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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혹한 시체 위에 꽃핀 투쟁의지
증 언 자 : 김종배(남)
생년월일 : 1954. 11. 23.(당시나이 26세)
직 업 : 대학생(현재 정치가)
조사일시 : 1989. 11
개 요
학생수습위원회 부위원장 겸 장례위원장, 25일 새로 조직된 시민학생투쟁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무기반납을 끝까지 반대했다.
여학생 죽는 것 보고 총 들어
나는 도청을 점거한 학생, 시민들로 구성된 학생수습위원회(이하 수습위)의 부위원장 겸 장례위원장을 맡고(나중에는 위원장을 맡았다), 계엄군이 27일 새벽 진입할 때까지 도청에 남아 항거하다 체포되어 실형을 살았다.
당시 군에서 제대, 복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학생운동에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런 내가 도청 점거팀에 합류하게 된 것은 21일의 충격적인 사건 때문이었다. 21일 오후 도청 앞에서 계엄군이 일제히 발포를 시작했을 때 나는 가톨릭센터 부근에 있었다. 처음엔 공포탄인 줄 알았는데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쓰러졌다. '이럴 수가 있는가. 군인이 시민들을 향해 조준사격을 하다니' 나는 경악했다. 그러나 그런 생각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우선 부상자들을 병원으로 옮겨야만 했다. 학생, 시민들이 중상자는 전남대병원 등 종합병원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나도 같이 있던 친구들과 경상자 3명을 업고 동구청 뒤의 홍안과로 달렸다. 부상자를 홍안과에 내려놓은 뒤 현관에서 밖의 동정을 살폈다.
여고생 한 명이 위에는 교복을, 밑에는 흰 체육복을 입고 지나갔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 날아온 총알을 맞고 여학생이 쓰러지는 게 아닌가. 어디서 총알이 날아온 줄 몰라 한참 지난 뒤에 쓰러진 여학생을 홍안과로 데려와 살펴보니 이미 숨진 후였다. 나는 속으로 울었다. 이제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날 저녁 드디어 총을 들었다. 총을 들고 밤새 시내를 돌아다니다 새벽녘에야 집에 들어가 한숨 자고 다음날 다시 시내로 나왔다.
22일 오후 2시쯤으로 기억된다. 도청 앞 광장에 학생, 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주최한 시민수습대책위가 소개되었다. 최한영, 장휴동, 이종기 씨 등이 시민수습 대책위원이라고 했다. 계엄사와의 협상결과를 보고하는 자리였다.
정시채 부지사가 장휴동 씨와 같이 분수대 위에 올라가 "총기를 무조건 반납하고 투항하지 않으면 모두 죽는다"고 시민들을 설득했다. 시민들은 아무 말도 없이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장휴동 씨가 연설할 때 나는 분수대 위로 뛰어올라가 마이크를 뺏어들고 울부짖었다.
"사람들이 많이 죽었는데 무조건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면 어쩌란 말이냐. 시민들이 흘린 피는 생각지도 않느냐. 도대체 시민들이 뭘 잘못했단 말인가!"
계속해서 정시채 부지사와 수습위원이란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야! 이 광주시민들의 피를 팔아 출세하려는 놈들아. 너희들은 필요없다. 다 꺼져라."
그들은 모두 쫓겨 내려가고 도청 앞 광장은 성토장으로 변했다. 여기저기서 공포를 쏘며 환호하는 시민들도 있었다. 우리는 그날 오후 각 병원에 분산되어 있던 시체를 전부 도청 앞으로 모았다. 모두 50여 구 정도가 모여졌다. 시체를 본 시민들은 모두 분노했다. 오후 4시에 시체를 늘어놓고 시민궐기대회를 가졌다.
먼저 묵념을 올렸다. 시민들은 사후수습을 관변 수습대책위에 맡길 게 아니라 학생, 시민들이 중심이 되어 처리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학생수습위 부위원장 겸 장례위원장으로 활동
그날 저녁 남도예술회관 앞에 전남대, 조선대 학생들이 모여 학생수습위를 구성했다. 학생수습위는 전남대 송기숙, 명노근 두 교수를 지도교수로 모시고 전남대, 조선대 학생들로 구성됐다. 위원장 김창길, 부위원장 겸 장례위원장 김종배, 총무 정해민, 대변인 양원식, 무기수거반장 허규정, 보급부장 구성주 등이었다.
처음 구성됐던 이 수습위 간부들은 그후 여러번 바뀌었다. 나는 분수대에서 마이크를 뺏어 들고 얘기할 때부터 싸우자는 입장이었는데 묘하게 수습위원이 되었다. 도청 안에는 이미 어른들로 시민수습위가 구성되어 있었으므로 우리들은 학생수습위를 만들자고 해서 수습위에 속하게 된 것이다.
위원장인 김창길은 주로 어른들과 계엄사를 오가며 수습책을 논의했고, 나머지 학생들은 도청에서 자체수습에 나섰다. 장례위원장을 맡은 나는 도청 안마당에 시체를 입관시켜 놓고 가족의 생사를 확인하려는 시민들을 한 사람씩 들여보내 신원을 확인시켰다. 시체는 신원이 확인되는 대로 상무관에 안치시켰다.
무엇보다도 어려웠던 일은 관 구입이 용이하지 않은 점이었다. 죽은 사람이 너무 많아 관이 부족했던 것이다. 광주시내 장의사를 다 찾아다니며 관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한 다음에 돈을 지불하겠다며 내가 직접 사인을 해주기도 했다. 나는 유족들을 상대하며 그들과 함께 분노하고 때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처참하게 일그러진 시체를 직접 관리하고 슬픔과 분노로 울부짖는 유족들을 가까이서 대했기 때문에 무기반납에 반대하고 끝까지 싸워야한다는 입장을 더욱 강하게 가졌는지도 모른다.
23일 정시채 부지사가 도청직원을 출근시켰으면 좋겠다고 말해 우리는 국장급 이상의 직원만 출근하도록 조치했다. 그날 오후 4시 도청에서 구용상 광주시장 주재로 도청 국장 연석회의가 있었다. 구시장이 학생 대표의 참석을 요구해 나와 허규정이 회의에 참석했다. 구시장이 우리에게 물어왔다.
"우리가 행정적으로 지원할 사항이 있느냐?"
"시체를 옮길 앰뷸런스가 없고, 식량이 부족하니 하루 쌀 세 가마니를 공급해 주십시오. 그리고 관 구입에 애를 먹고 있으니 관을 좀 구해줬으면 좋겠습니다."
구시장은 모든 것을 가능한 방향으로 처리하겠다고 약속했다. 나는 또 사망자들의 장례식은 광주 시민장으로 치를 수 있도록 행정적 지원을 요청해 시장의 응낙을 받아냈다.
무기반납을 둘러싼 갈등
24일 오후 6시에 김창길이 계엄사를 다녀온 결과를 놓고 학생수습위 회의가 열렸다. 김창길은 "계엄사에서 총기를 반납하지 않으면 군을 진주시키겠다고 한다. 그러면 우리 모두 죽게 되니 무조건 총기를 반납하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나는 무조건 총기를 반납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면서 4가지 요구사항을 제시하자고 말했다. 1. 광주시민이 폭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매스컴을 통해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2. 구속된 학생 시민을 전원 석방할 것이며, 3. 사망자뿐 아니라 부상자에 대해서도 충분한 피해보상과 치료를 약속하라. 4. 장례식은 시민장으로 할 수 있도록 조치해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이러한 요구가 관철되지 않는 한, 결코 총을 놓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처음 도청을 점거할 때부터 도청 내의 학생, 시민들 간에는 의견이 상당히 엇갈렸다. 대별해서 무조건 총을 놓고 투항하자는 측과, 학생, 시민들이 내건 요구조건의 관철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측이었다. 전자를 '온건파', 후자를 '강경파'라고 불렀다. 내 의견으로는 후자를 주장한 측이 결코 '강경파'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내건 주장이 정당한 것이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기반납에는 반대했지만 시민들로부터 무기를 회수하자는 데는 거의 모든 사람이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군인들이 시내에서 철수한 상태에서 총기를 휴대하고 다녔으므로 시민들이 불안해 할 뿐 아니라 위험부담 또한 컸기 때문이다. 그날 저녁 양측의 안을 놓고 격론을 벌이던 우리는 책상을 뒤엎고 싸우기까지 했다. 서로 의견이 좁혀지지 않자 김창길이 우리를 가리키며 "김종배 저놈 수상 한 놈이다. 저 놈 말을 들으면 안 된다"고까지 했다. 그즈음 나는 윤강옥과 윤상원을 도청 안에서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회의에 직접 참석하지는 않았지만 내 입장에 동의해 "밖에 뜻을 같이하는 학생들이 많이 있으니 걱정 말고 소신껏 하라"고 격려해 주었다. 그때부터 윤상원과 긴밀한 얘기를 나누며 도청 밖의 사람들과 연계를 갖기 시작했다. 그후에도 '온건파'와 '강경파'는 수시로 대립, 총으로 서로 위협하는 사태가 자주 발생했다. 두 파간에 대립이 너무 심해 '강경파'를 지지하던 박남선 상황실장은 내게 경호원 두명을 붙여주기도 했다. 그만큼 양측의 대립이 심했고 총을 휴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생명의 위협까지 느껴야 했다.
24일 회의는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끝났다. 그날 저녁 늦게 도청에 와 있던 전남대 사대학장 오병문 교수가 나를 불렀다. 오교수는 장형태 전남지사의 친구로 며칠 전부터 사태를 원만히 수습하기 위해 도청에 자주 드나들며 학생들을 설득하고 있었다. 내가 교수님께 부탁했다.
"교수님. 현재 구성되어 있는 시민수습대책위는 계엄사 입장만 대변하고 있어 대화가 되지 않습니다. 양식있는 시민들로 수습위가 재구성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가톨릭 신부를 한 명 소개해 줄 테니 같이 얘기해보게."
잠시 후 오교수님이 조철현 신부를 모시고 왔다. 조신부는 "그동안 남동성당에서 따로 모여 수습책을 강구해 온 사람들이 있으니 같이 이야기하자"며 다음날 홍남순, 김성용, 조아라, 이애신씨 등을 모시고 왔다.
시민수습위와 '남동성당파' 인사들, 학생들이 같이 모여 논의한 결과 얘기가 통하지 않는 시민수습위원들을 모두 내보내고 '남동성당파'와 학생, 시민들만 남아 수습위가 재구성되었다. 홍남순 변호사가 위원장, 김성용 신부가 대변인으로 선출됐다.
독침사건
25일에 소위 '독침사건'이 있었다. 도청에 들어와 있던 장계범이란 사람이 간첩의 독침을 맞고 쓰러졌다고 알려진 사건이었다.
내가 아는 독침사건의 전모는 이렇다. 시간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도청 1층 지방과에서 누가 독침을 맞았다는 얘기가 들렸다. 내가 현장으로 달려갔을 때 장계범은 이미 병원으로 실려간 뒤였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에게 물어봤더니 정향규란 사람이 독침으로 장계범을 찔러 둘 다 전남대 병원으로 실어보냈다는 것이었다. 독침이란 게 현장에 남아 있었는데 보통 우리가 쓰는 볼펜이었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병원에 사람을 보내 자세한 내용을 알아오라고 시켰다. 그러나 장계범과 정향규 두 사람은 이미 병원에 없었다. 담당의사가 독침을 맞은 흔적이 없다고 말하더라고 했다. 장계범의 집을 안다는 사람이 있어 윤석루를 시켜 장계범을 잡아오라고 했다. 윤석루는 황금동 장계범의 집에는 아무도 없어 대문짝을 부숴버리고 그냥 돌아왔다고 전했다.
장계범은 22일 도청을 처음 점령할 때부터 같이 들어왔는데 항상 군용 무전기를 들고 다니며 계엄군의 교신내용을 잡는다고 설치고 돌아다녔던 사람이다. 실지로 가끔 계엄군의 동태가 어떻다는 등 떠들고 다녔다. 언젠가 3층 빈방에서 무전기에 대고 무어라고 말하는 걸 본 적이 있는데 장계범이 지나치게 놀라 조금은 이상하게 느꼈다.
독침사건이 완전히 조작되었다는 증거는 그후 내가 계엄사에 붙들려갔을 때 확인됐다. 27일 도청에서 연행돼 계엄사 헌병대 연병장에 엎드려 있는데 모두들 고개를 들게 하고 주모자급을 가려냈다. 그 자리에서 장계범이가 누가 주모자라고 손짓을 하며 잡아내는 게 아닌가. 그 자리에서 장계범이 지적한 10여 명이 주모자로 따로 분류되었음은 물론이다. 여하튼 25일 오후에 시민수습대책위원의 한 사람이던 장세균 목사가 외신 기자들을 불러놓고 간첩의 독침에 두 명이 죽었다고 발표했고, 어처구니없게도 그날 저녁 TV에 이 사건은 '독침사건'으로 보도됐다. 이 사건으로 도청내에는 불신감이 만연되고 '강경파'는 빨갱이로 몰렸다.
시민학생투쟁위원회
나는 신변에 위협을 느끼기도 했고 이대로 그냥 있다가는 '온건파'에 밀려 그대로 무너질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날 저녁 윤상원과 의논해 YWCA에 있던 학생 1백여 명을 밤 10시경 도청으로 진입시켰다. 나는 정상용, 윤상원 등과 의논, 수습위를 투쟁위로 개편했다. 계엄사가 우리의 요구를 하나도 들어주지 않을 뿐더러 계엄군 진입설이 본격화된 판국에 수습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공식명칭을 시민학생투쟁위원회로 정하고 내가 총위원장에 선출됐다. 그 밖의 간부들은 다음과 같다. 외무부위원장 정상용, 내무부위원장 허규정, 대변인 윤상원, 기획실장 김영철 (위원 이양현, 윤강옥), 민원실장 정해직, 상황실장 박남선, 기동타격대장 윤석루(부대장 이재호) 등. 조직개편을 마친 우리들은 본격적인 투쟁준비를 해나갔다. 모든 부서를 장악하고 예비군까지 동원해 싸워나갈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26일에는 그동안 보이지 않던 장형태 도지사가 도청에 출근했다. 오병문 교수가 와서 도지사가 만나고 싶어한다는 말을 전했다. 정상용과 나는 도지사실을 찾아가 도지사에게, "전혀 성의를 보이지 않는 계엄사와 더 이상 대화를 못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 대로 총을 놓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최소한의 요구가 관철되도록 주선해 주십시오. 그리고 사망자들을 도민장으로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방금 상무관에 안치된 시체를 보고 왔다. 특히 일가족 3명이 몰살된 것을 보니 가슴이 아프다. 사망자에 대해서는 28일 도민장을 치를 수 있도록 주선해 주겠다."
장형태 지사가 긍정적으로 대답했다. 우리는 또 "시민들이 불편을 느끼고 있으니 버스를 운행하도록 하고 시장을 개방하도록 조처해 달라"고 했다. 그리고 학생들로 홍보반을 편성, 시내를 돌아다니며 이러한 사실을 알리고 시가지 청소에 힘썼다. 그래서 26일은 시장도 어느 정도 개방되고 평온과 질서가 회복됐다. 26일 오후 계엄사는 수습위를 통해 5시까지 무장을 해제하지 않으면 계엄군을 투입하겠다고 알려왔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최소한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는 한 끝까지 버티겠다고 나섰다. 예정된 5시가 훨씬 지난 뒤에 수습위원들 중 조철현, 이애신, 조아라 씨가 돌아왔다. 그러나 그들도 대책이 없었다. 계엄사는 곧 군을 투입시키겠다는 입장을 강경히 내세우더란 얘기였다. 또다시 '온건파' 10여 명과 무기반납을 둘러싸고 격론이 벌어졌다. 그들이 계속해서 무기반납을 주장하자 박남선이 앞장서 그들을 도청에서 쫓아냈다. 그들은 도청에서 나가며 식당에서 취사를 담당하던 여학생과 외곽경비를 서고 있던 사람들에게 "계엄군이 곧 진주한다"고 설득, 이때 상당수의 사람이 빠져나갔다.
그날 낮에 정시채 부지사가 허규정과 나를 불러 "계엄군이 곧 진주할 텐데 내가 미리 귀뜸해줄 테니까 학생들은 모두 빠져나가라"고 했다. 우리는 "만약 계엄군이 진주하면 도청 지하실에 있는 폭약을 폭파시키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도청 지하실의 폭약은 계엄군 프락치에 의해 이미 뇌관이 제거된 상태였다. 우리는 장형태 지사가 28일 도민장 거행 약속도 했고 해서 설마 계엄군이 그때까지는 투입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참으로 순진한 생각이었다고 느낀 것은 정작 계엄군이 진주한 후였다.
계엄군이 투입된다는 불안감 속에 26일 밤이 깊어갔다. 수습위원들도 모두 돌아가고 학생과 시민들만이 도청을 지키고 있었다. 단지 처음에 구성되었던 시민 수습대책위의 이종기 변호사만이 도청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 변호사는 "수습위원을 맡았는데 수습을 못 했으니 학생들과 같이 죽겠다"며 2층에 자리잡았다. 이 변호사는 학생들과 같이 죽을 작정으로 목욕을 하고 왔다고 했다.
밤 12시가 넘어 시민들에게서 계엄군이 움직이고 있다는 제보 전화가 도청으로 걸려왔다. 우리는 설마 계엄군이 들어올까 반신반의하며 기동타격대에게 순찰을 내보냈다. 시내로 나갔던 기동타격대에게서 정말 계엄군이 진입하고 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27일 새벽 2시가 가까운 시간이었다. 도청 안에 비상을 걸고 박영순(여, 송원전문대)과 이경희(여, 목포전문대) 두 여학생을 데모진압용 가스차에 태워 시민들에게 방송하도록 시켰다. 계엄군 진입을 알리는 두 여학생의 가두방송이 나가자마자 총성이 울리기 시작했다. 이때가 2시 15분이었다고 기억된다.
우리는 수류탄과 실탄을 새로 지급하고 학생, 시민들을 도청 곳곳에 배치시켰다. 3시 30분쯤 도청 후문 쪽에 군인의 모습이 보였다. 30분 이상 교전이 계속됐다. 나는 2층 부지사실에 김윤기, 안길정 등과 함께 있었다. 1층이 점거됐다는 얘기를 듣고 4층으로 올라갔다. 한참 지난 후에 아래층이 조용해졌다. 아마 우리가 마지막 남은 모양이었다. 문을 열고 내다보니 4층 복도까지 올라와 있던 계엄군이 총을 쏘았다. 계엄군은 핸드마이크로 소리쳤다.
"상황이 끝났으니 총을 버리고 나오라."
일순간 우리는 싸우다 죽을 것인가. 나갈 것인가 망설였다. 한 명이 "어차피 모두 끝난 모양인데 나갑시다" 하고 말했다. 한참동안 망설이던 우리는 그 말에 총을 버리고 밖으로 나갔다.
나는 보안대 지하실로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 처음에는 북쪽과 연결지으려는 것 같았으나 아무에게도 그런 혐의가 드러나지 않자 김대중 씨와 연결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김대중 씨와 전혀 연결이 안 되자 수사가 잠시 중단되었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정동년 씨가 튀어나왔다. 정동년 씨는 예비검속되어 풀려나갈 줄 알고 있었는데 동교동 김대중 씨 자택 방명록에 이름이 적혀 있어 그것이 꼬투리가 된 것이다. 결국 정동년이 내란임무종사 수괴로 되고 나는 5·18을 일으킨 행동대장으로 각본이 짜여졌다.
재판받을 때 정동년 씨와는 사전에 얼굴 한 번 맞댄 일조차 없다고 증언했지만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2심에서 무기로 감형되었다. 영창생활과 재판과정에서 느낀 것은 무장투쟁이나 극한적 상황에서 인테리들은 지극히 소극적이고 이기적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사회 밑바닥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더 의젓하고 당당하고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1982년 성탄절 특사로 석방되어 이것저것 장사를 해보았지만 잘 안 되어 1987년 복학했다. 지금은 정당활동을 하고 있다.(조사.정리 양선화) [5.18연구소]
첫댓글 행복과 사랑이 함께하는 7월 마지막 주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