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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제현신사비는 날조된 가짜이다. 금서룡(今西龍)은 고고학을 오염시킨 범죄자이다.
◉ 점제현 신사비의 발견
이 비석은 1913년 조선총독부의 요청으로 고고학자라는 세키노 타다시(關野貞)와 역사학자라는 이마니시 류(今西龍) 를 비롯한 일본인 학자들이 평안남도 평강 지역의 어을동토성(於乙洞土城) 터를 조사하면서 토성의 동북쪽 약 150m 지점에서 발견하였다. 비석은 위쪽 가장자리 부분이 파손된 상태였으며, 글자도 마모가 심해 모든 글자를 판독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비문의 내용은 아래와 같으며 판독이 불가능한 글자는 ▨로 표시하였고 논란이 있는 글자는 괄호로 표기하였다.
▨▨▨年四月戊午秥蟬長(渤)▨ → ▨▨▨년4월 무오일에 점제현의 장(발▨)
▨建丞屬國會▨▨▨▨▨ → ▨건승 속국 회…
▨神祠刻石辭曰 → 신사의 돌에 내용을 옮겨 새기니
▨平山君德配代嵩承天▨▨ → ▨평산군의 덕은 대산·숭산의 산신과 비견하고 승천…
(保)佑秥蟬興甘風雨惠閏土田 → 점제현을 보우하고 좋은 비바람을 일으키고 기름진 토지와 밭의 혜택을 내리시니,
▨▨壽考五穀豊成盜賊不起 → ▨▨이 장수하고 오곡이 풍성하며 도적은 일어나지 않고
▨▨蟄臧出入吉利咸受神光 → ▨▨숨어들고 길한 것과 이로움이 출입하여 모두 신의 빛으로 받아들입니다..
내용은 “고을의 수령에 해당하는 점제현장 발(渤)이, 연도는 알 수는 없으나 4월 무오일에 행한 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내용을 돌에 새겨넣은 것으로, 그 내용인 즉 점제현에 좋은 일만 가득하길 바란다는 것이다. 3번째 문장의 평산군(平山君)의 덕이 산처럼 높다 하였고, 점제현을 보우하여 좋은 기후와 좋은 토지와 밭을 주고, 도적이 일지 않고, 길하고 이로움이 가득해서 모두 신의 빛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인 것 같다.
이 점제현 신사비가 평안남도 용강에서 발견됨에 따라 한나라 때 낙랑군에 속했던 25개의 현 중 점제현의 위치가 낙랑군 점제현(秥蟬縣: **점선현이라 읽어야 하나 이병도는 점제현이라고 잘못 토를 달았다.)이란 사실임을 한사군 한반도설을 주장해 오던 이마니시 류(今西龍) 를 비롯한 일본인 역사 학자들과 고고학자라는 세키노 타다시(關野貞) 등이 낙랑군 한반도설이 확실함을 고고학적으로 입증한 자료로 삼았다.
또 평강의 어흘동 토성도 낙랑군 점제현(秥蟬縣: 점선현)의 치소(治所)라고 하였으며, 낙랑군의 나머지 24개 현 위치를 평안도 일대로 비정하는데, 많은 참고 자료가 되었다.
그러나 이 점제선 신사비는 중국에서 밀수입한 비석 쪼가기를 평안도 용강에 세워 놓고 이곳이 점제현이라고 사기를 친 것이다. 점제현은 수양제의 침략경로 좌12군 1번째에 위치한 요서지방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읻.
◉ 세키노 타다시와 이마니시 류 등이 비정한 낙랑군 25개 현은 어디?
이들 일본인들에 의해 낙랑군 유적이라고 발굴된 해방 전의 발굴 기록은 현재까지 한국 역사학자들이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우리나라 정부기관인 국립문화유산연구원의 <한국고고학 사전>에 실린 낙랑군에 대한 글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https://portal.nrich.go.kr/kor/archeologyUsrView.do?menuIdx=567&idx=10083
낙랑토성(樂浪土城)은 낙랑군 설치지역에 분포하는 평지성이면서 방형인 토성을 말한다. 낙랑군 시기의 고분군과 인접하여 분포하므로 군현 지배와 관련된 치소로 해석되는데,
평양시 낙랑구역 토성동 토성, 평남 온천군 성현리 토성, 황해도 은율군 운성리 토성, 신천군 청산리 토성, 봉산군 지탑리 토성, 함남 금야군 소라리 토성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낙랑토성(樂浪土城)은,
1) 평양 토성동 토성(土城洞 土城)은 낙랑군의 소재지로 추정되는데,
한일합병의 해인 1910년 조이영장(鳥居龍藏)이 낙랑군과 관련된 유적으로 주목한 이래, 1935년 봄과 가을에 각 1회씩(1?2차), 1937년 1회(3차) 등 총 3회의 발굴조사가 조선고적연구회에 의해 이루어졌다....
여기서 다수의 봉니, ??왕부(王扶)?? 동인(銅印)? 우심전(藕心錢)? 반량(半兩)? 소천직일(小泉直一) 등의 동전, 반량전?오수전? 화천 등의 용범, ??낙랑예관(樂浪禮官)????? 낙랑부귀(樂浪富貴)?? 등의 문자 와당(瓦當)이 출토되어 낙랑군의 중심지임이 밝혀졌다. 당시 발굴유물은 현재 동경대학 고고학연구실에 보관중이다.
2) 평안도 온천군 성현리 토성(城峴里 土城)은 내성과 외성의 이중구조로 이루어져 있는데, 가까운 평강군에서 점제현신사비(?蟬縣神祠碑)가 발견되어 이 성을 점제현의 치소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3) 은율군 운성리 토성(雲城里 土城)....토성 남쪽에는 낙랑군 시기의 운성리 고분군이 분포하고 있어 당시 현(縣) 치소 중 하나로 추정하고 있다.(***참고: 이병도는 은율군을 대방군 열구현(列口縣)이라 비정함.)
4) 평안남도 신천군 청산리 토성(靑山里 土城)은 1928년 금서룡(今西龍)이 주변에서 명문벽돌을 수습하면서 주목을 받았다.....서호리에서 출토된 ??大康四年三月昭明王長造?? 명문벽돌을 근거로 昭明縣의 치소로 보고 있다.
5) 황해도 봉산군 지탑리 토성(智塔里 土城)은 ...와당, 벽돌 등을 비롯하여 화천, 오수전(五銖錢) 등의 화폐가 출토되었다....토성에서 서북쪽 5㎞ 떨어진 대형 벽돌무덤에서 ??帶方太守張撫夷??라는 명문벽돌이 나옴으로써, 대방군의 치소로 비정하고 있다.
***참고: 토성 안에서 세키노 타다시(關野貞) 등은 무덤을 발굴하고 수습한 몇 점의 벽돌 명문에 대방태수 장무이란 글과 여러 기록이 있었으며, 이를 근거로 후한(後漢)의 공손강 이래 대방군이 바로 황해도 대방군이라고 일본인들과 이병도 등 식민사학자들이 확정하고 있다.
6) 영흥군 소라리 토성은...토성 내부의 8호 구덩이에서 동촉, 세형동검 검파두식, 쇠도끼(鐵斧), 쇠투겁창(鐵矛), 을(乙)자형 동기, 재갈 등 다수의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토성에서 1㎞ 거리에서 낙랑군 시기의 귀틀무덤 2기가 확인되었다.(***참고: 함경남도 영흥군을 화려현이라 역사학자들은 비정하고 있다)
***참고: 위의 내용은 한국의 정부기관인 국립문화유산연구원의 <한국고고학 사전>에서 수십편의 일본인 논문과 2종의 한국인 논문을 이용하고, 그 고고학적 근거와 논문을 토대로 한(漢)나라의 낙랑군 유적이 평안도와 황해동서 쏟아져 나왔고, 이 고고학적 유물은 낙랑군 25개 현이 평양과 평안도 지방에 분포해 있었음이 확실하다는 논리로 내세웠다.
그러나 이들 낙랑토성(樂浪土城)은 이들 토성과 주변 무덤에서 낙랑(樂浪)에 관련된 고고학적 유물이 발견되어 이들을 낙랑토성이라고 지칭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발굴했다는 낙랑 유물은 모두 북경 유리창에서 수없이 구입한 낙랑 관련 골동푸(骨董品)을 토성이나 무덤 발굴 시 몰래 끼워넣고, 이 끼워넣은 유물을 고고학적 근거가 되는 유물이라고 당시 우매했던 한국인들을 속인 행위이었다.
그 이유는 일본인 고고학자라는 세키노 타다시(關野貞)나 조선총독부에서 북경의 유리창 골동품 가게에서 수없는 낙랑(樂浪)과 한 대(漢代)의 유물을 구입한 사실이 세키노 타다시(關野貞)의 일기(日記)나 조선총독부 박물관 구입물 목록에 기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북경에서 낙랑 유물을 구입했다면, 마땅히 북경 부근에 낙라이 있었다고 고고학적으로 인정해야 함에도 그들은 구입ㅂ한 골동품을 평안도와 황해도 무덤 발굴 시 끼워넣고 이 지역이 낙랑과 대방 지역이라고 날조한 것이아.
◉ 일본 정한론자들과 한통속이 된 일본 고고학자, 역사학자와 이병도
일본인들은 명치유신 이래 서양의 식민지 정책을 흉내 내어 일본 영토와 식민지 확장의 꿈을 키웠다. 또 한국의 경상도와 전라도가 예전 일본의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의 임나가야에 해당한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을 인용하면서 한일합병의 1910년 보다 40여 년 전인 1870년대부터 수많은 일본 군국주의자 들에 의하여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하면서 일본에서 가까운 한국을 우선 먼저 식민지로 만들고자 획책을 하여 왔다.
일본의 역사학자들이나 고고학자들 역시 임나 일본부설 등에 따른 조선 땅이 일본 땅이 되어야 한다는 야욕에서 한국 고대 역사 왜곡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일본의 역사학자들이나 고고학자 들은 한일합병 이전부터 조선의 고대사 말살의 선두에 서서 호시탐탐 정한론에 보탬이 될 수 있는 역사 날조와 조작에 심혈을 기울이게 된 것이다.
한일합병 보다 16년 전인 1894년에 나카 미치요란 자는 조선낙랑현도대방고(朝鮮樂浪玄菟帶方考)」를 발표하면서 자기 나라도 아닌 조선의 땅 북쪽이 모두 한(漢)나라의 식민지 낙랑과 대방이라는 글을 썼다. 이 자는 일본인임에도 일본 역사가 아닌 한국 역사의 고대 역사를 최초 왜곡한 자로 보인다.
이후에 1910년 한일합병이 되자마자 시라토리 구라키치의 「한의 조선사군강역고(漢の朝鮮四郡疆域考:1912)), 이나바 이와키치의 「진번군의 위치(眞番郡の位置: 1914)), 이마니시 류의 진번군고(眞番郡考: 1916) 등이 차례로 한사군 위치에 관한 글을 발표했는데, 이들의 발표는 모두 한사군이 조선반도 안에 있었고, 진번과 대방은 황해도는 물론 멀리 전라도까지 한나라의 점령지이었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더해서 이병도는 세키노 타다시(關野貞)가 발국한 당토성 지역이 대방의 중심지였다는 고고학적 발굴보고를 추종하여 “<한국고대사연구> 진번군고”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는데, 재령평야을 중심으로 진번(후의 대방군)의 영토는 “대체로 황해도 재령평야를 중심으로 동쪽은 지금의 춘천 일대, 북쪽은 자비령, 남쪽은 한강 북안에 이르는 것”이라는 주장을 했다.
그는 세키노 타다시(關野貞)가 발굴지 봉산을 대방의 치현(治縣)이란 주장을 그대로 인용했고, 낙랑군 둔유현(屯有縣을) 황해도 황주(黃州)로, 대방군 열구현(列口縣)을 황해도 은율(殷栗)로, 낙랑군 수성현(遂城縣)을 황해도 수안(遂安)이라는 황당하고 해괴한 궤변을 논문으로 발표하여 황해도와 경기도 북부를 대방군으로 확정한 장본인이 되었다.
그는 결론적으로 일본 정한롡자와 정한론자들에 동조한 일본의 고고학자 및 영사학자들이 획책한 한반도 내 한사군설과 한국고대사 말살에 결정적 도움을 준 인물이 된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병도의 이런 한국사 말살 행위가 지금껏 밝혀지지 않고 잇다.
이 밖에도 이병도와 식민사학자들은 낙랑군 조선현(朝鮮縣)을 지금의 평양으로, 패수현을 지금의 평북 구자군으로 누방현을 평양시 강동으로, 증지현은 평남 안주시로.....등등 하여 낙랑 속현 25개가 평안도와 함경도 일부에 있다고 비정하였다.
또 대방군에 대하여도 전술한 대방군 치소 황해도 봉산군을 비롯하여 열구현 은률, 장잠현 황해도 신원군, 해명현 황해도 장연군, 소명현 황해도 신청군, 제해현 황해도 서흥군, 함자현 황해도 안악군 등이라고 비정하였는데, 이는 일본인 뿐 아니라, 한국 식민사학자들이 다투어 비정한 것이다. <아래 인터넷 나무위키 참조>
https://namu.wiki/w/%EC%82%BC%EA%B5%AD%EC%A7%80/%EC%A7%80%EB%AA%85/%EC%9C%A0%EC%A3%BC
그러나 일본의 정한론에 동조한 일본 역사학자들의 각종 한사군 관계 논문인나 이들을 추종하여 한반도 내 한사군설을 뒷받침한 한국 식민사학자들의 모든 논문은 각종 역사서에 비추어 볼 때 완전한 날조 왜곡의 비양심적 논문으로 모두 쓰레기로 폐기 처리해야 마땅한 논문들이다.
또 일본 고고학자들이 한반도 내에서 발굴했다고 하는 모든 낙랑계 유물이나 대방계 윰물은 다시 한번 강조하거니와 중국 북경 유리창에서 구입한 물건을 무덤 발굴시 몰래 끼워 넣은 조작, 날조된 유물이라고 날조한 것이다.
점제현 신사비를 비롯한 지상 유물도 중국에서 훔쳐오거나 밀수입해 온 물건을 한반도 내에 세워 놓은 것이다. 이들은 일본 고고학을 한없이 오염시킨 중대 범죄자들로 앞으로 반드시 역사적 심판을 받아 마땅한 자들이었음을 밝힌다.
◉ 일본 고고학자들의 고고학을 크게 오염 범죄 행위들
일본엣서는 신석기 시대의 유물만 발견되었고, 구석기 시대의 유물은 발견된 사례가 없었다. 그러나,
“후지무라 신이치 유물 발굴 조작 사건”이 1975년 이래 2000년까지 20 여년 간 계속된 사례가 있으며, 일본 고고하계의 신빙성이 추락된 사례가 있다.
후지무라 신이치는 1976년 미야기현 오사키시에 위치한 사사라기 유적지에서 석기 유물을 발견하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이후 2000년도 10월에는 아사히신문(朝日新聞)에 80만 년 전의 구석기 시대 유물을 발굴했다고 발표하였다. 그는 유명인사가 되어 아예 신의 손(神の手), 갓 핸드(God Hand, ゴッドハンド)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가 1970년대 이후 발굴에 관여한 유적 180곳 중 162곳인 90%에 해당하는 유적에서 위조 조작 흔적이 발견되었다. 위조 조작 흔적이 확실하게 발견된 것만 162곳이기 때문에 나머지 18곳도 진짜라고 확신할 흔적이 없었다. 19세기가 아닌 20세기 말에 이와 같이 고고학을 크게 오염시킨 사건이 2000년도까지 20여년 간이나 계속되었다는 사실은 놀아운 것이다.
후지무라 산이치 뿐 아니라,
카가와 미츠오(賀川光夫, 1923~2001)는 벳푸 대학 (고고학) 명예교수가 있다. 그는 1962년 오이타현 사이키시(佐伯市)에 있는 히지리다키 동굴(聖嶽洞穴)을 발굴하여 후기 구석기의 석기와 뼈를 발견했고 이 소식은 교과서에도 반영되었다. 그러나 교과서에 까지 실렸던 이 발굴 역시 후에 다시 조사한 결과 구석기인의 뼈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져, 그는 조롱을 당하는 등 고초를 겪자 억울함을 주장하여 2001년 3월 9일에 죽음으로 항의하겠다면서 자살했다.
일본 고고학자 세키노 타다시(關野貞)가 황해도 봉산군에서 발굴했다는 장무이 무덤의 벽돌 명문과 이 명문을 근거로 대방군 치소와 대방군으 군현이 황해도에 있었다는 그으 발굴도 중국에서 입수한 장무이 관련 벽돌 명문을 무덤 발굴 시 끼워 넣고 날조한 범죄 행위를 한 것 임에도 이후 일본의 역사학자나 한국의 역사학자는 이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지금까지 추종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장무이 무덤을 조작하여 대방군이 황해도 봉산군에 있다고 밝힌 논문은 허위 날조이었다. 왜냐하면 대방군은 결코 황해도에 설치한 사례가 없고, 낙랑의 둔유현 남쪽 만리장성 안쪽 조백하 부근에 있었기 때문이다. 대방이 조백하 부근에 밀집해 있었음은 필자가 카페 게시판에 올린 글에 명확히 제시되어 있고, 그 게시글은 사이트는 아래와 같다.
https://cafe.daum.net/hangaram-forum/FPWg/373
(이병도는 진번과 대방을 황해도라 하였지만, 晉書의 대방은 조백하 부근 고구려 국경지역에 있었다)
대방군이 황해도에 존치한 사실이 전혀 없고, 조백하 부근에 밀집해 있었던 사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삼국사기를 보면 영양왕조에 수양제가 고구려를 침략하면서
“아름다운 땅 낙랑과 현도, 요동이 고구려 오랑케의 땅이 되었고, 고구려가 갈발지간(갈석과유주 발해군 지역)을 점령하였고, 요서(遼西: 조백하의 서쪽)을 침략하였다”라고 조명을 내린 바 있다.
이때 대방군(대방군)에 속한 속현은
열구(列口), 장잠(長岑), 제해(提奚) 함자(含資), 명해(冥海), 탄열(呑列)의 6개 현이 있었다. 대방군과 이들 6개 현 중에서
대방군(帶方郡)은 수양제의 침략경로 우 12군의 11번째)을 비롯하여
장잠(長岑)은 좌12군 2번째에,
제해(提奚)는 우12군 6번째에
함자(含資)는 우12군 2번째에,
명해(溟海)는 좌12군 3번째에
각각 평양으로 진격하라는 고구려 국경지역 조백하 부근에 밀집해 있었고 황해도가 결코 될 수 없다. 열구(列口)와 탄열(呑列)이 빠져 있지만, 수양제의 침략경로에 있던 낙랑을 비롯한 낙랑군 25개 현이 거의 대부분 수양제 침략 경로에 있었다는 역사적 기록을 볼 때 이 두 지역도 조백하 부근 댑방군에 인접한 땅이 확실하다. 그러므로 이 역사적 기록에 비추어
세키노 타다시(關野貞)는 황해도 땅이 도저히 될 수 없는 황해도 봉산의 무덤을 발굴하면서 중국에서 가져온 장무이 명문 벽돌을 끼워 넣고, 이곳이 대방군이라고 사기를 친 것이다.
그러므로 세키노 타다시(關野貞)는 일본인 고고학자 행세를 하면서 고고학을 오염시키고, 사기를 치고, 역사를 외곡 날조한 세계 역사상 중대한 범죄 행위를 서슴치 않고 저지른 것이다.
◉ 세키노의 대방과 낙랑 발굴품이 오염되었고, 폐기되어야 할 이유
황해도 장무이 무덤과 평양 낙랑군 유적 발굴에 최고로 기여한 자는 세키노 타다시(関野 貞)이다. 그는 수차 북경의 유리창(琉璃廠)이라는 골동품 판매 중심지를 방문하고 많은 낙랑군 유물을 구입했다는 그의 일기 기록이 남아 있다.
“그의 일기장에는,
대정 7년(1918) 3월 20일 맑음 북경
서협(西脇)씨의 소개로 중산용차(中山龍次氏)씨(중국: 지나 교통부 고문, 월후 출신)를 방문했다. 그의 소개로 우편국장 중림(中林 공백) 씨를 방문하여 우편국 촉탁인 문학사 흑전간일(黑田幹一) 씨의 동도(東道)부터 유리창( 瑠璃廠)의 골동품 점을 둘러보고,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위하여 한나라 때(漢時)의 발굴품을 300여 엔에 구입했다.
(大正七年三月二十日晴 北京西脇氏ノ紹介二ヨリ中山龍次氏(支那交通部顧問, 越後 出身)ヲ訪ヒ,同氏ノ紹介二ヨリ郵便局長中林(空白)氏 ヲ訪ヒ,郵便局囑託文學士黑田幹一ノ東道ニヨリ瑠璃廠ノ骨董店ヲ廻覽シ, 朝鮮總督府博物館ノ爲メ漢時ノ 發掘品ヲ三百餘円ヲ購フ.)
대정 7년(1918) 3월 22일 맑음
오전에 죽촌(竹村) 씨와 유리창에 가서 골동품을 샀다. 유리창의 골동품 점에 는 비교적 한대(漢代)의 발굴물이 많았고, 낙랑(樂浪) 출토품은 대체로 모두 갖추어 져 있기에 내가 적극적으로 그것들을 수집했다.
(二十二日晴 午前, 竹村氏 瑠璃廠 往古玩購. 瑠璃廠 骨董鋪 比較的漢代 發掘物多, 浪出土品大抵皆在, 余極力之蒐集.)라고 기록 되어 있었다(자료 출처: 문성재 교수 (인하대 고조선연구소)
세키노 타다시 (関野 貞 , 1868년 ~ 1935년)”
또 평양 낙랑군 태수의 봉니라고 주장한 유적이 현장에서 발굴한 게 아니고 조선총옥부 박물관에서 사들인 것이란 기록도 있다.
“1922년 10월 30일, 조선총독부 박물관에서 ‘낙랑태수장’ 봉니를 고가인 150원에 매입”
“1931년 12월, 조선총독부 박물관에서 ‘낙랑태수장’ 봉니를 100원에 매입”
“1934년 2월, 조선총독부 박물관에서 ‘낙랑대윤장’ 봉니를 100원에 매입” (자료 출처: 문성재 교수 (인하대 고조선연구소))
***참고: 위의 대방과 낙랑군유적 발굴에 최고로 기여한 자는 세키노 타다시(関野 貞)는 북경 유리창을 찾아가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위하여 한나라 때의 골동품 들을 300 여 엔(円) 어치나 구입하였다고 하였으며, 이틀 후에도 많은 낙랑 출토품을 고가에 매입하였다고 하였다.
이 자의 일기를 보면 북경시 유리창에서 “낙랑(樂浪) 출토품은 대체로 모두 갖추어 져 있기에 내가 적극적으로 그것들을 수집했다(浪出土品大抵皆在, 余極力之蒐集)”고 자신의 일기에 기록했음에도 평안도의 무덤 발굴 시 그가 끼워 넣은 몇 점의 낙랑 유물이 나왔다는 날조된 허위 보고서를 만들어 낙랑이 한반도 내에 있다는 학설을 세운 나쁜 놈이다. 이 자가 북경에서 다량의 낙랑 유물을 수집했으므로 북경이 낙랑이지 어찌 한반도 내에 낙랑이 있겠는가? 이 자는 고고학 유물을 날조하고 고고학을 오염시키면서 역사를 날조한 중대한 범죄자임을 스스로 그 일기장에서 적은 것이다.
그러므로 세키노가 구입한 한대(漢代)와 낙랑 유물이 평양의 낙랑군 유적 발굴 시 끼워넣고 조작했다는 사실을 자신의ㅣ 일기에서 명확히 고백하고 증명한 것이다. 낙랑은 부경 부근에 있었고, 한반도 내에는 설치한 적이 없다.
또 다른 이유는 전술한 바와 같이 낙랑군과 낙랑군의 25개 속현이 거의 모두 수양제 침략 경로인 고구려 서쪽 국경지역 조백하 부근에 밀집해 있었고, 대방군과 그 속현도 거의 모두 고구려 국경 지역 조백하 부근에 밀집해 있었음이 ᄉᆞᆷ국사기의 명확한 기록된 수양제의 침략 당시 조서의 기록이라는 점이다.
◉ 점제현신사비가 가짜임이 확실한 이유와 날조한 일본 범죄자 들
점제현신사비 화강암의 생성년대는 평남 용강일대의 화강암 생성년대보다 2천 8백만 년~2천 2백만 년 전에 형성된 화강암이어서, 평안남도 용강 일대에서 만들어진 화강암이 아니고, 다른 지역(중국)에서 옮겨온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같은 주장은 1990년 1월 17일 연세대 석좌교수이었던 손보기 박사가 (사)한배달과의 대담에서 ‘현재 북한의 국보급 유물인 점제현신사비는 일본인 금서룡(今西龍)이 1913년에 중국에서 가져와 날조한 날조품’이라고 증언한 것이 9월호 한배달 잡지에 실리면서 처음 알려졌다.
손보기 교수의 주장을 요약하면 ‘일본인 금서룡(今西龍)이 중국 하북성 갈석산에 있었던 비석을 파내어 한반도 평남 온천군으로 배로 실어 가져와 한반도내 한사군설을 조작하는데 이용하였다’는 것이다.
손보기 교수는 ‘갈석산에 보면 신사비 크기의 바위를 쪼아낸 자국이 있으며 신사비의 돌을 조금 떼어내고, 갈석산의 돌을 떼어서 맞추어 보면 딱 맞는다고 하였다. 또 일본인들이 이 비석을 배로 실어다가 10리 밖에 못와서 용강에 뉘어놓고 놀고 있는 어린이들을 배경으로 비의 사진을 찍어서 그곳이 낙랑의 점제현이다'라고 날조하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마니시 류(今西龍)는 한반도로 가져온 점제현신사비를 근거로 낙랑군 재 평양설’을 날조하는데 이용하였으며, 북한학자들은 이미 그것이 날조품이라 과학적으로 증명하였는데 우리나라 학자들만 아직도 이 비문을 근거로 ‘한낙랑군 재평양설’을 주장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같은 주장은 1990년 1월 17일 손보기 박사가 (사)한배달과의 대담한 기사내용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무엇 보다도 삼국사기의 역사 기록인 수양제의 고구려 침략 당시 칙명(勅命)으로 내린 조서 내용은 이 점제현이 결코 평안도에 있지 않았고, 낙랑군 자체가 점제현(秥蟬縣)을 필두로 낙랑군 속현 25개 현이 모두 고구려 땅 서쪽 국경지역 조백하 부근이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수양젱의 침략경로를 보면 낙랑군의 속현 25개 현 중에서
1) 점제현(秥蟬縣)은 좌12군 1번째 침략경로에 있어서 황해도가 아닌 요서의 고구려 땅 낙랑의 속현이었고, 조백하 부근에 있었다.
2)수양제가 ”아름다운 땅 낙랑과 현도 및 요동이 고구려 오랑케 땅이 되었다“고 한 낙랑(樂浪)은 좌12군 12번째에 있었다.
또 3) 장잠은 좌12군 2번째에, 4) 임둔은 우12군 4번째에, 5) 함자는 우12군 2번째에, 6) 제해는 우12군 6번째에, 7) 혼미는 우12군 3번째에 있었으며, 8) 증지는 검교우어위 호분 낭장 위문승의 진격로에, 9) 수성은 탁군태수 검교 좌무위 장군 최홍승의 진격로에 있었고,
이밖에도 10) 현도는 좌12군 8번째에, 11) 옥저는 좌12군 11번째에, 12) 요동은 좌12군 7번 째에 각가 있었다.
세키노 타다시(関野 貞)가 대방태수 장무이의 벽돌 며문을 발국했다고 사기를 친 대방은 황해도에 존재한 적이 없었고, 수양쩨 침략경로 있었는데,
13) 대방은 우12군 11번째에 있었고, 대방군의 속현으로,
14) 장잠(長岑)은 좌 12군 2번째에,
15) 제해(提奚)는 우12군 6번째에,
16) 함자(含資)는 우12군 2번째에,
17) 해명(海溟)은좌12군 3번째에 각각 기록되어 있었다.
위와 같이 낙랑이나 낙랑솎현 들, 그리고 대방과 대방의 속현들은 모두 평안도나 황해도에 있지 않았고, 모두 고구려 서쪽 국경지역 조배하 부근에 밀집해 있었던 것이다.
수양제 조서에 기록된 칙명은 일반 역사서의 기록이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인 역사 기록이며, 정확한 역사 기록이다. 감히 수양제의 절대적인 조서를 거짓이라고 말하는 역사학자가 있다면 이런 자는 역사학자가 아니라 사기꾼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전술한 점제현(秥蟬縣)은 수양제 침략경로 좌12군 1번째에 있어서 평남 평강이 아닌 만리장성 안쪽 조백하 지역이다. 일본인 고고학자라고 사칭한 사기꾼 세키노 타다시(関野 貞)의 황해도 봉산군 무덤 발굴시 집어 넣은 장무이 명문 벽돌은 발굴하면서 중국에서 가져온 명문벽돌을 슬쩍 집어넣고 사기를 쳤다는 사실이 명백하다.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평안남도 용강에서 발견하였다는 점제현신사비(秥蟬縣神祠碑) 역시 중국 하북성 지역에서 밀수해온 비석을 평안남도 용강에 옮겨놓고, 이곳이 낙랑군 점제현이라고 사기를 친 것이 명확하다.
고고학을 빙자하여 장무이 무덤 명문 벽돌을 위조해 넣고 그곳이 대방군 치소라고 사기를 친 세키노 타다시(関野 貞)나 중국에서 밀수해 온 비석을 평남 용강에 옮겨놓고 이 비석이 낙랑군 점제현이라고 사기를 친 이마니시 류(今西龍) 같은 자는 고고학을 크게 오염시킨 자이고, 역사를 조작 왜곡하여 허위사실을 역사적 사실이라고 세상을 속인 천하에 질 나쁜 범죄자이다.
일본 고고학계는 앞으로 세키노 타다시(関野 貞)와 이마니시 류(今西龍)의 낙랑과 대방에 대한 고고학 발굴물이 모두 사실이 아니고, 날조된 것이란 사실을 앞으로 반드시 인정해야 한다. 이들의 고고학 날조와 위조는 역사적으로 엄중한 범죄이므로 한국의 고고학계나 역사학계는 일본 고고학계나 역사학계에 이 엄중한 범죄 사실을 추궁하고 문책과 사과를 요구해야 한다.
그리고 세키노 타다시(関野 貞)와 이마니시 류(今西龍)의 낙랑과 대방에 대한 고고학 발굴품의 날조한 사실에 대하여 일본 고고학계는 한국과 세계의 고고학계에 반드시 진심어린 사과를 해야 한다. 그리고 앞으로 일본 고고학계가 더 이상 고고학 유물을 날조하지 못하게 할 대책도 수립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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