교수와 도쿄 미술학교 수석 졸업생인 김관호의 작품〈해질녘〉에서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일본 유학 시절 자신의 그림에 암갈색이 두드러진 것이 일본의 기후와 풍토 때문임을 알게 된 오지호는 빛과 색채에 대한 광학적 효과를 연구하였고, 우리나라 자연과 기후에서 답을 찾아나갔습니다. 6년 동안의 일본 유학을 마치고 1931년에 귀국한 오지호는 직장을 얻지 못해 예술가로서 잠시 막막한 삶을 살았습니다. 1935년, 친구인 김주경의 도움으로 개성 송도고보의 미술 교사로 부임하여 10년 가까이 개성에 살면서 많은 작품을 그렸습니다. 대표작인〈남향집〉과〈사과밭〉〈도원 풍경〉을 비롯해 1938년에는 김주경과 함께《오지호.김주경 2인 화집》을 펴내기도 했습니다.
애국정신이 투철했던 오지호는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으면서도 창씨 개명을 하지 않았고, 8.15 광복 후에는 조선미술건설본부 서양화부 중앙위원으로 활동했으나 편 가르기만 일삼는 미술계에 염증을 느껴 낙향했습니다. 1949년부터 조선대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그는 자신의 인상주의 회화 세계를 다져나갔고, 미술계에 만연한 일본의 정서를 없애려고 노력하였습니다.〈무등산〉〈흑산도〉등 고향의 풍경을 하나씩 화폭에 담던 무렵 6.25 전쟁이 터졌고, 오지호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억울한 옥살이를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육신의 고통보다 고향집 근처에 보관해 둔 작품이 몽땅 소실된 일이 더 고통스러웠습니다. 이후에 그린〈가을 풍경〉〈선인장〉〈장미〉등에는 단순한 형태와 강렬한 원색이 두드러졌습니다.

오지호 기념관


~~~~~~~~~~~~~~~~~~~~~~~~~~~~~~~~~~~~~~~~~~~~~~~~~~~~~~~~~~~~~~~~
빛과 색채의 마술사 오지호ㆍ |
'생명력 넘치는 빛'남도화단 뿌리로 남향집ㆍ추광ㆍ항구…회화 흐름 '생생' 佛ㆍ日 넘어선 한국적 남도회화 정립
|

1980년 세네갈에서의 오지호.
말년의 아프리카 여행은 현대미술의 제반 문제를 연구하는데 도움이 됐다. |
역사의 수렁에 빠져 신음하면서도 오지호는 한국 남도 구상화단의 기틀을 세웠다.
남도 서양화단의 한 축은 그의 의지와 정신에서 피어난 것이다. 그의 회화세계는 크게
4단계로 나눌 수 있다. 1926년 동경미술학교 시절부터 1950년 조선대학 교수로 초빙된
다음해까지가 1기다. 이때가 오지호로서는 가장 평온하고 행복했던 시기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빛과 색채로써 자연을 표현하고 예술적 생명력과 창조력을 발산하는 그림세계를
보여준다. '남향집','처의상' '포구' 등이 이 시기의 작품들이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하나같이
투명하고 눈부시다. '남향집'은 바로 작가 자신이 1935년 개성에 있는 송도고보의 미술
교사로 재직시 살았던 집이다. 그는 자연을 사랑하고 특히 햇빛을 좋아해, 인상파적인
기법으로 색채를 분할해 표현하곤 했다. 그림자에도 빛깔이 있다고 생각해 그림자에
회색이나 검은색을 쓰지 않고 나무 그림자를 파란 색으로 처리했다. 밝은 햇살이 드리운
한낮의 한가로움이 잘 표현돼 있으며, 청색과 노란 색의 색감이 선명하다. '사과밭'은
사과꽃과 잎의 색채혼탁을 피해 점묘법을 사용한 것이 눈에 띈다.

남향집, 1939, 캔버스에 유채, 80.5x65 Cm |
이런 기법을 사용함으로써 5월의 태양빛 아래 흐드러진 사과밭의 아름다움을 청명하고
수려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시기의 특징은 활달하면서도 부드러운 붓질과 색채감과
리듬감이다. 색채에 리듬감을 가미해 인상주의를 뛰어넘으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50년 무렵부터 60년까지를 2기로 분류할 수 있는데, 이 기간은 전반기와 후반기로
나눌 수 있다. 빨치산사건, 투옥 등으로 인한 몇 년간의 공백기를 거치며 빛과 색채에 대한
욕망과 애정이 더욱 강화된 시기다. 전반부의 그림들은 1기에 비해 화면이 단순화되고
변형되면서 한결 세련되고 능숙해진 붓질이 돋보인다. '추경' '창가의 꽃' '카토리아' 등이
이 시기의 작품이다. 1955년경에는 자신의 뜰 앞에 7평짜리 간이 화실을 지은 뒤 정물에
몰두하게 되는데, 전반기보다는 이 후반기에 그의 변모는 더욱 뚜렷하다.
1956년 작 '장미'에서 알 수 있듯이 장미송이 위에 있는 빛을 포착해 이를 조화롭게
변용시킴으로써 장미꽃의 질감까지를 느끼게 해준다. 화사하고 밝은 색채로 생명의 환희를
표현하면서 새로운 자연을 창조해낸 것이다. 그의 걸작으로 꼽히는 1956년작 '칸나'는 밝고
화사한 색감을 표현하는데 역점을 두고, 빨강, 파랑, 노랑, 초록의 원색과 분홍, 연둣빛이
한데 어울리는 화려한 색채의 맛을 풍기고 있다. 칸나잎과 파초잎을 그리면서 잎의 사실적인
묘사보다는 짙은 색과 옅은 색을 교차하듯이 얼기설기 칠해서 입체감이 아니라 평면감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의도적인 데포르메에 의해 작가가 의도한 조형목표에 더욱
가까워지도록 했다는 것이 이 시기의 가장 큰 특징이다. 당시의 작품 '추광'은 이런 특징을
더욱 두드러지게 보여준다. 산과 나무를 더욱 단순화시켜 데포르메를 극대화하고 있는데,
색면의 빨강, 분홍, 노랑, 파랑, 녹색의 색채대비를 이뤄 가을풍경의 정취를 한껏 드러내고
있다.

항구, 1972, 캔버스에 유채, 37x45 Cm |
1960년부터 1970년까지는 오지호 작품세계의 3기로 부를 수 있다. 이 무렵 오지호는 1960년
4ㆍ19혁명과 5ㆍ16혁명을 거치면서 조선대 교수생활을 마무리하게 된다. 민자통 사건에
연루돼 1년의 옥고를 치르면서 몸과 마음이 쇠약해져 2년의 공백기를 가지게 된다. 그런만큼
이 시기의 그림에는 많은 변화가 나타난다. 회색과 청색이 주류를 이루면서 이른바 '회청색
시대'로 돌입하는 것이다.
맑고 경쾌한 화면구성이 사라지고 어두운 색채의 포름과 대비, 리듬이 강조되면서 거친 터치와
재질감이 드러나고 구조적 화면구성과 표현주의적 경향이 정착되는 시기가 이때다. 이 시기에는
야수파적 색채주의로 흐르는 경향도 엿보인다. 그는 그리고자 하는 대상이 마음에 들어올 때
그 대상은 내부의 창조력과 결합된 또다른 하나의 다른 풍경이라고 '회화론'에서 말한 바 있다.
표현하고자 하는 생명감이 더욱 거친 붓질로 표출된 시기가 이때다. 그리고 형태미는 더욱
간결해져 더욱 견고한 내면의 정돈이 드러난다. 이러한 경향은 1960년대 후반, 여수나 목포
바다와 '항구' 연작에서 드러나듯 구도는 간결해지며, 속도감 넘치고 거친 붓 터치가 주류를
이룬다. 구차스럽게 설명하기 싫어 구도는 단순화시키고 내면은 더욱 깊어져 거친 생명력으로
화폭에 드러내 보인 것이다.

추광, 1960, 캔버스에 유채, 53.3x60.7 Cm |
특히 1963년 작 '야산추경'에서는 거친 질감과 어두운 분위기를 짙게 느낄 수 있다.
밝은 것 같으면서도 어두운 명암을 띈 것은 그 당시의 암울했단 심경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 회청색 시기에는 주로 포구와 설경을 많이 그렸다. 이것은 그가 학교를 그만 둔 뒤 답답함을
떨치기 위해 산과 바다를 많이 찾았기 때문이다. 1970년부터 1982년 임종시까지를 4기라고
부를 수 있다.
이때에도 그는 어느 시기 못지 않게 많은 작품을 남겼다.
이 시기를 그의 절정기로 부를 수 있는데 두 번의 유럽여행을 가지면서 그의 예술감각이
절정을 이루며 작품의욕이 왕성해지던 때다. 아울러 구성력과 색채감이 더욱 풍성해진
시기도 이때다. 이 절정기에 마침내 그는 색채와 구성을 통한 남도의 생명감 넘치는
표현주의를 완성시킨 것이다. 1972년 작 과수원 풍경은 4월의 광주 들판을 그린 것이다.
꽃을 전면에 배치해 그의 작품중에서는 드물게 보이는 구도로 제작됐다. 이 작품은 동, 서양의
색감과 구도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뤄낸 작품이다. 같은 해에 그린 '샘'은 단풍잎이 퇴색하는
깊은 가을의 단풍나무를 그린 것이다. 앞부분은 사실적으로 그렸으나 뒤쪽으로 갈수록 데포르메
시켜 풍부한 색채들로 자유로운 화면을 구성해냈다. 1973년에 그린 '해경'은 바위와 하늘,
바다로만 구성돼 딱히 어디를 그렸는지 알 수 없으나 각자 보는 이에게 나름대로 생각할 수
있는, 시간 공간적 여유를 주기도 한다.

봄, 1981, 캔버스에 유채, 41x53 Cm |
역시 같은 해에 그린 '가로수'에서도 풍부한 색채를 사용해 새로운 화면을 창조해내고 있다.
나이프를 사용해 그린 이 그림은 데포르메를 확대시켜 그의 특성인 강렬한 빛을 이끌어내고
있다. 오지호 미술의 핵심은 역시 빛과 생명력이다. 그 회화적 구현을 남도적 색채를 통해
이뤄냈다. 그 색채는 밝고 건강미 넘치는 남도의 풍광과 정서에서 기인했다. 프랑스
후기인상파에서 출발해 일본의 외광파를 뛰어넘어 한국적 남도회화를 정립해 낸 것이다.
오지호는 빛과 색채로 한국 남도의 밝고 생동감 넘치는 자연을 재창조해냄으로써 남도
구상화의 맥으로 뻗어나간 남도화단의 뿌리인 것이다. (시인ㆍ문예비평가)
자료출처 - 전남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