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산악인 마틴 콘웨이의 낭만의 순례 산행기
알프스 등반 개척자들 중에는 스위스 대학교수 소쉬르 박사의 발자취를 따라
빙하와 지질학 연구에 몰두하다가 아마추어 산악인이 된 이도 있고,
산정이 천국과 가장 가까운 최적의 기도처라고 생각한 목사와 신부도 있고,
등반을 스포츠의 일환으로 생각한 변호사·의사·문인들도 있다.
그리고 영국 풍경화가 터너와 낭만파 시인 워즈워스,
그리고 미술 평론가 러스킨의 영향을 받아 알프스의 산악미에 매료되어 등반에 매진한 이도 있다.
마지막 부류에 속한 사람들 중 한 사람이 바로 마터호른 초등자 에드워드 윔퍼다.
그는 약관 20세에 알프스의 풍광을 담은 판화제작을 의뢰받고 알프스에 파견되었다가 끝내는 산악인으로 변신했다.
그들의 조력자들은 생업으로 수정채취, 산양사냥, 밀수 등을 목적으로
국경선을 넘나들던 현지인들로 가이드라는 새로운 직업을 얻어 알프스 등반발전에 기여했다.

알프스 산악미에 도취되었던 또 한 사람이 마틴 콘웨이 경이다.
1856년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사제의 아들(영국 국교의 사제는 결혼이 가능)로 태어난
그가 높은 산을 처음 접한 것은 7살 때 부친을 비롯한 가족들과 영국 웨일즈 북부의 스노든(Snowdon) 산행에 나섰을 때였는데,
구름 속으로 씩씩하게 걸어 올라가던 그는 지쳐서 말을 타고 오르는 고모의 등에 매미처럼 달라붙어 정상에 도달했다.
그는 소년시절 가족들과 체르마트 여행 중 가이드를 따라 브라이트호른(4,171m)과 당뒤미디(3,260m)를 등정했고,
캠브리지 대학에 재학 중에 교우들과 티롤의 슈투바이 산군의 최고봉인 추커휘틀 등정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그는 학우들과 엔가딘 계곡을 방문하여 모르테라치를 등정하고 하산시
영국의 유명한 산악인 틴달 교수가 눈사태에 휩쓸려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던
악명 높은 눈사태 통로인 쿨와르를 무사히 통과하기도 했다.
또한 동료와 낙석을 피하며 눈 덮인 기나긴 설릉에 올라 베르니나를 등정하고,
이 산군의 설벽에서 수많은 스텝을 깎으며 아이스액스 사용법을 익혔고, 또한 로프 조작법도 배운 그는
20세 때 까다로운 투표로 선출되는 영국산악회 회원이 되는 영광을 안았다.
1877년 그는 교우와 체르마트를 방문하고 몬테로자를 노멀루트가 아닌 암릉으로 등정했다.
이후 그의 일행은 훈련등반으로 치날로트호른을 등정한 후 북동릉으로 마터호른을 등정했는데,
윔퍼 일행이 초등하고 하산하다가 4명이 추락한 현장에는
사고 당시의 절단된 확보용 자일이 바위에 여전히 걸려 있어 커다란 공포심을 유발했다.
콘웨이는 일행과 아름다운 바이스호른도 등정했다.
콘웨이는 야간에 달빛을 받으며 마터호른 주변의 여러 빙하 위를 단독으로 탐험하는 위험도 감수했다.
그는 이미 초등된 산에 새로운 등로를 개척하는,
당시 유행하던 운동(New Expeditions)에 참가하여 일행과 로트호른의 서벽과 돔(Dom)의 돔요호 아레트를 등정했다.
그는 설산에서 본격적인 등반기술을 습득했기 때문에 암벽보다 설벽이나 빙벽을 선호하여
돌로미테를 방문하고서도 석회암이 빚어낸 산악미만 감상했을 뿐 어떤 벽도 오르지 않았다.
그는 대학 졸업 후 저명한 미술평론가가 되어 여러 권의 미술 평론 서적을 저술하고,
모교 미술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이후 그는 일행과 페닌 알프스 등반에 나서 몬테로자의 남쪽 봉우리를 모두 등정하고,
알프스의 풍광에 매료되어 알프스를 제2의 고향으로 삼고
도피네 산군의 여러 봉우리를 초등한 바 있는 미국 산악인 쿨리지와 함께 레폰틴 알프스를 등반하여
이 산군의 몬테레온을 비롯한 모든 봉우리를 등정했다.
또한 그는 영국의 유명 산악인 프레시필드와 노멀루트로 몽블랑을 등정했다.
그는 등반이 포함된 낭만을 찾아 떠나는 여행을 좋아해
이집트, 시리아, 키프로스, 그리스, 콘스탄티노플 등을 여행했다.
1892년 콘웨이는 카라코람 원정대를 이끌었다.
영국 산악인 프레시필드와 머메리도 참가를 약속했다가 개인사정으로 탈락했다.
당대의 가장 훌륭한 클라이머인 머메리는 척추장애를 앓고나서 무거운 짐을 잘 지지 못했지만,
날씬한 체격에 팔 다리가 길고, 강한 완력을 소유하고 있어서 암벽등반의 적격자였다.
현지 가이드와 그레퐁 등을 등반하면서 암벽등반기술을 익힌 후
알프스에서 가이드 없는 등반활동을 주도한 그는
가파른 암벽에 거미처럼 붙어서 발가락과 손가락 끝으로 작은 홀드나 크랙과 레지를 찾아내어
벌레처럼 꿈틀대며 자신의 몸을 위로 끌어올렸다.
그는 저녁 무렵 정상에 올라 하산 도중 한데에서 밤을 지새울 것이 뻔한 경우에도
올라온 길로 하산하지 않고 미지의 새로운 루트로 하산하는 모험을 감행했다.
그러나 머메리는 탐험이나 측량 같은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주로 암벽등반에만 심취했기 때문에 탐험을 선호하는 콘웨이와 등반취향이 달라서 두 사람이 함께 등반할 기회가 없었다.
카라코룸 원정대의 주목표는 인도 카시미르 북쪽의 거대한 봉우리들과 빙하가 있는 미답지역을 탐험하는 일이었다
(당시는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되지 않았음).
물론 K2 정찰도 원정대 목표의 하나였다.
그의 원정대는 히스파르 빙하, 비아포 빙하, 발토로 빙하를 측량하고 지도를 제작했다.
콘웨이는 빙하 주변의 무명봉에 이름을 지어주기도 했다.
오거, 무즈타그타워, 황금왕관봉, 브로드피크, 히든피크가 그가 이름을 붙여준 봉들이다.
가셔브룸4봉의 서벽을 ‘빛나는 벽’ 이라고, 초골리사를 ‘브라이드(새색시)봉’이라고 명명한 사람도 콘웨이다.
빙하 탐험과 측량에 주로 관심을 둔 콘웨이와
K2 정찰에 주로 관심을 둔 에켄슈타인 대원 사이의 불화로 에켄슈타인이 원정대에서 탈퇴하는 바람에
원정대가 소기의 성과는 거두지 못했지만,
유명 가이드 추르부리겐과 브루스 중위(나중에 장군으로 진급되고 퇴역 후 영국 에베레스트 원정대장이 됨),
그리고 구르카 병사들의 헌신적인 협동으로 원정대는 등반을 계속하여 파이어니어피크를 등정했고,
카라코룸의 지도를 작성하여 훗날 수많은 산악인들의 카라코람 산행 길잡이가 되었다.
그의 원정대는 또한 라다크 지역도 탐험했다.
그가 저술한 <카라코룸 원정기>는 지금도 미국의 고서시장에서 400달러 이상을 호가하는 귀중본이다.
1894년 콘웨이는 유명산악인 피츠제랄드 일행, 가이드 추르브리겐,
그리고 카라코룸 탐험에 참가했던 구르카 병사 2명을 초청하여 알프스 종주산행을 시작했다.
가이드 추르브리겐은 개인사정으로 초반에 탈퇴했다.
콘웨이는 북측으로 등정한 몽블랑을 이번에는 남측에서 등정하고
알프스 주능선의 노른자 페닌과 레폰틴 알프스는 전에 이미 수차례 등반했기 때문에,
북쪽의 베르너 오버란트를 통과했다.
막판에는 피츠제랄드 일행도 탈퇴했으나 콘웨이는 구르카 병사 2명과 알프스 주능선의 끝에 있는 설산 존블리크를 등정,
등반 시작 86일만에 21개봉을 등정하고 39개의 고개를 넘으며 알프스 종주를 끝마쳤다.
이 산행은 온건주의에 빠져 침체되어 있던 당시의 알프스 등반활동에 새로운 도전정신을 불어넣었다고
영국의 유명 산악인 제프리 영이 극찬했다.
그는 일행과 북극지방의 스피츠베르겐 섬을 스키와 썰매를 이용하며 두 번씩이나 횡단했다.
1898년 그는 가이드 추르브리겐이 초등한 안데스의 아콩카구아를 등정했고,
이어서 볼리비아의 6,000m급 일리마니를 초등했다.
남미의 끝 마젤란해협의 티에라 델 푸에고를 탐험하기도 했던 그는 1902년에 영국산악회 회장이 되었고,
1931년 카라코룸 지도 제작의 공로를 인정받아 남작 작위를 받았다.
그는 태생적으로 탐험가였다.
그는 이상적인 등반가에 대해 "산중의 여러 지역을 멀리 배회하기를 즐겨 같은 숙소에서 연속 두 번 숙박하지 않으며,
산의 반대쪽 탐험을 즐기기 때문에 등정보다는 고개 넘기를 더 좋아하지만,
경우에 따라 등정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이다.
또한 가장 쉬운 등로를 선호하며, 바라보이는 모든 산봉우리의 이름을 알고 싶어하며,
산군의 여러 봉우리 가운데 한 봉우리는 기필코 등정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라고 말했는데,
이는 바로 자기 자신을 닮은 사람을 말하고 있다.
그의 커다란 명성은 알프스에서 고난도의 등반업적을 이룩했기 때문이 아니라
카라코룸과 같은 멀리 떨어진 산맥을 탐험했기 때문이다.
그는 스키를 탄 최초의 영국인 중 한 사람으로, 영국알파인스키클럽의 초대 회장을 역임했으며,
등반에 스키를 도입하는 데 기여했다.