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쥔장사찰자료실 스크랩 삼국통일 후 무기를 보관한 무장사지((?藏寺址)
소윤당 추천 0 조회 29 13.12.21 20:1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삼국통일 후 무기를 보관한 무장사지

 

 

무장사지

 

 

무장사지(?藏寺址)는 경주시에서 동쪽으로 약 20㎞ 떨어진 거리에 위치하며, 행정구역은 경주시 암곡동 산 1번지 일대이다. 

경주보문단지 동쪽의 커다란 물레방아를 지나서 좌측으로 돌아서면 암곡동으로 가는 아스팔트 포장도로가 나온다. 도로를 따라 구불구불한 산길을 올라가서 고갯마루를 내려오면 덕동호수를 만나게 되는데 오른쪽 호수 안이 고선사지가 있던 수몰되어 있는 곳이다.

계속해서 1.5km 도로 끝까지 가면 무장사지 및 억새단지로 가는 등산로의 주차장이 있다. 이곳에 주차를 하고 평탄한 계곡 길을 따라 약 4㎞ 걸어가면 숲 사이에 에 무장사지가 있다.

 

절터는 상하로 단이 져 있고, 상단에는 아미타불조상사적비(阿彌陀佛造像寺跡碑)의 쌍두귀부 대좌에 비신(碑身)없이 이수가 얹혀 있으며, 아랫단 끝자락에는 삼층석탑이 있다.

지형으로 보아 가람은 동쪽 높은 곳에 불전(佛殿)을, 서쪽 낮은 곳에 탑을 둔 동서방향 가람배치인 듯 하다

 

 

『삼국유사』무장사 미타전조(彌陀殿條)에 의하면, 신라 제38대 원성왕의 부친으로 돌아가신 후 명덕대왕(明德大王)에 추봉된 대아간(大阿干) 효양(孝讓)이 그의 숙부 파진찬을 추모하여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세속에 전하는 바에 의하면, 사찰의 이름을 무장사(?藏寺)라 한 것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이 삼국을 통일한 뒤, 병기(兵器)와 투구를 이 골짜기 안에 감춘데 연유한 것이라고 한다.
조선시대 성종대에 완성된『신증동국여지승람』경상도 경주부 불우조(佛宇條)에서는,“ 세속에 전하길 고려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한 뒤 병기와 투구를 이 계곡 가운데에 보관하였기에 이름을 무장사라고 하였다”고 하였다.

하지만 삼국통일은 776년 문무왕에 의해 완성되었으며, 태종무열왕대는 백제와의 전쟁을 시작한 시점이므로 무열왕이 병기를 암곡에 보관하였다는 이야기에는 의구심이 들며 고려 태조가 후삼국통일 후에 무기를 보관하였다는 이야기도 믿기가 힘든다.

 

 무장사는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은 지형 특성상 서향한 가람배치를 보이고 있으며, 좌우로는 협곡을 끼고 있다. 즉 능선 말단부의 사면을 계단식으로 정지한 뒤 사찰을 창건하였는데, 맨 아래 서쪽에는 삼층석탑을, 가운데는 금당을, 윗부분이자 금당의 동쪽에는 미타전을 건립하였다.

현재 무장사내의 건물군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것은 미타전이다. 무장사 아미타여래조상사적비(阿彌陀如來造像事蹟碑)와 『삼국유사』무장사 미타전조에 의하면, 사찰의 한 노승이 부처님(眞人)께서 삼층석탑의 동남쪽 언덕, 즉 미타전이 건립될 자리에 앉아서 서쪽을 향하여 많은 대중들에게 설법을 하고 있는 꿈을 꾼 후 마음속으로 불법이 머무를 곳으로 인지하고 있었다.

 

 

소성왕릉으로 추정하는 (전) 경덕왕릉

 

신라 38대 원성왕은 우여곡절 끝에 왕이 되지만 아들 복은 없었는지 두 아들이 죽고 장손자 혜충이 왕이 된다. 그가 39대 소성왕이다. 이 소성왕도 아버지의 명을 받았는지 왕 노릇도 겨우 1년 5개월(799년 1월~800년 6월)을 하다가 죽는다. 소성왕이 죽자 슬픔에 겨워 피눈물을 흘리며 상심하였다는 소성 왕비 계화는 “아미타불에게 지성으로 귀의하면 구원을 맞이할 수 있다”라는 말을 듣고 많은 재산과 재물로 국내의 명장(明匠)을 초빙하여 아미타불상과 신중을 조성한 뒤 이를 봉안하기 위해 노승이 점지한 그곳에 미타전을 건립하게 된다.

 

소성왕이 죽었을 때 큰아들이 겨우 13세이고 그 아래로 아들과 딸이 하나씩 있었는데 큰아들 청명이 나중에 삼촌 김언승에게 칼을 맞아 죽는 애장왕이 된다. 둘째아들 체명은 형 애장왕을 호위하다가 역시 반군에게 죽는다. 막내 어린 딸 장화는 반군 편에 가담한 김언승(41대 헌덕왕)의 동생이며 자신의 숙부 수종에게 시집갔으나 남편 겸 숙부는 42대 흥덕왕이 된 지 2개월 만에 죽는 기구한 운명의 주인공이었다.

 

이런 애사(哀事)를 지닌 무장사는 그 후 고려시대까지 절은 남아 있었으나 미타전은 이미 허물어졌다고 한다. 조선후기인 영조 38년(1760)에 경주부윤으로 있던 홍양호가 관리(官吏)로 하여금 무장사를 찾게 하였을 때 암자와 같은 건물과 스님이 머무르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1817년에 무장사를 찾았던 김정희가 비편(碑片)을 새로 발견한 뒤 사찰 뒤로 옮겼다고 한 내용으로 미루어 보면 19세기 초반 이후에 폐사(廢寺)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이곳에는 미타상을 조성한 인연을 적은 비문이 세워졌던 무장사 아미타여래조상사적비의 이수( 首) 및 귀부(龜趺)와 삼층석탑만이 남아 있다

 

 

무장사지삼층석탑(?藏寺址三層石塔)-보물 125호

 

 

 

 

이중기단에 삼층으로 적정한 비례와 균형 잡힌 당당한 모습은 통일기의 신라전형적인 석탑으로, 옥개받침은 5단이고, 하층기단 탱주는 2주이다.

이 탑의 특징은 상층기단에 우주와 탱주를 두지 않고 각 면에 2개씩 안상(眼象)을 얕게 심조(深造)한 것이 특징이다. 이렇게 기단부에 안상을 새긴 예는 현재 경주국립박물관 정원 입구에 있는 남산승소곡삼층석탑에서도 볼 수 있다

  

무장사지삼층석탑의 기단부 - 상층기단의 각 면에 2개씩의 안상무늬가 있다

 

 

기단은 이중기단으로 하층기단은 지대석과 면석을 1매석으로 다듬고 그 위에 갑석을 올려놓았다.

하층기단 면석은 각 면 양쪽에 우주를 두고 가운데는 탱주 2주를 두어 3구(區)로 구분하였다

 

상층기단은 우주와 탱주를 두지 않고 각 면에 2개씩 안상(眼象)을 얕게 심조(深造)한 것이 특징이다.

이렇게 기단부에 안상을 새긴 예는 현재 경주국립박물관 전원 입구에 있는 경주 남산승소곡삼층석탑에서도 볼 수 있다

 

 

 

탑신은 3층으로 각 층 공히 탑신석과 옥개석이 각각 1매석으로 모두 6매로 구성되어 있으며 네 모서리에 우주만 모각되어 있고, 흘림기법과 문비 등 장식은 없다. 1층탑신 상면 가운데 방형사리공이 뚫려있고  2층탑신과 3층탑신은 1층탑신에 비해서 현저하게 줄어들어서 급격한 체감을 나타낸다

 

옥개석은 모두 5단의 층급받침이 있으며, 윗면에 각형 2단 탑신받침이 있다.
낙수면의 경사는 완만하며, 단부에서 살짝 반전하고, 귀마루의 합각선은 뚜렷하다. 
물끊기홈은 없으며 각 층마다 옥개석의 네 모서리에 풍령(風鈴)등 장식을 달았던 작은 구멍이 귀마루 끝 합각선에 1개와 양쪽 전각 면에 2개씩 모두 5개가 뚫려 있다.

 

노반과 복발은 복원하면서 보강한 것으로 노반은 방형 육면체이고, 위의 복발은 적당히 편구형(扁球形)으로 다듬었다

 

 

 

삼층석탑은 본래 도괴되어 탑재 일부를 상실하였으나, 석재를 보충하여 1963년 12월 13일 복원하였으며 이 후 1996년 8월~11월에 석탑을 전면해체 보수하였다.

 

 

 

 

무장사지 아미타불조상사적비 (?藏寺址 阿彌陀佛 造像事蹟碑) -보물 125호

  

정면

 

 

뒷면

 

아미타불조상사적비는 신라 제 39대 소성왕(재위 799∼800)의 왕비인 계화부인(桂花夫人)이 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아미타불상(阿彌陀佛像)을 만들면서 그 과정을 자세히 기록한 비이다.

 

비석 받침은 쌍두귀부(雙頭龜趺)로서 머리 부분과 이수의 1/4 정도가 파손되어 완전하지 않다.

방형의 대좌 위에 마련된 귀부의 발은 이미 형식화되었으며, 두 귀부의 등위 중앙에 비신을 세우기 위한 장방형의 비좌(碑座)를 마련하였고, 비좌의 네 면에는 한 면에 3구씩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조각하였다.

이처럼 귀부에 십이지신상을 조식(彫飾)한 것은 다른 예가 없는 특별한 경우에 속한다.

 

전면

 

후면

 

측면

 

이 무장사지의 귀부는 두 가지의 특징이 있다.

첫째, 경주지역의 모든 신라시대 귀부는 건물지 또는 왕릉의 방향과 관계없이 남향을 하고 있는데 이 귀부는 서향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십이지신상의 고유한 방향과 일치하지 않는 점이다. 예컨대, 자상(子像)의 경우 정북을 향하고 있어야 하나, 현재는 동향을 하고 있다.

이 같은 정황을 고려하면, 무장사지의 귀부 역시 원래는 남향을 하고 있었으나, 이 후 언젠가 서향으로 방향이 변경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비신 받침의 12지상

 

이수

 

일부 잘려진 이수의 앞 뒤면에는 2마리의 서린 용[蟠龍]이 구름무늬 속에 장식되어 있는데, 앞발로 보주(寶珠)를 서로 빼앗으려는 듯이 머리를 쳐들고 있으며 용머리 사이로는 직사각형의 편액(偏額)이 있다.

편액에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이라는 여섯 글자를 이행으로 새겼다는 견해가 있으나 현재 선명하지 않아 구분이 잘 되지 않는다

 

무장사지 아미타조상사적비의 이수는 통일신라초기에 조성된 신라 태종무열왕릉비의 이수와 9세기 후반 최치원이 찬한 숭복사지비(崇福寺址碑)의 이수와는 다른 양식을 보여 주고 있어 통일신라기 이수의 변천을 파악하는데 귀중한 자료라 할 수 있다.

 

오른쪽 계곡에서 발견된 귀두

 

2008년 12월, 문화재청이 경주시와 합동으로 무장사 아미타불조상 사적비 비신 복원을 위한 현지조사를 시행하던 중 귀부의 좌측면 머리 1점을 오른쪽으로 30m 떨어진 계곡에서 발견하였다.

 

전문가들의 의견에 의하면 발견된 머리는 귀부의 양식이 귀두에서 용두로 변화되어가는 중간단계의 모습을 보여주는 자료로 학술적인 가치가 매우 큰 것으로 판단된다고 한다

 

 

2012년에 아미타조상사적비의 복원 사업이 완성되었으며 2008년에 발견된 발견된 귀부를 접합하였다 

 

 

아미타불조상사적비 비신

 

추사 김정희의 조사기                                               아미타불 조상사적비

 

 

아미타불 조상사적비는 일제강점기에 처음 발견된 이후부터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훼손된 채로 보관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 비는 신라 제39대 소성왕(昭聖王)의 비(妃)인 계화왕후가 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아미타불상을 조성할 때 세운 것으로 건립연대는 801년으로 추정된다.

여기 있었던 비신의 글은 신라의 김육진이 지었고, 비신의 서체는 왕희지(王羲之)의 글씨를 집자하여 새긴 것인데, 조선시대 이계 홍양호와 추사 김정희에 의해 비편(碑片)의 일부가 발견되었으며, 1915년 파편 가운데 세 번째 조각이 발견되었다.

발견된 비편에서 확인되는 비문의 일부분이『삼국유사』무장사 미타전조의 내용과 일치한 까닭에 무장사임이 분명해졌다.
그리고 한 비편의 왼쪽 면에는 1817년에 무장사를 방문한 뒤 새로운 비편을 발견한 기쁨을 적은 김정희(金正喜)의 조사기(調査記)가 별도로 기록되어 있다.

비신 없는 아미타불조상사적비의 이수 및 귀부의 높이는 1,330㎜이다.

 

이 밖에도 석등 옥개석과 미타전의 자리로 짐작되는 곳에 10개의 초석이 남아 있다,

 

주변에 흩어져 있는 초석

 

 

무장봉과 억새밭

 

 

무장사지가 있는 동대봉산의 무장봉 정상의 억새밭군락지는 최근에 알려져 많은 등산객이 찾는 곳이다.

무장봉 정상을 하얗게 채색한 억새군락은 148만㎡로 정선 민둥산의 3배가 넘는 규모이다. 정상에 오르면 광활한 억새군락지 너머로 멀리 포항의 영일만이 한눈에 들어온다

 

무장사지 가는 길-가파르지 않고 평탄한 길이다

 

암곡동 공용주차장에서 무장봉 정상까지는 약 6.7㎞ 거리. 산행로는 무장봉 정상 아래까지 사철 맑은 물이 흐르는 덕동천을 거슬러 오른다.

숲은 햇빛이 스며들지 않을 정도로 어두컴컴하다. 그래서 암곡(暗谷)이라는 지명이 붙지 않았을까.

개울을 몇 차례 건너고 평탄한 숲길을 걷다보면 무장봉과 무장사지로 가는 삼거리가 나온다. 오른쪽 개울 건너 나무데크로 조성된 길 150m 남짓한 곳에 무장사지가 있다. 우리나라 보물 125호 아미타불조상사적비와 보물 126호 삼층석탑이 있는 곳이다
그러나 대부분 무심한 산행객들은 이곳을 지나쳐 무장봉으로 바로 오른다.

 

 

무장봉의 억새군락지

 

동대봉산(660m)의 한 봉우리인 무장봉(624m)은 본래부터 억새군락지는 아니었다. 1970년대 초 동양그룹이 이곳에 오리온목장을 조성해 운영했으나 80년대 비업무용 토지 강제 매각조치에 따라 축산회사에 매각이 되었고,  1996년 이 목장이 문을 닫은 후 방치되면서 억새가 돋아나기 시작해 무장봉은 어느새 전국 최고의 억새군락지로 거듭난 것이다.
무장봉은 무장사지에서 3.1㎞를 더 올라야 만난다. 길은 가파른 곳이 거의 없어 잘 닦여진 평탄한 길이어서 가족 등반에 더할 나위없이 좋은 곳이다

무장봉은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와 TV 드라마 '선덕여왕'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봄철이면 암곡동 주차장 인근 농장에서 재배한 청정 미나리를 삼겹살과 함께 먹는 색다른 맛을 느낄 수 있다

 

무장산 등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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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봉산(東大封山·680m)

 

경북 경주시 덕동과 황룡동에 걸쳐 있는 동대봉산(東大封山·680m)은 하루코스의 가벼운 산행에 제격이다. 산이 높지 않고 능선도 순해 체력적인 부담이 덜하다

동대봉산은 동쪽 골짜기에 황룡사(黃龍寺)라는 절이 있어 황룡산이라고도 불린다. 조선시대 수군이 군함을 만들 때 사용하던 목재용 나무를 키우던 산으로, 입산이 금지된 봉산(封山)이라 불린데서 이름이 유래했다.  

조선시대에는 동대봉산의 산불이 유난히 잦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봉산으로 지정되어 관청에서 파견된 관리가 산을 감시하고 도벌을 단속했는데 그 권력을 이용한 민폐가 대단히 심했다고 한다. 취사나 난방을 나무에만 의존하던 당시로서는 나무가 생활필수품이니 누구를 막론하고 단속의 대상이 안 될 수 없었다. 가까운 산을 두고 먼 곳에까지 가서 나무를 해 와야 하기 때문에 동대봉산에 몰래 들어가 나무를 베는 일이 많았는데 어떠다 잡히면 매타작을 당하곤 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지역 주민들이 화풀이로 동대봉산에 방화를 일삼았다는 것이다.


 '불 붙었네 불 붙었네 동대봉산 불 붙었네. 동대봉산 붙은 불은 동해물로 끄려마는, 요 내 가슴 붙은 불은 어느 님이 꺼 줄런고.'
주민들이 부르던 노래의 가사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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