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고마운 새댁
진 연 숙
아파트 정문을 지나 집으로 걸어가고 있다. 길이 좁아 맞은편에서 차가 내려오거나 뒤에서 올라오면 사람들은 주차된 차들 사이에 잠깐씩 숨어 있어야 한다. 그런 복잡한 길에 할머니가 유모차를 밀며 ‘세월아 네월아’ 걸어간다. 낯익은 뒷모습이다. ‘아이고, 유모차 할머니 퇴근하시는구나,’ 오늘은 그녀의 패션이 멋지다. 꽃무늬가 잔잔한 원피스에 빨간 머리 앤이 썼을 법한 밀짚모자에 흰 운동화를 신었다.
퇴근 시간이라 차들이 줄지어 아파트 정문을 통해 들어오고 있다. 앞서가는 할머니는 뒤에 오는 차 소리를 못 듣는 것 같다. 이쪽저쪽 담장의 장미꽃들을 구경한다. 어슬렁거리며 지나가는 고양이에게도 아는 척을 한다. 승용차 세 대가 깜빡거리며 ‘제발 한쪽으로 피해 주세요, 할머니’ 그들의 소리 없는 애원을 한다. 그 낌새를 알아차렸는지 뒤돌아보고 조그만 체구를 트럭 뒤로 피한다. 차들이 이때다 하고 부리나케 지나간다.
우리 아파트 주민들은 할머니를 다 안다. 동네를 다니면서 폐휴지를 줍는 꼬부랑 할머니란 것을. 그래서 클랙슨을 울리지 않고 마냥 비켜주기를 기다린다. 할머니 곁으로 다가가며 인사를 했다. “할머니, 안녕하세요.” 곁눈질로 유모차 안에 가방 속을 들여다보았다. 빈 가방이다. 온종일 동네방네 돈이 될 만한 것들을 찾아다녔을 텐데 빈 가방이 안쓰럽다. 할머니에게 줄 게 뭐가 있을까 하고 가방 속을 뒤적여 봤다. 마침 출출할 때 먹으려고 넣고 다닌 노란 바나나가 한 개가 손에 잡힌다. 얼른 꺼내 할머니 빈 가방 속에 넣어 주면서 “할머니, 드세요.” 하니 “아니, 새댁먹지 왜 주고 그래요?.”라며 의례적인 인사를 한다. 그 얼굴은 웃고 있다. “아니에요, 하나밖에 못 드려서 미안해요.” 집에 계신 할아버지와 나눠 먹을 것 같다.
몇 해 전 뜨겁게 햇빛이 쏟아지는 여름 한낮에 할머니를 처음 만났다. 아니, 처음 보았다. 아파트 입구 편의점에 빈 상자가 몇 개 쌓여 있었다. 할머니가 등을 잔뜩 구부리고 상자를 줍고 있다. 마침 언덕길을 헉헉거리며 숨차게 오르느라 목이 타는 순간에 그 모습을 보았다. 모자도 안 쓰고 땀을 뻘뻘 흘리며 정신없이 상자를 개고 있어 안타까웠다. 한쪽 길에 서서 한참을 바라보다가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밖의 뜨거운 열기가 무색하게 에어컨의 냉기가 더위를 싹 걷어 간다. 곧장 음료 냉장고에서 베지밀 한 개와 물 한 병을 꺼내 계산하고 나왔다.
상자를 잔뜩 담은 유모차를 끌고 아파트 입구로 들어가고 있는 할머니를 뛰다시피 쫓아가며 불렀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채로 나를 쳐다본다. 냉장고에서 갓 꺼내 시원한 베지밀 한 병을 “덥고 목마를 텐데 시원하게 드세요.” 건넸다. “아이고, 이런 걸 왜 줘요. 괜찮아요. 색시 먹어요.” “난 물을 샀어요. 얼른 드세요,”하니 “집에 가서 먹을게요. 혹시 엊그제 물 사준 색시 아녀요?” 나처럼 안쓰러워하는 나이 먹은 색시가 또 있었나 보다. 웃음이 난다. 다행이다.
할머니 유모차에는 라면상자, 피자 상자, 과일 상자 등이 제법 쌓였다. 등이 굽은 할머니 키보다도 더 컸다. 밀어 드리면 불편해 할 것 같아 그 옆을 따라 걷는다. 둥그런 인상이 편안해 보였는지 주저리 사는 곳과 형편을 얘기한다. 우리 아파트에서 제일 큰 평수인 동에 할머니가 산다는 설명에 깜짝 놀랐다. 집에 몸이 아픈 할아버지와 쫄딱 망해 집에 들어와 있는 아들이 있다고 한다. 집도 저당이 잡혀 있어 반찬값이라도 하려고 폐휴지를 줍고 산다고 한다.
짧은 거리였는데도 이런저런 얘기로 할머니의 사는 형편을 짐작할 수 있었다. 뜨거운 여름 한낮 힘들고 지친 그를 낯선 누군가가 건네주는 베지밀 한 병이 위로가 된 것 같다. 쉽게 마음을 내보인다. 육십이 다 돼가는 중년에게 색시라고 호칭을 붙이며 감사 인사를 또 한다. “색시 정말 고마워요. 어디 살아요? 세상에 고마워라,” 연신 내 뒷모습에 대고 인사를 한다. 단 한 병의 베지밀일뿐인데, 내가 더 민망할 정도로 조그만 친절에 연신 고개를 숙인다. 형편은 어렵지만, 마음이 따뜻하고 고마움을 받을 줄 아는 할머니가 마음 부자인 것 같다.
그런 할머니가 한동안 안 보인다. 그해 겨울은 엄청나게 추웠다. 두툼한 분홍색 겨울 내복을 연말 선물로 받았다. 요즘은 얇고 신축성 좋은 내의들을 입으니, 나에게는 필요치 않았다. 이 내복을 앞 동 폐휴지 줍는 할머니에게 줄 생각을 했다. 올해처럼 추운 날씨에 길거리를 다니며 고생할 것을 생각하니 따뜻하게 겨울을 났으면 싶었다. 몇 호에 사는지를 몰라 이제나저제나 아파트를 걸어 다닐 때마다 두리번거리며 찾았다.
어스름한 저녁 무렵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나가는데, 저 멀리서 터벅터벅 얇은 잠바 차림을 한 할머니가 오고 있다. 반가움에 뛰어가 아는 척을 했다. “할머니, 이제 퇴근하는 거예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가지 말고 여기 계세요.” 쓰레기통을 길가에 내려놓고 집으로 뛰어갔다. 현관 앞에 며칠째 주인을 기다리던 내복을 집어 들었다. 그 자리에 꼼짝하지 않고 기다리고 서 있던 할머니에게 “내복 드릴게요. 입으실래요?” 하니 특유의 겸손한 거절로 “아니에요, 괜찮아요. 색시 입지 왜 줘요? 미안해요, 고마워요.” 하며 인사를 한다.
물건에는 거의 임자가 다 있다고 생각한다. 나에게 들어 온 것도 내 것이 아닌 것은 나를 통해 전달되는 과정을 지난다, 그건 다 이유가 있다는 생각으로 물건에는 욕심을 별로 내지 않는다.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는 것이 맘이 편하고 좋다. 이번 내복은 할머니가 주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가 꼭 입었으면 좋겠다. 며칠 동안 감기가 심해서 집 밖 출입을 못 했다고 하니 더더욱 그런 마음이 쓰인다. 혹시 다른 곳에 다른 방법으로 사용해도 그건 할머니 뜻이지만 말이다. 그래도 꼭 할머니가 입고 따뜻하게 추운 겨울을 잘 이겨냈으면 하는 바람이다. 가까이 사는 젊지 않은 색시의 마음을 할머니가 받아 주어 오히려 고맙다. 또 묻는다. 할머니는, “어디 살아요? 고마워요, 고마워요.” 내 뒷모습에 연신 인사를 해대니 얼른 그 자리를 벗어난다.
첫댓글 수필 잘 읽었습니;디.
감사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