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거룩한 허비
요한일서 4:9,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사랑하시되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하면 우리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자기 아들을 화목 제물로 보내셨을 만큼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의 악한 죄와 저주와 사망과 영벌의 결박에서 풀어놓아 자유하게 하기 위하여 자기의 외아들의 목숨을 내놓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곧 하나님 자신입니다. 누가 자기의 외아들을 희생 제물로 바칠 수 있겠습니까? 그것도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흉악한 죄인을 위하여, 아니 자기의 원수를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 외아들을 대신 감방에 넣거나 대신 사형수 판결을 받도록 내줄 수 있겠습니까? 차라리 나이가 든 자신이 대신 죽고 말지, 자기 목숨보다 더 소중한 자기 아들을 어찌 내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죄인들을 구속하기 위하여 자기 아들까지 아끼지 않고 내어주셨으니, 참으로 이것은 사랑의 낭비입니다. 죄인된 우리를 위하여, 죄가 하나도 없는 자기 아들을 내어주셨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원수처럼 미워하는 자들을 위하여 자기의 지극히 사랑스러운 외아들을 내어주셨으니, 참으로 무모하고 어리석을 만큼 큰 사랑의 허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낭비와 허비로 보이는 일들이 세상과 하나님의 역사 속에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속 은혜의 허비뿐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행위 역시 지나치게 큰 허비입니다. 하나님은 본래 다차원적 존재요 영적 존재이기에 이러한 우리 인간들이 살고 있는 시간과 공간이 존재하는 삼차원적 세계가 필요치 않습니다. 그런데 오직 자기 형상을 따라 지은 인간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보는 이 세상과 우주를 무모할 만큼 광대하게 창조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밤에 눈을 들어 하늘을 보면 일부 보이는 저 하늘 저편의 별들의 세계를 살펴봅시다. 여름 밤 캄캄한 시골에 올려다보면 밤하늘에 수천 개의 별들이 우리의 육안으로 관측할 수 있습니다. 그것들은 태양계의 해와 같이 스스로 빛을 내는 항성들입니다. 그 항성들을 둘러 싸고 수많은 빛을 내지 않는 행성들이 있을 것이지만 그것들은 육안으로는 볼 수 없습니다. 이렇게 태양처럼 빛나는 항성 별들 중에서 가장 가까운 별이 태양계에서 4.2광년 밖에 떨어져 있는 ‘프록시마 켄타우리’라는 별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별들이 무려 천억개 정도 포함된 것이 우리 태양계가 속한 은하계 성운입니다. 은하계에만 별들의 숫자가 천억 개에서 사천억 개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이러한 은혜계와 같은 커다란 별자리 성운 개수만 해도 관측 가능한 우주 전체에서 은하만 천억 개에서 2천 억 개가 있다고 합니다.
이 우주의 넓이가 얼마나 큰 지 그 거리를 계산할 때 광년이라는 단위를 씁니다. 빛이 일년 동안 가는 거리를 1광년이라고 합니다. km로 따지면 1광년은 빛이 일년 동안 가는 거리로서 9조 4600억km입니다. 그런데 우주의 넓이를 학자들이 추산하기를 930억 광년이라고 하니, 우주의 넓이는 우리 인간의 지각으로는 가히 상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넓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이 모든 광대한 우주를 만드시고 별을 그 우주 공간에 매달아 놓으시고 각 별들의 궤도를 정하시므로 그 별들이 궤도를 따라 운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광대무변한 공간과 별들과 암흑과 빛들이 다 지구에 살고 있는 인간들로 하여금 누리게 하시기 위함이니 얼마나 거대한 허비입니까? 동물들은 이 광대무변한 우주의 신비를 감상하며 경외심을 품을 수 있는 지각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지어진 인간만이 저 광활한 하늘과 그 하늘에서 반짝이는 별들을 바라보면서 기이하고 장엄함을 느낍니다. 그리하여 이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을 경외하며 그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의 솜씨와 그 크심을 인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주의 이 광대무변함은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보여주는 증거인데, 이는 효율성으로 보면 지극히 큰 낭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생각해보면, 인간을 위하여 이 자그마한 태양계 하나만으로도 족하며, 달 하나만으로도 족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하늘에 수없이 반짝이는 별들을 저토록 많이 만들어 달아놓으시고 끝도 없이 펼쳐지는 우주를 창조해놓으신 것은 참으로 엄청난 낭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들은 분에 넘치는 호사를 누리고 있는 셈이요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을 위하여 그의 경이로우신 창조의 능력을 낭비하실 만큼 인간을 존귀하게 여기신 것입니다.
어찌 하나님의 창조 행위만 그러하시겠습니까?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자기가 택한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한계를 모를 만큼 허비하는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그 후손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돌보심과 인내와 용서해주심의 사랑은 끝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75명만이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복 주심으로 430년만에 남자만 60만 명이 되는 큰 민족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은 당대 세계 최강의 나라 애굽에서 모세를 통하여 위대한 권능을 발휘하여 애굽 왕 바로가 꼼짝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보내줄 수밖에 없게 하셨습니다. 창일한 강 홍해수를 육지처럼 말려서 그들로 그 강을 무사히 건너게 하시고, 광야에서 40년 동안 아무도 폭염이나 기갈이나 길을 잃어버려서 죽음을 당한 자 하나도 없이 무사히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셨습니다. 이처럼로 하나님의 끊임없는 사랑의 돌보심과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이 이스라엘 위에 부어졌습니다. 그토록 자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불신앙으로 대할지라도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고 용서하시고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베푸신 언약을 끝까지 지키셨으니, 그 민족에게 행하신 사랑은 오늘날까지도 이후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그런 사랑을 받을 자격이 하나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처럼 넘치는 사랑을 그들에게 한결같이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러한 동일한 넘치는 사랑과 은혜가 지금도 동일하게 우리에게 베풀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거룩한 낭비를 하나님 아버지는 예수님 안에 있는 우리에게 베푸시기를 지금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가만히 생각해보면, 하나님은 자연 은총 속에서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은 인간의 심성에도 이러한 자기 허비하는 사랑을 심어놓으시어 행하게 하십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자식을 향한 부모의 한결같은 사랑입니다. 육신의 부모는 자식들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까지 아낌없이 줄 정도이니, 자식을 위하여 모든 수고를 다 행하고 모든 좋은 것을 다 내어주고 자신의 청춘과 삶을 다 희생하고도 오히려 기뻐합니다. 자식을 위하여 가장 좋은 것을 주고자 하여 자기가 누릴 것들도 아끼며 그것들을 자녀들에게 베풀 때에 가장 행복해 합니다. 때로 악한 불효 자식이 그 부모가 늙고 병들고 아무 힘이 없고 경미한 치매가 와서 돌보기 힘들 때에 어느 낯선 곳에 그 부모를 내려나 놓고 버리는 패륜적 행위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노인은 자기를 내다 버린 그 자식에게 혹시라도 해가 될까봐 자기의 신분을 끝까지 숨기고 말을 하지 않는 부모님이 있다는 사연을 접한 적도 있습니다. 참으로 부모의 사랑은 한없는 허비인데, 부모에 대한 자식들의 사랑은 종종 조건적이고 패륜적인 경우가 있습니다. 부모의 마음에 새겨진 이러한 헌신적인 자식 사랑은 바로 하나님의 허비하는 사랑의 모습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하나님이 친히 보여주신 이러한 거룩한 낭비, 거룩한 허비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까요?
우리도 하나님의 이렇게 아낌없는 사랑과 자비와 돌보심의 은혜를 입은 자요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무런 아낌없이 선물로 받은 자답게 하나님께 우리 삶을 드림에 있어서, 그를 섬김에 있어서 계산 없는 사랑으로 응답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산없는 허비하는 사랑을 받았는데, 우리가 하나님을 섬김과 드림에 있어서 지나치게 계산적이고 아까워하고 지낸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그 조건없는 넘치는 용서와 넘치는 축복과 넘치는 은혜를 알지 못하고 감사치 아니하는 모습일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주님께서 자기의 큰 죄악을 다 사해주시고 구원해주실 뿐 아니라 이방인의 사도로 자신을 불러주신 분수에 넘치는 은혜를 받았음을 인하여 자신을 온전히 주님을 위하여 드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가 고백하기를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로마서 14:7,8)
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그가 맡은 이방인의 사도로서 이방인 교회 성도들을 섬길 때에 받는 수많은 시련과 역경과 오해와 배신 속에서도 주님의 교회와 성도들을 향한 그의 사랑과 봉사에 있어서 주님의 그 조건없는 사랑을 본받아 행하였습니다. 그래서 고백하기를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로새서 1:24)
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근심하게 하며 노엽게 하는 행동을 많이 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도 편지하여 이르기를
“보라 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기를 준비하였으나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하리라 내가 구하는 것은 너희의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 어린 아이가 부모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요 부모가 어린 아이를 위하여 하느니라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하므로 재물을 사용하고 또 내 자신까지도 내어 주리니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사랑을 덜 받겠느냐”(고린도후서 12:14,15)
그렇게 자기 속을 썩이고 오해하고 배신까지 하는 자기가 세운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마치 부모가 자기 자식들을 위하여 헌신하듯이, 영적인 부모로서 재물도 허비할 뿐 아니라 그 자신의 삶과 생명까지 온전히 허비하겠다고 사도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영광은 바로 하나님의 거룩한 허비의 사랑과 자기 희생과 헌신에 응답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지금까지 이어져 왔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은 가히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크고 넓고 깊고 한이 없습니다. 그러한 사랑과 은혜를 전혀 받을 가치 없는 우리들을 위하여 아낌없이 부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러한 거룩한 낭비의 사랑을 받은 자답게, 조건없는 숭고한 자기 희생의 사랑을 받은 자답게 우리도 그에 걸맞는 삶을 살아갑시다.
하나님을 위하여 드린 삶은 결코 낭비가 아닙니다. 그의 크고 위대하신 이름을 위하여 드려진 삶보다 더 귀한 가치 있는 삶은 없습니다. 엘살바도르 선교사로 갔다가 원주민에게 살해된 짐 엘리옷이라는 젊은이는 그의 휘튼대학교 시절에 이렇게 일기에 썼습니다.
“영원한 것을 얻고자 영원할 수 없는 것을 버리는 자는 바보가 아니다.”
보이지 않으나 주님 안에서 영원한 영광을 얻고자,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여, 이 세상에서 마음을 뛰게 하고 의지하게 만드는 세상의 좋은 것들을 기꺼이 포기하고자 하는 자신의 결심을 굳히면서, 그는 이 고백을 자신의 일기 속에 또박또박 눌러 써놓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그의 위대한 능력을 허비하고 그의 가장 소중한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까지 십자가에 내어주시며 우리를 한없이 사랑하시는 바보와 같은 사랑을 베풀어주셨고 지금도 그러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거룩한 허비를 기억하면서, 우리도 바보처럼 거룩한 사랑의 낭비로써 하나님과 교회와 가족과 이웃을 섬기는 자로 살아갑시다. 그런 사람은 결코 바보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