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이라는 제도 속에서 여성이 희생을 강요당하며 존재감 없이 사는 게 문제지, 결혼 자체가 문제는 아니라고 봐요.”(44세·여·단체활동가) “성숙한 결혼문화는 다양한 사람들이 공존해서 살아가는 길을 내포하는 것이 아닐까요.”(32·여·직장인)“결혼은 전적으로 선택의 문제로 남겨야 합니다.”(28·남·학생)결혼을 둘러싼 다양한 견해다. 결혼을 했든 하지 않았든 한국 사회의 여성이라면 결혼이 주는 압박을 피해갈 수 없다. 미혼녀, 미혼모, 미망인. 결혼을 당연히 거쳐야 하는 것으로 보는 결혼중심의 언어가 이를 말해 준다. 한편에선 불평등한 결혼제도와 결혼 자체를 비판하는 것은 다른 문제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에 대한 저항의식에서 ‘비혼(非婚)’이라는 용어까지 등장해 보편화되는 추세다. 여성들은 이런 문제를 어느 정도 해소해 줄 평등결혼·부부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질까. 평등부부를 꿈꾸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남의 잔치’되기 십상인 결혼식 유감
“결혼식을 생각하면 마음이 힘들어요. 새하얀 웨딩 드레스를 입고 나를 잘 모르는 주례가 내 인생의 전환점에 우뚝 솟아 있고 폐백도 시댁만 드리고…. 슬펐지만 더한 건 슬퍼할 여유조차 없다는 거예요.”(김영희·29·가명)“옷이나 장소 등 대안적인 방식으로 하고 싶었지만 일단 비용과 시간 문제가 걸렸고, 결혼식 자체에 그런 열정을 쏟을 틈도 없었어요. 단지 이 머리 아픈 결혼식을 빨리 끝내버리자 그런 생각뿐이었죠.”(이정미·33·가명)결혼한 지 각각 6개월, 1년 된 김영희씨와 이정미씨는 결혼생활은 만족스럽지만 결혼식 자체는 고역이었다고 토로한다. 가까운 사람들이 모여 웃고 즐기는 축제처럼 보내고 싶었던 이들의 바람과 달리 결혼식은 비용, 시간, 관습 등의 문제로 후다닥 해치워야 하는 ‘남의 잔치’가 되고 만 것.
경험자들은 결혼식을 좌지우지하는 결혼비용의 주도권을 부모가 쥐고 있기 때문이라고 이를 설명한다. 아직까지 우리 사회의 결혼식 문화는 집안과 집안, 양가 어른들의 의례적인 행사에 머물러 정작 대안적인 결혼식을 해보려는 당사자들의 시도는 부모의 요구하에 묻혀버리고 마는 것이다.
결혼준비는 결혼을 하는 여성과 양쪽의 어머니에게 예상치 못한 ‘노동’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직장인인 서모씨(29)는 가구와 그릇, 자잘한 살림 도구들을 대부분 친정어머니가 마련했다. 자신은 퇴근한 뒤 어머니가 사놓은 것들을 확인하는 것이 전부였지만, 결혼준비가 이렇게 돈과 시간 외에 ‘마음씀’을 요구하는 노동인지 미처 몰랐다고 그는 말한다.반면 이정미씨는 처음부터 일절 양가 부모의 도움을 받지 않고 결혼을 준비한 경우다. 동생들과 살던 아파트에서 작은 전세 주택으로 옮기고 살림 도구들은 대부분 예전의 것들을 그대로 쓰고 있다.
“결혼하기 전부터 두 사람이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는 결심이 있었어요. 선택은 하나를 버리는 건데, 버리지 못하면 부담으로 남을 거라는 판단을 했죠. 부모에게 받지 않고 시작하는 게 힘든 부분도 있지만 나 자신에 대한 책임감을 갖게 돼 더 잘된 것 같아요.”이씨와 동종의 직장에서 일하는 남편(34)은 가사에 적극적이다. 남편이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그는 책을 읽고 그의 동생은 TV를 보는 모습이 이 집에선 낯설지 않다.“‘당연히 해야 한다’로 자리잡고 나면 자연스럽게 돌아가요. 상대에 대한 신뢰가 있을 땐 내가 좀더 해도 짜증나지 않죠.” ‘평등부부’ 첫 단추는 부부공동재산 갖기 평등결혼, 평등부부에 대한 이슈는 1994년 유엔이 정한 ‘세계가정의 해’를 맞아 여성신문사가 ‘평등부부상’을 기획, 제정한 데서 비롯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부부가 각자의 자아를 존중해 주고, 배우자의 자아실천을 위해 적극적인 도움을 주도록 한다.” 7회에 걸쳐 실행된 ‘평등부부상’‘평등부부선언문’중 한 내용이다. 당시 ‘평등부부상’은 각계의 평등한 부부를 발굴, 우리 사회의 양성평등 문화를 앞당기는 데에 좋은 역할모델을 제시했다. 그 수만도 150여 쌍이 훌쩍 넘는다. 대표적인 인물이 영화평론가 변재란, ‘반쪽이’ 만화가 최정현씨 부부다. 여성을 존중하고 사회와 가정의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이들 부부의 모습은 TV 드라마로 제작되는 등 평등가정 확산에 영향을 미쳤다.
가사분담 못지않게 부부가 평등한 경제권을 갖는데 대한 관심도 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지난 2000년부터 여성의전화를 중심으로 논의되고 있는 부부재산계약제와 부부공동명의다. 부부재산계약제란 결혼을 앞둔 남녀가 부부로서 함께 사는 동안 두 사람의 재산을 어떻게 관리, 이혼할 경우에는 어떻게 정리할 것인지 약정하는 것이고, 부부공동명의는 말 그대로 주택 등의 재산에 부부가 공동으로 명기하는 것이다. 특히 기존의 부부별산제를 보완한 부부공동재산제는 여성부가 주도, 지난 총선에서 각당이 공약으로 채택하는 등 올해 여성계가 민법개정안 발의까지 기대하는 제도다. 이는 부부가 재산을 공동명의로 등기해 결혼 후에라도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재산을 처분하지 못하도록 규제하고 있다.
“부부공동명의를 하는 여성들의 경우 결혼생활에 대한 만족감이나 자존감이 높게 나타납니다. 경제적인 것이 여성들이 목소리를 내는 계기가 되고 기본적으로 평등한 부부의 출발점이 되는 셈이죠.” 한국여성의전화연합 신연숙 국장의 설명이다.
전세금 대출부터 집 계약까지 자신이 직접 했다는 안모씨(35)는 “아직 호주제 폐지가 안 돼 호주는 남편이지만 세대주는 나다. 국민연금, 의료보험, 하다 못해 총선 때 선거용지 오는 것까지 내 이름으로 나오는 걸 보면 느낌이 다르다”고 전한다. 이처럼 부부공동의 재산은 평등한 의사소통과 결정 못지않게 평등부부를 가늠하는 중요한 척도가 되고 있다.
여성학자 이박혜경씨는 “결혼을 반드시 해야 한다는 문화적인 통념의 재생산에서 한 고리를 끊지 않으면 결혼 안에서 부부간의 권력관계는 바뀔 수 없다”고 지적한다. “결혼이 정상이고 결혼하지 않으면 비정상이라는 생각, 이성간의 결합이 정상이고 동성간의 결합은 비정상이라는 생각, 아이를 낳는 것이 정상이고 낳지 않으면 뭔가 모자란다는 생각, 혈연이 아니면 가족이 아니라는 생각, 한 집안은 한 여자와 한 남자로 구성되어야 정상이라는 생각은 이데올로기일 뿐”이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평등결혼, 평등부부란 모녀, 친구, 자매, 비혼 남녀 등 다양한 이들이 결혼이 아닌 방식으로 평등하게 ‘모여 살기’를 할 때 더욱 성숙하게 열매맺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